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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자료★ 스크랩 제1장 빛과 어두움의 전쟁(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와의 전쟁)
주님이 주신꿈 추천 0 조회 70 08.03.22 23: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장
빛과 어두움의 전쟁(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와의 전쟁)


먼저 하나님 나라와 사단 나라와의 전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요즘 세계적으로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가 체첸을 침공해서 많은 피를 흘리고,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긴 전쟁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지구상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영적으로도 매우 강렬하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오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와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확연하게 드러났다.

사단은 숨어서 활동하기 좋아한다.
구약성경에는 사단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구약성경 중에서 사단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들이 몇 구절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사단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욥기서에 사단의 어떤 면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볼 때, 작은 일부에 불과하고 전체적으로는 숨겨져 있다. 실제로 사단은 마치 간첩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활동하는 것을 즐긴다. 왜냐면 그때에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숨어있는 사단이 드러남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면서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숨어있던 사단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보면 거의 페이지마다 사단의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말은 페이지마다 사단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사단의 졸개인 귀신들을 쫓아내는 사건이 나오는데, 때로는 사단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통해서 대적하고, 때로는 대제사장들과 율법사들,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서 대적하는 사건들이 거의 페이지마다 나온다. 그리고 서신서를 보아도 사도바울과 다른 제자들의 뒤를 끝까지 좆아 다니면서 훼방하고 대적하는 무리들의 배후에서 사단이 교묘하게 조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사단은 오늘날도 제도화된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도 역사할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사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역사하고, 예수님의 가족들을 통해서도 역사했다.(마16:23; 마12:48; 요7:4-5) 그래서 페이지마다 사단이 역사하고, 페이지마다 하나님나라와 사단나라와의 전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쟁을 선포하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 처음부터 사단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하셨다. 성경을 보면 여러 군데에 전쟁선포와 같은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마3:2)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예수님의 초림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침투했다고 신학적으로 많이 이야기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 흔히 공수부대의 예를 든다.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이나 북한이나 공수부대를 적진 속에다 비행기로 낙하해 적진 깊숙이 침투시킨다. 그래서 공수부대 요원들이 적진 중앙에 침투해서 거점을 확보하고 활동을 확장해간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그와 같다. 사단이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는 적진 중앙에 예수님이 공수부대 요원처럼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거점을 확보해 나갔다. 예수님께서 거점을 확보해 나가시는 방법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써 하셨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는 사단의 통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통치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말해준다. 그 하나님의 통치가운데로 사람들에게 촉구하심으로써 사단나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의 복음의 사역을 이러한 영적전쟁의 차원에서 이해하게 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혹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우리가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말한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8)

피할 수 없는 전쟁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전쟁 중에 있다는 사실들을 잘 알지 못한다. 혹은 알아도 군인으로보다는 민간인으로 남아있기를 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단! 하면, 그 이야기만 들어도 싫어한다. 사단은 성경책 속에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사단, 귀신 얘기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혹시 뭔가 이단 냄새가 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피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꼭 꿩과 같기 때문이다. 꿩은 매가 뜨면 머리를 땅에 처박는다고 한다. 자기만 안보면 끝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매는 위에서 다 내려다보고 있다. 그것은 죽는 짓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사단에 대해서 혹은 영적으로 대적하는 세력에 대해서 꼭 꿩과 같은 자세를 취하려고 한다. 그냥 사단에 대해서 아무 말 안하고 아무 언급 안하면 되는 줄 안다. 그러니까 무방비 상태로 더 당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오늘날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도 그냥 민간인으로 남기 원한다. 자기 눈을 가리고 그것에 대해서 관심을 안가지면 되는, 그저 멀리만 하면 자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사고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의 사역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대위임령이라고 하는데, 그 명령을 우리가 영적전쟁의 차원에서 이해하면 가장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그리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우리가 전쟁 중에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다. 그 특정한 목적은 사단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마귀의 일을 멸하셨는가? 크게 나누면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1.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마귀의 일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빛이 어둠 가운데 비춰지면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사단은 숨어서 역사하는데 사단의 일이 드러나면 그것은 파괴되게 되어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경이 귀신들림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릇된 사고체계(견고한 진)
우리의 사고체계가 전환되어야 예수님께서 성경에 표방하고 가르치는 복음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Vision도 올바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사고체계가 전환되지 않으니까 복음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Vision도 인본주의로 생각한다. 새물결선교회에 와서 시간만 지난다고 되지 않는다. 주님의 은혜로 비춰져서 사고체계가 전환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사고체계가 사단이 지배하는 견고한 진지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10:4)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고체계가 올바로 되어있지 않으면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울(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다. 그런데 오늘날도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기 때문에 사고체계가 전환되려면,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기준이 비춰져야 한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우리의 시고체계에서의 전환이 일어나야만 우리 신앙이 근본적인 전환이 있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부터 올바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안되는데, 우리의 사고체계가 너무나 인본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고체계이기 때문에 이것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은 매우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는 짓은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돌아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셔서 빛을 비춰주실 때, 그 어두움이 드러나고 그것들이 깨지게 된다.  

2.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멸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이것들이 다 사단의 나라에 대한 공격이다. 예수님의 사역에 관해서 누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가난한 자는 물론 심령이 가난한 자도 되겠지만,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억압당하는 자를 의미한다. 특별히 헬라어로 볼 때, 여기에 가난하다는 말은 oppress로 '억압당한'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가난하되 어떤 억압하는 자로 인한 가난, 혹은 억압적인 구조로 인한 가난, 이러한 부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이 말이 육신적으로 가난한,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도 되지만, 이 말은 근본적으로 사단의 억압으로 인해서 짓눌리고 상처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전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것이 복음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전할 복음도 동일하게 그렇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삶에 온갖 엉겅퀴와 가시가 나는 것처럼, 사단의 지배로 인해서 온갖 억압과 아픔과 죄가 다스리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져오심으로써 저들을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고,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한 복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그 하나님나라의 통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것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불치병이 치유 받고, 억압적인 환경에서 저들을 자유케하시는 일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난 것이고,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막3:23-27)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 강한 자는 사단을 가리킨다. 그리고 강한 자의 세간은 사단의 지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하고야 세간을 늑탈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사단을 묶고, 그 사단의 지배아래 있던 사람들을 자유케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단의 권세를 묶고 그 지배아래 있던 자들을 자유케 하시고,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또 온전케 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사단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들은 사단이 하나님의 대칭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절대로 사단은 하나님의 상대가 아니다. 사단은 피조물로써 사단의 상대는 미가엘 천사다(계12:7). 사단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 또한 사단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도 계시지만 미국이나 필리핀 어디에도 동시에 계신다. 그런데 사단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만 있을 뿐이다. 물론 사단은 많은 부하들이 있다. 그래서 많은 연락망을 가지고 있고, 빨리 움직일 수도 있다.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무소부재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창조주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셔서 사단의 권세를 파하시고 사단에게 묶인 자들을 해방시킨 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의 선포와 능력의 사역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사단의 일을 멸하셨고, 또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역도 그 사역이다.

마른 스펀지를 물에 적시면 스펀지에 물이 흡수된다. 이와 같이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의 사역이 가득하도록 우리가 힘써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 그래서 오늘날도 여전히 억압적인 환경가운데서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져서 성경이 가난하다고 억압되어 있다고 표현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가서 저들을 자유케하는 그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걸 자
새물결선교회에서 일년에 두 차례 중. 고등부 수련회를 하는데, 몇 년 전에 미국에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그 세미나 강사가 꿈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같았다. 꿈에 사람들이 경매장에서 경매를 하려고 쭉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경매물이 쭉 나오는데, 그것이 물건이나 짐승이 아니고, 청소년들이 전부다 벌거벗겨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하고 경매에 붙이면, 마약으로 사갈 자, 섹스로 사갈 자, 폭력으로 사갈 자들이 그 아이들에게 입찰가격을 불러서 높은 가격에 팔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경매로 마약에게 팔려가기도 하고, 섹스에게 팔려가기도 하고, 폭력에게 팔려가는 그런 꿈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서 저들에게 걸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셨다고 했다. 여러분에게는 이 말의 무게가 안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오늘 당장 먹고사는 것이 급해서 이런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마태복음 6장을 다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 일을 했다. 우리들도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될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하나님 그들을 우리에게 주세요. 마귀의 올무에 끌려가지 않도록 저들을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그리고 나가서 그 일을 감당해야 될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예수님께서 그 일을 맡기셨다. 이것이 영적전쟁이고, 이것이 사단의 일이 멸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평생직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믿는 사람은 평생직장은 보장되어 있다. 명예퇴직 당할 염려가 없다는 말이다. 죽을 때까지 일해도 다 못할 일이 여러분에게 맡겨져 있다. 오래전에 은행에 근무할 때 같은 직장에 있던 분이 교회에 잠깐 나온 적이 있는데, 그분이 금융계에 한참 명예퇴직 바람이 불 때 명퇴를 당했다. 그분이 하는 말이 이제 오십대 초반이고 아직도 자기는 젊은데, 자기 친구들 중에는 아직도 은행장으로 바쁘더라고 부러워했다. 사실 좋게 말하니까 명예퇴직이지 강제로 해고당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조기퇴직을 당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사역은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평생 하고도 다함이 없을 만큼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맡겨주셨다. 여러분이 다 목회자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은 목회자에게만 맡겨주신 것이 아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맡겨 주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영적전쟁으로 부르셨다. 그러니까 이 말은 여러분들이 사는 도시를 이쪽저쪽 가로지르면서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묶기 위해서 ‘사단아 묶임을 당하라’ 그러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나라의 능력으로 억압당한 자들을 자유케 하시고 치유하셨듯이 우리가 바로 그 일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아가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공수부대 요원같이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역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셨듯이 이제는 교회가 거점이 되어져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하나님나라의 능력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지고 사단의 권세가 그만큼 멸해지도록 우리가 순종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스펀지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여전히 내 코가 석자인데, 하면서 핑계를 댄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은 가난의 압제를 끊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난의 압제를 끊기 원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로 돈 많이 버는 것,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파멸의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가난의 압제를 끊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감당하게 하길 원하신다.

새물결선교회를 처음 세우실 때부터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전체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을 우리가 탕자처럼 개인의 목적을 위해서 다 탕진해 버렸다고 하셨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도 포함되어 있고, 교회 성장도 포함되어 있고, 우리나라 전체에 주신 물질적인 부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I.M.F를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번째 유업을 주실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다. 지금은 교회가 마이너스 성장 가운데 있지만 다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을 약속하셨고, 더 나아가서 경제적인 회복도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실제로 경제적인 회복은 그 뒤로 매우 짧은 시간동안에 국가 전체로 잘 회복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본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면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약속하셨고, 그 일들을 행하시고 있는 것을 주위에서 종종 본다. 이것은 이사야서 61장에서도 예언되어 있고, 그 외에 여러 곳에서 예언되어 있는 내용이고,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나 기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여러 차례 주신 말씀이다.

지난 주간에 중보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것도 강하게 두 번이나 감동을 주셨다. 그래서 주일날 특별히 사업하는 성도들에게 잘 들으라고 그 예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내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진기법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사업을 하되 우리가 과거처럼 사업은 소홀히 하고 로비하고 부패하고 부정하는 일로 꾸려가려고 했던 그러한 자세를 철저히 버리고 투명하고 맑게 또한 상대방을 이해할 줄 아는 올바른 사업의 가치관을 가지고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하시고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일들을 국가적으로도 하실 것이고, 개인들에게도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지금 하고 계시고, 그러한 약속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 것도 우리의 각 처소에서 그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거하고, 그분의 법도 가운데 거할 때, 어두움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어두움의 가치관들이 깨뜨려짐으로써 그만큼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진다.

3.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멸하셨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세계 제 2차 대전에 핵심적인 승리였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사단의 나라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단의 능력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승리였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그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사단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셨다.

그동안 사단이 합법적으로 인류를 지배해왔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땅을 다스릴 권세를 아담에게 주셨는데,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사단의 말을 듣고 범죄 함으로 그 권세가 사단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사단이 합법적으로 죄를 통해서 인류를 지배해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 죄를 멸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부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3-15)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심
의문에 쓴 증서라는 말은, 예를 들면 여러분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죄지는 모든 내용들이 그 속에 다 들어있는 문서다. 언제 어디서 누구누구에게 거짓말한 것,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모든 부분들, 마음속에 악한 생각들, 다른 사람 미워하고 시기한 것, 훔치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온갖 여러 가지 죄악들이 다 거기 들어있는데, 이것이 의문에 쓴 증서다. 이것이 우리를 거슬리고 이것이 우리를 대적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소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 증서를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골로새서 2장 14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사단이 합법적으로 인간을 다스리고 지배해온 그 죄를 도말하여 버림으로써 사단의 머리를 깨뜨려버린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사단의 대한 결정타를 가한 것이다. 그동안 사단은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지배해왔는데,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그 일을 멸하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4-15)

사망을 당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심
어떤 물고기는 자기보다 큰 물고기에게 일부러 잡혀 먹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물고기 뱃속을 뚫고 나와서 자기보다 큰 물고기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이 물고기의 예처럼 예수님도 사망에게 잡아먹혀 사망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멸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사단의 세력에 대한 결정타이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D-day에 비교한다. D day란 말은 세계 제2차대전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변에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성공한 날이다(1944.6.6). D day란 말은 원래는 decisive day의 약자다. D day란 말은 결정적인 날이라는 것이다. 왜 결정적인 날이라고 하냐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연합군이 성공함으로써 연합군이 유럽 본토에 들어감으로써 그 전쟁은 이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다. 물론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무조건 항복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그 기간에 오히려 전투가 더 치열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을 아는 사람들은 아군이나 적군이나 전쟁은 이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또 왜 신학자들이 D-day에 비교 하냐면,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셨던 것처럼 근본적인 승리가 쟁취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영적 싸움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뒤에도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싸움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싸움은 계속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단과의 전투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승리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전쟁의 승리는 이미 확보되었다. 이제 잔군을 소탕할 따름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귀신들린 자에게 나아갈 때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기신 권세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고, 우리가 세상을 대적하여 나갈 때나, 죄를 대적하여 나갈 때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승리를 주신 그 주님의 권세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보면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했다. 그때는 더 이상 사단이 우리 주위에 얼씬도 못하도록 온전한 승리가 쟁취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중간에 살아간다.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좋은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감당하셨던 것처럼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감당함으로써 예수님이 확보해 놓은 승리가 우리 삶을 통해 우리 주위로 확산되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섬기고 이 일에 온 힘으로 순종해야 될 줄로 믿는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제자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은 목사님들에게 한 말씀이라고 한다. 그런데 모두가 잘 들을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우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거기 모인 특별히 열두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가장 먼저는 사도라고 부르는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를 제자 삼아 가르친 것 같이 너희들도 저들을 제자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은 제자들이 가서 제자를 삼되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처럼 똑같이 그 모든 것들을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너희는 가서 앞으로 목회자 될 사람은 따로 좀 가르치고, 평신도들은 그냥 주일날 교회나 나오고 헌금하도록 가르쳐라.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명령은 평신도와 목회자가 따로 구분이 없다.

우리도 열두제자 처럼 되어야 한다.
열두제자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나가서 제자를 삼아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가르친 모든 것들을 가르쳤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까지 왔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먼저 열두제자처럼 되어야 한다. 이 명령이 그 말이다. 이 말은 여러분의 직분이 목사든지, 전도사든지, 장로든지, 집사든지, 교사든지 그것은 교회에서 섬기는 직분의 차이일 뿐이고,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제자들이다. 다 하나님의 자녀다. 여기에는 직분이나 남녀 구분이 없다. 직분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 차이지 우리의 신분은 다 똑같다. 그래서 이 명령은 단순하다. 우리가 너무 복잡하게 이해해서 그렇지, 우리가 모두는 다 열두제자처럼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서는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명령, 그래서 대위임령이라고 하는데, 영어로 The Guest Commission이라고 한다. 이 대위임령에서 말씀하신 바는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열두제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 모두가 다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열두제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명령의 두 번째는 우리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되 내가 먼저 그 열두제자처럼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목회자들이 가르칠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성도들 한명 더 붙잡아 놓기 위해서 말의 아름다움으로 구슬리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서 제자라고 말할 때 목회자와 평신도를 나누지 않는다. 나누는 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사고체계 때문이지 성경적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열두제자처럼,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의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사는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열두제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그래야 한다.

우리 모두는 다 선을 넘어야 한다.
오늘날 어떤 성도들 중에는 신앙생활 하면서 목사는 안하고 장로는 그래도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배경에는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선이 있다면, 그 선을 넘어서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장로가 된다는 말은 그래도 열심히 하지만 그 선은 넘지 않고 뭔가 이쪽 편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헌신도하고 또 헌금도 많이 내되 그래도 뭔가 세상에서 조금씩 즐기기도 하고, 뭐 큰소리도 좀 치기도 하고, 자기 이름을 내세우기도 하면서 뭔가 하기를 원하는 그런 배경이 뒤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모든 성도들이 그 선을 넘으라는 것이다. 그 선을 넘어야 직분이 목사이건 장로이건 집사이건 권사이건 무엇이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다. 그 선을 안넘는 것은 세상사랑이다.

지금까지 하나님나라의 전쟁과 사단의 나라의 전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만왕의 왕으로부터 이 싸움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 싸움을 잘 싸워서 오늘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도구로 쓰임 받으며 또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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