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석(琴石) 홍영식(洪英植) 선생 연보(年譜) 및 숭모(崇慕)기행
금석 홍영식 선생 출생과 어린시절
금석 홍영식 선생은 1855(철종3년) 12월 29일에 아버지 좌부승지 홍순목(洪淳穆)과 전주이씨 와의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본은 남양 자(字)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禁石)이다. 어려서는 몸이 아주 약하여 자주 앓았고 여덜살에 생모가 돌아가셔서 친어머니가 없는 가운데 자랐다.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졌고 어렸을 때부터 너무 총명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7살 때 아버지가 작은 읍의 현감으로 있을 때 어느 날 현감의 부하인 아전들이 홍영식을 매우 귀엽게 여겨 홍영식을 "내 아들"이라고 저희들 끼리 농을 주고 받았다. 이를 엿들은 홍영식은 분을 참지 못하여 울음을 터뜨렸다. 현감이 울음소리를 듣고 홍영식을 불러 "웬일로 울었느냐"고 물었으나 홍영식은 이 사태에 대하여 재빨리 눈치를 채고 끝내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홍영식의 아버지인 현감에게 이 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녀 했던 아전들은 이 일이 있고 나서 홍영식을 진정한 마음으로 대했다고 한다.(*2. 증손 홍석호의 글)
고종과 함께 수학(修學) 그리고 결혼
흥선대원군이 형편이 몹시 어려웠던 시절에 홍순목을 찾아온 흥선 대원군이 아들 명복(命福;12세에 고종 임금이 됨)을 훈도해 달라는 청탁을 하게 된다. 그 시절 흥선대원군이 찾아오는 것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던 시절이다. 그러나 홍순목은 흥선대원군의 청을 받아 들여 아들 영식과 함께 정성을 다해 훈육했다. 명복과 영식은 두살 차이로 공부를 하면서 교분을 맺은 것 같다.
1868(고종5년)에 홍영식 선생은 양주 조씨와 결혼 하였고, 명문거족의 자손으로 훌륭한 선생 밑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나아가 신식 문물에 눈을 뜬 관계로 보수적인 아버지와는 상반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2. 증손 홍석호의 글, *3 김동인 소설 운현궁의 봄)
과거와 승진
홍순목 연보(邢堂稿)와 조선왕조실록(1872, 고종9년)에 과거에 대한 기록이 있다.
같은 해 7월25일에 홍순목은 근정전에 나아가 고종으로 부터 치하를 받은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전에 오제(梧製)에서 우의정의 아들이 급제하였으니, 매우 기특한 일이다.' 우의정 홍순목이 아뢰었다. '신의 못난 자식 홍영식이 나이가 겨우 18살로서 , 매우 어리석고 학식도 보잘것 없는데 이번 절제(節製)에서 우연히 방액의 대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특명으로 사제(賜第) 하시고 이어서 또 사악(賜樂)하셨으며 ...(생략).....오늘 또 과성(科聲)까지 있고 보니 몹시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생략... 못난 자식이 창방(唱榜)이 되지 않는지라 극진한 은혜를 베푸시어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몇 년의 기한을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해 주신다면 실로 만물을 생성하는 천지와 같은 은택일 것이며, 신의 가득 참을 경계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고종이 하교(下敎) 하였다.
'대신이 면대해서 이렇게 누누히 간청하니 직부 하도록 한 홍영식에 대해 이름을 발표한 후에 마땅히 우선 사가(賜暇)할 것이다.'
홍순목이 아뢰었다.
'누차 성교(聖敎)를 받는 것이 이렇게 융숭하고 지극하니, 신은 온몸 영광스럽고 감동되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위의 기록으로 보아 홍영식 선생이 칠석제로 등과한 것이 분명하다.
1875(고종12년) 홍영식 선생은 20세가 되어서야 관직에 오르고, 1878(고종12년) 3월에 교리(校理; 正 5品), 5월에 사서(司書), 9월에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 10월에 검상(檢詳) 11월에 부수찬(副修撰), 문학(文學; 正4품), 1879(고종13년) 3월에 부응교(副應敎) 6월에 직각(直閣), 9월에 필선(弼善), 1880(고종14년) 8월에 상례(相禮;從3品), 11월에 부호군(副護軍), 12월에 참의(參議 ; 六曺에 달린 正 3品의 벼슬), 병조 참판에 이른다.(* 5 조선왕조실록 )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 시찰
1981(고종15년) 신사유람단이 구성되어 일본에 파견됐다. 선진문물을 받아 드리려는 시도였고 일본의 문화란 명치유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 초기의 개화운동이라는 것이 학계의 연구 결과다. 신사유람단은 홍영식 선생을 비롯하여 12명의 조사(朝士), 26명의 수원(隨員), 12명의 통사(通士), 12명의 하인(下人)으로 구성되었다. 시찰 분야는 내무성, 농사무성, 외무성, 대장성, 문부성, 사법성, 공부성, 세관, 육군 등이었고 12명의 조사(朝士)가 각각 맡았다. 홍영식 선생은 육군을 담당하였고 수원(隨員)으로 고영희(主簿 33세), 함남기(參奉 32세), 김낙진(56세), 통사(通士)로 백영주, 하인은 정용석이었다. 홍영식 선생의 시찰기는 일본 육군 총제(日本 陸軍 總制 규장각 3271), 일본 육군조전(日本 陸軍操典, 규장각 3710, 3702)이 있으나 필자는 아직 접해 보지 못했다. ( *6 정옥자 신사유람단고 P525)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일본 우정총국장 마에지마는 신사유람단원 중 한 사람이 우편제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질문을 하여 왔고 자료도 많이 요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홍영식 선생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고 있다.
미국 초대 공사 푸트 부임 시 영접 서신 전달
고종 19년(1882)1882.5.22 조.미(朝美)조약이 체결 되었고, 조약 체결 시에 조선 국기(태극도형기; 8괘기)와 미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이 기록은 태극기가 탄생된 최초의 이야기로 알려 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초대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부임할 때 홍영식 선생은 접빈사(영접관)로 주사 김노철과 함께 함상(艦上;모노가시호)에 올라가 "영접 서신"을 전달했고 이 때 함상 정면 마스트에 조선 국기(태극도형기로 추정 되는 깃발)와 미국 국기가 힘차게 펄럭이고 21발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영접 행사가 거행 되었다.
보빙사의 부대신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미국 방문
1983(고종20년) 6월 5일 고종이 전교를 내렸다.
"미국 공사가 국서를 거져와서 우호관계가 두터워 졌으니 마땅히 답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협판 교섭통상사무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협판 교섭통상사무 홍영식을 부대신으로 하여 떠나게 하라."
보빙사는 전권대신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으로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 총 8명이 참여하게 되고, 서울에서 중국인 오예당을, 동경을 경유할 때에 일본인 宮岡恒次郞을 통역관으로 참여 시키고, 안내 겸 비서로 미국인 로웰(Percival Lowell(한국명 魯越)을 고용하였다. 태평양을 건너 9원2일(양) 샌프란 시스코에 상육하고, 기차로 시카코를 거쳐 9월15일(양) 워싱톤에 도착 하였다. 미국 대총령 아더 (Chestter A Arthur)가 그 당시 뉴욕에 체류하고 있어 뉴욕 애비뉴 호텔로 가서 아더(Chestter A Arthur) 대통령의 접견을 받고 국서를 봉정하게 된다. 미국무성은 2명이 장교(해군정보국의 메이슨 Theoodore A. Mason 중위, 해군도서관의 훠오크 Georg C. Foulk )를 일행에게 배치하여 호술(護術)과 안내를 맡게 하고, 도시와 공공기관을 시찰하게 한 다음 10월 12일 대통령과 작별회견을 끝으로 귀국하게 된다.
홍영식 선생은 고영철, 최경석, 외국인 로웰, 오에당(吳禮堂), 宮岡恒次郞을 거느리고 10월16일(양) 워싱턴을 떠나 12월 20일(양) 서울에 돌아오고, 동년 11월 21일 고종에게 복명을 올린다.
미국 방문에 있어 한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한국말을 쓰고, 한국의 글을 알리면서, 마차를 타고 "조선국기를 휘날리며" 미국의 도시를 방문한 보빙사의 선진 문물 시찰은 강대국과 유대를 강화하여 외세를 막으려는 그 당시의 외교적 노력이라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도 우리 나라의 외교 환경과 비슷하다. 홍영식 선생의 복명기는 김원모 선생이 지은"한미수교100년사"에 수록 되어 있다.
부산항 해저전선 설치 조관(條款)에 서명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에 약정 허가하여, 일본 규수(九州) 서북 해안으로 부터 쯔지마(對州)를 거쳐 조선의 부산해안에 이르기 까지 전선을 설치하고 육상으로 전선을 연결하여 전신을 할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선과 일본간의 조관(條款)이 1883(고종20년) 1월 24일 양국간에 체결 되었다. 홍영식 선생은 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의 자격으로 서명하게 된다.
우정사(郵程司) 협판(協辦)및 우정총국 설치와 함꼐 우정총판(郵征總辦)에 취임
근대식 우정사업에 대한 연구와 개설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홍영식 선생은 처음에는 봉수와 역마와 같은 비 능율적인 제도에 대하여 개혁할 생각도 갖고 있었으나 일본이 개항(開港)장에 우정(郵政)사업을 수중에 넣고 있는데 대한 불만을 품고 이의 개선에 크게 힘썼다. 1883.1월(고종 19년 12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설치되고 그 밑에 우정사(郵程司)가 설치 되면서 그 책임자인 협판(協辦)이 되었고, 또 보빙사의 부대신으로 미국을 시찰할 때에 뉴욕의 서부전신전화국과 우체국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귀국한 뒤에 고종에게 근대식 우정제도의 필요성을 진언하여 그 결과로 1884(고종 21년) 3월 27일(4월22일) 고종은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리게 된다.
"각국과 통상을 한 이후로 안과 밖으로 관계되는 일이 날로 증가하고 나라의 무역에 대한 소식이 그에 따라서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체전(遞傳)을 합당하게 하지 못하면 원근의 소식을 모드 연락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우정총국(郵征總局)을 설립하도록 명하니 우선 연해 각 항구에 오가는 신함(信函)을 맡아서 처리하고 내륙의 우편에 대해서도 점차 확창하여 공사(公私)에 이롭게 하라.
병조참판 홍영식을 우정총판(郵征總辦)으로 차하(差下)하여 일을 처리하고 해당 총국의 시행 장정(章程)과 써야할 인원도 모두 해당 총판이 품지해서 시행 하라는 내용으로 군국아문과 통상아문에 분부하라"
한성과 제물포(인천)간에 우편업무 개시
우정 총국이 설치된 건물은 선조 때 전의감(典醫鑑)으로 지은 건물로 고종이 하사한 것이다. 현재 서울의 우정국로에 있는 체신기념관이 한국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의 건물이다. 분국은 제물포에 최초로 설치 되고 홍영식 선생의 추천으로 분국장에 이상재 선생이 임명되었다. 일본에 주문한 최초의 한국우표(文位郵票) 5종이 일본 인쇄소에서 인쇄되어 그 가운데 5문, 10문 등 2종이 국내에 들어 오고, 우편업무 취급장정의 제정, 인력과 장비 등 준비를 거쳐 한성과 제물포(인천)간에 우편물 교환이 동년10 월 1 일(11월18일) 비로소 개시 되었다.
우정총국 개설연(開設宴) 주관하고, 갑신정변 일으키다.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열강의 세력을 끌어들여 세력균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이룩하고 아울러 외국의 신 문물을 도입해서 부강한 이상국가를 만들려는 의지로 뭉친 개화파는 1884(고종 21년) 10월17일(12월4일) 우정총국 개설연(開設宴)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이날 연회는 저녁에 우정총판 홍영식 선생이 주관하에 이루어졌다. 후우트 미국공사, 아스튼 영국영사, 陳樹棠 중국공사 등 외교사절과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 사대당 고위 정객들이 참석하여 술과 음식이 들어와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익어 갔다. 끝날 때쯤 담장 밖에서 "불이야" 소리와 함께 불길이 솟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도 우영사(右營使)로 참여 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가 밖에 있던 개화파 병사의 칼에 맞고 대청에 들어와서 쓰러졌다. 연회에 참석했던 외국사절과 초청인사 등이 놀라서 흩어지고, 홍영식,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궐내로 들어가서 고종의 침전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하게 아뢰고 다른 곳으로 이어 하시여 변을 피할 것을 청 하여 고종이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각 전과 각 궁이 도보로 뒤를 따르는 일로 부터 갑신정변이 전개 되었다.
삼일천하(三日天下)에서 최고 위직로 활동하다.
1884(고종21년) 10월18일자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다.
"서광범을 협판교섭사무로 승차하고 이어 독판을 서리하게 하였다. 김옥균을 헤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으로, 서재필을 전영 정령관(前營正領官)으로 사관생도 부장(士官生徒 部將) 12인을 별군관(別軍官)으로 차하(差下) 하였다. 홍영식(洪英植)을 좌우영사(左右營使) 박영효(朴泳孝)를 전후영사(前後營使)로 삼고 김옥균(金玉均)을 호조참판(戶曺參瓣)으로 삼고 이어 판서(判書)를 서리(署理)하게 하였다. 이재원(李在元)을 의정부 좌의정(議政府 左議政)으로 제배하였다. 홍영식(洪英植)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이재완(李在完)을 병조판서(兵曺判書)로, 윤웅열(尹雄烈)을 형조판서(刑曺判書)로, 김홍집(金弘集)을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김윤식(金允植)을 예조판서(禮曺判書)로 삼았다"
홍영식 선생의 관직에 있어서 이광린 저 개화당 연구(일조각 1973)와 한국사 강좌 V근대편(이광린 저 서강대학교1984)은 조선왕조실록과 일치(右議政)하고, 김옥균저 갑신일록과 이를 바탕으로 기술한 백과사전은 좌의정(左議政)으로 기술되어 있다. 또한 홍영식 선생 묘소에 세워진 안내판(정보통신공무원에서 세웠음)도 좌의정(左議政)으로 기재되고 윤치호 일지에서는 영의정으로 기록 되어 있다. 최근 갑신정변에 대한 연구서적이 많이 출판되어 있고, 김옥균 저 갑신일록(甲申日錄)은 사건이 있은 날로 부터 1년이 지난 1885년에 집필 되었고 일본에 건너 갔던 동지들이 미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혼자만 외롭게 남아서 기억에 의존하여 저술했던 관계로 일부 오류도 지적되고 있다. 이광린 교수는 갑신정변 연구(1979 일조각 P163)에서" 홍영식은 처음에는 좌우영사와 우포장으로 되었으나 개화당 정권을 대표하는 사람을 내세우게 되자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박영효 저 갑신정변 회고록에서는 "홍영식은 모의 총람의 제 일인자 김옥균은 일본 공사관과의 교섭과 통역을 맡음"이라는 기술이 있다.
춘원 이광수는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에서 "홍영식은 과연 성의 있는 사람이었소, 서광범은 인물이었으나 병약하여 대사를 하기가 어려웠소"라 하였고 "홍영식을 많이 칭찬했다"는 등 박영효의 속 마음이 여기에 표출되어 있다.
이 이외에도 서재필 회고록, 윤치호 일기, 한성지잔몽(漢城之 殘夢, 서울에 남겨둔 꿈), 종정연표, 조선교섭자료(일본자료) 등 문헌이 있다.
고종을 끝까지 호종 하다 장열하게 순국하다.
1884(고종21년)10월 19일 조선왕조실록은 갑신정변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날 신시(申時)에 청나라 병사들이 대오를 나누어 궁문으로 들어 오면서 총포를 쏘았고 우리나라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의 병사도 따라 들어오니 일본 병사들이 힘을 다해 막았다. 유시(酉時)에 상께서 후원에 있는 연경당(演慶堂)으로 피 하였는데 이때에 무예청(武藝廳) 및 위사(衛士), 별초군(別抄軍)이 비로소 들어와서 호위하여 문을 열고 나가 북묘(北廟)로 향하였다. 일본공사가 병사를 거느리고 궁을 떠났는데, 김옥균, 박영효, 및 생도 서광범, 서재필 등은 모두 따라 갔고, 오직 홍영식 과 박영교및 생도 7인만이 뒤따라 북묘로 갔다. 해시(亥時)에 오총령(吳總領)은 상께서 북묘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대오를 거느리고 맞이하러 갔다. 홍영식 등이 어의(御衣)를 끌어 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상을 모시고서 사인교(四人轎)에 태우니 홍영식 등은 고함쳤다. 우리 병사가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를 쳐 죽이고 또 생도 7인도 죽였다."라 하였다.
당시 개화당 동지들이 망명하자는 말에 홍영식 선생은 "내 나라에서 일을 도모하다가 실패 했다면 내 나라에서 처벌을 받든가 자결을 해야지 구차하게 외국으로 가느냐? 나는 고종을 시위(侍衛)하겠다"고 말 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미국인 로우웰(Percival Lowell 魯越, 천문학자)은 "정치신념에 목숨을 건 그의 죽음은 창의(彰義)의 죽음"이라 말했다.
숭모 사업, 어떻게 전개하여야 하나?
정부차원에서 기념우표, 기념엽서 발행, 체신기념관 및 우정 박물관 운영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으나 여기에 더하여 홍영식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문화사업 등을 추진 했으면 한다. 우정창시 130주년(2014년)을 앞두고 가장 시급한 것은 홍영식 선생의 묘소(여주군 흥천면 문장리 소재)에 세워진 안내 간판(2개)을 새로운 디자인으로 다시 세워야 한다. 안내문구의 기술 부분 중 위에서 지적한 것을 다시 토의 하여 정확한 사료에 근거한 문안을 만들어야 한다. 갑신정변에서 왕실을 제외하면 홍영식 선생은 최고위직에 있었고, 끝까지 고종을 호종 하신 충의에 가득찬 분이다. 최고의 추앙을 받아야 할 분이다.
정변에서 살아 남은 동지들의 회고록이 한글로 번역되고 갑신 정변의 연구가 많아 지면서 차츰 선생의 위대한 면모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위인전 또는 소설로 쓰고, 희곡 등으로 각색되어 연극 공연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2014년은 우정 창시 130주년이 되는 해다. 홍영식 선생의 업적을 정확히 알리고 묘역의 안내판 등을 세우려 해도 그 것을 협의 해야 할 주체가 없다. 좋은 의견을 모으고, 체계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조직이 있으면 좋겠다.
최근 정보에 의하면 우정130년사"를 연구 하고 집필하고 있는 분이 있다는 소식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하게 우정사를 연구하는 그의 노력에 경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