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광란의 밤을 보내고 새로 맞는 아침은 그리 쉽지 많은 않습니다. 졸린눈을 비비고 씻고 식사하고 하다보면 일어날때 나를 압박하던 피곤함은 어느새 가십니다. 오늘은 일정이 상당히 힘든 코스입니다. 기온이 40도가 넘는 데다가 햇빛을 많이 쐬니 몸관리가 더더욱 요구되는 날이죠. 허원 교수님과 가이드 분들의 몸조심하라는 충고를 하십니다. 더운 곳이라 그런지 아침 볕 부터가 심상치 않군요.
버스는 투루판 시내를 빠져나와 거칠은 사막지대 사이를 달립니다. 여기서는 농사를 짓는 장면으로도 도시임을 알 수 있게 되죠. 30여분을 달리자 차창 밖으로는 길게 뻗은 화염산이 이글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집니다. 약 500m 고도에 120km에 걸쳐 길게 늘어서 있는 산입니다. 화염산이라 붙여진 이유는 보시는 바와 같이 불이 이글거리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죠. 실제로도 한여름에는 표면온도가 80도를 넘어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화염산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워 거리를 두고 구경할 수 밖에 없죠.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이 살았던 곳이죠. 또한 장사가 칠각정에서 동남동녀를 잡아먹는 용을 검으로 죽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산이 붉은 것은 용의 피며 표면이 갈라진 것은 장사가 칼로 내려친 자리라고 합니다. 실제로 보니 실감이 나네요.
화염산을 구경하기 위해 따로 만든 주차장에서 내립니다. 구경도 하지만 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도 만든 것 같습니다. 정면으로는 화염산이 보이고 바윗돌에 붉은 글씨로 화염산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습니다. 옆의 낙타도 화염산이라는 붉은 글씨를 두루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 절묘한 콤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낙타에 호기심을 가진 학우가 낙타에 타서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물론 돈을 내야죠.
이제 이 신강지역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해볼까요? 청조시대에 여기로 한족을 많이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역시 이 지역을 중국땅으로 굳히기 위한 것이었겠죠. 현대로 가면 1950년 이곳사람들 말로는 '해방'이라고 말하는 중와인민공화국의 영토의 일부가 된 뒤에 왕진이 자신의 부하 10여만명을 전역시켜 땅을 개간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위그루족의 반란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죠. 모처럼 독립을 이루려니 했다가 다시 외국세력이 들어오니 당연한 일이겠죠. 이 과정에서 중국군인이나 관리들이 계속 살해가 되었는데 이에 왕진은 어느 한 지역에서 위그루족을 아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5분동안 무차별 학살합니다. 군대식으로 말하면 '시범쪼'였던 셈이죠. 왕진은 이 지역에서는 공포의 대명사로 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적대감을 뿌리깊게 심어주어 아직도 위그루족은 한족을 적대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시장에서는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염산에서 다시 버스로 10분을 달려 고창고성에 도착합니다. 버스에서 부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외성입니다. 오랜세월이 지나 겨우 성의 흔적이라고 알아볼 정도지요. 여기 성은 외성, 내성, 공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투루판의 중심가 였으나 폐허만이 남고 우리같은 관광객이나 답사객이 찾고 여기 관광으로 먹고사는 상인들만이 살고 있죠.
고창고성이 생기게 된 연유는 이렇습니다. 한 무제시대(BC,1C)에 서역에 천리마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이광래를 파견하여 금은보화로 이말을 수입하려 하지만 서역국은 도리어 금은보화를 강탈하고 수출을 거절합니다. 이에 한무제의 처남인 이원개 장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도리어 패배하게 되죠. 한무제는 가욕관에 보고하러 온 이원개 장군에게 다시 정벌하게 하고 이원개 장군과 군사들을 들여 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고창고성을 쌓고 결국은 승리하여 천리마를 획득합니다. 나중에 여기로 35,000명이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들어가는 곳은 그늘로 가리워진 주차장입니다. 중국각지에서 온 관광객으로 차도 사람도 붐빕니다. 목적지인 공성까지는 약 15분동안 걸어들어갑니다. 여기서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착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햇빛은 유난히 따갑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습기가 없기 때문에 짜증나지는 않습니다. 그늘은 시원하고요. 어느 여학우는 지쳤는지 들어갈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길은 차가 교행할 만한 넓이이고 주로 손님을 태우는 당나귀가 지나갑니다. 곳곳에는 풀이 나 있는데 타원형의 잎에 수박처럼 둥근 열매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수박보다는 훨씬 작죠. 주로 이곳을 다니는 당나귀들이 먹는 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런 척박한 곳에서도 풀이 자라는군요. 한편 기념품을 파는 여자아이가 아까부터 우리를 계속 따라옵니다. 보통 사달라고 극성을 떠는 상인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잘 통하지는 않지만 간단한 잡담도하고 농담도 하여 우리의 여정이 힘겹지만은 않습니다. 공성까지 잔잔한 웃음을 띄며 묵묵히 공성까지 따라옵니다. 김양식 선배가 이 정성에 감복하였는지 기념품 하나를 사주시는군요. 이들은 주로 기념품가게에 딸려 있는데 이런 식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셀러리라고 해야겠죠. 조급한 마음으로 관광객을 짜증나게 하기 보다는 이렇게 호감을 사서 물건을 판다고 합니다.
내성도 거의 흔적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정도로군요. 그리고 공성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는 사원과 궁전의 모습만 간신히 남아 있습니다. 입구 오른쪽으로는 현장법사가 설법을 했다는 건물이 있습니다. 들어가보면 천정이 뻥 뚫려있고 설교를 하기위해 약간 높은 작은 바위만한 발받침이 있습니다. 약 2~300명이 안에서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도 한때는 불교의 영향이 며쳤던 곳이죠. 물론 현장법사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이끌었던 삼장법사를 말합니다.
입구정면으로는 사원의 중심탑이었던것 같은데 벽면에는 불상을 놓았던 흔적이 칸칸이 남아 있습니다. 붉은 색의 채색흔적도 남아있죠. 수천년동안 이나마의 채색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특이사항이라고 할 수 있죠.
한편 여기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에서 왔음을 알리자 연신 "footboll, footboll"을 외쳐댑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민국"이라는 외침으로 답하고요. 아무래도 월드컵의 여파가 크긴 큰 모양입니다.
약 15m정도 되어 보이는 내성으로 올라가니 저 멀리 외성이 보이고 그 옛날에는 건물이었을 법한 곳이 바위처럼 웅크려져 있습니다. 거의 바위에 난 구멍이 창문이었음을 알리는 것이죠. 13세기에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차가 있는 곳까지는 당나귀로 이동합니다. 다들 더운날씨 때문이라 그런지 걸어갈 엄두를 못냅니다. 상당히 지쳐있는 동엽이형하고 둘이서 10원을 내고 고창고성입구까지 이동합니다. 다들 지쳐있는듯.. 오늘부터가 정말로 실크로드 답사길이라고 하더군요. 버스로 이동한다고는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여정이죠. 수레에 사람을 가득 태운 당나귀는 또약빛을 쐬면서도 묵묵히 달려갑니다. 아무래도 차를 탔을 때와는 틀리죠.
고창고성 입구, 그러니까 차가 있는 곳에 들어서자 마자 상점에서 물을 사먹기에 정신 없습니다. 물은 정말로 여기서만 구경할 수 있죠. 빨간색을 띤 페트병에 든 물은 우리나라의 단맛이 나는 물과는 달리 여기서는 다소 쓴맛이 납니다. 물마저도 이렇게 틀립니다.
이제 식사시간이 됐으니 식당으로 이동해야죠. 투루판으로 이동하는 길에 창밖에는 은색 굴뚝에 벌건 불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짐작대로 유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루무치에서 난주, 서안, 북경방면으로 가는 철길에는 유조차가 눈에 많이 띄죠. 경의선이 연결되고 통일이 되면 열차로 여기까지 기름을 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투루판 시내는 더운지 한산한 모습입니다. 도로가 곳곳에는 수로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천산산맥에서 내려온 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시내버스가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입니다. 여기서는 35인승 정도의 버스가 주로 다닙니다. 더 이상 큰 버스는 없군요. 전에도 말했듯이 서안에서는 2층버스도 많이 다니죠. 도시의 크기에 따라 시내버스도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이 지역에서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음식이 많이 있습니다. 두부도 있고, 국물도 맛이 비슷한 것이 있고요,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 김, 깻잎등으로 낯선입맛을 달래기도 합니다.낯선 땅에서 먹은 고추장이며 김이 그렇게 신선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왜 한국사람들이 외국나가서 오랜동안 살면서도 된장이며 김치를 잊을 수 없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와서 음식이 굳이 나한테는 무리가 되고 힘겨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항상 느끼던 맛에서 멀어지면 그리운 모양입니다. 여기 사람들도 한국에 오면 마찬가지 겠지요.
식사를 마친후 새로 생긴 일정인 석굴이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 워낙에 새로 생긴거라 이름은 잘 모르지만 아까 고창고성에서 현장법사 얘기도 그렇고 석굴이 있는 곳으로 보아 여기서도 불교가 번창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루무치에는 실제로 불교를 많이 믿지만 여기서는 이슬람교가 더 흔하죠. 그래서 호텔이며, 시내거리며 중동지방을 더 연상시키지요. 간판에 크게 붙여진 한문보다 그 밑에 쓰여진 위그루 언어가 더 어울립니다. 실제로도 중동지방 글씨랑 비슷한 계통이라고 합니다.
석굴은 어느 계곡 한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막에서 협소한 곳으로 접어드나 했더니 도로아래에는 계곡이 밑으로 아늑하게 보이고 창위로 눈을 맞추면 누런 빛의 모래가 산을 이루어 우뚝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주차장으로 들어섭니다. 주차장 앞에는 현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의 석상이 서 있었지만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석굴에안에서는 사진을 찍지는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석굴이 많이 훼손이 되었는데 이슬람 교도들에게도 그렇고, 서양열강에서 훔쳐간 것도 있고 문화대혁명때 홍군이 훼손하고 해서 타지인에게 아무래도 경계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석굴입구마다 문을 설치하여 자물쇠를 채워놨죠.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이 사원이 계곡 중턱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아래에는 중들이 거처하는 곳이 있었고 중턱에는 석굴들이, 맨위에는 사리탑이 있습니다. 계곡 밑으로는 나무와 풀이 주변의 척박한 환경을 무시하듯이 푸르른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석굴안에 있는 불화중 상당수가 흙으로 천정을 덮고 있고 금박으로 입혔던 곳은 파연진 흔적이 있고해서 이 사원의 슬픈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시달림을 당한 우리는 그늘진 곳에서 수분도 보충하고 상점에서 팔고 있던 하드를 사먹어봅니다. 단단하여 나누어 먹기에도 편하고 어른분들이 먹었다는 얼음과자를 연상시킵니다. 나도 어릴때 먹어봤을 법한 것인데요, 불량식품 기억나시죠? 오랜만에 맛을 보니 반갑군요.
도로에서 승용차는 구경하기 힘들고 관광객을 실은 버스와 짐을 싣고 제갈길을 가는 트럭만이 간간이 보일 뿐입니다. 가끔 시외버스인지 2층구조에 사람이 누워갈 수 있도록 한 버스도 보입니다. 아무래도 장거리이다보니 이런 구조로 한듯 합니다.
다음목적지인 교하고성도 만만한 곳은 아니로군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5원을 주고 산 밀집모자로 무장을 갖추어봅니다. 교하고성이라고 새겨진 간판과을 지나치자 마자 남문이었던 곳이 보입니다. 여기에서는 군인이 주로 지키고 있던 곳이었고 동문은 강물을 타고 드나들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성문자리 안쪽성벽에는 평평한 곳이 있는데 여기서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겠죠. 메마른 땅에는 낙타풀이 가시를 드러내며 억세게 자라고 있습니다. 낙타가 이풀을 피를 흘리면서까지 먹는다고 합니다. 곳곳에는 옛날 건물이었이었던 곳이 구멍을 낸 바위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태는 고창고성보다 양호하여 벽돌의 흔적이 있군요.
길을 따라 성 중심부로 들어가자 관청이었던 자리가 있는에 그 유명한 고선지 장군도 여기서 사무를 보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지하화 되어있어 계단으로 내려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물은 깊이가 30~40m된다고 하는데 실내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군요. 다만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을 펐던 도구가 실외에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다시 지하통로로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데 여기는 유사시에 비밀통로로 쓰였다고 합니다.
성안을 돌아보다가 뒤늦게 다닌 사람들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천천히 이동합니다. 교하고성은 양쪽으로 계곡이 펼쳐져 있고 강이 흐르고 있는데 아마도 방어상의 유리함으로 의도적으로 이곳에 위치한것 같습니다. 계곡밑을 보니 정말로 아찔하군요. 교수님들이 위험하다고 만류를 하시고.. 계곡 건너편에는 포도농장이며 건포도 말리는 건물이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흙빛의 야산도 보이고요. 참고로 여기 교하고성은 고창고성보다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유네스코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며 옛날 최대인구는 7000명이었다고 합니다. 투루판시 서쪼그로 10km떨어져 있다고 하며 길이는 1,650m, 폭은 300m라고 합니다. 고대에는 차사전국의 도시로 서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교통 요충지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천천히 가니 앞에서는 빨리 오라고 야단들이로군요. 마침 화살표 모양의 돌이 '저쪽으로 가시오'라는 듯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대원사였던 곳으로 가보니 모두들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햇빛을 쐬며 걷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죠. 제 옷도 땀으로 소금기가 남아있군요.
교하고성을 빠져나와 물과 과일로 휴식을 취하고 소공탑으로 향합니다. 김성운님이 사주신 수박은 너무도 달았습니다. 연신 비디오 카메라 찍기에 바쁘신 분이죠. 계속 수고를 해 주십니다.
약 30분을 달려 소공탑에 도착, 여기는 이슬람 사원인데 청진사로 불리는 사원에 딸린 탑이죠. 신강지역에서는 가장 큰 고탑이라고 하며, 청대의 명장 액민화탁이 청왕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업적을 남기고자 만들기 시작하여 1777년 아들 소래만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둥근 모양의 이 탑은 높이는 44m라고 이며 십수가지의 무늬를 층층이 나누어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원안에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원안은 흙으로 지어서 그런지 시원합니다. 이 안에는 전기로 된 불빛이라곤 전혀 없이 햇빛으로 조명처리가 되어 있습니다. 햇빛이 들어올 곳을 정교하게 계산하여 단지 햇빛만으로 건물안의 조명처리를 할 수 있게 된것이죠.
이제 식사를 하러 아까 갔던 식당으로 갑니다. 이제 식사를 마치고 투루판역에서 20:50기차를 타고 가욕관으로 이동하는 것이죠. 식사를 마치고 미리 밖으로 나가 봅니다. 시원한 실내와는 달리 후덥지근한 기운이 저를 덮치지만 웬지 이 후덥지근함이 따듯하게 느껴집니다. 식당앞 버스 정류장에는 이따금씩 승객이 버스에 오르내리며 제 갈길을 갑니다. 버스 정류장에 접근해보니 여긴 4개의 노선이 다니는군요.
투루판 시내에서 역까지는 1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공간개념이 한국과는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죠. 1시간거리도 투루판에 소속되어 있군요. 우리나라에서는 시가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역이라고 한다면 먼저 우리학교가 있는 청주를 들 수 있겠고, 구례도 아니고 순천시 관내에 있어 구례입구라는 뜻을 가진 구례구역을 들 수 있겠죠. 투루판역 근처에는 약 1만여명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철도 종사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제 투루판으로 오는 길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청소가 시작되는군요. 저는 '아침이슬'을 불러봅니다. 버스안에서는 3박 4일동안 허평씨와 김씨 가이드분과 작별인사를 합니다.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역에 도착하니 황사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후려갈깁니다. 마침 우루무치로 향하는 녹색을 띈 기차가 출발을 하고 있군요. 맞은편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기차가 서 있습니다. 역사옆의 입구로 들어가 지하도를 건너 열차에 오릅니다. 여기 한 열차편성에도 여러 객실이 있는데 맨 앞에는 의자로 된 객실, 뒤로는 방의 구분없이 상,중,하단으로 나위어진 침대차(우리는 6인실이라 부릅니다.),특실로 치는 듯 4인실 침대차가 있습니다. 열차등급은 보쾌인듯 합니다. 열차안에는 복도 오른쪽으로 방문이 줄지어 있습니다. 방안은 4인 침대와 천정에는 짐칸, 침대 옆의 벽면에는 간단한 물건을 놓는 곳(안경을 놓는데 유용함)으로 이루어져 있군요.
열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특실로 치는 열차답게 열차의 흔들림이 적습니다. 한편 4인실은 정부간부아니면 외국인이 주로 쓰고 일반인은 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복도에는 이 열차가 실크로드 관광임시열차임을 알리는 열차행선지판이 놓여 있습니다.
창밖은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 사막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마침 우리객실에는 저의 방짝인 동엽형과 나, 쓰루가이드분만 탑승하였습니다. 1자리는 비게 된 것이죠. 창밖에는 아직 밝음이 어둠에 눌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오후 9시에 밝은 풍경을 본다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죠.
어스름이 내리자 맥주를 마시기 위해 열차후미에 있는 식당칸으로 갑니다. 어느새 사람이 불어나고 맥주를 마시며 369게임이 시작됩니다. 이후 기차만 타면 치열한 369게임이 벌어졌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