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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 곽씨의 십이정려각(十二旌閭閣)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 즉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 (夫爲婦綱)을 잘 지키면 이를 국가에서 포상하여 기리도록 하였다. 현풍 솔례 마을 현풍 곽씨 가문에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삼강(三綱)을 지킨 28인의 정려비로 선조31년(1598년)부터 영조 때 까지 一門三綱 등 포상된 12각이 나열 되어 각 건립 연대는 다르나 영조 때에 한 곳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던 조선시대에 가문마다 충신, 효자, 열녀를 선정 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세금을 감해 주는 특전을 주었는데 한 고을에 하나의 정려를 세워도 삼강오륜을 기본적 가치관으로 삼았던 그 당시에는 해당 가문은 물론 그 고을의 자랑 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한 고을에, 한 가문에 12 정려가 내려진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할 뿐만 아니라 역사성과 정신적인 의의를 고려한다면 중요한 민족사적인 유산이다. 12정려각은 1990년 8월 7일자로 문화재 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고 소재지는 경북 달성군 현풍면 지리(솔례) 1348-2호, 규모는 173평, 건물1동, 정면 12칸 측면 2칸의 주심포 집으로 팔각지붕이며 내부에는 2기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일문삼강(一門三綱) 충신 곽준(郭䞭 1551-1597)은 안음현감(경남 함양군 안의읍)에 재임 중 정유재란 (丁酉再亂)이 일어나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왜군(倭軍)인 가등청정(加藤淸正) 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함 - 임금을 위해 전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忠 ” 이며 따라서 ⌜충신증이조판서행안음현감충렬공곽준지각 忠臣贈吏曹判書 行安陰縣監忠烈公郭䞭之閣⌟이라 정려가 내려졌으며 公의 장자 이상(履常), 차자 이후(履厚) 형제는 피투성이 된 아버지를 붙들고 적과 싸우다가 형제 모두 전사함. 이때 아버지가 “나는 국록을 먹는 사람으로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싸우지만 너희들은 피하라”고 하였으나 형제는 “아버지와 같이 싸우겠다”며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함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전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孝”이며 따라서 ⌜효자증호조정랑곽이 상곽이후지각 孝子贈戶曹正郞郭履常郭履厚之閣⌟의 정려가 내려졌으며 곽준의 자부(子婦)인 장자 이상의 처(妻) 거창 신(愼)씨는 남편과 시동생이 나라와 아버지를 구하려다 비참하게 화를 당한 그 참상을 보고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 그 자리에서 칼로 자결하였으니 이것이 곧“烈”로⌜열부 증정랑곽이상처공인거창신씨지각 烈婦贈正郞郭履常妻恭人居昌愼氏之閣⌟의 정려가 내려졌다. 곽준의 장녀인 유문호의 처는 친정 일가의 그 끔찍하고 비통한 변고에도 남편 때문에 죽지 않았으나 남편이 적에게 잡혀 살해당하자 바로 따라 자결하였다 이것은 바로 효열부(孝烈婦)로⌜열부학생유문호처유 인포산곽씨지각 烈婦學生柳文虎妻孺人苞山郭氏之閣⌟의 정려가 내려졌다. 선조께서는 위와 같은 충신 곽준 일가의 놀라운 사실들을 듣고 “놀랍도다 부사어충(父死於忠)하고 자사어효(子死於孝)하고 부사어열(婦死於烈)이라 이것은 유사이래 유일무이한 일이로다“ 하면서 친히 ”一門 三綱“을 내리셨다.
효자각 (四孝子閣) 宣祖 祖 곽재훈의 아들 결(潔), 호(浩), 청(淸), 형(泂) 4형제가 임진왜란 당시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비슬산 암굴 속에 피난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해수 기침 때문에 왜적에게 발각 되어 왜적들이 큰 칼로 아버지를 해치려 하자 아들 4형제가 아버지 대신 “나를 치라”고 하면서 번갈아 아버지 앞을 가로 막다가 그만 4형제가 모두 그 자리에서 몰살 되었다. 왜적도 사람인지라 그 아들들의 효성에 감동하여 부친 곽 재훈의 등에 “四孝子之父”(네효자의 아버지)의 패를 달아 돌려보내니 다른 왜적들도 등의 패를 보고 해치지 않았다. 이는 효(孝(효)의 표본으로 ⌜효자유학곽 결곽호곽청지각 孝子幼學郭潔郭浩郭淸之閣⌟의 정려가 내려졌다. *효자각에는 결, 호, 청 3형제만 있으나 이는 당시 예조에서 잘못으로 빠뜨려 졌다. 현재 비슬산 그 암굴에는 “四孝子窟”이라고 새겨져있다.
양효자각(兩孝子閣) 광해조 곽주(郭澍)의 次子 의창(宜昌), 三子 유창(愈昌) 두 형제는 의창 5세에 아버지가 병석에 누우시니 밤낮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지극정성으로 간호 하고 시중을 들었으나 불행이 상(喪)을 당했다. 상주 노릇하는 것이 어른도 못 따를 만치 조객영접이며 곡읍(哭泣)하는 것이 옛날 한(漢)나라 서유자(徐儒子)의 고사(故事)와 같았다고 탄복했다. 동생 유창은 겨우 3살 이지만 그 행실이 형을 따라하니 출천지효라고 아니 할 수 없었다. 이 어린 두 형제에게 나라에서는⌜장원서별검 掌苑署別檢⌟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효자증별검곽의창곽유창지각 孝子贈別檢郭宜昌郭愈昌之閣⌟의 정려를 내리셨다.
절부(節婦) 선조조 곽재기(郭再祺)의 처 광릉이씨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위기를 느껴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몸을 깊은 강물에 던져 익사로 수절(守節)하였다. 나라에서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광릉이씨에게 ⌜절부계공랑 곽재기처유인광릉이씨지각 節婦啓功郞郭再祺妻孺人廣陵金氏閣⌟의 정려를 내리셨다.
열부(烈婦) 현종 조 곽홍원(郭弘垣)의 처 밀성 박씨는 어느 날 밤에 도적이 들어와 칼로 부군을 위협하니까 부군의 앞을 가로막고 악을 쓰며 도적에게 덤벼 부군을 구하고 자기는 그 칼에 맞아 죽었다. 죽기 전 마지막 임종 때“ 그대를 구하였으니 나는 기꺼이 눈을 감겠다“ 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열부 밀성 박씨에게 ⌜열부학생곽홍원처유인밀성박씨지각 烈婦學生郭弘垣妻孺人密城 朴氏之閣⌟의 정려를 내리셨다.
열부(烈婦) 현종조 곽수형(郭壽亨)의 처 안동 권 씨는 시집 온지 1년이 못되어 부군이 병으로 눕게 되자 부인은 주야로 간호하고 기도 했으나 끝내 부군을 여의니 엄숙히 장례를 치르고는 남편 따라 죽기로 마음먹고 식음을 전폐하여 자액했다. 나라에서는 안동 권씨에게 ⌜열부학생곽수형처유인안동권씨지각 烈婦學生郭壽亨妻孺人安東權氏之閣⌟의 정려를 내리셨다.
열부(烈婦) 영조조 곽내용의 처 전의이씨는 어릴 적 효경을 익혀 효성이 지극했다. 곽 내용과 혼사 후 신행 전에 부군의 부음을 받고 분곡(奔哭)하면서 시가(媤家)로 급행하는데 딸의 거동이 예사롭지 않아 와병 중인 친부(親父)가 급히 사람을 보내 딸을 불러놓고 “이미 내 병은 중태로 살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앞에서는 죽어서는 안 된다“ 하고 호된 꾸중을 하니 이씨는 다시 시가로 와서 누구와도 면담함이 없이 겨우 연명만 하고 있다가 4개월 쯤 되어서 친부의 부음을 받고 그 때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끝내 자진(自盡)하였다. 열녀이면서 친부의 호된 꾸중을 받들어 실행한 효녀이므로 효열부(孝烈婦) 이다. 운명 후 시신을 염습하였는데 자리 밑에서 규방가사일폭(閨房歌詞一幅)이 나왔다. 이것이 유명한 전의이씨의 ”절명사(絶命詞)“이다. 상여가 부군 묘 앞에 이르니 부군 봉분이 스스로 갈리는 기적이 있어서 합장하였다. 나라 에서는 전의 이씨에게 ⌜열부학생곽내용유인전의이씨지각 烈婦學生郭乃鎔 孺人全義李氏之閣⌟의 정려를 내렸다.
효자(孝子) 곽문만(郭文滿)의 아들 경성(景星)은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부친이 병석에서 고기회를 먹고 싶다하기에 때가 엄동설한인데도 호수의 두꺼운 얼음을 깨고 월척의 오어(烏魚가물치)를 낚았다 천출효자의 기적이다. 그것으로 시탕봉양(侍湯奉養)하니 부친은 지극 정성의 간호에 쾌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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