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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조령 ~ 새재 점묘(sketch)
이러는 사이에 도착한 소조령이 삭막했다.
버글거리던 2층 팔각정 관망대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주차장은
잡초들의 난장판이 돼버렸다.
성황이던 오르막의 주유소와 식당도 폐물로 덩그렇다.
터널 개통으로 재(嶺)들이 예외 없이 된서리를 맞고 있으나 추억
찾아 오르는 이들도 간혹 있어 여기처럼 몰락하진 않는데.
소조령 음식점, 주유소가 텅 빈채 헐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1. 2)
소조령마루의 팔각정은 온데 간데 없고 쓰레기 하치장이 되었다(3)
특히 소조령은 신혜원(新惠院)이었던 고사리(古沙)마을, 이화여
대수련관, 조령산자연휴양림, 새재(삼관문)등의 출입로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대규모 위락시설이 있고 시내버스를 비롯해
각종 차량의 내왕이 빈번한데도 왜 이리 되었을까.
아마, 종착지 혹은 출발지가 지근이라 모두 지나쳐버리기 때문?
재마루를 넘어서면 괴산군 연풍면(槐山 延豊)이다.
같은 충북땅이지만 괴산은 반기문 UN사무총장의 명성을 활용할
연(緣)이 없나 보다.
출생지라는 음성, 배출했다는 충주가 자랑과 선전에 열올리는데
괴산땅에 들면서 뚝 끈긴다.
배출이란 중고등학교를 의미하는 듯한데 그렇다면 서울은, 서울
대학교는 왜 잠잠할까.
피겨스케이트 세계 1인자가 되었다 해서 갓 입학했을 뿐인데도
자기네가 배출했다고 선전하는 후안무치의 대학도 있는데(白岩
斷片 80번 글 참조)
고사리 내리막길에서 은행 줍는 60대 초반의 양주를 만났다.
얼마나 부지런한지 벌써 큰 자루 두 개를 가득 채웠다.
잠시 몇 마디 나눴을 뿐이지만 금슬 좋은 인텔리 이미지에 궁색
하지 않은 차림의 이 부부는 냄새가 고약한데다 자칫 옻에 걸리
기라도 하면 꽤 고생해야 하는 이 궂은 일을 왜 할까.
그들에게는 내 이런 생각을 간파하는 독심술이라도 있나.
노인이 왜 이리 힘든 일을 하시냐고 선수를 쳐왔다.
그들은 혹 가을을 즐기는 중일까?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래서 나처럼 임보고 뽕도 따는 일을 하는 중일까.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른데.
도심에서는 소유권을 들먹이며 이런 줍기마저도 못하게 하는데.
1/ 은행나무길 2/신예원 3/과거보러 한양가는 오솔길 4/과거길
고사리 주차장에서 3관문인 새재(鳥嶺 642m)까지 오리 남짓한
오르막 길이 평일인데도 꽤 많은 인파로 붐볐다.
대부분이 가을 나들이 나온 그룹(group) 단위인 듯했다.
새재는 백두대간 이화령과 하늘재 사이에 있다는 사이재의 축음
(縮音)이기 때문에 鳥嶺이 된 것은 표의의 오류라는 설도 있다.
間嶺이 맞다는 주장이겠다.
그럼 또 하나의 이름 초참(草站)은?
앞회에서 언급했거니와 황병주의 비명 횡사 이후로는 잠시라도
머뭇거리고 싶지 않은 재다.
그런데 아버지가 하던 일을 이으려고 직장까지 버렸다는 판박이
아들 황민우를 3년전 백두대간 남하중 만났을 때 무척 반가웠고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작년 추석 직전에 백두대간 세 번째 북상 중에 들렀을 땐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듯한 생활, 자녀의 교육문제 등 젊은 부부가
감당하기엔 벅찼던가.
그 때, 서운한 마음 달래며 마역봉에 오른 나는 얼마후 부봉에서
어이없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고도 동화원으로 탈출하지 않고 하늘재까지 강행한 무모와
억지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다.
평생 메고 가야 할 멍에가 되고 말았으니까.
문경 관문(聞慶關門)과 황병주
괴산을 뒤로 하고 경상북도 문경땅(聞慶)을 밟기 시작했다.
춘하추동 불문하고 반세기 넘게 많이 밟은 길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간은 주로 조령산, 주흘산과 백두대간의 들-날
머리 보조 임무를 담당했을 뿐인 그 길이 지금은<영남대로>라는
이름의 옛길이며 나그네의 목적로로 격상되었다 할까.
그리고 이 길은 영남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가는
과거길이기도 했다.
한양 길 3갈래중 추풍령은 추풍낙엽 길이고, 죽령은 미끄러지는
길이라는 속설때문에 선비들에게는 금기(taboo)의 길이 되었고,
그래서 오직 이 길만을 고집했다나.
이같은 선비들의 선호 이전에 조령은 영남과 한양의 관문이었을
뿐 아니라 군사적 요새지였다.
임난때(1.592년)는 왜장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와 카토키요
마사(加藤淸正)의 군대가 이곳에서 합류해 충주를 공략했다.
군사적 중요성을 깨달은 조정에서 1, 2. 3관문 등 3중의 관문을
완성한 것은 115년도 더 뒤인 숙종34년(1.708년)이었다.
그리고 2세기가 지난 후에는 중요 관광자원이 되었다.
백성을 핍박해 축성했으나 훗날 그 후손들의 귀중한 수입원이 된
경우는 중국의 만리장성을 비롯해 범지구적이다.
그러나 길의 흥망은 역시 사람의 왕래에 좌우된다.
작금에 걷는 중인 옛길들은 왕래가 없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유일한 증표다.
새재에서 1관문과 소조령의 양쪽 길 역시 관광지로 업그레이드
되기 전에는 희미한 옛길로 명맥이 유지되었을 뿐이다.
지극히 단순했던 소로가 몰려드는 발길들에 의해 넓어지고 갈래
갈래 나뉘기도 했다.
2관문 아래에 서있는 연대 미상의 한글판 <산불됴심> 석비(지방
문화재자료 제226호)를 제외하면 금의환향길, 장원급제길 등 갖
가지 이름의 설명판은 관광홍보 차원의 최근작들이다.
1/鳥嶺關(1관문) 2/동화원 3/鳥谷關(2관문) 4/산불됴심비
5/교귀정 6/조령 원터 7/선정비석군
늘 그랬듯이 소로만을 고집해 동화원 휴게소에서 손두부와 좁쌀
동동주로 아침겸 점심을 대신했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上草)山, 옛동화원(桐華院) 지역으로
충북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 신혜원과 10리 어간의 원터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인녀 김애란은 황병주를 추모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려진 것과는 다른 증언을 했다.
남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사심 없이 돌봐준 황병주는 조령 관문
지역에서 고마운 이웃 아저씨, 형님, 오라버니로 각인돼 있단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아직껏 애도하는 듯 했다.
유명을 달리한 그 여름의 그 날 밤에도 내방한 친구들과 장시간
대작한 후 새재 입구까지 배웅하고 올라오던 길이었다고.
과음했기 때문에 오토바이도 버리고 칠흑의 밤길을 걸었다는데
2관문(鳥谷關) 앞 급커브 다리에서 실족하여 변을 당했다는 것.
차라리 오토바이를 탔더라면 전조등의 길안내를 받아 무사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재 한 귀에서 악의없는 너스레를 떨며 길 안내를 하던 황병주,
호구조사 하듯 가가호호를 기웃거리면서 문경 관문의 맥가이버
(MacGyver)를 자처하며 신뢰와 화목을 도모하던 그,
김애란은 그에 대한 추모를 이렇게 표현했다.
갈 길이 바쁘기도 하지만 황병주 생각에 자꾸 더 침잠되어 가는
듯 해서 일어섰다.
신구관찰사의 교인처인 교귀정(交龜亭), 조령원, 선정비석군 등
1관문(主屹關) 한하고 영남대로의 옛자취들이 즐비하다.
관문은 사적147호로 지정되고 일대는 도립공원으로 승격했다.
그런데 오로지 주흘산, 부봉, 조령산과 대간 등 산에만 올인할 땐
전혀 안중에 들어오지 않던 그것들이 영남대로의 길손이 되니까
비로소 완전히 클로즈업(close-up)되고 있다.
관심의 심리학을 좀 더 파고들어야 하려나 보다.
1/主屹關(1관문) 2/문경사과축제
청운각(靑雲閣) 유감
제 2회문경사과축제로 북적거리는 1관문을 빠져나옴으로서 조령
권을 벗어났다.
그래도 축제 분위기는 중초리 노상까지 이어지고 있는가.
충주 이류에서 처럼 노상 판매대에서 사과 1개를 깎아 먹었다.
그러나 사과값 받기를 한사코 거부한 주인은 도리어 배낭에 넣고
가다 먹으라며 더 내놓았다.
낙남정맥 진주 정촌면의 해봉농장 주인 제해용이 그랬는데.
충주와 문경의 인심차일까 사람 나름일까.
충주인심에 대한 이중환의 박한 점수(택리지)가 문득 생각났다.
조령천을 끼고 하초리, 진안리(陳安)로 나왔다.
이화령터널을 빠져나온 3번국도 앞에서 문경읍내로 틀었다.
대동지지가 초곡(草谷:主屹關)에서 곧바로 마원리(馬院)로 가는
지름길(馬浦院十里不入聞慶而直行)을 제시했음에도(현3번국도)
굳이 그랬다.
문경은 가는 곳마다 추억과 사연이 뭉치뭉치 쌓여 있다.
욕심 많게도 빼어난 산들은 물론 백두대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것으로는 모자라다는 건가.
문경읍 상리 문경초등학교 앞을 걷는 중이었는데 청운각(靑雲閣)
이라는 현판에 비해 초라한 집이 내 시선을 뺏어갔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1937년 4월부터 만주군관학교에 가기 직전인
1940년 3월까지 문경 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그 때의 하숙집이란다.
이 집을 1억 3천만원의 시비(市費)로 보수한단다.
기리는 마음이 거시적으로(擧市) 얼마나 간절하면 그러겠는가.
이 지역의 정서가 단적으로 읽혀지는 케이스(case)다.
그런데, 생가도 아니고 단지 일정기간 하숙했을 뿐인 이 초가가
그렇게도 보존 가치가 있는 집일까.
단 한번의 교사생활을 한 학교와 하숙집이라는 유일성 때문일까?
하숙집 이상의 특별한 관계라도 있어서 그러는가.
공적(덕)비, 선정(덕)비를 비롯한 각종 비석군과 각가지 각(閣)의
건물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편재해 있다.
석연찮은 경우들이 적잖지만 그 판단은 공정하고 공평한 역사에
맡기고 나는 그냥 칭송의 미덕이려니... 봐준다.
그 역사의 판단이란 모든 이해 당사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때에 비로소 공정성과 공평성이 보장되니까 일정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문경의 찜질방
문경읍은 현청(縣廳)과 영남대로의 객관(院)이 있던 곳이다.
1949년까지도 군청과 경찰서 소재지였다.
도요지의 명성 못지 않게 지금은 온천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중심권을 벗어나 땅거미가 질무렵 마포원(馬浦院)이 있던 마원리
버스정류장에서 하루 일과를 마감했다.
마원리는 문경읍의 최남단이며 마성면(馬城)의 접경이다.
한양으로 가는 교통 요지이며 출장 관리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말을 많이 길렀다는 곳이다.
점촌행 버스에 올랐다.
문경읍엔 찜질방이 없기 때문에 시청소재지까지 가야 했으니까.
버스 기사의 자상한 안내 덕에 고생하지 않고 찾아갔다.
점촌동의 문경건강랜드.
실은, 작년 추석 직전에 대간 부봉의 어이 없는 사고로 거동할 수
없게 됐을 때 천신만고 끝에 점촌까지 와서 3일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참숯가마 삼백집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점촌과 함창읍(상주시)의 경계지점이라 새벽 버스사정을
감안하여 여길 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찜질방 식당의 비빔밥은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으로는
지금껏 먹은 것중 최고였다.
고백컨데 나는 경상도 음식을 평하는데 매우 인색했다.
그런 내가 경상도 비빔밥을 거의 단숨에 뚝딱 먹어치운 것이다.
그 까닭을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이 하룻동안 먹은 것이라곤 200ml우유 한팩, 동화원의 손두부 한
모와 동동주 반되, 중초리의 사과 한개가 전부였으니까.
아무튼, 그동안의 야박한 점수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었다.
다시 먹을 때 '도로묵'을 뇌까리게 될 망정.
이 찜질방에는 메트리스는 없고 이불을 유상 대여한다.
그러니까 이불 대여율을 높이기 위해 메트리스가 없다?
이같은 미시적 상술은 고객을 왕으로 받드는 현대 경영의 적인
것을 아직껏 모르고 있단 말인가.
소비자의 불평은 사고의 원인이며 고객의 불만과 사업의 성공은
반비(反比)관계인 것을.
점촌의 찜질방은 도시 발전 속도를 추월하는가.
3년 반전 백두대간 남하때 산양면 차갓재에 오르기 위해서 점촌
찜질방을 이용한 적이 있다.
그 때, 한 밤중에 도착하여 묻고 물어 찾아간 찜질방은 대중탕을
대충 개조해 어설펐는데 그나마도 점촌의 유일 명소(?)라 했다.
한데, 겨우 3년 남짓한 사이에 여럿으로 늘어났다니까.
점촌 시민들이 찜질효과에 더디게 눈을 떴다는 뜻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