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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동댐으로 둘러막힌 가장 오지인 안동의 정산마을에서 꼭꼭 숨어서 살고 있는데,
내 삶이 어디론가 자꾸 새어 나가는 모양이다.
대전에 있는 광수사 주지스님께는 전혀 소식도 못 전하고 지냈었는데,
금년 초에 내가 딸을 시집보낸 것까지 아시고
이번 참에 광수사에 와서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이야기해 달라고 하셨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밤낮이 바뀐 정돈되지 않은 삶으로 별로 미래를 꿈꾸지도 않고 사는 내가
어찌 그 많은 불자님들 앞에서 희망의 삶을 말할수가 있겠는가?
숨어 사는 데는 도사가 다 되었지만, 도저히 남들앞에 나서는 건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경천스님에게 말했지만 스님은 괜찮다고,
다 할수 있다고, 염려말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건 나를 위한 일방적인 요구였다.
거절할 수 없는 한가닥의 길 앞에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잡혀있는 날짜까지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그러니까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기꺼이 내가 헤쳐나가야만 할 관문인 듯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영광스러운 자리인 것도 같았다.
잘 해내지 못해도 내 인생은 타고난 그대로의 내 인생이 아닌가!
마음의 결정을 하고 약속한 그날을 기다려 맞이했다.
3월2일. 일요일 흐림 황사.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 중에 인구형이나 진균이가 시간이 되었으면 함께가려고 했었지만,
각자 다른일들이 생겨서 차량봉사는 장애인 활동보조인으로 정했다.
오후2시 집에서 출발한다고 경천스님에게 전화를 하니,
경천스님께서는 마침 구인사에서 나오는 길에 예천에 들려
서예의 대가로 알려진 권창륜 선생님께 서예를 배운다고 하시면서 예천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그래서 3시쯤 예천에 도착하여 공항휴게소에서 경천스님을 만났다.
매우 반가웠다.
경천스님께서는 그랜저 승용차에 전용기사를 두고 전국을 다니시며 업무를 수행하는 모양이었다.
휴게소에서 우리 활보인 차도 가스 만땅 채우고 새차까지 한 끝에
스님께서 사주시는 음료를 마시고 네비게이션 필요없이 스님의 차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초행길이라 인터넷 지도 검색과 네비까지 준비했었는데,
가는길에 스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는 점촌 나들목에서 중부내륙 고속도로에 올라 남상주까지 달렸고,
거기서 아직 표시되지 않은 청원까지의 새 고속도로를 따라갔는데,
속리산을 넘어가는 동안 일기예보에서 그랬던 황사가 짙게 끼어 온 세상이 뿌옇게 보였었다.
처음 예상한 길은 김천으로 해서 경부고속으로 대전까지 올라가려 했는데,
새 고속도로가 있어서 따라간 것은 남상주에서 청원까지 였고
거기서 경부고속으로 신탄진 북대전, 그리고 호남고속으로 연결되어 유성 나들목에서 내렸다.
활보인이 운전을 잘 하여서 놓치지 않고 스님이 탄 차를 계속 따랐기에
대전 유성구 계산동에 있는 광수사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광수사는 계룡산 초입. 대전 사람들께 잘 알려진 수통골 입구에 위치해 있었다.
절 앞으로는 한창 도시개발을 하느라 길도 막아 놓았지만 광수사는 3층 건물로 그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장애인 편의시설이 되지 않은 절이었다. 입구부터 여러개의 계단이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함께간 아내와 활보인의 도움으로 겨우 계단을 올라 절 건물로 들어섰고,
스님의 안내에 따라 2층의 외부 손님접대용인 듯한 비구니스님방으로 올라가는데도
여러개의 계단을 용을 쓰며 올라갔다.
내 힘이 왜 이렇게 빠졌을까? 속으로는 참 속상했다.
나도 계단 서너개씩을 건너뛰며 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
간격좁은 이 계단마져 스스로 걸어 오르기가 이렇게 힘이드니...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지내야 할 숙소인 비구니 스님방을 배정 받고
짐을 풀어 놓은 뒤에 곧바로 3층에 있는 법당으로 올라가 부처님 불상앞에 인사를 드렸다.
법당 한가운데 모셔져 있는 큰 3존불 가운데 비로자나 부처님이 있는데,
그 불상에서 2000년도에 우담바라가 피어 아직도 있다고 했다.
한때 그것은 TV나 각 언론매체를 흥분케 하기도 했었는데,
알고보면 식물성 꽃이 아니고 곤충류의 알로서
불상 팔꿈치에 꼭 꽃모양으로 생겨나서 애피소드를 만들었던 이야기다.
아무튼 전설아닌 그런 일이 있었던 절이고
믿는이들은 아직도 광수사 부처님의 신통력을 믿고 있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을게다.
그런데도 나는 먼저 상월대조사스님 진영앞에 삼배를 올렸다.
그것도 이제는 맨바닥에 엎드려 절하고 일어서지 못하니까 선 체로 합장하여 삼배를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법당의 불상앞에서도 절을 이쁘게 하는데...
나는 그렇게 인사하고 법당 천장에 잘 진열된 연등을 감상하고 벽화 탱화를 둘러보다가 숙소로 내려왔다.
숙소에는 방도 넓직하였고 이불도 꽤 여러채 장롱속에 간직되어 있었으며,
TV와 냉장고, 에어콘, 찻물끓이는 전기포트와 다기셋트, 향을 피우는 향로와 향까지
그리고 냉장고 속에는 몇가지 음료도 준비되어 있었다.
모르긴 해도 호텔 수준일 것 같았다.
그런 방에 정을 붙이기가 무섭게 그 절의 신도회장님과 총무님을 불러서 인사를 시켜주신 뒤에
절에서는 저녁을 일찍 먹는다며 오라해서 6시쯤 되었을 때 향도방이라 이름붙여진 방으로 가서
동태찌게가 곁들여진 여러 나물 반찬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었고,
따라나온 몇가지 과일도 후식으로 맛보았다.
아내는 늘 손수 손님대접 밥상을 차리기만 했지 받아보기는 드물어서인지
이런 대접이 처음이라며 아주 좋아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다시 비구니스님방으로 돌아오니 스님께서는 아무 걱정말고 편히 쉬라면서 나가셨다.
그때 활보인 장록씨도 예전에 가 봤다면서 유성온천에 목욕하러 가고
아내와 난 잠시 쉬다가 절 2층에서 경내를 조금 구경했다.
한 두시간 그렇게 지났을까 경천스님께서도 온천에 다녀오셨다며 거기서 장록씨를 보았다 했다.
나도 관광차 가보고 싶었지만 대중 온천탕을 즐기기엔 건강이 무리여서 아예 나서지를 않았다.
그리고 스님께서 내일 11시 정기 법회 시간에 법사스님이 안 계시니
주지로서 나를 소개해 줄테니까 간단한 약력 같은걸 적어 달라하고,
내 시간에는 40분정도 그냥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을,
아내가 꿈을꾼 사연까지 이야기하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다가 장록씨도 돌아왔고,
앞서 대전에 계시는 카페에서 알게된 아카시아 전승우님께도 연락해 놓았더니 잘 찾아와서
함께 주지스님방으로 가서 스님의 서예 실력과 연습한 작품 등을 감상하고
수없이 많은 감사패와 임명장, 기증받은 서예작품, 손수 쓰신 서예작품, 출판한 4권의 책등을
둘러보는 사이에 전승우님께는 스님께서 직접쓰신 대상받은 서예 습작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옛부터 스님이 참 스승이었고,
국사, 왕사, 법사등의 스승의 가르침을 만 백성이 받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교회에서는 스님이라 호칭하는 것까지 왜 "님"자를 붙이느냐고 따진다고 하셨다.
그런 말씀과 함께 한문학의 필요성과 스님의 위치에 있자면 늘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이야기 끝에 나는 불자로서 그 많은 팔만대장경 중에 필수로 알아야할 경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했더니 경천스님께서는 반야심경외엔 천수경이면 족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스님께서 서예를 배우는 까닭과
김정동 형님께서 영남대 한문학과에 다니며 함께 동문수학하는
현 우리나라 서예의 대가이신 예천의 권창륜 선생님에 대한 말씀도
기증 받아 걸어놓은 표구 작품의 글씨체를 예제로 하여 설명해주셨다.
그런 잠깐이지만 사실적 경천스님의 삶의 공간에서
그 묵향을 흠뻑 마시며 스님의 일상을 생생하게 보고 배웠다.
그 순간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맘속 깊은곳에서 용솟음 쳐 올랐다.
그렇게 11시 가까이까지 스님의 말씀을 듣다가
다시 우리 숙소로 돌아와서는 준비된 차를 우려마시고
우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시쯤 되어 전승우님 돌아가고
내일 사촌여동생 피자가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대전에 사는 사촌 순옥이와는 통화를 하여 내일 가게에서 보는 걸로 약속하고
이불을 펴고 잠을 청했으나 밤낮이 바뀐 내 생활습성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잠이 오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뒤척인 끝에 겨우 잠들수 있었다.
3월 3일 월요일 맑음. 광수사 정기법회
아침 7시 10분쯤에 일어났다.
세수도 하기전인 7시 30분에 아침공양을 드시라며 오라해서 가보니
절에 계시는 스님들은 목욕을 가셨다면서
미역국과 무우국을 끓여 밥상을 정갈하게 차려놓고 권하기에 우리들만 먼저 가서 먹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가보니 따뜻한 비데 좌변기가 설치되어 있어
신기한듯 한참동안 사용하면서
더운바람과 물줄기의 감미로움을 반복하여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세면 시설도 꽤 수준급이어서 샤워를 할까 하다가
내 건강을 되짚어 보고 그냥 세수만 하고 말았다.
그런후 미리 미리 준비를 다 해 놓아야 법회 시간에 실수를 덜 할 듯 하여
이야기의 요점도 메모를 하였고,
또 경천스님으로 하여금 어떤부분을 강조해서 이야기하라는 조언도 귀담아 들었다.
그렇게 스님의 뜻을 따르는게 이 영광된 자리에서 내 할일이라 여기며
생각을 고쳐 맘속으로 이야기할 부분들을 설계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다가옴에 긴장되기도 했지만,
어차피 때워 넘겨야 할 내 시간인 것이라 마음을 안정시켰다.
10시쯤에 다시 스님방에 가니까 경천스님께서는 친필로
이명박 대통령의 새해 휘호였던 時和年豊을 써주시고,
내 한자이름을 물어 權五雄 불자에게 건승을 빈다는 스님의 뜻을 적어 주심에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덤으로 百壽百福이라 쓴 작품과
상월원각대조사 스님의 법어인 서예작품도 선물로 받았다.
또 활보인한테도 운전경비라며 봉투를 주시고,
법회 마친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받으라고
절 총무님에게 일러 봉투를 주셨는데 매우 두둑하였다.
난 그런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사양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서 그냥 받아두었다.
그리고 스님 방에서 나와 11시 법회시간에 맞춰 3층 법당으로 올라가니
그새 대전의 광수사 신도들이 큰 법당을 줄을 맞춰 꽉 채우고 앉아 있었다.
어림잡아 600여명 정도 되어 보였다.
조사스님 진영앞에서 선채로 삼배를 드리고
아내의 도움을 받아가며 잘 정돈된 불자님들 앞으로 가서
신도회장님의 안내로 내빈석에 앉았다.
그런 자리는 평생 처음이라 앉아 있어도 몸둘바를 몰랐다.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듯 하여 바로 보지도 못했다.
그런 과정 끝에 이윽고 법회는 시작되었고,
삼귀의례에 이어 반야심경 독송과 상월원각대조사님 법어 낭독이 있은 다음
신도회장님의 개회 인사에 이어 합창단원들의 청법가가 불려졌고,
주지스님인 경천스님께서 인사말씀과 더불어
이번 법회는 법사스님들의 안거시기라 따로 모시지 못하고,
지극한 믿음으로 부처님의 가피력을 한 몸에 받은 나를 대신 불렀다면서 소개를 잘 해 주셨다.
그리고 내게 나와서 이야기 하라고 하시는데,
막상 앞에 나가서 마이크를 대하고 보니
나는 어디서부터 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첫 인사부터가 어리둥절 했다.
이미 스님께서 내 소개를 너무 자세하게 말씀해 버려서
그것을 재차 말 하기에는 꼭 중복되는 이야기 같았다.
그렇지만 어떻해.
별로 잘 하는것도 없는 저를 대전의 큰절 광수사에서 불러 주셔서 매우 영광스럽다고 인사를 하고,
어릴때의 어려운 가정사와 구인사에 가게된 동기,
그 어려움과 근육병으로 인하여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을 했는데,
그때도 구인사로 향했다가 되돌아와 객지생활을 하며 중국집,가구점, 제과점, 버스계수원등.
도시의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던 퇴계원 철교에서 죽음을 실험할 때,
상월조사스님께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면 죽지않고 열심히 살겠다는 각오를 했었기에,
그때 죽지 않고 살아 남아 서울에서 마지막 객지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 올수 있었으며,
고향 안동으로 귀향해서는 말못하시는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며 열심히 산 끝에,
영농수기 "참깨가 쏟아지는 땅"을 쓸때 부처님께 염원했던
"이 글로 하여금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구한다"는
그 일이 신통하게 이루어져 지금의 저 아내를 만났는데,
그때 여동생도 관세음보살 백만번을 부르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관음정진을 1년정도 한 그날. 바로 지금의 저 아내가 온 날이라고,
그 말을 하는 순간 웬 눈물이 막 쏟아지던지...
이야기의 흐름이 꽉 막혀 버렸다.
그래도 신도님들은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아내가 꾼 그 꿈 이야기를 아내로 하여금 직접 들으라고 아내에게 마이크를 넘겼는데,
아내도 역시 사설이 좀 길었지만 내보다 더 또렷이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내가 나서서 그 이후의 봄날같은 내 삶의 이야기를 하는데,
내 스스로가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 속으로 되돌아가 감정의 혼란이 일었다.
그러니 처음 생각했던 이야기와는 달리 딸 낳고, 아들낳고, 그 이름 구인사에 가서 짓고, ...
1993년 아내의 교통사고와 그해 내가 해낸 일들...
그리고 샘터사에서 올해의 인간승리상을 받고,
그 인연으로 구인사 박덕수스님의 눈에 띄어 구인사에서 하계 청년수련회에 강연을 했던것 등.
이야기를 하는사이 자꾸 세세한 부분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습성으로
엉뚱하게 시간을 끌다 보니 딸내미 시집보내는 과정은 전체적으로 요약해 버렸다.
그런데 자주 박수를 받았지만, 내 눈물이 반쯤은 섞인 까닭으로
열심히 사는 과정 끝에 -그래서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산다- 라는 결론은 흐리게 얼버무린 것 같았다.
그래도 메모해간 그것들을 모두 소화해 낼려고,
점점 잃어가는 건강으로 시골학교에서 80여명의 어린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친 것과
정심을 바탕으로 주어지는 현실을 거부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서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금춘가족지를 발행하여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는 것,
또 금춘카페도 개설하여 관리하며,
한마음 항상 깨끗하면 어디서나 연꽃이 핀다는
조사스님의 법어처럼 때묻지 않고 깨끗이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궁극적 목표는 인류의 행복을 완성하려는 목표로 산다고
그렇게 열심히 사니까 모든일이 순조롭게 이루어 지더라는
그 모든게 부처님의 가피력인 것 같다라는 그런 이야기를 정신없이 해댔는데,
때때로 박수가 쏟아지기는 했어도 전체적으로 두서가 없고 명료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점수로 매기자면 60점 주기가 어려울 것 같은 내 스스로의 평가다.
그래도 주지 스님께서는 웃으면서 잘했다고 격려해 주시니 그만한게 다행일까?
그렇게 내 이야기는 두서없이 마쳤는데,
법회가 끝나면 복잡하니까 먼저 내려가서 식사를하라고 권유해서
2층으로 내려왔기에 법회의 뒷 마무리는 어떻게 끝이 났는지 알수가 없다.
사홍서원을 해야 법회를 마친다는 걸 나는 아는데...
그렇게 내가 2층으로 내려온 뒤 곧 법회가 끝난 모양이었다.
귀빈들을 대접하는 방에서 점심 식사를 하려는데,
법회에 참여했던 그 지방 내빈들이 자리를 함께 했으니까,
그 중엔 장애인불자회 회장님도 계셨고...,
난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내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점심 공양을 먹을때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몫은 먹었고,
자료로 갖고간 금춘지와 책 몇권은 신도회장님에게 넘겨주고,
한국장애인 불자회 회장님 김춘두님의 명함만 하나 받았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나니, 경천스님께서도 곧 다른 곳으로 일 보러 간다하시고,
나도 다른 낯선이들과 교류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우리는 광수사 현관 밖으로 따라나와서는 경천스님과 기념 사진 몇장 찍고
우리도 다음 약속지인 대정동 사촌여동생 피자가게를 찾아 광수사 절을 빠져 나왔다.
운전 도사라는 활보인도 때론 헷갈리는 모양이다.
내 짐작으로 이정표를 보며 서대전 나들목쪽으로 가면 된다고 했는데,
유성 시가지 쪽으로 길을 잘못 들어 한바퀴 돈 뒤에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여 내가 찍어간 대정드리움 1단지를 쉽게 찾았다.
이미 광수사에서 나올때 전날 만났던 아카시아 전승우님이 폰통화를 해서 피자가게서 만나기로 했기에
우리가 도착하니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날 쿨피스 동생과의 이야기도 있었던 터라
전승우님도 남 같지가 않게 사촌 여동생 순옥이를 만난 자리에서
그간의 안부와 대전 사람들의 느림의 미학과, 대정동의 도시개발 사항과
피자가게의 경영 실태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한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동생이 구워주는 피자 3판을 마련하는 동안 기념 사진도 좀 찍어 두었고,
배달갔던 269번 강병규 매부도 반갑게 만나 악수로 인사를 했다.
그렇지만 술판을 벌일수도 없는 사항이라 동생네와 전승우님과도 다음을 약속할 수 밖에 없었고,
전승우님께서 미용재료중 가정에서도 사용하는 삼푸와 오일등 몇가지 제품을
선물로 주시기도 해서 고맙게 받아왔다.
뜻하지 않았던 일로 대전을 가게 되면서 카페의 인연을 그렇게 반갑게 만났던 것도 참으로 큰 행복이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오래도록 잊지못할 것이다.
여동생 가게에서 헤어진 뒤 우리는 갈때와는 반대로 서대전 나들목으로 해서
대전 시가지 남부를 돌아 비룡 나들목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접했고,
옥천, 금강, 추풍령을 지나 김천까지 가서는 중부내륙으로 선산휴계소에 들렀다가
상주, 점촌으로 빠져 나와 국도를 타고 안동까지 왔다.
안동 와서는 기성이를 보기도 할겸 신토불이 동생네 식당에 가서
오랜만에 갈빗살과 등심으로 8만원짜리 비싼 저녁을 먹었고,
활보인이 광수사에서 받은 봉투가 5만원이라기에 도로비 1만원 보태서 6만원을 더 주었다.
그리고 아들 친구 환국이와 함께 소주 몇잔을 건배하여 마시니,
광수사에서 뭔가 2% 부족했던 마음이 싹 가시고,
세상사 모든게 자신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루 전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술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 기분 좋은 취기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발이 날리니
그 또한 접어뒀던 감성을 일렁이게 하는 3월의 눈이었다.
일찍 핀 매화꽃에 저 눈이 쌓이면 그것이 설중매가 아닌가!
새벽녁까지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따뜻한 누울자리가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말이다.
~~★ 이 상 ★~~
3월2일부터 3일까지 대전 광수사 법회를 다녀오면서
행해진 카페지기 권오웅의 여행기였습니다.
긴글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아..감동입니다 잘다녀오셨군요 마니 피곤하시죠 글을 어찌나 생생하게 잘 쓰시는지 제가 옆에서 보는것 같아요 *^^* 수고하셧어요 언제 장애인 불교인과의 만남이 있는날에 함께 동참하고 싶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길 빌어요..*^______^* 씨익
흔적의 글로도 감동을 먹는군요. 감사합니다. 장애인불자회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날 특별히 그분들이 오셨더군요. 혹 연락되어 만남의 기회가 있으면 꼭 이쁜천사님을 모시겠습니다.
긴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눈앞에 그려지도록 잘써주셔서 술술 읽었습니다. 참 좋은 추억을 이야기하셨고, 좋은 추억을 만드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선생님, 끝까지 술술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 쓰는시간이 차타고 대전까지 갔다가 오는 만큼 걸렸습니다. 그만큼 저에겐 추억도 길게 남겠지요.
우~와~~~ 정말 감동먹었습니다. 같이 참석한듯 눈 앞에 선한 현장 풍경과 실감나는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알콩 달콩 자세히 써 주셨어. 감동과 설레임으로 잘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를 발판삼아 한 단계 더 발전하는 햇살아우님이 되시길 바라면서 긴글 쓰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이슬누님. 제 삶의 진솔함이 남들에게 감동이 된다는게 행복하군요. 물질로 갚지 못하는 은혜 한 줄 글로서 보답해야 하리라 다짐합니다.
가슴깊은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맨날 행은 없고 말만 하는 스님들 법문만 들었던 광수사 신도 들에게는 아마도 적지않은 감동을 주었을 겁니다 .탐 진 치에 찌들은 뭇 스님들 에게 는 아마도 부처님의 큰 경책으로 들렸을 겁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그랬을까요? 스님들의 근무태만이 부처님의 경책으로 다가왔을까요? 내 삶조차 부끄러운데, 어찌 감히 스님들을 꾸짖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면 나도 폭포수 아래 앉아 깊은 심신의 수련을 쌓아야 하는데요. 아무튼 좋게 평가해 주시는 경남형의 참된 마음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넘 감사히 잘보았습니다 아마 다음에는 울애들과 함게 함놀러갈게요 언제나 건강 하시구아름다움만 간직 하소서
고맙습니다. 아카시아님... 만날때까지 늘 행복하십시요.
광수사 법회 다녀온 소감잘읽어내 참으로 대단하구나 그리고 장하구나 많이배우지도못했으면서도 고등교육을 배운사람 못하잔캐척척 맡은봐 모든일을 해내는동생이 말일세 주어진일은 무엇이라도 막겨만주면 다할수있는데 뭐한자리 안시켜주나 함께가지않아도 자세히 기록해서 훤히본것같으내 수고하고 애써내 우리는 부처님가피력 많이받은사람들이라 더더욱정진하여 부처님가피력을 보여줘서 많은사람들이 믿어행하게해야한다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