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김경식의 문학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김경식
강화도 역사와 문학기행
글/사진 김경식
■ 역사와 문학의 땅
고단하고 험난한 역사의 시련 속에서도 깊은 상처를 숨기며 침묵으로 속살을 보이지 않고 견디어 온 땅이 있다.
강화도다.
수많은 외침과 내란으로 우리 국토의 어디인들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 있었겠는가.
민족이 몽고의 말발굽아래 신음하며 겨우 강화도만 홀로 남아있었다. 당시 고려 조정과 백성들은 강화도에서 민족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그들의 삶과 생존 본능적 갈급함을 상상하면 지금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제는 큰 다리가 두 곳이나 건설되어 섬이 아닌 육지가 되어 버린 섬이 강화도다. 지질학적 근거를 찾아보면 강화도는 마식령산맥의 끝과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던 곳인데 침식작용으로 섬이 되었다. 한강의 관문이자 제주, 거제, 진도, 남해 다음으로 국내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서해안에 앉아서 한반도를 바라본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은 강화 앞바다에서 서해바다와 합류한다. 이런 지형지물이 강화도를 사연 많은 역사의 섬으로 만들어 왔다.
민족의 영산인 마니산(해발 468m)은 여전히 서해와 한반도를 지키며 오롯이 서 있다. 이 산은 강화도의 진산이며 정상에 참성단이 있다. 마니산의 본 이름은 마리산이다. 마리의 사전적 의미는 머리다. 조선 숙종 때 이름을 알길 없는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마리산의 꼭대기에 단(壇)이 있다. 이 단이 곧 단군이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머리산이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단군의 아련한 역사적 실체가 이곳에서는 진실로 통한다. 이 시대를 대변하듯 강화도에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하점면 장리 주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고려산 아래 평지에는 고인돌이 약 120개나 누워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키며 흩어져 있다. 이 지역은 연개소문이 태어났다는 설까지 있으니 영험한 땅이다.
강화도는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역사의 고비마다 순탄하지 않은 영욕의 세월을 보낸다. 산과들 바닷가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유물들이 땅을 파면 계속 나오고 있다. 강화도의 전 지역이 박물관이란 말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화도는 어느 시대의 몇 가지 역사적인 단면을 가지고 평가할 수 없는 곳이다. 다양한 주제가 필요하고 역사적인 실체에 따른 설명이 필요하다. 이런 학습과정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강화도는 단지 마니산의 참성단과 나라가 위급할 때 피난처로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역사의 고비마다 순탄하지 않은 영욕의 세월을 보낸다.
고려 고종은 1232년 6월 당시에 유럽인들에게도 공포의 군대였던 몽고군과의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다.
이런 고려인들의 의지를 생각하며 고려 궁지를 걷는 일은 숭고하다. 그러나 1270년 5월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몽고는 이 성을 파괴 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결국 성과 궁궐은 강제로 무너지고 말았다. 조선시대에 이 터에는 강화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런 사연을 지닌 고려궁터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강화산성이다.
병자호란의 상흔이 깃든 강화산성 길은 감미롭지만 역사적인 슬픔이 서려 있다. 1637년 병자호란 때는 이 성이 다시 청나라 군사에게 점령당했으니 강화성의 시련이 알만하다. 그러나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무려 39년간 몽고에 대항한 흔적을 확인하면, 우리 민족의 끈질긴 민족성을 확인하게 된다.
제물포조약의 체결했던 연무당터를 거닐며, 일본의 마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조상들의 순진성과 나약성도 인식해 보아야 한다.
■ 이규보의 삶과 문학
고려인들의 끈질긴 몽고의 저항의식에는 이규보 선생의 동명왕편이란 서사시와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진정표라는 명문장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문학과 역사기행을 하게 되면 이런 진실을 알게 되고 이것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강화도를 기행하게 되면 선조들의 민족과 나라사랑을 배우게 된다.
동명왕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이(神異)한 일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비록 배운 것 없는 미천한 남녀들까지도 제법 그에 관한 일들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고려시대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 곧 주몽의 이야기를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음을
이규보 선생은 서두에 쓰고 있다.
고려의 운명이 몽고의 말발굽아래 밟혀서 바람 앞에 등불이 되던 시절에 이규보 선생은 절망상태에서 붓을 든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절망한 고려의 백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동명왕편의 서사시는 오늘까지 전하며 나라 사랑을 전한다.
동명왕편의 서사시 본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원기(元氣)가 혼돈 없애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어났다.
십삼, 십사, 머리모양
체모(體貌)도 기이터라.
그 남은 어진 제왕(帝王)
경사(經史)에도 올라 있다.
여절(女節)은 대성(大星)느껴
대호지(大昊摯) 낳았고,
여추(女樞)는 전욱(巓頊) 낳되
그도 칠성(七星) 느낌이라.
복희씨(伏羲氏)는 제사법을,
수인씨(燧人氏)는 불(火)의 발명,
동명왕의 탄생을 강조하기 위해 시작되는 서막이 사뭇 경이롭다.
동명왕인 주몽의 죽음에 관한 사실은 아직은 미정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 제1'시조 동명왕' 19년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가을(9월)에 왕은 운명하셨다. 이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가 원문: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 龍山 號 東明聖王)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명성왕의 이런 내용이 오늘까지 두 눈뜨고 살아있다.
이런 분의 일대기를 대서사시로 쓰기 위해 헌신했던 분이 고려의 대문장가인 이규보선생이다. 이 분의 묘소를 찾아 가는 겨울 강화도의 바람은 쌀쌀하지만 가슴은 뜨겁다.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읍을 들어서 전등사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길상면 온수리로 가는 도중 목비고개를 넘으면 주유소가 나온다. 이 주유소 입구로 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약 500M쯤 가면 우측에 이규보 선생의 묘소가 보인다.
이규보 선생은 고려시대가 낳은 위대한 문인이다. 이제 그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 해 보자.
이규보(李奎報 1168~1241)선생은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윤채(李允綵)는 호부랑중의 낮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규보 선생은 태어나자 심한 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난다. 이미 아홉 살에 신동이라 불릴 만큼 글재주를 보인다.
그러나 늘 과거시험에는 낙방을 하였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이규보란 이름의 유례도 그의 과거시험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이규보의 본래 이름은 인저(仁底)였다. 그의 나이 22세 때 사마시에 응시하기 전 날 꿈에 한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너는 이번 시험에 꼭 장원을 할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아라”. “하늘의 비밀이니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하였다.
결국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름을 奎報 (별이 알려주다)로 개명한다.
당시 최고의 시인들인 이인로, 이담지, 함순등과 함께 연회에 불려간 이규보는 무인정권의 실세였던 최충헌으로부터 시의 재주를 인정받아 전주목사의 서기직을 얻게 된다.
문학에 탁월했던 이규보선생은 중국문학을 모방하던 풍조를 버리고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다. 이 서사시는 우리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었다. 몽고군의 침략으로 고려 정부를 강화도로 옮겨 대장경을 만들 때에도 민족수호의 충성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직접 작성한다.
젊은 날의 벼슬길은 순탄했지만 63세 때 유배를 당하기도 한다.
고종 24년 69세에 고향으로 가서 쉬게 해 달라는 편지를 쓰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70세의 나이에 ‘문하시랑평장사’라는 오늘날의 부총리 자리까지 오른다.
1241년 9월2일 세상을 떠났으며, 여기 강화의 진강산 기슭에 임금의 명으로 장사를 지냈다. 묘역 입구에는 ‘이규보선생문학비’가 반긴다.
오른쪽에는 사가재(四可齋)가 서 있다. 4가지 옳은 것을 가지고 사는 집이란 뜻의 이 집에서 이규보의 삶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밭이 있으니 먹을 수 있고, 뽕나무가 있으니 입을 수 있으며, 우물이 있으니 마실 수 있고, 나무가 있으니 땔 수 있다”는 네 가지 가(可)에서 따온 집의 이름을 음미해본다. 최소한의 생활에 만족하며 살려고 했던 이규보선생의 묘역으로 오르면 초라한 상석, 문인석, 향로석과 마주한다.
다만 다른 묘소에서 잘 볼 수 없는 고리석이 4곳에 적당한 간격으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고리석’은 제사를 지낼 때 햇볕이나 비를 막기 위해 채양(천막)을 칠때 줄을 매는 연봉우리 모양으로 묘역에 묻혀있다. 다른 곳에 바람이 불어도 이곳은 바람이 잠자듯 조용하다. 묘소에 오르면 강화의 명산 정족산이 보이며 사방이 확 트여있다. 이 언저리가 모두 그가 당시에 살았던 땅이다. 700년 전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으며, 이규보선생도 이곳 어딘가에 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선생은 고려의 문인으로 명예를 얻기 위해 무인정권에 결탁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한 시풍(詩風)은 대단했다.
동명왕편은 주몽으로 알려진 동명왕의 영웅적이고 모습들을 찬양한 장편 서사시다.
그는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몽고침략시기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을 찬양하고 역사적인 실체를 가지고 시를 썼다.
고려 초기 문인들의 허상적인 관념론을 탈피한 민족문화를 재인식하게 만든 동명왕편의 의미는 대단하다. 그는 처음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을 황당무계한 전설로 알고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고려인의 긍지를 품고 141행이나 되는 서사시를 쓰게 된다.
이 서사시 몇 구절을 읽는다.
먹구름이 산과들을 덮어
산맥도 보이지 않는다.
수천의 백성들의 소리
나무베는 소리 같다.
왕은 말했다.
하늘이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성을 쌓으라 한다.
갑자기 안개와 구름이 걷히더니
궁궐이 높이 솟아올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중의 한곳인 전등사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이규보 선생의 묘소는 꼭 찾아가야 하는 곳이다. 묘소의 위치도 예사롭지 않다. 바람 불고 추운 날 찾아가도 늘 온화한 장소다. 그의 호를 딴 백운계곡이 보호하며 남향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
삼랑성(정족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를 오르는 산길은 몇 번을 걸어도 아름답고 호젓하다. 삼랑성은 단군과 관련이 있는 성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축성하였다니 그 역사가 아련하다. 그래서 산성의 이름도 삼랑성이다. 이 터가 사뭇 예사롭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전등사 뒤쪽에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가 건립되었다는 것이 증명한다. 이 사고에 보관된 서적들은 비록 지금은 이전되고 없지만 지금까지 온전히 보전되고 있다.
양헌수 장군의 전승비를 읽다보면 이곳도 호국의 장소임을 알게 된다.
병인양요(1866년)때 양헌수 장군은 370명의 포수들과 함께 프랑스의 군대 ‘올리비’에 대령 휘하의 군사 160명과 격돌하였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프랑스 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의 한 곳이다. 아도(阿道)화상이 381년(소수림왕)에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불렀다.
고려시대에 몇 차례 수리하였으며 1625년(인조 3년)에 중수하였다. 전등사라로 이름이 바뀐 것은 고려 충렬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진종사에 옥등(玉燈)을 시주하여 유래되었다. 대웅전은 1621년(광해군13)에 건축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八作)지붕이다. 이 대웅전은 다른 곳 보다 작고 단아하다. 단청도 호사롭지 않으며 수수하다. 전등사 대웅전이 특이한 것은 지붕처마를 바치고 있는 네 귀퉁이에 나체의 여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옛날 이 절을 건축하던 도편수의 애인이 변심하여 홧김에 원숭이 같은 얼굴의 여인을 나체로 조각하였다. 이 벌거벗은 여인의 나무 조각을 4개 만들어 네 처마 밑 귀퉁이에 앉혀놓았다. 처마 밑에서 절집의 수명이 다 할 때 까지 고행하고 있으라는 도편수의 속 좁은 마음이 답그러나 이런 나체 모습을 알면서도 그냥 지켜봐 주고 있는 절집의 넉넉한 마음이 전등사의 덕이다.
전등사 범종의 사연도 기이하다. 1097년 중국의 하남성(河南省)의 백암산에 있는 숭명사의 종인데 어떻게 전등사와 인연이 되었는지는 아직도 미궁이다. 다만 이 종은 일제 때 군수물자에 활용하기 위해 인천 부평 병기창까기 갔다가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전등사 범종의 이런 수난이 오히려 수명을 길게 하여 천년이 되었는데도 건강하다. 앞으로도 천년 이상은 살아 있을 것이다.
전등사 탐방은 마당에 있는 늙은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사찰을 이리 저리 보는 것도 아름다운 맛이 있다. 그러나 삼신당을 오르는 계단을 올라 약 100M쯤 더 걸어 오르면 정족산성 사고(史庫)터를 올라보라. 사고 터는 복원을 하여 놓았는데 대문이 자물통으로 굳게 닫혀 있다. 몇 번을 와도 닫혀있다. 그러나 이 대문 앞에 보는 전망은 경이롭다. 또한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적을 이곳까지 옮겨와야 했던 조상들을 생각하니 슬퍼진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 충주(忠州),성주(星州)의 사고의 책들이 모두 불탄다. 전주(全州)사고만 살아남았다. 이 실록들이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된다. 다시 보현사(普賢寺)사고를 거쳐 1603년 강화도 마리산(摩利山)사고에 이동한다. 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때 비로소 복간을 시작하기 시작한다.
1660년 정족산성이 완성된다. 이 성내에 장사각(藏史閣), 선원각(璿源閣)이 건축된다. 1678년(숙종4) 비로소 실록이 이곳으로 옮겨진다. 이곳은 실록뿐만 아니라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정부문서도 보관하였다. 사고관리는 본래 춘추관의 소속이었지만 이 사고의 관리는 전등사에서 맡은 것이 특징이다.
강화도 관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신축된 것은 정조 때다. 정족산 사고는 외규장각과 별도로 운영되었다. 또한 정족산의 사고(史庫)는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가 바로 이 서적들이다. 그러니 이 터는 민족의 정신적인 보고를 지킨 곳이 아닌가. 이렇듯 서적을 보관하려고 고민하던 조상들의 지혜와 수고에 감개가 무량하다. 전등사를 거쳐 내려가는 숲에는 나라를 지키고 보존하려고 했던 조상들의 숨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건창의 삶과 문학
홍범식은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당시 금산 군수로 근무하던 동헌 뒤에 있던 소나무에 목을 매어 순국(殉國)한다. 그는 병인양요(1866)때 순국한 이시원이란 인물을 알았다. 이 분의 손자가 이건창이다.
나는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 선생의 일대기를 읽는 중에 강화도가 고향인 이건창 선생의 이야기에 매료되기도 했다. 특히 이건창이 47세로 사망 했을 때 조사를 쓴 사람이 매천 황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현은 경술국치 때 절명시를 쓰고 순국한다. 이건창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12년 되어 그는 자결한 것이다. 우주보다 소중한 생명을 정의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순국자들과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이건창이란 인물의 삶이 더욱 궁금했다. 이후 그의 고향 마을 화도면 사기리를 찾아가던 강화도 탐방이 뻔질나게 이어졌다.
그러나 필자의 생활과 현실적인 여건도 사기리의 늙은 탱자나무 가시처럼 녹녹하지 않은 부박한 삶이었다. 당연히 강화도 탐방이 몇 년간 공백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늘 강화도는 이건창과 그의 또 다른 정신적인 스승인 정재두란 인물로 인해 가슴을 열고 필자를 기다리곤 했다.
이건창 생가는 전등사에서 마니산 가는 오른편 길가에 앉아 있다. 생가는 초가집으로 새롭게 복원되었는데 찾는 사람은 드물다. 사랑채 바깥마당 우측에 서 있는 이건창 선생의 문학비를 읽으면 자칫 그가 정치인으로 오해를 할 수 있다.
개성을 6년 사이에 다섯 번 지났지만
부소산과 채하동도 들르지 못했네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동안 벼슬살이에
마음에 맞는 일 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이 비는 1997년 이상보 박사가 회장인 한국문학비건립회원들이 회비를 모아 건립한 것이니 의미가 새롭다. 아는 지인들의 이름이 뒷면에 열거되어 있어 반갑다.
이건창(1852-1898)은 강화가 낳은 문인이며 철학자, 청백리(淸白吏)다. 본관은 전주, 호는 영재, 이조판서 이시원(李是遠,1790-1866)의 손자로 이조참판 '이상학'의 아들이다.
이건창은 선대부터 강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토박이며 조부로 부터 나라사랑과 학문을 배운다. 이미 5세 때에 문장을 활용할줄 알던 신동이다. 14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한다. 조선시대 최연소 합격이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워 등용이 어려울 정도였다. 19세가 되어 홍문관 직의 벼슬살이를 시작하지만 결코 그에게 벼슬살이는 순탄치 않았다.
용모가 깨끗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청렴결백하여 그의 생활은 늘 가난했다. 매천 황현(黃玹1855-1910), 김택영(金澤榮1850-1927) 강위(姜瑋1820-1884)와 친분이 있었다. 조선 후기 4대 시인을 말 할 때 이 세 사람과 이건창을 칭한다.
이건창의 문장도 예사롭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란 시를 쓰고 순국하다. 그의 절명시 중에서 한 두 편만 읽어보라. 비애감과 더불어 마음이 비장해 진다.
절명시(絶命詩)
亂離袞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난리곤도백두년 기합연생각말연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금일진성무가내 휘휘풍촉조창천
전쟁을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네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에 어리네.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조수애명해악빈 근화세계이심륜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은 이제는 망해 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지식인 노릇도 어렵구나.
김택영(金澤榮)이 편찬한 매천집(梅泉集) 전하는 이 절명시(絶命詩)는 매천 황현(黃玹)이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 1910년 8월 29일)직전에 쓴 시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시다. 이런 분들이 존재하였기에 그나마 조선 500년이 이어져 왔다. 바로 이것이 선비정신이 아니겠는가.
이건창의 친우 창강 김택영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라의 미래를 한탄하며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 퉁저우(通州)에서 시름 많은 나날을 구국의 일념과 한시로 여생을 보냈다. 다만 ‘강위’는 삼정문란의 폐단에 공분을 느끼던 시인이었지만 강화도 연무당에서 1876년 일명 강화도조약 때 일제의 필담을 맡아야 했다.
이제 연무당은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이곳에서 강화도조약이 체결 된 역사의 현장이다. 개화파였던 ‘강위는 당시에 이 조약이 일제의 야욕의 시작이 될 것을 몰랐을 것이다. 만약 이건창이 경술국치를 보았다고 하면 자신의 스승인‘강위’를 원망하였을지 모른다. 이건창은 강위를 스승으로 정제두 선생의 양명학을 지행합일의 실천적인 학문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의 한 사람으로 이를 몸소 실천하며 살았다.
영재(寧齋)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삶을 조명해 본다.
그의 나이 22세(1874년)때 기록하는 임무를 가진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를 기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청나라의 서보,황각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인정받는다.
1875년 23세의 나이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이 넘게 평안도 벽동에서 귀양살이를 한다.
그의 벼슬길은 늘 당대의 현실적인 상황과 어울리지 못하여 시련을 당하게 된다.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직접 찾아가 도와줄 방법을 찾았다. 1890년 한성부 소윤이 되고 1891년 승지가 되지만 상소가 문제되어 전남 보성에서 유배를 당해야 했다. 벼슬을 단념하였지만 왕은 계속해서 그를 부르곤 하였다.
해주관찰사(1896)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였다. 군산의 고군산군도의 세 번째 귀양살이 후에 고향인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로 귀향한다. 이후 한양에 발길을 끊고 살다가 1898년 그의 나이 47세에 한 많은 삶을 마감한다.
천주교의 정당성과 유교의 허위와 천주교의 교리를 목숨 걸고 썼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쓴 사람은 정하상(丁夏祥1795-1839)이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아들이며 끝내 순교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이론을 겸비하고 실천적 싸움을 최시형 또한 1898년 순교한다. 이건창 선생은 두 분처럼 종교적인 진보주의자는 아니었다. 비록 유교주의자였지만 문학적으로 당시의 상항을 표현한 한편의 시가 가슴을 울린다. 이 표현은 문학의 진보이며 그가 얼마나 진실하고 맑은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단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순국의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전가추석(田家秋夕)이란 제목의 시 한편 읽어본다
.
한양의 부자들은좋은 일들이 많지만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추석의 명절도 없네.
이건창 선생의 시는 약 사백 수가 넘는다. 모두 한시들이지만 나라사랑과 민족 사랑이 숨어 있다. 선생의 시는 강화도라는 특수한 지형이 만들어 낸 것인지 모른다. 당시 외세의 침략을 어린 나이에 목도하고 고려 때 몽고침략의 이야기들을 수없이 듣고 자랐을 그에게 나라사랑은 백성 사랑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인 타락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가져온 조선 말기 스러지던 조선의 운명적 상황은 그에게 고통이었으리라. 그는 백성 없이 나라가 없다는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학문적 스승이기도 했던 조부 이시원이 병인양요(1866년)의 수치를 감내하지 못하고 자결하던 장면을 어린 이건창이 목격한 것이 삶을 좌우하였으리라.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은 아우와 함께 양잿물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다.
철종때 그는 이조판서였다.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략하자 주변에서는 그에게 피난을 갈 것을 호소하였지만 관원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는데 무슨 피난이냐며 집에 그냥 머물렀다.
오히려 조상들의 산소에 참배하고 3통의 유서를 남겼다. 1통은 손자 이건창에게, 다른 1통은 가족들에게 마직막 1통은 막내아우에게 썼다.
이건창이 받은 유언은 질명미진 '質明美盡'이다. 14세의 이건창은 이런 조부의 마지막 길을 보며 성장했으니 민족관이 남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의 큰 상처와 감동을 동시에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송나라 정자(程子)의 문장을 인용한 질명미진(質明美盡)이란 유서를 손자 이건창에게 남긴다. 이런 사연으로 이건창 시인의 생가 현판은 明美當이다. 이런 사연은 45년 후 벽초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에 참을 수 없어 목을 매어 자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죽을 지언정 친일은 하지 말거라"의 유서를 자신의 아들인 벽초 홍명희에게 남겼다. 벽초의 삶을 부친의 유언이 평생 결정하게 된다. 사람의 자존감은 그냥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이건창의 생가는 초라하다. 명미당(明美當)이란 현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자신의 조부 유언을 가진 집 이름이 아닌가. 생가 마당을 서성이며 그의 삶과 문학을 생각한다.
신숙주를 비판한 이건창의 시 고령탄(高靈歎)을 읽으면 그의 역사관을 인식할 수 있다. 고령(高靈)은 신숙주의 호다.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런 구절도 있다.
남쪽 마을에서는 하얀 술 거르고
북쪽 동네에서는 송아지 잡는데
서쪽 이웃집에서는 가난한 여인이
구슬프게 밤새워 우네.
이 시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울고 있는 과부를 보고 지었다고 전한다. 가난으로 남편은 죽고 유복자를 보며 참담했을 한 과부의 상황을 시로 쓴 것이다. 그는 늘 가난한 백성의 편이었다.
당시 충청감사 조병식은 악랄한 수탈을 일삼았다. 1877년 고종은 청렴결백하던 선생을 충청도 암행어사로 발탁한다. 조병식은 선생이 왕에게 보낸 장계를 가로채어 자신을 포상하는 글로 교체한다.
선생이 분개하여 이것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의 판단은 한심했다. 조병식을 시기하는 부덕한 인물이라며 선생을 평안도 벽동으로 귀양을 보낸다. 이래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기적이다. 조선 왕조는 이미 그 기력을 다했던 것이다. 생가와 비석도 없는 그의 묘지를 돌아보면, 그가 얼마나 청백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조선 후기 철학사를 빛낸 강화학파의 한 사람이었으며 위대한 시인이 아닌가. 다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다.
이미 김택영은 그를 고려와 조선의 천년의 문인 중에서 9명의 문장가에 포함시켰다. 이럴진대 언제까지 그의 묘소에 비석도 없이 방치할 것인가. 이건창은 47세의 단명이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이곳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10년이 지나 그의 묘소를 찾아 천리길을 걸어 온 매천 황현은 "그대여 홀로 누워 있는 것 서러워 마시게, 살아서도 그대는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라는 감회를 적은 시가 가슴을 적신다.
그는 정제두가 양명학의 지행합일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의 학문태도를 교훈 받고 실천하였다.
그가 쓴 당의통략(黨議通略)은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평등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서술한 명저다. 조선당쟁사를 이렇듯 객관적으로 쓴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의 이런 삶을 지배하였던 사상적 스승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하곡 정제두(鄭齊斗 1649-1736) 선생이다. 그는 본관이 연일(延日)이며 포은 정몽주의 11대손으로 한양에서 태어나 5세때 부친을 여의었다. 우의정을 지낸 조부 정유성(鄭維城1596-1664)이 부친을 대신해 키웠다.
선생의 묘소는 화도면 하일리(霞日里)에 자리잡고 있다. 풀이하면 저녁노을이란 이름이니 제격이다. 또한 선생의 운둔지의 지명으로도 적합하다. 이곳은 강화도의 서쪽 끝이다. 선생은 당쟁의 소용돌이 더 이상 볼 수 없어 숙종 말년에 한양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다.
■ 정제두의 삶과 철학
정제두(1649~1736) 선생은 강화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론적으로 확립한 경세론을 전개했다. 본관은 영일이며, 호가 하곡(霞谷)이다. 하곡은 강화도 북서쪽의 바닷가 마을이다. 하곡이란 이름은 ‘노을이 아름다운 골짜기’란 뜻이다. 해질녘 이곳 바닷가에 서면 노을이 이름처럼 아름답다. 1709년 그의 나이 60세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 하곡에 거처를 정하고 학문에 전념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우의정 유성(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상징(尙徵)이다.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윤증(尹拯)에게도 배워 1668년 19세에 이미 초시에 급제했다. 그의 집안과 학문을 깊이를 알만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철학인 주자학에 반대하고 양명학에 심취한다. 이미 양명학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
정제두 학문과 덕행은 유명세를 타고 퍼진다. 1688년 평택현감을 비롯한 많은 벼슬자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한다. 40세 때인 1689년 안산(安山)에 옮겨 살면서 양명학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저술된 저서가 학변(學辨)과 존언(存言)이다. 이 저서들은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심성학(心性學)이 담겨 있다. 이제 그는 결단을 해야 했다. 세상과 은둔하여 양명학의 토대를 구축할 결심을 하고 장소를 물색한다. 강화도 하곡이다. 그의 나이 60세 1709년 드디어 그는 강화도 하곡으로 이주한다. 양명학에 대해 배척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숙종 때 호조참의, 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에 임명되기도 한다. 그는 장수 했다. 87세로 세상을 떠나 강화도 하곡에 묻혀 있다.
양명학의 핵심사상은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이다.
심즉리(心卽理)는 양명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표현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순수하고 착하다는 성설설과 이후에 새로 생겨나는 감정이 있다. 이 둘을 합친 것이 理<리>라는 사상이다.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창시자인 명나라 왕수인1472~1529)이 독자적으로 만든 말이다.
그의 호가 양명이다. 치양지는 착한 것을 알고 이해하면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이다. 이때 그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사상은 맹자의 성선설의 영향을 받았다. 착함에 이르는 길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왕수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 ‘선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과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누어 분파가 형성된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말과 실천이 동일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나는 양명학의 이 지행합일을 좋아한다. 양명학 전래 시기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임진왜란 전이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논쟁이 빈번했다. 그러나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이었다. 양명학 찬성론자들은 규탄의 대상자가 되어야 했다. 퇴계 이황은 불교의 선학(禪學)과 일치한다며,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을 비판했다. 조선에서 죽어가던 양명학을 발전시킨 이가 정제두 선생이다. 이광사. 이건창. 김택영을 거쳐 정인보, 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산맥을 이룬다. 이 철학의 봉우리가 강화학파이다.
양명학은 혁신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혁명가들에게 관심이 많다. 이 사상을 받아들인 곳이 일
본이다. 일본의 학자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장’은 양명학을 일본식으로 연구한다. 메이지유신에 사상적인 영향력을 준다. 일본에서는 양명학의 책이나 잡지가 수없이 출판된다.
나는 정제두의 묘소에서 항상 그가 꿈꾸던 세상을 그려보곤 한다. 그가 벼슬을 단념하고
바닷가 마을에서 백성을 사랑하며, 조선의 사상을 정립하던 모습에 감동을 받곤 한다.
그는 조선 후기의 진정한 처사였다.
강화도에는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철학의 숨결이 담겨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