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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소작답 스물네 마지기
“세상이 바뀔 때에는 대두목이 나오리라. 그래야 우리 일이 되는 거다.”(道典11:54:3)
산산 골골 3·1운동의 함성이 메아리쳤던 1919년, 그해 윤7월 18일에 조종리 본소 도장이 완공되었다. 지난 해 11월부터 도장을 짓기 시작하였으니까 열 달이 걸린 셈이었다. 고수부님은 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네 사람들이‘도집’이라고 부르게 될 이 도장은 마을에서 그중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도장 뒤에는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 사이사이로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한옥으로는 큰 집이었다. 앞에서 보면 세 칸인데 겹집으로 되어 있어서 총 여섯 칸 겹집 전퇴였다.
고수부님은 도장에서 신도 20여 명과 함께 거주했다. 그러나 당장에는 치성을 올리시는 것 외에는 다른 신정(神政)을 행하지 않았다. 소작답 스물네 마지기를 붙여 농사나 감독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치성을 올릴 뿐이었다. 소작답은 전주부호 백남신 성도의 아들 인기가 설립한 화성농장 김제관리소에서 마름으로 일하고 있는 강사성 성도가 주선한 것이었다. 인류가 진멸지경이 될 후천 가을개벽이 저기 저만큼 성큼성큼 달려오고 있는데‘천지의 어머니’된 고수부님이 한가한 듯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 궁금하다. 무오년 옥화 때문일까. 그럴 법도 하지만, 뭐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당시 고수부님이 일체 바깥일을 하지 않은 채 수행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항상 새벽닭이 울고 난 뒤에 주문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낭랑하고 쩌렁쩌렁했든지 건넛마을 원조 마을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고수부님이 아무리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자 했어도 당신의 명성을 받들고 찾아오는 신도들의 발길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조종리 도장을 찾아오는 신도들은 늘어갔다. 당시 조종리 사람들의 증언에 기대면 고수부님을 한번 대면하려고 해도 웬만큼 신앙해서는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장 안팎은 거의 매일같이 북적거렸다. 고수부님의 일거수일투족이 특히 신도들한테는 곧 전범이 되는 것은 당위일 터였다. 당신이 주로 수행을 하고 계셨으므로 도장을 찾아온 신도들도 대부분 수행에 임하였다. 방마다 앉아서 주문을 외는 등 수행공부를 하는 모습이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기록이 없으므로 당시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찾아와 수행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추측할 수 있는 정황 근거는 있다. 그때 조종리 도장에는 부엌일 하는 여자신도 두어 명이 있었는데 부엌에서 칼질하는 소리가 조종리 바깥까지 끊이지 않았다. 신도들의 수행공부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수부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고수부님은 항상 큰 방에 앉아서 날이 따뜻하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냈다고 한다. 2006년 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가이드는 “천지신명들이 태모님의 하명을 받기 위해 장문(將門)을 형성하므로 문을 열어놓고 계신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해 8월, 전북 옥구에 괴질(콜레라)이 발생하여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괴질 공포가 확산되는 가운데 고수부님을 찾아와 의지하는 신도들이 더욱 많아졌다. ‘만백성의 어머니’수부로서 어찌 모른 체 하고 뿌리 칠 수 있겠는가. 고수부님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옥구사람 고민환(高旻煥: 1887∼1966)과 이근우(李根宇, 1890∼1967)가 조종리 본소를 찾아와 입도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고수부님 도문에서 수석성도가 될 고민환은 증산 상제님 도문의 수석성도 김형렬과 비교되는 인물이다.
고민환 —. 본관은 제주, 호는 성포(聖圃, 고수부님이 내려 준 도호)다. 500석지기 부호의 아들로서 일찍이 구도에 뜻을 두고 정진하였던 인물이다. 한때 군산은적사로 출가하여 승려생활을 한 경험도 있었다. 얼마 동안 승려생활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전하고 있는 승복을 입은 그의 초상화로 볼 때 꽤 오랜기간 동안 불교에 몸담았던 것 같다. 고민환은 불교는 물론이지만 유학과 신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지식인이었다. 문밖출입을 할 때는 항상 말을 타고 다녔으며 성품이 온순한 학자로서 사욕이 없고 남과 시비하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훗날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행적을 수집하여『선정원경(仙政圓經)』을 집필하게 된다.
고민환과 이근우가 조종리 본소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때 고수부님이 고민환을 향해“어디에 사느냐?” 고 물었다.
“옥구군 성산면 성덕리에 삽니다.”
“좋은 곳에 사는구나. 앞으로 그곳을 떠나지 마라.”
고수부님은‘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세 번씩이나 거듭다짐을 받은 뒤 또 물었다.
“그곳에 오성산이 있느냐?”
“예. 있나이다.”
“그러하냐. 그곳에 수천 칸이라도 지을 만한 집터가 있느냐?”고수부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고민환은“수만칸이라도 지을 수 있나이다”고 대답했다. 고수부님은 기다렸다는 듯이“좋구나. 그러면 좋은 곳이니라”하고 말했다. 당장의 고민환으로서는 고수부님이 왜 그런 질문을, 그런 말씀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수부님은 은연중에 오성산으로 갈 뜻을 드러낸 것이었다.
증산 상제님은 재세 시에 오성산에서 몇 번에 걸쳐 공사를 집행했다. 그 중에서도 고수부님과 관련된 공사를 행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1905년 오성산에 가서“세상이 칭찬할 만한 곳이라”(6:20)고 하였던‘고수부님의 오성산 은둔 공사’, 1908년 겨울‘임옥에서 땅빠진다’(10:9) 공사 등이 그것이다. 지금 고수부님의 말씀은 증산 상제님의 공사와도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다.
고민환은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 가운데 김형렬 수석성도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첫 대면부터 그럴 싹이 보이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고수부님은 첫 대면부터 고민환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인품도 그렇지만 그가 오성산 아래 옥구 성덕리에 살고 있다는 것도 더욱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첫 대면 얼마 후 부터 고민환은 조종리 본소에 머물면서 고수부님의 수종을 들었다.
조종리 도장을 찾는 신도들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임피·옥구는 물론 각 지방에서도 고수부님을 찾아 조종리로, 조종리로 밀물같이 밀려왔다. 고수부님이 도장 개창을 선포한 이래 단 한 번도 거르지 않는 행사 중의 하나는 치성봉행이었다. 정기적인 큰 치성은 경우 음력 1월 3일의 정삼(正三)치성, 6월 24일 증산 상제님 어천치성, 9월 19일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 그리고 양력 12월 22일경의 동지치성이 있다. 이밖에도 4월 초파일 치성(후에 치성에서 제외시켰다), 24절후 치성들이 거행된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도(神道)로 역사하는, 모든 일에는 신이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치성은 곧 신명을 받들고 신도와 교류하는 성스러운 제의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치성에 온 정성을 다 바치는 것은 당위였다. 정성에는 물질적인 것도 포함될 터. 신도 수가 늘어나자 치성 때마다 많은 경비가 소요됐다. 성도들은 지역별로 구획을 정하여 치성 경비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내가 농사를 지어서 여유가 있으니 그 돈으로 치성때 자금으로 쓰라. 가난한 신도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으니 그리 알라.”고수부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사람이 적고 그로 인해 도무(道務)진행이 어려움을 한탄하지 말라. 판밖에서 성도(成道)하여 들일 때에는 사람바다를 이루는 가운데 너희들의 노고라 크리라.”
고수부님의 말씀 가운데‘사람바다를 이루게 된다’는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판밖에서 성도하여 들일 때’라고 했으므로 도운사 전체를 통시적으로 볼 때 후천 가을개벽 직전의 도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무렵의 조종리 도장 상황을 추정하면 그랬다. 신도들은 일을 하고 싶어서 죽겠는데 도대체 고수부님이 허락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수부님이라고 언제까지 일을 하지 않고 농사만 짓고 있겠는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신도들은 답답했을 것이다. 하루는 성도들이 고수부님께 물었다.
“어머니, 우리 도판이 언제나 발전해서 사람도 많이 생기고 재력도 풍족하게 될는지요?”
성도들은‘사람도 많고 재력도 풍족’한 대흥리 교단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당시 조종리 성도들은 차경석이 이끄는 대흥리 교단을 퍽 부러워했던 것 같다.
“걱정하지 마라. 내 일은 셋, 둘, 하나면 되나니, 한사람만 있으면 다 따라 하느니라. 세상이 바뀔 때에는 대두목이 나오리라. 그래야 우리 일이 되는 거다.”
이 말씀은 고수부님이 대도통을 하던 날 차경석 성도를 주인으로 행하였던‘이종 공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당시 고수부님은 차경석의‘이종’한 도운을 정리내지 갈무리하여 결실도운으로 매듭짓게 될 추수할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추수할 사람’이 대두목이라고 밝혀주고 있다. ‘말씀’에서‘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곧 후천 가을개벽을 가리킨다. 그때 대두목이 출세하게 되고, 그가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추종하게 될 것이며, 그때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다. 고수부님의 도운‘말씀’은 계속된다.
3·1운동의 함성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던 그해 가을 어느 날,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안흥마을에 사는 고찬홍(高贊弘: 1875∼1951)이 조종리 본소를 찾아왔다. 대흥리 도장 때부터 신앙한 고찬홍은 인품과 풍채가 좋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특히 말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천석꾼 부호로 항상 세루 두루마기 차림을 하고 다닐 정도로 깔끔하고 엄격한 면도 있었다. 고수부님에게 문안을 드린 고찬홍은 포교운동을 크게 일으킬 것을 청했다.
고수부님이 대답한다. “장차 너희들에게 찾아오는자만 거두어 가르치기도 바쁘리라. 이제 새로 포교할바가 아니요, 먼저 몸 닦음을 근본으로 삼아 부모를 잘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남에게 척짓지 말고, 농사에 힘써 때를 기다리라.”1년 전, 강응칠과 강사성에게도 이와 비슷한 대답을 했었다. “포교 운동은 오직 천명을 좇아 시기라 이르기를 기다릴 것이며, 오는 자는 오고 가는 자는 가게 하여 그들의 뜻에 맡김이 옳으니라.”
3·1운동 실패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저 교활한 문화통치 아래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던 조선민중들이 구원의 빛을 따라 찾아올 곳은 오직 고수부님의 도장일 터. 고수부님은 지금 도약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고수부님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하자니까 전하지, 알고보면 전하기가 아까우니라. 앞으로 좋은 세상 나오리니 너희들은 좋은 때를 타고났느니라.”
들리는가. 당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도들에게 무한한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고수부님의 말씀이 당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19년 그때 그 시절은 물론이요, 오늘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한테 쩡쩡한 종소리처럼 들려주는 말씀에 다름 아니다.
제17장 평천하(平天下) 치천하(治天下)
“잘못된 그 날에 제 복장 제가 찧고 죽을 적에 앞거리 돌멩이가 모자라리라.”(11:70:9)
1921년 증산 상제님의 성탄치성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무렵 전준엽(田俊燁: 1891∼1945) 성도가 조종리 본소로 찾아오는 신도들을 수습하여 도장 유지의 원칙을 정할 것을 고수부님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전준엽은 고찬홍, 이근목 성도와 더불어 의논한 끝에 지역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본소에 있는 간부 성도들이 직접 나섰다. 전준엽과 이근목은 충청남도 일대, 고찬홍은 임피·옥구를 돌아 회의소집을 통지했다.
9월 초닷샛날 조종리 도장에서 지역대표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는 그랬다. 각 지방을 열다섯 구역으로 나눈다. 1년에 열네 번씩 올리는 치성은 각 구역이 나누어 맡는다. 치성 경비는 대치성에는 120원, 소치성에는 80원씩 각 구역이 순차적으로 담당한다. 그리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그해 증산 상제님 성탄절부터 시행하기로 하였다. 보고를 받은 고수부님도 허락했다.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일—. 그날 성탄치성에 참석한 신도는 1백여 명이 넘었다. 때는 여전히 폭압의 시절이다. 때가 때인 만큼 1백여 명이 치성에 참석한다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치성이 한창 진행될 때 고수부님은 왠지 조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부랴부랴 치성을 마친 뒤에는 신도들에게 “…가라. 가라. 속히 돌아들 가라”고 재촉하였다. 고수부님의 명이 빗발쳤으므로 신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치성 날 신도들을 쫓아내듯 보낼 수밖에 없었던 고수부님의 심사도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새벽이다. 별안간 도장 바깥이 왁자지껄하였다. 김제경찰서에서 나온 순사들이 굶주린 이리떼같이 달려들어 도장 안팎을 샅샅이 수색했다. 아. 고수부님은 바로 이런 불상사가 있을 줄 알고 미리 대비한 것이었다. 흠 잡힐 만한 증거물이 나올 리 만무하였다. 수색을 마친 순사들은 할 일이 없다는 듯 터덜터덜 돌아갔다.
이 때는 조선총독부에서 증산계(甑山系) 교단을‘음모결사(陰謀結社)’라고 지목하여 크게 탄압하는 중인지라 많은 신도가 모여 있으면 검속(檢束)을 면치 못할것이므로 태모님께서 그 기미를 아시고 미리 해산하게 하심이더라. 10월 보름날 밤에 치성을 올릴 때 참석한 신도가 300여 명이라 또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거늘 태모님께서 천지를 안개로 덮어서 지척을 분별치 못하게 하시니 신도들이 모두 무사히 돌아가니라.(11:60)
얼마 후 옥구군 구읍면 수산리에 사는 전선필(田先必: 1892∼1973)이 조종리 본소에 찾아왔다. 문후인사를 받은 고수부님은 대뜸“너 오다가 사람 봤느냐?”하고 물었다.
“무슨 사람 말씀입니까?”
“야, 이놈아! 사람 말이다.”
“좀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영문을 알 수 없는 전선필로서는 답답하기만 하였다. 고수부님은 계속“야, 이놈아! 사람 말이다, 사람!” 하고 호통을 쳤다. 같은 문답이 잠시 이어진 뒤에야 전선필이 알아듣고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고수부님은“사람, 사람, 사람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참으로 사람이 없구나.”하며 크게 탄식했다. 무슨 뜻일까. 『도전』은 천지대업을 개척하는 데 제대로 된 일꾼이 없다는 한탄어린 얘기라고 풀이한다. 그저 개벽 타령이나 하고 도통이나 꿈꾸며 장마철 개구리처럼 입으로만 주문을 읽어대는 유치한 신앙을 후려친 것이라는. 그랬다. 고수부님이 지금까지 소작답이나 부치면서 시간을 보낸 것은 참된 일꾼을 기다려 온 것이었다. 때의 무르익음과 함께. 그러나 고수부님이 기다리는 참 일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지금 그런 일꾼이 없음을 탄식하는 것이었다.
1922년이 밝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는 해가 바뀔수록 더욱 확고해져 가고 있었다. 일제에 저항하던 조선인의 불타는 기개도 점차 수그러 들어갔다. 그 정도로 일제의 간교한 문화통치가 성공을 거두었고 그만큼 탄압은 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해 정월 초하룻 날 고수부님은 조종리 동네아이들의 세배를 받았다. ‘큰 어머니’의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고수부님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아이들도 고수부님을 잘 따랐다. 아이들을 부를 때는“야, 칠성아!, 칠성동자야!”하고 불렀는데 물론 호칭에 맞는 기운을 붙이려는 의도였다. 또한 아이들의 부모에게는“저 동자들을 잘 가꾸라”하고 타이르기도 했다. 치성을 마치면 성도들에게 “야, 과일은 칠성 아이들 차지다. 너희들은 먹지 마라.”하며 아이들에게 먼저 내려 주기도 하였다.
당시 조종리에 살았던 강용 노인의 증언—. 내가 여섯 살 먹어서부터 세배를 다녔는데 열두 살까지 뵈었다. 내가 학생모자 쓰고 세배를 가면“이놈, 개떡모자 썼다.”하시고“개떡모자 벗어라.”하신다. 그런데 안벗고 있으면 오셔서 손수 벗기시고 머리를 만져 주시며“장난을 좀 치게 생겼다.”하셨다. 한번은 일곱, 여덟 살경에 세배를 갔는데 그 곳에는 항상 방 앞에 비서가 있었다. “들어와라.”하시자 비서가 들여보내 주어들어가 보니 그분은 방석에 앉아 계시다가“세배 왔어?”하시고“해야지.”하시며 세배를 받고, 그리고 사람을 부르셨다.“ 이놈들을 잘 먹여야겠는데 뭘 좀 내오너라.”하시고 가져온 것이 시원찮으면 직접 나가셔서 먹을 것을 챙겨들고 오셔서“먹어라.”“천천히 잘 먹어라.”하시며 머리부터 전부 쓰다듬어 주시며“잘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하셨다. 더군다나 우리 집은 도를 반대하는 집안인데도 그렇게 잘해 주셨다. 지금까지 그렇게 훌륭하시고 따뜻한 분을 뵌 적이 없다. 그렇게 훌륭한 분이다. 그런데 열두 살 넘어서는 그분을 못 뵈었다. 조종리에 안 계셨기 때문이다.
1923년이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틈만 나면 성도들에게 심법 공부를 가르쳤다. 어느 날 고수부님은 강사성 성도에게“‘마음 심’자를 써 놓으라”고 하였다. 지필묵을 챙겨온 강사성이 붓에 먹을 꾹 찍어 큼지막하게 심’자를 썼다. 잠자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고수부님은“아느냐? 이 심’자가 천하만사의 원줄기니라. 누구든지 이 글자의 생김새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말해 보라”고 하면서 앞에 앉아 있는 성도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성도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다.
고수부님은 말한다. “마음 심 자의 아래 모양은 땅의 형상이요, 위의 점 세 개는 불선유(佛仙儒)라. 온갖 부귀영달(富貴榮達)과 생사(生死)의 있고 없음도 이 마음 심 자에 있느니라.”언제인가 유학자 신도 백용기(白龍基)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했다. 그때 고수부님은 “그것이 마음 심 자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지만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명하였다. 백용기가“거기까지는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을 때 고수부님은“그러고도 학자라고 자부하며 안하무인(眼下無人) 하느냐. 내가 일러 줄 테니 배우라”고 준엄하게 꾸짖으며“아래의 활은 천지 반월용(天地半月用)이요, 세 점은 불선유(佛仙儒)니라”고 가르쳐 주었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은 삼통[三桶, 『도전』에 따르면 고민환 성도는『선정원경』에서 당시 성도들이 삼통을 당통(黨桶)ㆍ병통(病桶)ㆍ공당통(共黨桶)으로 생각했다고 하였다- 인용자 주]에 싸이지 말라. 오직 일심(一心)으로 심통(心通)하라.”하시고“삼통에 휘말리면 살아날 길이 없느니라.”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올바른 줄 하나 치켜들면 다 오느니라. 평천하(平天下)는 너희 아버지(증산 상제님을 일컬음-인용자주)와 내가 하리니 너희들은 치천하(治天下) 줄이나 꼭 잡고 있으라.”하시고 “도(道) 살림도 그침없이 제 살림도 그침없이, 끈 떨어지지 말고 나아가거라.”하시니라. 자리다툼하지 말고 잘 닦으라. 제 오장(五臟) 제 난리에 제 신세를 망쳐 내니 보고 배운 것 없이 쓸데없는 오장난리 쓸데없는 거짓지기, 쓸데없는 허망치기로다. 잘못된 그 날에 제 복장 제가 찧고 죽을 적에 앞거리 돌멩이가 모자라리라.(11:70)
‘말씀’중에‘올바른 줄 하나’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집행한 천지공사를 인사로 집행하여 선천 난법시대를 문 닫고 후천 진법시대를 개벽하게 될 대사부의 출세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최근에 고수부님이 전개한 일련의 심법공부 공사에 대한 결론에 다름 아니다.
그해 음력 7월 20일 전북 옥구군 미면(米面)에 사는 전대윤(田大潤: 1861∼1933) 성도가 아들 김수응(金壽應: 1889∼1936)과 함께 조종리 본소를 찾아왔다. 전대윤과 김수응, 그리고 그의 동생 수남(壽南: 1900∼1932) 일가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고수부님 도장의 독실한 성도들이었다. 특히 대흥리 첫째살림 도장시절부터 신앙을 시작한 전대윤은 고수부님보다 19살 연상이었으나 용화동 셋째살림 도장에서 고수부님의 내수(內) 시종을 들 정도로 헌신적인신앙인이었다.
고수부님은 전대윤, 김수응 모자를 보고“그 동안 편하게 지내지 못했구나”하고 다시 수응을 향해“네 동생 수남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하고 물었다. “5년 전에 일본에 간 뒤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그러하냐!”고수부님은 술을 들다가 갑자기 마루로 나갔다. 그리고 동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수남아! 수남아! 수남아—”하고 세 번을 부른 뒤 방으로 돌아왔다.
김수남이 도일한 것은 1919년 가을이었다. 도쿄에서 은행원으로 취직하여 일본여자와 결혼까지 했다. 인간의 마음이란 그런가. 낯선 이국생활도 점차 안정이 되어 가면서 처음 정착할 때와 같지 않았다. 고향집에 편지연락도 뜸해지다가 아예 끊어버렸다. 귀국할 생각도 없어졌다. 바로 그날, 그러니까 고수부님이 조종리 본소 마루에서 동쪽을 향해 수남을 불렀던 바로 그 날—. 은행에서 한창 사무를 보던 수남은 어디선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귀에 익은 고수부님의 음성이다. 깜짝 놀란 수남은 밖으로 뛰어 나가 은행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고수부님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날로 고국에서 어머니가 아프다는 전보가 왔다는 핑계를 대고 2주일 동안 근친휴가를 얻었다. 열차는 도쿄발 오후 6시 15분이다. 이튿날 저녁 시모노세키역(下關驛)에서 내렸다. 신문을 샀다. 그날 낮에 일어난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김수남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바로 그의 집과 근무처 일대가 대지진의 피해를 당한 지역이었다. 수남은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에 몸을 실었다.
간토대지진은 1923년 양력 9월 1일 오전 11시58분에 일어났다. 56만여 가구가 파괴되고 16만 명에 이르는 인명피해가 난 천재지변이었다. 문제는 대지진 이후부터였다. 갑작스런 재앙으로 일본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일본정부는“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을 죽이고 있다”는 등 각종 유언비어를 날조했다. 격분한 일본인 자경단(自警團)과 군대, 경찰에 의해 6천여명의 조선인과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학살되는 참상이 일어났다.
김수남은 무사히 고향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형의 말을 듣고 보니까 은행에서 고수부님의 음성을 들었던 때가 바로 고수부님이 동쪽을 향하여 자기를 불렀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수남은 고수부님에게 재생의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모친과 함께 조종리 본소로 갔다. 고수부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고수부님은 빙그레 웃으며 다만, “응, 수남이 왔냐!”고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김수남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수부님을 추종하였다.
제18장 천지공사
“천지가 다 알게 내치는 도수인 고로 천지공사를 시행하겠노라.”(11:76:2)
1924, 25년이 가고 26년이 왔다. 일제 강점기가 고착화되어 가는 가운데 각종 주의와 단체가 판을 치던 때였다. 저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이 공포된 것도 같은 시기(1925. 5)였다. 조선 청년들의 기개를 만국에 떨치게 될 6·10만세운동사건이 잉태되고 있던 그해(1926)3월 5일, 고수부님은 갑자기 성도들을 도장에 불러 모았다.
“이제부터는 천지가 다 알게 내치는 도수인 고로 천지공사를 시행하겠노라. 신도행정(神道行政)에 있어하는 수 없다.”
본격적인 천지공사를 시행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니까 고수부님은 지금 긴 침묵을 깨고 본격적으로 천지공사의 닻을 올린 것이었다. 고수부님의 말씀 가운데‘천지가 다 알게 내치는 도수’가 무엇인가. 침묵 속에서 보이지 않게 진행하는 천지공사가 아닌,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천지공사를 집행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요, 그렇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밝힌 것이다.
천지공사의 닻을 올린 고수부님은“궁궁을을(弓弓乙乙)”을 부른 뒤에 공사를 시작했다.
“천지공사나 기도 시에는 천지 음양굿이라야 하나니, 남녀가 함께 참석하여야 음양굿이 되느니라. 남자만으로는 하늘굿이며 여자만으로는 땅굿이니 이는 외짝굿이라. 외짝굿은 원신(寃神)과 척신(隻神)의 해원이 더디느니라.”
이날 이후 천지공사를 행할 때 고수부님은 반드시 남녀 성도들을 함께 참석시켰다. 또 공사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의관을 갖추게 하는데 남자는 짧고 긴 머리에 관계없이 정자관을 쓰고 두루마기 위에 행례복을 입게 하며 여자는 족두리에 원삼을 입도록 하였다. 천지신명과 함께 행하는 천지공사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는 절차와 형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터였다.
태모님께서 공사를 보실 때는 며칠 동안 밥 한 술 뜨지 않으시고 술과 청수만 드시기도 하며 당신의 진짓상을 물려 신명을 대접하시는 일도 허다하거늘 이 때 신명들에게 종종 말씀하시기를“나도 이렇게 먹으니 그리 알고 그대로 드시구려.”하시니라.(11:407)
고수부님이 천지공사를 시행하겠다고 선언한 바로 그날, 신도 대여섯 명이 모인 가운데 강휘만 성도를 불렀다.
“금년에는 이종(移種) 때 쓸 물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신농씨 도수를 붙여 비를 빌겠노라.”
고수부님은 강휘만의 머리 위에 수건을 얹었다. 바로 그 순간 신도가 내린 강휘만이「농부가」를 큰 소리로 부르며 농부가 모내기 하는 흉내를 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때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밀려오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천지가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날 해질 무렵부터 큰비가 퍼부었는데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다. 이 공사로 그해에는 이종할 물이 풍족하여 큰 풍년이 들었다.
고수부님의 천지공사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 듯 순항하고 있었다. 3월 9일, 고수부님은 고찬홍과 전준엽 등 여러 성도들을 불렀다.
“세상 사람이 죄 없는 자가 없어 모두 제가 지은 죄에 제가 죽게 되었으니 내가 이제 천하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건지리라.”
청수 한 그릇을 떠 놓고 그 앞에 바둑판을 놓은 뒤에 고수부님은 담뱃대로 바둑판을 치며 성도들에게「태을주」를 읽게 하였다. 성도들이 외는「태을주」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고수부님이 별안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고수부님은 한나절 동안이나 기절하였다가 가까스로 깨어났다.
고수부님은 말한다. “죄가 없어도 있는 것같이 좀 빌어라, 이놈들아! 천지에 죄를 빌려면 빌 곳이 워낙 멀어서 힘이 드니 가까이 있는 나에게 빌어라.”
이 공사에서 고수부님의 대속(代贖)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고수부님이 정신을 잃고 한나절 동안 기절하였다가 깨어난 것은 천하 사람의 죄를 대속한 것이다.
3월 24일, 고수부님은 전준엽 성도에게“이제 조왕(王) 일을 보아야 할 터인데 네가 아니면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하며 그의 무릎을 베고 갑자기 펑펑 소리내어 울었다. 조왕은 조신(神)·조왕할매·조왕대감ㆍ조왕각시·조왕대신·부뚜막신 등으로 불리는데 부엌을 맡고 있는 신을 일컫는다. 조왕은 가신(家神) 신앙에서 처음부터 부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전준엽은 난감했을 것이다. 부녀자들과 관련이 있는 조왕 공사를 보는데 공사 주인으로 남자인 전준엽이 지목된 것도 그렇지만, 공사 진행과정에서 고수부님이 자기 무릎을 베고 울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고수부님은 울음을 쉽게 그치지 않았다.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고수부님은 울음을 그치고 일어났다. 고수부님은 전준엽의 몸을 검사한 뒤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큰 솥 앞에 선고수부님은,
“조왕의 솥을 말리지 말고 물을 훌훌 둘러 두어라”고 말하면서 솥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준엽을 앞에 세운 뒤 담뱃대 두 개를 준엽의 머리 위에‘열 십(十)’자로 이게 하고 다른 성도들로 하여금 마당에 늘어서서「농부가」를 부르게 하였다. 고수부님은“이렇게 하여야 먹고 사느니라”고 말했다.
그날부터 전준엽은 조종리 도장의 재정을 총괄하였다. 포교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성적인 전준엽이 재정을 총괄한 이후 조종리 도장에는 여성 신도들이 크게 늘어났고 성금이 많이 들어오면서 재정이 넉넉해졌다.
여성 신도들이 늘어났기 때문일까. 이 무렵 고수부님의 공사에는‘여성’이 소재가 된 경우가 많아졌다. 그날도 고수부님은‘여성’을 재료로 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주로 남성 신도들이었다.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고수부님은,
“이놈들아, 아느냐? …천지가 생긴 이래로 네 어미 밑구녕이 제일 거니라.”
하고 맞은편 조종산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남성 신도들로서는 좀 민망하였을 터였다. 증산 상제님도 그랬지만 고수부님의 천지공사라는 것이 모두가 하나같이 처음 있는 일이요, 그랬으므로 파격적인 것이야 당위일 터였다. 아무리 그러하기로‘네 어미 밑구녕이 제일 걸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어미 밑구녕’은 어머니의 음부를 가리킨다.‘ 걸다’는 말은 푸지다, 기름지다는 정도의 의미로 풀이된다.
“부인들은 천지의 보지 단지니 너희들은 보지가 무엇인지 아느냐? 보배 보(寶) 자, 땅 지(地) 자니라. 밥지어 바쳐 주니 좋고, 의복 지어 바쳐 주니 좋고, 아들 딸 낳아 선령 봉제사(奉祭祀) 하여 주고 대(代) 이어 주어 좋으니 그러므로 보지(寶地) 앞에 절해 주어야 하거늘 너희들이 어찌 보지를 괄시하느냐, 이놈들아!”
꾸짖듯이 말하고 고수부님은 담뱃대로 앞에 늘어선 남성 신도들의 머리를 딱딱 때렸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듯이“가도(家道)를 바로잡으려면 부인에게 공손공대(恭遜恭待)하며 잘 해 주어야 하느니라”고 말했다.
4월이다. 4월이면 초파일 치성이 있다. 그 동안 치성 때만 되면 고수부님은 늘“사람이 없어서…사람이 없어서….”말하곤 하였다. 성도들은‘어머니께서 신도들 수가 적어서 저러시나 보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당시 성도들의 생각에는 당장에 차경석의 보천교가 떠올랐을 것이다. 성도들은 한 자리에 모여 의논했다. 결론은 쉽게 났다. “이번 치성에는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어머니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자.”
성도들은 여러 가지로 정성껏 치성을 준비했다. 누구보다도 치성을 잘 챙기는 고수부님이“이번 치성에는 소 한 마리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소 성품이 조용하고 말이 없는 김수열(金壽烈: 1897∼1978) 성도가 1백여 리가 넘는 옥구군 미면 미룡리 고향으로 달려갔다. 미룡리에서 둘째가는 부자인 김수열은 대흥리 도장시절부터 한결같이 신앙해 온 열성 신도였다.
때는 귀신도 깨어 일어나 일손을 돕는다는 모내기철이다. 김수열은 집에도 들르지 않은 채 머슴이 논을 가느라 한참 부리고 있는 검은 황소를 끌고 왔다. 조종리 본소에 도착한 김수열은“이 소를 잡아서 치성에 쓰십시오”하고 황소를 헌성하였다. 고수부님은 김수열의 성경신(誠敬信)을 크게 치하했다.
4월 초파일 치성 하루 전날이다. 과연 성도들이 정성을 쏟은 결과가 있어서 도장에 모인 신도가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 정도라면 좁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조종리 중조마을을 뒤덮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치 중조마을에 온통 하얀 배꽃이 떨어져 뒤덮은 것처럼. 참례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온 신도들이었다.
“치성 때면 소를 몇 마리씩 잡았고 돼지는 수십 마리씩 잡았다. 경상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소발에 짚신을 신겨서 끌고 모이는 것을 집적 봤다. 치성하는 날에는 동네 뒤로 변소를 수십 개씩 지었다. 그 중에서도 똑똑한 사람은 도집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채 같은 데 있고 그 안에 들어가질 못했다. 아이들은 개구멍으로 들락날락하고….”(강용 증언, 『도전』재인용)
참례자들이 이 정도 모였으므로 치성을 준비하던 성도들은‘이번만은 어머님께서 낙담치 않으시리라.’ 자신했다. 치성석에 나온 고수부님은 참례한 신도들을 한번 휘 둘러보고 혀를 끌끌 찼다.
“야아∼ 우리 집에 검불 참 많이 모아다 놨구나!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흰데기 하나 없구나!”고수부님은 한탄하였다. “박혀 있는 놈이나 온 놈이나 흰데기 하나 가릴 수 없구나. 너희들 중에서는 종자 하나 건지기 힘들것다.”
‘흰데기’란 가을 추수철에 나락을 한번 훑어내고 두번째 훑을 때 나오는 알곡을 말한다. 여기서 흰데기 하나 없다는 것은 당시 신도들 중에 가을개벽을 넘어 후천에서 거듭 살아남을 만한 정신을 가진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결국 당시 성도들을 일꾼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인데 당시 이 얘기의 뜻을 이해하는 신도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개벽의 때나 기다리고 신앙의 목적을 도통이나「주역」풀이, 「현무경」부적 풀이 따위에 두고 있었다. 고수부님은 무엇보다도 그런 신앙인을 경계했다.
신도들로서는 기운이 쑥 빠져 달아났을 것이다. 고수부님은 그런 성도들을 향해“야, 이놈들아! 마음 보따리를 고쳐야 한다. 너희들 마음 보따리를 내놓아라.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심보재기부터 뜯어고쳐야 하느니”하고 호통을 쳤다. 고수부님의 답답한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말없이 듣기만 하는 성도들을 보고 고수부님은“잣대 잡을 놈이 있어야 쓰지, 잣대 잡을 놈이 없구나.”하며 탄식했다.
이날 저녁에 고수부님은 공사를 집행하였다. 도장 앞마당 중앙에 단을 쌓고 청수를 한 동이 길어다 놓게 하였다. 중앙과 사방에는 각 방위에 해당하는 오색 깃발을 세웠다. 고수부님은 물 한 그릇을 떠 오게 하여 입에 머금어 훅 뿜어냈다. 그리고 담배를 피워 연기 몇 모금을 허공을 향해 불었는데 안개가 뿌옇게 끼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어 안개비가 내려 고수부님과 성도들의 옷이 모두 축축이 젖었다.
참례자들의 흰 두루마기가 얼룩덜룩해져 여간 볼썽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원래 갓 위에 옻칠을 하는데 당시 민중들은 생활에 여유가 없었으므로 십중팔구는 갓위에 먹물을 칠하고 그 위에 기름을 먹인 유건(儒巾)을 쓰고 다녔다. 안개비가 내려 갓에 칠한 먹물이 뚝뚝 떨어져 흰옷이 먹물로 얼룩진 것이었다. 참례자들은 자기의 흰 옷에 먹물이 드는데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고수부님이 담뱃대를 휘휘 저으며 공사를 지휘하는데 순식간에 눈앞에서 풍운조화가 일어났다. 참례자들은 도취되어 안개비가 오고 먹물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넋을 잃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고수부님이 두루마기를 입고 점잖게 서있는 고찬홍 성도에게 손짓을 하며“찬홍아, 찬홍아!” 하고 불렀다. 고찬홍이 대령하였다. 고수부님이“찬홍아, 내 옷 좀 갈아입혀라”하고 말했다.
고수부님이 많은 신도들 가운데 굳이 고찬홍 성도를 불러 자기의 옷을 벗기라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뜻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고찬홍은 고수부님보다 5년 연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천석꾼의 부호로서 늘 점잖게 정장을 하고 다니는 봉건주의 양반의 한 전형이었다. 아니나 다르겠는가. 고찬홍은‘양반’체면에 어쩔줄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야, 이놈아! 네 에미 옷 좀 벗기라는데 그렇게도 걱정이냐.”고수부님이 꾸짖으며 고찬홍이 쓰고 있는 갓을 확 잡아당겼다. 하필이면 갓이 고수부님의 하초(下焦)에 부딪혀 바싹 구겨지면서 고찬홍의 머리가 고수부님의 양다리 사이에 끼었다. 고수부님은 고찬홍의 머리를 두 다리로 낀 채 조종산 일대가 떠나갈 듯 큰소리로 말했다.
“야∼ 이놈들아! 너희 놈들이 전부 내 보지 속에서 나왔느니라.”
남성 신도들은 꿀 먹은 벙어리 모양으로 입을 꾹 다문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인가. 그 자리에 누가 있어 웃거나 울 수 있단 말인가. 신도들로서는 고수부님의 그 말씀이 선천의 묵은 천지를 문 닫고 새천지를 연 상제님을 대행하여 후천선경세계로 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인류의 어머니’자리에서 정신을 깨는 이른바‘육두문자’식 말씀이라는 것을 쉬이 깨달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고찬홍이 옷을 벗기는데 뜻 밖에 고수부님이 월경 중이었다. 고수부님의 고쟁이에는 월경수가 묻어 옷이 빨갛게 젖어 있었다. 민망해진 고찬홍이 옷을 벗기다 말고 몸 둘 바를 몰라 허둥거리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였다. 고수부님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 고찬홍의 갓을 잡아 고개를 똑바로 돌려놓고 따귀를 철썩 때렸다.
“아이고, 못난 자식! 이놈아, 네가 나온 구멍이 무엇이 그렇게도 쑥스럽냐. 뭐가 그렇게 싫단 말이더냐.” 고수부님이 꾸짖는데 고찬홍이‘점잖은 사람이 도(道)도 좋지만 이렇게 여자 거시기로 잡아당겨졌으니 이런 쑥스러울 데가 어디 있는가’하며 무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본새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의 심중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고수부님은“수건으로 다 닦으라”하고 말했다. 고수부님은 알몸을 드러낸 채 대중을 향해 큰 소리로 부르짖듯 말했다.
“야∼ 이놈들아! 너희가 다 내 밑구녕에서 나왔다. 천하가 다 내 밑구녕에서 나왔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땅에서 나온 것 아니면 어떻게 먹고사느냐. 네 어미 보지 속에서 나왔으니까 다 먹고살지. 이놈들아—.”
천하를 호령하는 듯 외치는 고수부님의 목소리는 조종산 너머 멀리 징게맹경 드넓은 평야 위로 메아리쳐 갔다. 참관한 수많은 갓 쓴 신도들은 양반이요 남자 체면에 감히 볼 수가 없다는 듯 전부 고개를 돌린 채 망연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천하가 다 고수부님의‘밑구녕’에서 나왔다면 어떻게 되는가. 고수부님이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날 저녁 공사를 마친 후에 치성을 준비하는데, 고수부님은 왠지 서둘렀다. 치성은 그날 밤중에 마쳤다. 고수부님은 참례자들의 이름이 적힌 방명록을 가져오게 하여 모두 찢어 버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서둘러라. 농사철이니 어서 이 밤길로 나서서 돌아가라.”고수부님은 쫓아내듯 신도들을 돌려보냈다.
신도들이 영문도 모르고 엉겁결에 도장 밖으로 나서는데 칠흑같이 캄캄한 밤중에 갈 길이 수백 리요, 더군다나 안개가 짙게 낀 데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려나오니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워 우왕좌왕했다. 때는 4월이라 마침 모내기를 하려고 논에 물을 한창 가두어 놓았으므로 일부는 짚신 발이 논에 빠져 질척거리며 가고, 일부는 논길로 가로질러 각기 서둘러 돌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던지 길이 아주 새로 났을 지경이었다.
바로 그날, 김제경찰서에 귀가 번쩍 뜨이는 첩보가 접수되었다. 4월 초파일을 맞아 조종리 도장에서 1천명이나 되는 인원이 운집했다는 것이었다. 때가 어느때인데 1천 명이 모인단 말인가. 그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반기라도 드는 날에는…. 경찰서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이튿날 아침에 일본인 경찰서장이 직접 말을 타고 기마대 여덟 명을 진두지휘하여 도장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조종리 본소에는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에 덮여 있는 가운데 사람이라고는 불과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경찰서장 이하 순사들은 마치 귀신한테 홀렸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본소에서 고수부님을 모시던 20여 명의 간부 신도들이 도장에서 나왔다. 서장이“너희 두목을 만나야겠다”고 윽박지르며 부하들을 시켜 도장 안팎을 수색하라고 지시하였다. 도장에는 전날 잡은 소가죽과 미처 치우지 못한 그릇과 음식들이 그대로 널려 있어 들통나기가 십상이었다. 성도들이‘이제는 꼼짝없이 잡혀가게 되었구나’하고 마음을 졸였다. 이상한 일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순사들이 도장 건물 뒤꼍에 널려 있는 소가죽을 밟고 다니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순사들이 도장 안팎을 수색하고 있을 때 고민환 성도가 서장을 만나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뒤 고수부님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고수부님은 밖의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을 열어 놓은 채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고수부님으로부터 출입을 허락받은 서장이 군화를 신은 채 덜컥 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 고수부님을 한 번 쓱 쳐다보는 순간 그만 그 자리에 엎어져 마치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벌벌 떨 뿐이었다.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향해“야들아, 쟈가 와 저런다냐”하고 말한 뒤 서장에게“왜 그러느냐? 초악이 붙기라도 했느냐? 못난 눔!”짐짓 꾸짖으며“네가 나를 찾았다 하니 무슨 용무인가?”하고 물었다. 서장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에 고수부님은“네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용무가 없는 거 아니더냐.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하라”하고 말했다.
일본인 서장은 그제야 살았다는 듯 뒷걸음질로 기다시피 하여 물러 나왔다. 토방 위로 내려선 서장은 마치 저승에나 갔다가 살아난 듯 창백한 얼굴로 부하들에게“가자! 아무것도 없다”하고 철수명령을 내렸다. 문밖으로 나가면서 서장은 성도들을 향해“당신네들은 저렇게 무서운 사람하고 어떻게 같이 사느냐!”하고 혀를 내둘렀다.
일본 순사대가 물러간 뒤 고수부님은 본소에 상주하는 성도들을 모두 불렀다.“ 농번기가 되었으니 너희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농업에 힘쓰라.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니라. …이후에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르리라.”고수부님의 명령이 떨어졌으므로 성도들도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성도들이 귀가할 때 고민환 성도 역시 여장을 꾸려 출발하려고 하는데 강대용이“고민환은 돌아갈 생각을 말라. 이곳에 일이 있다”며 고수부님의 말을 대신 전했다. 성도들이 모두 떠난 뒤 조종리 도장에는 다시 정적이 밀려왔다.
제19장 천지 보은
“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요, 부모는 자녀의 천지니라.”(2:26:5)
1926년 4월 10일, 고수부님은 강원섭, 강사성, 서인권, 서화임, 이근목 성도 등을 데리고 가마를 타고 예고도 없이 조종리 본소를 떠났다. 정읍 연지평에 있는 딸 태종의 집에서 하루를 쉰 다음날 다시 출발했다. 목적지는 대흥리 보천교 본부였다. 대흥리에 도착한 고수부님은 차경석의 집 옆 버드나무 아래에 가마를 멈추라고 했다. 고수부님은 가마에 그대로 앉아서“윤경아. 윤경아”하고 차윤경을 불렀다. 잠시 후 차윤경이 달려 나왔다. 고수부님이“가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으나 차윤경이 듣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같은 마을 신대원(申大元)의 집에 처소를 정하였다. 다음날 고수부님은 남자 옷차림으로 가마를 타고 차경석의 집으로 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누구도 열어주지 않았다. 잠시 후 대문이 열렸는데 보천교 여방주 이달영(李達榮)이 나와서 손을 들어 고수부님을 치려고 했다. 말없이 이달영의 거동을 지켜보기만 하던 고수부님이 노한 얼굴로“1년도 살지 못할년이 감히 이렇듯 무례하냐”하고 꾸짖었다. (천지공사에 한 치 오차가 있을 수 없다. 이듬해 정월, 이달영은 음독자살을 하게 된다.)
조종리로 돌아 온 얼마 후 고수부님은 고민환을 수석 성도로 세워‘칠성용정 공사(七星用政公事)’를 보았다. 칠성용정 공사는 선천을 마무리 짓고 후천을 열어갈 인사도수를 실현하는 도운의 절정에서 추수일꾼을 내는 대공사. 따라서 공사 진행 하나하나가 엄하기만 하였다. 공사에 들어가기 직전에 고수부님은 강응칠 성도에게“네 갓과 도포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남장을 하고, 다시 고민환 성도에게“네가 입는 의관을 가져오라”고 하여 갈아입었다. 그리고 고민환에게 고수부님 자신의 의복을 입혀 내실에 있게 하였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고수부님은“내가 증산 상제님이니라” 하고 말했다.
“고민환의 나이 마흔에 일곱을 더하면 내 나이 마흔 일곱이 되고 내 나이 마흔일곱에서 일곱을 빼면 고민환의 나이 마흔이 되니 이로부터 고민환이 곧 나의 대리요, 증산 상제님의 대리도 되느니라.”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청년 일곱 사람을 뽑아 ‘칠성 도수(七星度數)’를 정하는 공사가 그것이다. 고수부님은 일곱 명의 청년들에게 의복을 새로 지어 입히고 공사에 수종을 들게 하였다. 굳이 청년 일곱 명을 불러 공사를 본 것은 앞으로 젊은 일꾼들이 나서서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도판을 짊어지고 나갈 것을 미리 내다보고 천지공사로서 집행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도체(道體) 조직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육임(六任)에 대한 공사이다. 이와 같은 공사는 몇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날 칠성공사를 마치면서 고수부님은“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야 모든 조화와 기틀을 정하느니라. …앞으로 모든 일을 고민환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다. 이공사로서 고수부님은 고민환 성도를 자신의 대행자로 삼았다. 이로부터 조종리 교단의 운영권과 제반 권한을 고민환에게 위임하였다.
그 후로 태모님께서 모든 도정을 민환과 상의하여 처리하시매 성도들은 민환을 태모님의 정통 후계자로 인식하더니(11:98)
그해 음력 5월 17일이다. 고수부님은 갑자기 외출을 하였다. 고수부님 자신은 가마를 타고 박종오, 고민환, 김수열, 김수응, 고찬홍, 이용기, 김재윤, 강원섭, 강사성, 전준엽, 서인권, 김종기(金鍾基), 주종한(朱鍾翰), 문인원(文仁元), 백종수(白宗洙), 송사일(宋士日), 박남규(朴南奎), 진희만(陳喜萬), 이석봉(李碩奉) 등 열아홉 사람을 따르도록 하였다. 고수부님의 행차는 가히 장관이었다.
태모님께서 조종리에 계실 때 출행하시는 일이 많지 않으나 혹 대흥리나 먼 곳으로 행차하실 때는 사인교를 타고 부용역까지 가시어 기차를 타시거늘 가마의 앞쪽을 마루에 올려놓으면 태모님께서 방에서 나오시어 버선발로 가마에 오르시고 성도들이 가마 안에 신발을 넣어 드리니라. 가마는 네 사람이 메고 항상 교대할 가마꾼들 네 명이 그 뒤를 따르니 태모님께서 돌아오실 때는 가마꾼들이 미리 부용역에 나가 대기하다가 모시고 오는데 조종리에 당도하시면 당산(堂山) 마을에 있는 당산나무를 한 바퀴 돌고 도장으로 들어가시니라. 이렇듯 항상 수십 명의 성도들이 태모님을 모시고 길게 뒤를 따르니 그 모습을 구경하러 나온 인파와 함께 온 마을을 하얗게 덮으매 마치 신관 사또의 부임 행차 같더라.(11:107)
정읍 수성리 구미동(龜尾洞: 현재 정읍시 수성동 구미동)에 당도하였을 때 고수부님은 김수남의 집으로 가서 공사를 행하였다. 정확한 공사내용은 확인할 수 없으나 공사과정은 대충 그러하였다. 고수부님은 가마솥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한 뒤에 전준엽을 그 앞에 세우고“누구도 감당치 못하고 준엽이나 감당하리라”고 하며 무엇인가 써서 불살랐다. 이어 대야에 물을 떠 오게 하여 시래기 하나를 담갔다가 꺼내어 위로 올렸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공사를 마친 뒤에 고수부님은 고민환, 주종한, 백종수, 김종기, 김수응, 문인원, 김재윤 등 일곱 성도들은 김수남의 집에 머물러 있게 하고 나머지 열두 성도들을 데리고 김수남의 집을 나섰다. 고수부님이 도착한 곳은 대흥리였다. 한 달 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신대원의 집에 처소를 정한 뒤 공사를 행하였다. 공사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상세한 내용은 11:109∼110을 참조할 것). 그리고 20일 오후에 고수부님은 차경석의 집으로 갔다.
그날 차경석은 휘하의 여방주를 시켜 쫓아냈던 한달 전과는 달리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집안으로 고수부님을 맞아들인 차경석은 교자상을 차려 올렸다. 교자상을 앞에 놓고 앉았던 고수부님은 갑자기“경석아∼”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차경석은 무슨 소리냐는 듯 빤히 보았다.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비록 보천교가 내분을 겪고 있었으나 (적어도 숫자적으로는) 6백만 신도를 거느린 증산 상제님 계열 최대 교파인 보천교 교주요, 조선 팔도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천자 등극설의 주인공이다. 차경석의 입장으로서는 고수부님의 하대가 민망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전날의 경석이 아니요, 이제는 만인의 두목이니 전날과 같이 경홀한 말을 버리시지요.”
“뭐라고 했냐?”고수부님은 똑바로 차경석을 쳐다보았다.“ 네가 천자라 하나 헛천자[虛天子]니라.”고수부님은 교자상에 놓인 큰 배를 들어 차경석의 목덜미를 쳤다. 놀란 차경석은 황급히 몸을 피하여 문밖으로 나갔고 여방주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고수부님을 끌어냈다. 보천교 본소를 나온 고수부님은 성도들과 함께 조종리로 향했다.
고수부님이 출행 중에 조종리 본소로 돌아올 때의 일화 —. 고수부님이 먼 길을 행차할 때는 사인교를 타고 부용역까지 가서 기차를 이용하였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이미 얘기하였다. 그날 행차도 마찬가지였으나 부용역 이후부터는 좀 달랐다. 부용역 앞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온 고수부님은,
“내 머리를 땋고 댕기를 달아라”고 말했다. 시종하는 여신도가 얼른 붉은 댕기를 땋아 놓았는데 47세의 장년인 고수부님은 영락없이 시집 안간 노처녀였다.
부용역 앞 1백 미터 전방에는 김제군 백구면·공덕면·용지면의 합동 주재소가 있었다. 노처녀로 변장한 고수부님은 신도들을 이끌고 맨 앞에 서서 담뱃대를 휘휘 저으며 큰 소리로“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시천주주」를 외우며 걸어갔다. 원래 주문을 욀때는 자신도 모르게 엄숙해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그 날 고수부님의 행동은 매우 희화적이었다.「 시천주주」를 마치 노래하듯 욀 뿐만 아니라‘갈 지(之)’자 걸음으로 신작로 좌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주재소 쪽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었다.
주재소 앞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일본순사들이 앞을 막고“뭐이가, 너희들?”하면서 검문을 하였다. 고수부님이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잠시 후 일본순사대장이 다가와 고수부님을 건드리려고 손을 내밀었다. 태산같이 요지부동한 자세로 앉아 있던 고수부님이 담뱃대로 순사대장의 손을 딱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더욱 큰 소리로 “…신천지 가가장세 일월일월 만사지”를 읊조렸다.
잠시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던 일본순사들이 고수부님을 향해 손가락질하며“아노∼ 기찌가이! 기찌가이!(あの∼ きちがい! きちがい! : 저∼미치광이! 미치광이!)”하고 놀렸다. 그리고 성도들을 향해“저런 미친년을 따라다니다니, 저 놈들도 참으로 한심한 놈들이로군”하고 비아냥거릴 뿐 더 이상 검문을 하지 않았다. 주재소를 무사히 통과하여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에 이르렀을 때 고수부님은“가마를 대령하라”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근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흥리 보천교 본소에 다녀온 닷새 뒤인 5월 25일, 고수부님이 행한 공사는 의미심장하다. 고수부님은 항상“천지를 믿고 따라야 너희가 살 수 있으니 천지 알기를 너희 부모 알듯이 하라”(11:114)고 말했다. 물론이와 같은 공사는 증산 상제님의 그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증산 상제님 역시“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요, 부모는 자녀의 천지니라”(2:26)고 했다. 천지에 중심을 둘 때는 천지가 곧 억조창생의 부모가 되지만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공사는 결국 인사적인 문제에 가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날 공사는 준비과정부터 장엄하였다. 도장 마당 동서남북에 각각 단을 쌓고 푸른 기와 흰 기, 붉은 기, 검은 기들을 각 방위에 세우고 중앙에는 삼층 단을 쌓고 푸른 용과 누런 용을 그린 큰 황색 기를 세웠다. 동서남북 각 깃발마다 성도 열다섯 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모두 1백15명의 신도들이 참가한 대규모 천지공사이다. 중앙 단 위에 큰 등과 작은 등 열네 개를, 네 방위에는 각기 작은 등 열다섯 개씩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중앙과 네 방위에 각기 제물을 진설한 뒤에 비로소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되었다. 고수부님은 뭇 신도들을 지휘하여 중앙과 사방에 돌아가며 절하게 한 뒤「시천주주」를 외우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고수부님 자신은 제단으로 나와‘천하 만민의 죄업을 풀어 줄 것과 온 세계에 새로운 행복을 내려 줄 것’을 증산 상제님께 기도하였다.
고수부님이 한창 기도를 올릴 때였다. 바람 한 점 없이 청명한 날씨인 터라 네 방위의 깃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중앙의 황기가 별안간 사방으로 펄럭였다. 깃발이 펄럭일 때마다 누런 물이 마치 비를 흩뿌리는 듯 사방으로 뿌려져 신도들의 옷이 모두 누렇게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