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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원 베데스다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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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자료실 스크랩 설교예화3
천상비둘기 추천 0 조회 73 16.03.30 19: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설교예화3

 

 

비방하지 말라.
이탈리아의 항해사이며 아베리카의 발견자인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스페인에 귀환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어느 날 콜롬부스는 여러 귀족 부호들이 마련한 축하 잔치에 초대되어 참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어느 한 귀족이 비꼬아 말하기를, "누구라도 배를 타고 끈기 있게 항해만 하면 어떤 육지에라도 닿을 것이 뻔한 일이 아니냐?" 하고는 쿨롬부스의 업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버렸다. 이 말에 콜롬부스는 몹시 기분이 상했지만 한참이나 조용히 앉아 있더니 식탁에 올라온 삶은 계란 하나를 들고는 "누구둔지 이 계란을 바로 세워 보십시오."하고 말했다. 식탁에 둘러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식탁에 놓여 있는 삶은 계란을 세워 보려 하였으나 세우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콜롬부스는 "그러면 제가 해 보지요."하더니 삶은 계란의 한쪽을 테이블에 쳐서 깨뜨린 후 부서진 쪽을 아래로 하여 계란을 세웠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렇게라면 못 세울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정거렸다. 그러자 콜롬부스는 다시 말했다. "이렇듯 쉬운 일도 지금까지 누구하나 하지를 못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이나 남이 해논 다음에는 쉬운 것이랍니다."라고 말하자 모두 시비를 그쳤다는 것이다. '잠바라'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말이 많으나 자신의 잘못은 요술쟁이가 구슬을 감추듯 감추기를 잘햐며 남의 욕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말과 행동의 그릇된 점에는 눈을 밝히지만, 그러는 동안 그 자신은 발전이 없고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며 욕심만 부풀어 점점 나쁜 사람이 될 뿐이니라."고 하였던 것이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를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6)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네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1-5) 비판에는 건전한 비판도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비판이 그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새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살해한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의 사람 나단은 목슴을 걸고 담대하게 나아가 다윗의 죄를 비판했습니다. 또 세례요한의 비판이 그것입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왕비를 삼았을 때 용기 없는 많은 사람들은 말 한마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있었던 세례 요한은 담대하게 왕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결국은 목슴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만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여기고 훈련받아야 할 것은 비판받을 줄 아는 훈련입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비판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부족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비판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판은 매우 위험해서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함부로 비판하게 되면 자신과 상대방에게 심한 상처를 입힘니다. 이 세상에는 실제로 조심성 없이 비판하여 일어난 문제들이 많습니다. 첫째로 비판은 비난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판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들은 대개 정확하고 빈틈 없으며 청렴 결백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사람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도 하고 도리어 그들 때문에 교회는 더 어지러워집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른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잘못되었기 때문에 내가 바른말 한 것에는 일절 잘못이 없고 못 알아들은 상대방만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비판이 정확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판을 얼마나 잘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비판의 내용을 잘 알아듣도록 전덜할 책임이 비판자에게 있습니다. 비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감정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일에는 이성만 중요한 줄 아나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이 뒤틀리면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과 장로님이 서로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이 주일 예배 때 맨 앞 자리에 앉아서 목사님이 설교할 때 신문을 꺼내 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는 이는 정말 잘못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잘 설득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상대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잘 감싸 줄 책임이 비판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비난하는 사람은 상대의 감정 따위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을 더 격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바른말 한다고 해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는 사랑입니다. 어떤 문제를 지적하려고 할 때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비판이 되고 사랑 없이 정죄만 하려 하면 비난이 됩니다. 일단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비판은 중독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올바른 비판자는 남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 마음 아파합니다. 그런데 비판 중독자는 남의 허물을 찾으면 기뻐합니다. 상대방의 허물을 얘기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들이 비판 중독자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비판 중독자는 쓰레기 같은 정보를 수집합니다. 상대방의 장점과 본받을 점 등 긍정적인 정보는 거부하고 부정적이고 잘못된 정보는 다 수집합니다. 온갖 더러운 정보를 다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만 물어 보면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얘기를 다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불행합니다. 밤낮 냄새 나고 골치 아프고 좋지 않은 생각을 머리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비판은 우리를 교만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남을 비판하다보면 마치 우리가 심판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비판은 잘못을 바로 잡도록 돕는 것이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다 보면 자기는 마치 죄가 없는 사람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만해지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필할 줄로 생각하느냐"(1-3절) 그렇다면 좋은 비판 좋은 판단은 무엇일까요? 첫째 사랑이 동기가 된 긍정적인 비판과 판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칭찬이라고 합니다. 칭찬이 비판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비판은 칭찬입니다. 사랑입니다.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눅19:5) 또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눅7:36-48)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그 사람이 잘하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칭찬을 많이 하십시오. 사람은 칭찬을 받으면 자기가 잘못하는 것을 스스로 고칩니다. 둘째로, 비판 중에 가장 좋은 비판은 자기 비판입니다.

소경의 등불(빛)
저녁 늦게 친구의 집에 놀러 갔던 한 장님이 돌아오는 길에 등불을 손에 쥐어 주는 친구에게 하는 말이 "소경이 등불을 가져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장님이라고 조롱하니 자네까지 나를 조롱하기냐?"고 화를 내었다. 이때에 친구가 대답하기를 자네는 등불이 필요없어도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등불을 보고 자네를 피해 가도록 하기 위하여 주는 것이니 그냥 가지고 가라는 말에 오해를 풀고 등불을 받아 가지고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한참이나 집으로 걸어오던 길에 앞서 오던 사람과 충돌하고 말았다. 다시 화가 난 장님은, "당신은 내가 들고 있는 등불이 보이지도 않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상대편에서 오던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의 등불은 꺼져 있었오!"하는 말에 소경은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의 결점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매사에 불평을 토하는 사람이 결국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성도들이 장님처럼 자기 자신도 바로 알지 못하고 꺼진 등만 손에 들고, 매사에 불평을 토하는 생활을 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도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눅11:35)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행악에 그칠 뿐이니라."(시37:8)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오는 것
가정불화 때문에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던 한 여인이 "남편과의 싸움에서 오고갔던 모든 것을 법정에서 말해줄 수 있겠는가?"하는 변호사의 질문에 여인은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재판장님! 남편이 던진 후라이팬으로 화장대가 부서지고 깨어진 접시 때문에 나의 머리가 상했으며 그가 휘두른 방망이 때문에 나의 몸 전체에 멍이 들었지만 그런 것들은 잘 기억이 아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한 말, 한마디만은 잊혀지지를 않습니다."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함부로 내뱉은 말 한마디가 가시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고 사랑하던 남편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해야 할 만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하여 맹자는 말하기를 "무책임한 자가 말을 쉽게 한다."고 하였고, 석사는 "모든 화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입을 지키라. 입을 지키지 아니하면 맹렬한 불길이 집을 태워 버리듯 입이 불길이 되어 나의 몸을 태우고 말 것이다. 모든 중생들의 불행한 운명은 그 입에서 생기는 것인데,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날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 세우기를 위하여 선한 말을 할 것이며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을 악의와 함께 버리라."(엡4:29-31)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13:2)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16:23-24)

지혜로운 아내가 되라.
뉴욕에서 인생문제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 놀만 필 목사님은 결혼생활에 파탄이 오는 이유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야 할 부부가 상대방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며 자칫 잘못하여 행복하던 결혼 생활을 파경으로 몰고 갈 뻔한 패티 여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패티 여사는 용모도 단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식과 재능을 겸비하여 곧잘 사람들을 읏길 줄 아는 애교가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자기으 남편을 진심으로 사강하고 있으면서도 가끔 남편의 약점을 재료로 농담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원래 말이 없고 마음이 너그러운 남편 봅은 자기 아내의 이와 같은 농담을 조금도 탓하지 아니하고 사람들과 함께 웃고 즐기곤 하였지만, 이와 같은 농담이 계속되자 남편 봅은 더욱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갔고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아내와 함께 가기를 꺼려하는 한편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다른 여자에게 정도가 넘는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장 동료 여성은 독신인데다가 자기 아내와는 달리 봅을 추켜 올리고 언제나 존경하는 태도로 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남편인 봅은 자기를 노리개감으로 취급하는 아내보다 자기를 칭찬하며 존경하는 여성에게 더 친밀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아차린 패티 여사는 한편 당황하였으나 지금까지 남편을 함부로 대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남편의 약점을 말하곤 한 것이 남편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깨닫고는 남편을 노리개감으로 여기던 나쁜 습성를 끊어 버리고 이번에는 남편을 추켜 올리고 존경하는 태도를 행동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때 동요했던 남편의 마음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정파탄의 원인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함으로 생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 씨는 말하기를 "가정이란 나의 평안을 얻는 거 이 아니라 평안을 주어야 하는 곳이며 행복을 채굴하는 곳이 아니라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실행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이 는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성경에서도 행복한 가정 특히 웥망과 시비가 없는 부부의 관계는 어떻게 하면 이루어질 수 있나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법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2-25)

연쇄반응
어떤 사람이 편지를 부치기 위해 우체국에 가서는 3전짜리 우표 하나를 사려고 10전짜리를 내놓았다. 창구에 앉아 있는 우체국 직원은 창백한 얼굴을 한 위장병 환자였는데, 거스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일단 내놓았던 우표를 다시 집어 넣고는 시치미를 떼고 아래만 내려다보며 글만 쓰고 있었다. 아침 일찍 우표 한 장을 사러 갔던 이 사람은 우체국 직원의 이와 같은 불친절한 태도에 몹시 기분이 상하고는 모처럼 써가지고 부치려던 편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분한 마음으로 우체국을 나섰다. 마침, 그때에 잘 아는 사람 하나가 우체국 앞을 지나가다가 반가이 인사를 했다. 잔뜩 화가 난 이 사람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인사를 했던 사람이 화가 났다. "내가 제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신세를 진 일고 없는데 참, 몹쓸 사람이네,"하고는 투덜거리며 집으로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이 사람은 더욱 속이 상해서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현관문을 힘껏 밀어 버렸다. 집 안에서 재봉일을 하고 있던 부인은 집이 무너질 듯한 요란한 문닫는 소리에 놀라 달려나와보니,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남편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눈치만 살피던 부인은 부인대로 화가 나서 옆에 있던 가정부에게 꾸지람을 퍼붓고는 방으로 들어 갔다. 그러자 말없이 집안 일을 돌보고 있던 가정부는 "내가 돈이 없어 가정부 노릇을 하니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수도가에 나가 앉아서는 수도물을 틀어 놓고 한참이나 울고 나니, 집안은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의 불평스런 우울한 생활 태도가 여러 사람을 괴롭혔던 것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37: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마귀의 선물(거짓말)
옛날 어느 마을에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도 거짓말을 잘하는 머슴이 있었다. 하루는 이 머슴이 주인 어른과 함께 목욕을 하러 갔다. 한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이 머슴은 먼저 나와서 옷을 갈아 입고는 아직 목욕을 끝내지 못한 주인을 향하여 집에 불이 났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주인 마님에게는 지금 주인 어른이 목욕을 갔다가 미친 것 같으니 빨리 가보라고 말했다. 주인 영감이 미쳤다는 말을 들은 마나님이 허겁지겁 목욕탕으로 달려와 보니 정말 영감은 벌거벗은 몸으로 "내 집에 불이 났다니! 내 집에 불이 났다니!"하며 들낙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짓말을 꾸며낸 종의 나쁜 계략 때문에 주인 부부는 멀쩡한 날에 희극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을 보면 "사탄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이간하고 서로 반목질시하게 하여 가정과 교회를 파괴시키고 망하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사탄은 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거짓말로 모함하여 희생시킬 것을 (계12:9)말씀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자칭 유대인이라하며 자기들이 가장 잘 믿는 것처럼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와 예수님을 시험하던 서기관과 바리새 인들에게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3:6)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아이들에게 한 번도 욕심 부리고 싸우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하라고 가르쳐 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잘 싸우고 거짓말을 쉽게 하는지 모릅니다. 입이 닳도록 '형제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좋은 것은 나눠 써라, 서로 돕고 살아라'하고 가르치는데, 실천이 안 됩니다. 친구를 미워해라, 싸워라, 욕심 내라, 울어라, 이런 것은 안 가르쳐 줬는데 완전 자동입니다. 거짓말하는 것 가르쳐 줘서 거짓말하는 아이를 봤습니까? 옳지 않은 일은 완전 자동으로 배웁니다. 가만 내버려 두면 죄 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지킴으로 고귀하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하룻밤 숙박 예정으로 말을 타고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시골길을 지나다가 7-8세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 아이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 아이는 톨스토이가 가지고 있는 백합꽃 수가 놓인 린넬 가방을 보자, 그것이 부러워 어머니에게 졸라대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그 아이가 졸라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그대로 지나텨 버렸다가 되돌아와서는 소녀에게 약속을 했다. "내일만 지나면 이 가방이 필요없게 되므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틀림없이 너에게 줄 터이니 울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린넬 가방은 친지의 유품인 소중한 기념품이었으나 툴스토이는 소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약속을 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저녁 어김없이 그 시골길로 돌아와 소녀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이 소녀는 불행하게도 톨스토이와 헤어진 후 급한 병으로 죽게 되어 조금 전에 장례식을 끝낸 뒤였다. 톨스토이는 소녀의 모친에게 부탁하여 소녀의 묘지까지 안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가지고 온 린넬 가방을 무덤 앞에 놓고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소녀의 모친은 눌물을 닦으면서 톨스토이게게 말하기를 "이제 아이는 죽었으니 이 가방은 가지고 가라."고 미안한 듯이 말하자, 톨스토이는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따님은 죽었으나 소녀와의 약속은 나의 망음에 아직 죽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배반하고 싶지 않습니다."하고는 머리를 숙였다는 것이다. "하잘 것 없는 약속이라도 정확하게 지키면 신용은 물론이고 인기가 올라갈 것이니 힘에 미치지 못하는 약속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미국의 국민학교(초등학교) 교과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독일에 대 기근이 들어 수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신음하고 있을 때에 어느 마을의 한 부자는 자기 마을 어린이들에게 매일 빵 하나씩이라도 급식을 시켜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집안 사람을 시켜 빵을 굽게 하고 20여명의 어린이들을 모이게 하여 하나씩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리고 기근이 끝날 때까지 매일 이와 같이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더니, 굶주렸던 어린이들은 "와-"하고 달려들어 서로 큰 것을 갖기 위하여 야단들을 한 후, 주인에게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이런 싸움통에 자기 순서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그레첸'이란 소녀는 아이들이 다 떠난 뒤 맨 나중 빵 그럿으로 다가가 찌그러진 작은 빵 하나를 집어 들고는 기쁜 표정으로 주인 어른을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돌아갔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어린이들은 지난 날과 다름없이 서로 큰 것을 가지려고 아우성들을 치다가는 주인에게 인사도 없이 가 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레첸은 예외없이 맨 나중까지 기다렸다가 이 닐도 다른 아이들 것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남은 빵 하나를 집어 들고는 주인을 찾아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집에 돌아온 그레첸은 어머님과 함께 그 빵을 나누어 먹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빵을 쪼개었더니 놀라운 일이 생겼다. 빵 속에서 50센트 짜리 은화 6개가 나온 것이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분명 이것은 잘못된 것이니 은화를 주인 어른에게 가져다 드려라."고 했다. 그때 그레첸은 그 돈을 가지고 주인 어른을 찾아가 사실을 아뢰었더니 주인은 대답하기를, "그 돈은 틀림없는 내 것이란다. 그러나 그것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씨 착한 너에게 상으로 주기 위해 빵 속에 넣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일본의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 씨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라, 그러면 하나님은 더욱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매사에 불평을 일삼는 자는 종신토록 만족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니....(시 50:23) 많은 사람들은 좋게 되면 행복이고 나쁘게 되면 불행이라고 하는 단순한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롬8:28) 부해도 가난해도 자족할 줄 아는(빌4:11)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김동인의 사초집을 보면 고려 말년인 1430년 경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대왕 때에는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유 관이란 사람은 그의 생활이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사하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지 우의정을 지내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집 하나도 변변한 것을 갖지 못하고 동대문 밖, 그것도 울타리와 대문도 없는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제때 지붕을 덮지 못하여 군데군데 하늘이 보일 만큼 구멍이 뚫어져 있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새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유 관은 조금도 불평하는 일이 없이 매사에 감사하였다. 5,6월 장마철이 되어 비는 매일같이 내리고 방 안에는 편히 누울 곳도 없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유 관 부부는 비가 새지 않는 곳으로 이리저리 옮겨 앉으며 비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너무도 많은 비가 쏟아지므로 우산을 받쳐들고 마주 앉아서야 겨우 비를 피하게 되었다. 한참이나 소동을 벌인 후 기가 막혀 화가 나있는 아내에게 유 관은 위로하여 말하기를, "여보! 그래도 우리는 우산이 있으니 이와 같이 심한 비를 피할 수라도 있는 것이 아니오. 우리처럼 우산도 없는 집이야 지금 이 비에 오죽이나 하겠오. 그러니 감사하십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불행 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끝내 성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S. 존슨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감사하는 마음은 높은 교양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저속한 인간에게서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하였고,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여 그 이름을 전 세계에 떨친 영국의 역사가이며 평론가인 칼라일은, "나는 암흑을 사랑하고 암흑 속에서 살았으며 죄인들의 괴수로 빛을 미워하고 경건한 생활을 비웃었으나 하나님은 나에게 풍성한 자비를 베푸셨으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

몇 근이나 됩니까 (열심)
어느 날 보너 박사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기의 열심을 천사가 저울에 다는 꿈이었다. 자기가 교회를 위하여 열심을 낸 것을 저울에 달아본 천사는 그 중량이 100근이 된다고 말할 때에 처음에는 기뻐하였으나 그는 그 열심의 내역을 듣고는 더욱 겸손하여져서 하나님 앞에 새로이 헌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역은 1) 자기 이기심에서 행한 열심이 14근이요, 2) 파당을 이루고 자기 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낸 열심이 15근이요, 3) 자기의 명예를 얻어 보려고 낸 열심이 22근이요, 4)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낸 열심이 23근이요, 5) 하나님을 사랑해서 진심으로 봉사한 열심은 100근 중에 겨우 26근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꿈을 꾸고난 보너 박사는 지금까지 자기가 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때로는 교만하였다는 것을 뉘우치고 겸손하여질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믿지 아니한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은 우리는 과연 주를 위하여 얼마만큼의 열심을 내고 있으며 열심을 내고 있다면 무엇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는지 우리 자신도 한번 반성해 볼 일이다. 영국의 저술가이며 비평가인 러스킨은 "사람이 사랑하는 데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고, 미국의 사상가요 시인인 에머슨은 "열심을 가지지 않고 이룩된 큰 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3)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벧전4:7-8)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어머니, 나의 어머니!
강철왕으로 유명한 미국의 실업가인 카네기 씨의 어린 날은 매우 가난하고 불우했다. 그는 본래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사업의 부진으로 미국으로 이민 가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고 미국으로 이민을 한 다음에도 그의 아버지는 책상보를 만들어 가지고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였으나 생계는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그의 생활이 가난했던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 카네기에게 내의라고는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잠자리에 든 다음, 밤마다 아들의 내의를 빨아 말리느라고 추운 겨울에도 하루 평균 16시간 내지 18시간을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어머니의 고생하는 모습을 보던 카네기는 너무도 마음이 아파 22세가 되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기어이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님에게 비단옷을 한 벌 사 드리고 집 안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많이 두어 어머님이 타실 마차도 사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약속을 하고는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카네기는 뼈져리는 분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카네기는 그가 어머니에게 서약한 대로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30년동안을 결혼도 하지 않고 있다가 52세가 되던 해 결혼하고 62세가 되던 해에야 첫 자식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어머니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에서 되어진 일이었지만 그로 인하여 카네기는 세계적인 강철왕으로 대 부호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 공경이 자식을 복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서삼경의 하나인 중국 고대의 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버지여!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여! 나를 기르시니, 나를 낳고 기르시기에 수고하셨도다. 그러나 슬프고 슬프도다 아버지, 어머니여! 그 깊은 은덕을 갚고자 하나, 그 은혜가 하늘같아 갚을 수가 없나이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은혜가 하늘같이 무한함으로 갚을 길이 없어 슬프다는 내용이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부모의 기도
미국의 신문 컬럼니스트인 알비게일은 '부모의 기도'라는 기도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 기도문을 보면, "오, 하나님! 저를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시며 그들의 모든 질문에 대하여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는 인자한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들의 생각을 가로막거나 꾸짖지 말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혹 실수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비웃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제 자신의 만족이나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하여 그들을 나무라지도 말게 하시고, 매 순간마다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을 통하여 정직한 것이 옳다는 것을 나타내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정직한 삶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주님! 제가 지분이 언짢을 때에는 나의 입술을 지켜 노하지 말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어린이라는 것과 그들이 어른같이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을 만났을 때에는 그들 스스로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기회를 허락할 수 있도록 저에게 참을성을 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나를 사랑하는 주님! 다시 한번 간절히 비옵기는 나로 하여금 정직하고 바르며 친절한 부모가 되게 하시고 자녀들로 하여금 신임받고 존경받으며, 본이 되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하는 내용으로 훌륭한 자녀를 원하는 부모는 먼저 훌륭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을 알게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린이 교육가인 '어빙'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자녀들로 하여금 나의 집이야말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부모는 훌륭하지만 그렇게 못한 이유는 부모에게 결함이 있는 증거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1남 8녀의 최 목사님(어버이의 사랑)
우리 나라가 일제 탄압 아래 있을 때에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동래읍 교회를 시무하다가 순교를 당한 최상림 목사님은 많은 자녀를 두신 분이었다. 1남 8녀로 딸이 8명인데다가 교역자 생활이고 보니, 생계 곤란이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고 딸들의 교육 문제는 더욱 암담했다. 그런데 마침, 그 교회에 자식은 하나도 없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로님 한 분이 목사님에게 간청하기를 "많은 딸 중에서 하나만 양녀로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즉시 그러자고 대답을 하고는 밤이 되어 자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며, 누구를 보낼까 하여 사모님과 함게 상의했다. "맏딸?"하고 목사님은 사모님을 쳐다보았다. 사모님은 "그 놈은 똑똑한 아이인 걸요."하고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둘째는?"하고 목사님이 다시 물었더니, 사모님은 또다시 "그 놈은 화목둥이인 걸요."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셋째는?"하고 다시 물었더니, "그 놈은 제일 잘 생긴 놈인 걸요!"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해서 목사님은, "그럼 넷째는?"하였더니 "그 놈은 너무 못 생겼구요." "그럼 다섯째는?" "그 놈은 몸이 약하구요." "그럼 여섯째는?" "그 놈은 아주 말을 잘 듣는 아이인 걸요." "그럼 일곱째는 ?" "그 놈은 아주 지혜로운 아이이고요." "그럼 여덟째는?"하였더니 "그 놈은 너무 귀엽게 굴어서요."하고는 사모님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하나도 보낼 아이가 없었다. 최 목사님 부부는 생활이 너무 곤란하여 많은 딸들 가운데 한 아이라도 양녀로 보내려고 마음을 먹었다가 결국은 하나도 보낼 수가 없는, 사랑스런 것들임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어떤 경우에라도 사랑하는 자녀는 버릴 수가 없는 것을 알게 하는 말이다. 교육가인 페스탈로찌는 말하기를 "부모의 사랑은 봄날 저녁 내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요, 자녀의 사랑은 아름다운 꽃송이 같은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이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지식에 넘치는 주님의 사랑은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이라."(엡3:18-19)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있으니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살리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4:9-11) 베드로도,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사랑하는 내 아들아!
롸든 리빙스톤 씨의 '아버지가 있었다'라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는 혼자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언뜻 네게 대한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 네 방에 몰래 들어와 너의 침상 곁에 무릎을 꿇었단다. 네게 대한 미안한 생각이 있어 네 침실에 들어왔더니 너는 한 손을 뺨 아래 넣고 황금색 머리털은 네 눈에서 흘러 내린 눈물에 젖어 붙어 있는 채 숨소리도 고요히 잠들어 있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 그동안 나는 너를 너무 많이 괴롭혔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구나. 아침마다 깨끗이 세수하라고 호통을 치고 집안을 어지럽힌다고 야단을 했으며 식탁에 앉으면 잘 씹어 먹어라. 음식을 흘리지 말아라, 팔꿈치는 식탁에 올려 놓지 말아라, 버터는 너무 많이 먹지 말아라, 그리고 밖에 나가 노는 것을 보면 가슴을 펴고 다니라, 옷을 더럽히지 말아라, 빵구 난 양말을 신은 것을 보면 친구들 앞에서 야단을 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왜 혼자 돈을 버는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하느냐고 잔소리가 많았구나. 그러나 내 아들아! 이 모든 것은 결코 네가 미워서 한 말이 아니었단다. 너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어른들의 척도로 너를 재어 본 아버지의 잘못이었단다. 어두운 밤 네 곁에 찾아와 이와 같이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이런 부끄러움 때문이란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내일부터 새 아버지가 되련다. 입술 악물고서라도 성질을 참고 입을 무겁게 하련다. 고요히 잠든 너의 모습을 보니 너는 아직도 어린아이로 깨끗하고 귀엽고 아름답기만 하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이처럼 어린아이인 줄을 모르고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던 일을 용서하려무나." 꾸지람을 듣고 눈물방울이 맺힌 채 고요히 잠든 자식을 바라보며 반성하는 아버지의 글이다. 이런 부모에게서 좋은 자녀가 나올 것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애3:40)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토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3:2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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