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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是我讀(“나는 이렇게 읽었다”의 뜻)
〖6~7월에 읽은 책들〗
강남국 읽음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오강남․성해영 대담집 북성재 刊
한국의 종교가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가 언제부턴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가 잘못된 세상을 걱정하고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텐데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했으니 어이할꼬? 이제는 급기야 세상이 한국의 종교를 걱정하는 최악의 단계에 까지 이르고 말았다. 아주 단적인 예로 내 주변만 하더라도 기독교를 버리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솔직히 오늘날 기독교는 이제 그 본연의 역할은 고사하고 사람들의 걱정을 넘어 점차 처치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성경에도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길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라고 했는데, 세상에 그 말이 바로 기독교를 두고 하는 말이 됐으니 이 참담함을 어찌 할꼬!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명색이 기독인으로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이 책은 그동안 숱한 저서를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호소해온 오감남교수와 그의 제자 성해영박사가 나눈 대담집이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솔직히 처음으로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라는 이름도 생소한 말의 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주 쉽게 말해서 <표층종교>란 종교에 대해서 아주 낮은 차원의 지식이나 믿음을 말하는 것이고 <심층종교>란 종교의 본질에 접근하는 심오한 경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책은 총 3장까지로 되어 있는데 제1장에선 심층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이며 제2장은 심층종교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제3장은 깨달음의 종교는 어떤 모습인가를 다루고 있는데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어쩌면 이 책의 핵심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종교에 대해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내 것만 알고 타인의 것을 인정치 못하는 것은 종교의 맛을 보았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여전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책엔 끊임없이 내 종교의 소중함에 비할 바 없이 타인의 종교도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오늘날에 한국 기독교가 문자주의에 빠져 얼마나 많은 오류들을 범하고 있는지 이 책은 낱낱이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렇게 시시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안다. 그들이 만나면 이 지상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서로 토론하며 협력할 것이다. 서로 잘났다고 싸움질을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 맞는 말이다. 세상에 내 것만 옳은 종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왜 남의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다. 내 것만 소중할 수는 없으며 내 것만큼 남의 것도 소중한 것이 세상의 이치려니!!! 하물며 종교랴...
『어디 아픈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시인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세상에 내놓은 몇 권의 시집을 읽은 터였으니. 1970년생이니 막냇동생보다도 다섯 살이나 어리네? 하면서 그녀와의 만남이 약속된 젊음의 장소로 향했었다. 이 책은 그녀가 ‘새벽의 도시’란 뜻을 가진 인도의 남부 코르만젤 해안에 위치한 오로빌이라는 곳에서 쓴 행복 편지다.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무작정 떠났다고 했다. 뭔가 충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떠났고 그녀는 그곳에서 생명의 본질과 향연이 펼치는 휘드러진 삶의 맛들을 여기에 하나하나 기록해 가기 시작했다. 그 가녀린 몸짓으로 이만큼의 언어의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역량임을 모르지 않는다. 이제 그녀를 수식하는 말은 시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은교』
박범신(1946~)은 다작(多作)의 작가다.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계속해서 쏟아내는 것을 보면 작가적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죽음보다 깊은 잠』『풀잎처럼 눕다』등을 발표하며 지난 70~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93년 돌연 절필을 선언으로 한국문단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던 작가는 그동안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장해 왔다. 최근에 냈던 『촐라체』『고산자』등과 함께 이 『은교』를 작가는 ‘갈망의 삼부작(三部作)’이라고 하고 싶다 말했다. 이 작품은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일흔 넷의 괴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던 이적요 시인이 열일곱 소녀인 한은교를 사랑했다는 설정이니 그럴 만도 하다. 사람을 사랑하는데 어찌 나이가 있을 수 있겠는지.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 말을 믿는다. 걱정이 되는 것은 아직 소녀인 은교가 어리다는 것인데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이렇게 추악한 것일지라도 배워가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작가의 소설을 모처럼 읽으며 여전한 필력에 감사하며 작가의 건필을 기원함과 함께 한국문단에 더 큰 획을 긋기를!!!
『고전탐닉』
허연 지음 마음산책 간
저자의 낯선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단숨이 읽었다. “삶에 질문에 답하는 동서양 명저 56”란 부재가 말해주듯 이 책은 낯설지 않은 고전을 읽고 느낀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 등을 냈고 기자로 재직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한다. <고전>하면 흔히 ‘알고는 있으나 읽지 않는 책’쯤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만 하더라도 솔직히 책 이름은 내 이름만큼이나 낯익은데 과연 지난날에 읽었던가 싶은 책들이 한두 권이 아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설혹 읽지 못했다 하더라도 언제 이 책들을 읽을까 싶어 절로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시대를 초월한 책이 바로 고전일 텐데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등한히 한 것은 아닌가 싶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한껏 미안해진다. 시대의 흐름을 어느 정도라도 인식하며 따라가기 위해서는 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시대의 고전을 읽는 것에는 비할 바 못된다고 할 수 있을게다. 물론 개중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책엔 카뮈의 『이방인』부터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까지 실려 있고 말미에 작가소개가 아주 유용했다. <고전을 읽는 것은 ‘초월’을 경험하는 것이다.>란 말이 여간 좋지 않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방귀희! 이제 그녀를 한국 장애인계의 대모(代母)라 하자. 그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한국 장애인들의 영원한 아이돌(Idol)이다. 그녀는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장애인계가 세상이라는 수면위로 하루라도 빨리 떠오르기를 소망하면서 육신의 장애를 태워 영육의 힘으로 글을 썼고 장애인들이 다하지 못한 얘기들을 대변해 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그녀를 너무 혹사시켰다. 솔직히 미안하다. 한편 생각하면 그녀의 짐은 너무도 무거웠으리라.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척박한 나라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아우성을 그것도 몇 십년동안 계속 외쳐왔다는 것이 그녀에게 미안한 이유다. 이제 사람들은 아주 조금씩 귀를 열고 그녀의 고독했던 외침을 듣기 시작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세상에 있을라고.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도 나는 그녀에게 빚이 많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고 우선 이 한마디를 전하고 싶다. 이 책은 그녀가 KBS-3R <내일은 푸른하늘>30년 오프닝 멘트를 모은 책이다. 아주 오래전 한 문예지의 권두언만을 모아 낸 『말』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낸 22권의 어느 책보다도 가장 읽기가 편했던 책이었다. 예손의 그림도 좋았고. 그녀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며!!!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익히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시집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시인은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우리는 매일매일』과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2004), 『니체, 영원회귀로와 차이의 철학』(2007) 등의 철학하기와 관련한 저서 등이 있다. 그녀는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너의 삶도 엉터리라는 것이 고통스럽게 한다고 말한다. 그 맘이 너무 예뻐 이 시집을 읽었다. 이 한권의 시집에서 단 한편의 시를 골라내라면 나는 단연 <긴 손가락의 詩(P-85)를 고르고 싶다.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앞으로도 그녀의 시집을 계속 읽을 참이다.
『밝은 웃음』
김산복 詩集 야웨 刊
시(詩)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시는 세상을 맑게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학 장르다. 영혼이 맑지 않고는 투명하고 맑은 시를 쓸 수 없다. 시는 억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심층 가까이 다가가려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분야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가장 깊은 대회를 하는 것이란 의미도 된다 하겠다. 따뜻한 가슴이 없이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것이 시라면 시는 가장 까탈스러운 장르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을게다. <귀천>의 천상병 시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그가 시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삶과 시가 일치했던 몇 안 되는 시인으로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처럼 김산복의 시 또한 그렇게 맑아서 좋았다. 나이가 들어도 풀잎에 맺힌 청초한 이슬 같은 맑은 영혼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물질적으로는 5천년의 역사 이래 가장 풍요한 시대를 살면서도 정신은 반비례하는 시대의 아픔 속에 세상의 숱하디 숱한 아픔과 슬픔 등을 이렇게 진솔하게 비비고 이겨 토담을 쌓듯 빚어낸 그의 시들이 곱다. 우선 몇 편을 보자. 「해도 너무해요」(P-35)<… 여기는 너무 해요 이성(理性)들은 누가 뺏어 갔나요 …>라고 탄식을 하고 있으며 「대화」(P-36) 에서는 <우리는 함께 어울려 뜨거운 손 맞잡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야 한다>고 직언을 하고 있다. 「눈부신 생명」(P-41)에서 시인은 <살아있음은 너무도 신기합니다 너무도 감사합니다>라고 했으며 「친구여」(P-47)에서 <다시 우리 만나 살 나라 있으니 그대 손을 놓아줍니다>라며 이별을 노래했다.「아름다운 삶」(P-58)에선 <호사스러움 없어도 멋은 있습니다. 우아하지 않아도 향기는 있습니다. 손마디가 굵어도 생의 힘이 담겨있고 까실까실한 볼에도 웃음이 담기면 아름다움이 솟아납니다.>라고 노래했다. 「노란 낙엽」(P-92)에서 시인은 <아! 저처럼 아름다운 죽음도 있구나>라 했으며 「꿈을 꾸다」(P-133)에서 <오늘의 교회들을 보시는 주님 안타까워 하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교회는 이 모습과 다르기에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파하신다>며 오늘날 한국교회를 질타하며 통회하신다. 「책임」(P-149)에서 <책임을 다할 때 아름답습니다 책임을 다할 때 향기롭습니다>라 했으며, 「눈물 교회」(P-244)에서는 <지금도 주님은 우리 땅에 오셔서 한국교회를 바라보시며 옛 옷을 입고 벗을 줄 모르기에 안타까워 울고 계신다.>라고 했다. 평생 목회와 글쓰기를 함께 해 오신 탓인지 책 전체에 흐르는 시어들은 솔직하고 그래서 단아하고 향기로운 것 같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이렇게 쉬운 시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싶다. 시적이고 비유와 은유를 섞지 않아도 아름답다. 나열식에 사실적인 일상의 언어도 가장 맛깔스러운 시어(詩語)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왜 이 책의 후미에 다른 분의 글을 실었을까가 궁금할 뿐이다. 합동시집도 아니면서!!!
2011. 7. 26
청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