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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를 생각하라
우리는 구약 성경을 어려워하면서도 참 재미있어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들은 성경의 많은 이야기는 구약에서 들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에는 참으로 많은 흥미진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서 234장인 '나의 사랑하는 책'에서는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중에서 그 때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으로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 임금 다윗 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 라고 가사를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송가 가수인 김성수가 부르는 노래인 '할머니의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가사에서 "어린 시절 할머니 내 손을 꼭 잡고 추운 겨울 예배당 힘겹게 올라가던 길 밤마다 나에게 들려주신 옛날얘기는 다윗 왕의 역사와 삼손의 이야기"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두 가사에서 말하고 있는대로 과연 구약 성경에는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한 재미는 단지 흥미진진한, 그러니까 흥미를 유발시키는 내용으로만 보고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흥미진진한 재미있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도록 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 중에서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의 멸망에서 다루어지고 있는'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 이야기가 있습니다(창 9:12-29).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이때의 일을 들어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2)고 하신 데 따라 롯의 처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면서 어떤 신앙적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 이야기를 여기서 생각하는 글로 삼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의 전개는 이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라는 이름으로 각각 불리우는 두 성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성이 멸망을 당하고 그 자취로 남게 된 것이 사해(死海)라고 합니다. 사해란 '죽은 바다'란 뜻인데 이러한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염분의 농도가 강해서 어떤 고기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바다에 들어가 사람이 눕게 되면 빠지지 않고 둥둥 뜹니다. 이런 바다이기 때문에 '염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해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를 다름 아닌 소돔과 고모라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에서 보듯이 지금은 멸망해서 없어지고 짠 바닷물로만 남은 도시입니다. 이곳이 이렇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 시대 때에 있은 사건인데, 아브라함의 부친인 데라(데라에게는 모두 세명의 아들인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란은 자기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하란에게는 아들 롯이 있었다)가 자기 아들인 아브라함과 이미 죽은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과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 그러니까 며느리를 데리고 갈대아(바벨론)에 있는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부친인 데라가 하란으로 불리우는 지역에서 205세에 사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란에 머물러 있는 당시 75세의 나이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이때 조카인 롯이 계속해서 동행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가나안 남부 지방에 머물러 있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목초를 차지하기 위한 목자들과의 싸움으로 불편한 관계 속에 있게 하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조카 롯과 헤어지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약속을 받은 자는 롯이 아닌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삼촌인 아브라함과 헤어진 롯은 낙원과 같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표현하는 여호와의 동산과 같이 매우 기름져 보이고 또 애굽 땅과 같이 아주 비옥해 보이는 요단 들녘을 택하여 내려가는 중에 여러 성읍을 거치게 되었고 그 중에서 소돔 가까이에 정착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여겼으며 악행을 일삼는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고모라는 가나안 경내에 있는데 소돔 근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소돔 사람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사람들에게서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의 도시의 대명사로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을 다 멸망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롯은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비록 그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받은 자는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으며 또한 소돔 성에서 있은 소돔 사람의 악행으로부터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호하려고 애쓴 의로운 자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의로운 사람이 단 열 명만이라도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하여 주실 것을 애절하게 바라며 간구하였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심판이 불과 유황으로 그 온 땅에 떨어지는 그 시간에 아침에 주님께 간구하면서 서 있었던 장소로 가서 것을 보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여서 그의 조카 롯이 몸을 피신하여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여 멸망하시지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애쓴 롯의 가족이 소돔 성을 떠날 기회와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피신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준 곳은 산이었습니다. 곧바로 산으로 달려 도망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주의해야 할 두 가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는, 들판에는 머물지 말고 산으로 달려 도망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산으로 도망하는 중에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는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에 롯은 산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그곳까지 갈 힘이 없으니까 도망하는 중에 재앙을 만나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죽기 쉽상이므로 그보다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성[소알 성]으로 피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허락이 있고 그 성에 다다를 때까지는 심판을 기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롯과 그 가족은 소돔을 떠나 소알로 떠났는데 해가 동쪽에서 떠오를 즈음에서야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롯과 그의 가족이 소알 성에 다다르자 그때까지는 심판을 보류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비처럼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 두 성과 그 부근에 있는 들판과 또 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농사한 모든 것을 다 완전히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래서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철저하게 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사해가 생겨났습니다. 본래 비옥한 땅이었으나 완전히 불타 버린 그 지역은 어떤 것도 살 수 없는 염분이 많은 지역으로 만드셨고 여기에 흘러 들어오는 물은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염도가 아주 강한 짠물로만 남아 그야 말로 사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소알 성에 다다른 롯의 가족 중에서 그의 아내가 그만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말한 대로 롯의 아내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것에 대해서 카일과 델리취가 공저(共著)한 창세기 주석에서 "우리는 그녀가 실제적으로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고 상상하지 말고 처음에는 맹렬한 불과 유황 증기에 의해 죽었고 그 후에 소금으로 덮여져서 소금 동상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고 상상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자리가 염해로 바뀐 것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과정이 어떻든지 간에, 곧 뒤를 돌아다보는 그 즉시에 소금 기둥이 되었던지 아니면 과연 불과 유황 증기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지시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롯의 처에게 미쳐 죽었고 그 후에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던 것처럼 소금으로 덮여져서 소금 기둥이 되었던지 간에 사실적인 것은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볍게 듣지 말고 참으로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실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신앙적인 교훈을 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는 무엇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을까요? 롯과 두 딸은 하나님의 사자가 지시한 대로 소알 성에 들어가기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약속대로 생명을 보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았으며, 그러자 소금 기둥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롯의 아내는 소알 성으로 도망가는 중에, 비록 소알 성에 다다르고 있지만 아직은 소알 성에 완전히 다 들어가기 전이기 때문에 아직은 도망가는 중인데 롯의 아내는 그 도중에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순종으로 지켜 나가지 않고 불순종하여 뒤를 돌아다 본 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롯의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듣고 그래서 무시한 데 있습니다. 비록 그 무시가 무심결에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 데 따른 결과가 됩니다. 아담의 아내인 하와에게서도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래서 불순종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중심에 진지하게 담아 두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아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히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 깊지 않은 나무가 태풍과 같은 강한 바람에 쉽게 뽑혀 넘어지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있으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견고히 서 있는가 하는 믿음의 시험[시련]을 겪을 경우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게 됩니다.
롯의 아내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있지 않고 가볍게 여기고 있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7장 29-33절을 보아야 합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의 사람들의 상태가 어땠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 20-21절에서는 그들의 실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따르게 하여서 올곧은 일만을 하고 올바른 일만을 행하게 하시는데 있었으며 그러한 아브라함에게는 그와 맺은 약속을 다 지켜나가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아브라함에게 알게 하시는 것과 관련하여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악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로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눈으로 봄으로써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해 나가시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아서 불의할 경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보듯이 여호와의 약속에서 끊어질 것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악행을 일삼는 죄악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에 따라서 그들에게서 해를 입는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복수와 천벌을 요구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하늘의 재판정을 두드렸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악행하며 불의하게 사는지요. 당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비옥한 땅에서 사는 혜택을 인하여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일에 힘썼으며 이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소돔 사람들은 자기 성을 찾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찾아내어서 - 그들은 단지 외지의 사람이 찾아든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 동성의 관계까지 하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서는 참으로 타락의 극치였습니다.
이런 현실적 상황 속에서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던 롯의 아내는 그 분위기에 깊이 빠져 있었으며, 이는 소돔을 빠져 나와 소알 성으로 도망가는 중에도 롯의 아내의 발목을 붙드는 애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롯의 아내는 남편의 뒤를 따라가다가도 남겨 놓고 온 집과 세간물에 애착이 생겨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이는 당시 소돔 성에 사는 사람들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당하는 그 시점까지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라고 말하면서 인자의 날에도 그러할 것을 예고하면서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고 하면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말씀한 것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롯의 아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여서 불순종할 만큼 가볍게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있었던 것이 아닌, 그러니까 그녀의 마음에는 집과 온갖 세간물에 애착을 갖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롯의 처를 들어서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인 유대인들의 상태로 연결시켜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의 무서운 고통과 죽음의 해를 겪으시면서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며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불러모으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세상은 노아의 시대와 같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하면서 살다가 홍수가 나자 다 멸망하던 그 때의 상황을 그대로 겪을 것입니다. 또 그 때에는 롯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 일어날 것이니 롯의 때에도 사람들은 매일 나가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농사 짓고 집을 짓고 있었으며 롯이 소돔을 떠나던 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려와 모두 다 멸망을 당하고 말았듯이 그 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일에만 온통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며 분주하게 지내다가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날에는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짐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고 들에 있는 사람은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을 롯의 처를 들어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를 생각하라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7:33-35)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면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여하에 따라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로 들여보내질 것이요 또 한 사람은 남겨진 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날에는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짐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고 들에 있는 사람은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시며 "롯의 처를 생각하라......"말씀하신 것은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롯하여서 예수님에 대하여 귀를 닫고 눈을 감고 배척하는 자들이 처할 불행에 대한 예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42-43절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마땅히 취하고 이어야 할 생활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하시고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른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한편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사실은 모든 신자들에게서도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로 들어가는 것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의 말씀에 굳게 서 있는 데서 롯의 처에게서 보는 멸망을 면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쉬울 만큼 어렵다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7-39). 과연 그런 것은 한 집안 식구일지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자를 반대하고 나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집안 식구 중에서 셋이 주님을 사랑하면 둘은 반대할 것이고, 아버지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 아들이 반대하는가 하면 아들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면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섭니다. 이로 인해서 서로 반목하고 싸웁니다(눅 12:52-53).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을 사랑하면 한편은 미워하게 됩니다. 한편을 중히 여기면 다른 한편은 업신여기고 무시하게 됩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은 그래서입니다(마 6:24). 농부에게서 밭이 생명인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신랑에게서 신부가 사랑의 전부인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아들에게서 아버지의 장례가 최우선의 일로 있는 사람은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들 모두에게서는 그들에게 있는 그 모든 소유와 일이 없지 없는 한에는 결코 주님을 따를 마음을 갖고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라도 명예와 권위와 부귀를 버리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편히 쉴 집이 없는 주님을 따르면서 고생을 마다할 수 있는 신뢰와 의지가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있는 상태에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과연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차라리 쉽다고 까지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의 도를 가르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듯이 롯의 아내는 그 마음에 집과 세간물에 애착을 갖고 있었던 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고 순종하여 나가는 믿음을 가져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롯의 아내에게서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정의 목숨을 지켜줄 힘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것으로부터 애착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소금 기둥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러한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때도 그럴 것이라고 경계시키면서 말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심지어는 세상 마지막 날에조차 사람들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욕망을 좇아서 분주하게 지내다가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버려 둠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좇아서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짐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고 들에 있는 사람은 동네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은 데려감을 당합니다.
레나 마리아라는 스웨덴 출신의 복음송가 가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길이가 반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는 중증장애인입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 아이의 삶을 인도해 주십시오," 이 아이는 성장하여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장애 상태에서 인생을 비관하여 삐뚤게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몸으로서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삶이 무엇일지를 궁리함으로 아예 세상에 대하여 욕심을 품지 않고 하나님만 찬양하는 일에 삶을 기울여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두 팔을 가지고 사지가 성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 있는 삶을 참으로 더욱 잘해 나갈 수 있지 않겠는지요.
우리는 어느 쪽인지요. 무엇으로 우리 마음이 차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아서 무릇 우리가 마음을 두고 그 중심을 지키기에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을 시험할 때에 과연 그 가치를 발휘하는 것에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목숨을 잃는 것이 자명한 데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그렇게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쓰이지 않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그 와중에서도 여전히 집이나 온갖 세간물 등 재물에 애착이 가는 상태에 있는 것인가요. 그래서 지금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신앙하는 데에는 그렇게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인지......
소금 기둥으로 변한 롯의 아내를 생각하십시오!. 그 생각이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자세와 태도를 바로 가져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