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머 그레이(climber gray)
잠자리가 바뀌면 의례히 찾아오는 불면의 밤이 두려워 복용한 수면제 덕에 그래도 빨리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 잠 속에서 설핏 들리는 세찬 비바람 소리는 또 다시 나를 어떤 악몽이나 가위눌림까지는 아니더라도 얕은 睡眠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선운사 예불 소리가 낮게 흐르는 안개처럼 내려와 그 야윈 睡眠을 조용히 흔들어 깨웠다. 나는 옆에 자고 있는 아내의 새벽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일어나 어둠 속에서 어제 챙겨둔 배낭을 메고 도둑고양이 모양 살며시 숙소를 빠져 나왔다.
숙소 문을 나서니 한 여름을 무색케 하는 시원한 바람과 동트기 전 짙은 어둠이 확 달려들었다. 어제 밤에 내린 소나기로 촉촉한 선운사길 위엔 새벽 별빛이 드문드문 스며들었다. 선운사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는 새벽 예불 소리는 오히려 어둠을 더 짙고 고요하게 느끼게 했다. 이렇게 어둠과 고요 속에 걷는 것은 나에게 어떤 숭고와 느림의 미학을 일깨워 준다. 숭고란 자신을 초월하는 뭔가를 마주했을 때 자신을 사로잡으며 감탄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아주 특이하고 드문 감정이다. 이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접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력한 엄숙함을 경험한다. 나는 선운사 새벽 산길을 걸으며 이런 숭고한 원초적 생명력을 호흡하였다. 새벽 공기는 차고 향기롭고, 나무들은 팽팽한 생기로 가득 차 있고, 불어난 계곡물 소리는 고요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선율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걷는 이 느림은 주위의 이런 모든 사물들을 온전히 감상하고 받아들이는 위대한 시간을 제공한다. 또한 느림은 내가 있기 전에도 있었고, 내가 사라진 다음에도 계속될 이 영원한 존재를 관통하는 총체적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슬픔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하고 어떤 갈망 같기도 한 붉은 덩어리가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올 여름 휴가는 십 수년간 해왔던 설악산 하계 훈련 등반이나 외국 고산 등반을 포기하고 아내와 함께 여기 고창 선운사에 왔다. 그저께 열린 학회 참석차 전주에 온 김에 가까운 선운사에서 유숙하며 짧은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지금쯤 산악회 회원들은 설악산 어느 봉우리나 계곡에서 비박을 하며 오늘의 또 다른 등반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어제 험난한 등반을 한 후 안식의 하산주 술기운에 누군가가 먼저 부른 달마봉 산노래를 꿈속에서 다시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달마봉의 달빛은 이 밤 나를 울리고
밤이 내린 계곡엔 눈물만이 흘러가죠.
물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외로운 날 달래지만
떠난 사람 그리워서 잠 못 드는 이 밤은
나의 노래 실어갈 구름만이 벗이지요.
산 사람 사랑은 산 같은 사랑
변함없이 주는 사랑
이 생명 진다해도 영원히 사랑하오.
그대만이 나의 사랑, 그대만이 나의 사랑
나는 2005년 유럽 알프스 몽블랑 등반을 다녀 온 후 무슨 이유인지 뚜렷이 모르게 산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 다음에 동남아 최고봉인 키나발루도 갔다 오고, 또 일본 북알프스의 가장 난코스인 야리다케 능선 종주도 했지만, 어쩐지 내 자신이 서서히 산을 두려워하며 조금씩 피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내가 클라이머 그레이(climber gray)라 명명한 일종의 허망감 같은 것이 엷은 안개처럼 나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였다.
나는 전처럼 무조건 산을 오르고 싶다는, 그것도 아주 험난하고 불확실하며 고통과 불안이 가득 찬, 그런 산을 오르고 싶다는 열망이 내 안에서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조금씩 주말에 산악회 회원과 암벽이나 릿지 등반하는 것을 그만 두고, 가까운 팔공산이나 비슬산 등에서 홀로 트레킹하는 정도만으로 겨우 그 뜨거웠던 산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내안에 뭔가 산과 멀어지게 하는 새로운 것이 자라나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내 안에서 산을 밀어내는 새로운 것이 과연 무엇일까?
사실 나는 유럽 알프스 최고봉을 등반하며, 또 그 정상 등정에서 실패하며, 자연의 그 거대함과 그에 비해서 한없이 나약한 내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며, 미처 겸손과 겸허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일종의 허탈감과 허무감를 먼저 맞보았다. 그것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과 흡사했다. 그와 동시에 이제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와 함께 밀려오는 피할 수 없는 체력의 한계와 늦게 자리한 대학 교수라는 익숙지 못한 새로운 책무에 충실하려는 강박관념이 이렇게 서서히 산에 대한 두려움을 싹트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이른 새벽 암흑과 고요 속을 걸으며, 분명하지만 설명하기 힘든 슬픔 같기도 하고, 그리움 같기도 하고, 한편 갈망 같기도 한 이 얄궂은 심사는 결국 산에서 멀어지는 내 자신에 대한 애틋한 연민 같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어떤 형태로던지 내 스스로 반드시 산을 통해서만 치유해야하는 자신만의 생채기일 것이다.
어느 듯 선운사 계곡 깊숙이 들어서서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능선에 서니 멀리 희미한 빛 같은 것이 퍼져왔다. 나는 크게 소리 치고 싶었다.
“무가 뭐래도 나는 험난한 산을 오르는 크라이머다!”
(이 글은 경북의사회보에 게재한 글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서억수선생님의 특징이 잘 나타난 글 인것 같습니다.
글도 좋지만 사진이 정말 좋습니다(저는 사진에 더 눈길이 갑니다)!! 남들이 보기 힘든 산에서의 새벽 이나 일몰풍경 등을 앞으로도 많이 올려주세요^^
그 미치게 몸부림 치게 하는 갈망이 일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은 그리움을 품은 또다른 갈망이겠지요. 이전에는 잡지 못해서 갈망했지만 이제는 보내야 하기 때문에 갈망하는, 안에서 텅텅텅 울리는 북소리 같은. 비어가는 것의 당연함을 알면서도 그 비어감을 이기기 어려운 그 변곡점의 미묘한 흔들림을 보았습니다.
아....나도 산에 가고 싶다, 선운사 새벽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전에는 남루를 벗는 것도 호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운사 그 새벽길에서는 아무런 남루도 없어 호사도 없었겠습니다. 석수 선생의 글은 늘 그렇게 제 남루를 씻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