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로 파미르 코뮤니즘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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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산악연맹 코뮤니즘원정대
한국산악회 코뮤니즘원정대
전년도에 최초로 진출한 소련 파미르 지역에 한국원정대가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매년 개설되는 코뮤니즘(7,495m) 국제캠프에 동국대, 거리회, 악우회, 계명대에서 합동으로 12명의 대원을, 그리고 한국산악회에서도 5명을 파견, 이중에서 6명이 등정함으로써 이 지역 최초의 등정기록을 세웠다.
한국산악인의 파미르 진출은 6공화국 정부의 북방정책과 소련의 개방정책의 영향으로 화해무드가 조성되어 89년 7월에 최초로 이루어졌었다. 이 지역에서는 74년부터 세계산악인들을 위한 코뮤니즘 국제캠프가 개설되어 등반이 이루어져왔었다.
▲ 90년 7월 31일 소련 최고봉 코뮤니즘에 단독으로 오른 한국산악회의 유학재대원. 이보다 앞서 대산련의 장봉완외 4명이 국내 첫 등정을 기록했다.
90년 7월에 열린 제16회 파미르캠프에는 대한산악연맹 합동대와 한국산악회기술위원회에서 모두 15명이 참가했다. 대산련합동대는 이인정대장(45·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을 비롯해서 김광진(40), 안규섭(34), 박영석(27), 김진성(26), 윤태영(25) 등 동국산악회원 6명과 거리회의 장봉완(39), 악우회의 송봉철(28), 이선용(27), 그리고 계명대산악부의 최병수를 합쳐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코뮤니즘의 노멀루트인 서쪽 포르탐벡루트로 7월 27일 등정에 성공했다. 등정자는 장봉완대장과 김진성, 송봉철, 박영석, 최병수대원 등 5명이었다.
한편 한국산악회팀의 김영대장(36)과 정재학(29), 유학재(29), 박열주(27), 구경모대원(27) 등 5명은 북쪽 지릉루트로 도전, 이들 중 유학재대원이 7월 31일 단신으로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보다 앞서 7월 19일 김영, 구경모대원이 코르즈네프스카야(7,104m)를 등정, 이 산에 한국인 첫 등정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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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8천미터급에 몰린 세 한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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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에 히말라야 등반을 목표로 한 한국대는 여름시즌에 파키스탄으로 몰린 3개 팀과 가을시즌에 네팔히말라야로 몰린 9개 팀, 그리고 겨울철의 1개 팀 등 모두 13개 팀이었다. 이 중 8천미터급 산을 노린 원정대가 절반이 넘는 8개 팀으로 낭가파르밧(8,125m)과 에베레스트(8,848m)에 각 2팀, 그리고 가셔브룸 1봉(8,068m), 캉첸중가(8,586m), 마칼루(8,463m), 안나푸르나 1봉(8,091m)에 각각 한 팀이 출사표를 던졌다. 나머지 5개 팀은 모두 7천미터급 원정대로 안나푸르나 3봉(7,555m), 타르케 캉(글레이셔 돔·7,193m), 추렌히말(7,371m), 닐기리 북봉(7,061m), 히말출리(7,893m)를 목표로 했다.
봄시즌에는 오랜만에 히말라야원정대가 없어 휴식기를 갖고 여름에는 3개의 8천미터급 원정대가 파키스탄으로 몰렸다. 한국산악계로서는 아직 미답의 산인 세계 8위의 고봉 낭가파르밧에 대산련과 광주합동대가, 역시 한국인 미답의 가셔브룸 1봉에 대전합동대가 도전장을 낸 것이다.
이훈태대장(50·대산련 등반기술위원장)이 이끄는 대산련 낭가파르밧원정대는 등반루트를 남쪽의 루팔벽으로 잡고 5월 11일 일찌감치 베이스캠프(3,050m)를 건설했다.
▲ 낭가파르밧 대한산악연맹
루팔벽은 63년부터 헤를리히 코퍼대장이 이끈 독일대에게 네 차례나 도전을 받은 끝에 70년 5월 등정된 4,500미터의 표고차를 자랑하는 난벽이다. 루팔벽은 워낙 난코스이기 때문에 등반대들은 주로 초등된 북쪽의 헤르만 불루트나 서면 디아미르벽을 선호해 왔다.
그런 루팔벽에 도전한 대산련팀은 대장 외에 정상모부대장(36), 김창선등반대장(30), 엄홍길(30), 장병호(29), 김주용(33), 박찬민(25), 홍재기(27), 조성수(25), 김경호(25), 전서화(31), 홍경표(28), 김홍빈(26), 한문기(30) 등 전국에서 선발된 14명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다음날 곧바로 76년 오스트리아팀에 의해 초등된 일명 한스 쉘 루트의 우측 벽을 공략했다. 쉘 루트의 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4일간 미답의 이 루트를 5,800미터까지 올랐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본래 계획했던 루트로 돌아와 제1캠프(4,500m)를 설치한 것이 5월 21일. 이로부터 원정대는 1개월에 걸쳐 2캠프(5,100m), 3캠프(6,100m)를 설치한 끝에 6월 24일 어렵게 제4캠프(7,100m)를 건설했다. 계속되는 악천후로 베이스캠프로 후퇴를 다섯 번이나 거듭한 후였다.
7월 2일, 낭가파르밧 전체가 짙은 개스에 휩싸여 시계가 불량한 상태였지만 대원들은 5캠프 루트 공작에 들어갔다. 적설량이 많아 러셀하는 데 체력을 모두 소진했으나 7,350미터 지점에 이르니 짙은 개스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더이상 등반이 불가능하다는 무전연락을 받은 이훈태대장은 눈물을 머금고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후퇴 결정을 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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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낭가파르밧원정대
한편 낭가파르밧 서쪽 루트에는 또다른 한국대가 국내초등을 노리고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디아미르벽의 킨스호퍼루트를 선택한 광주 낭가파르밧원정대는 전년도 광주전남 학생산악연맹의 동계에베레스트 시도에 이어 광주 지역 두 번째 거봉 원정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원정대는 71년 마나슬루 원정에 참가해 호남 지역 최초의 히말라야 경험자로 꼽히는 최창돈대장(45)의 지휘아래 윤장현부대장(41), 위계룡등반대장(37), 김웅기(38), 이은식(38), 송영호(33), 오성개(32), 박찬기(31), 김경선(31·여), 이성원(29), 박신영(29), 정오승(28), 정성백(28), 문태철(28), 서종갑(24), 이지헌(43·의사) 등 16명으로 구성되었다.
6월 8일 베이스캠프를 건설한 광주팀은 11일 제1캠프(5,200m), 여기서 800미터의 빙설벽과 200미터의 수직벽을 통과해 16일 2캠프(6,200m)를 설치했다. 21일 제3캠프(6,800m)까지 진출했으나 대원들간에 불화가 발생하고 악천후가 닥쳐 전원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원정대는 28일부터 등반을 속개 7월 2일에는 정성백, 송영호, 박신영대원이 4캠프(7,500m)까지 올라가 설동을 파고 비박을 감행했다. 그리고 다음날 컨디션이 비교적 좋은 정성백대원이 마침 정상공격을 나선 불가리아팀 대원 3명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정대원은 12시 30분경 8천미터 지점에서 체력이 완전히 소진돼 돌아서야 했다. 여기서 원정대의 불행이 닥쳐왔다. 하산하던 정대원이 오후 2시경 실종된 것이다. 그의 피켈은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불가리아팀이 7,900미터 지점에서 발견했다.
이로써 한국의 낭가파르밧 원정은 통산 4회의 실패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대원을 잃게 되었다.
‘빛나는 원정대’란 색다른 명칭을 단 대전충남연맹의 가셔브룸원정대는 발토로 산맥에 우뚝 솟은 세계 11위의 가셔브룸 1봉(8,068m)을 3봉(7,952m)과 동시에 공략한다는 목표로 6월 15일 베이스캠프(5,050m)를 건설했다. 이 원정대의 명칭은 발티어로 ‘빛나는 벽’이란 뜻을 가진 가셔브룸에서 따온 것이다.
▲ 90년 7월 16일 박혁상대원과 함께 가셔브룸 1봉 정상에 오른 폴란드의 세계적 여성등반가 반다 루트키에비츠
가셔브룸 산군에 대한 한국대의 도전은 전년도 성균관대의 가셔브룸 2봉 원정에 이어 두 번째이나 1봉과 3봉 등반은 처음이었다. 이 원정대는 82년 고줌바캉, 86년 랑탕리룽을 등반한 바 있는 윤건중대장(37)의 지휘아래 김병만부대장(36), 송열헌(31), 유승태(27), 윤상호(28), 박혁상(27), 차용석(35), 박명우(26), 윤석민(24), 김병만(30), 주충익대원(27) 등 11명으로 구성되었다.
한국대는 6월 17일 제1캠프(5,950m), 22일 가셔브룸 라(고개)에 2캠프(6,400m)를 세웠다. 여기서 원정대는 북면으로 새 루트를 시도해 보았으나 200미터를 전진하는 데 그쳤다.
7월 2일 제2꿀루와르까지 진출한 후 다음날 송열헌, 박혁상대원이 정상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6,900미터 지점에서 비박을 하며 기회를 노렸으나 갑작스런 날씨 악화로 후퇴해야 했다. 8일, 다시 4명의 대원이 정상공격을 위해 2캠프까지 올랐으나 강풍과 눈보라로 또다시 돌아서야 했다.
날씨가 호전된 7월 15일, 박혁상, 유승태대원이 7,300미터 지점에 비박용 텐트를 쳤다. 이날 송열헌, 박명우, 윤상호대원도 3봉의 7,300미터까지 진출하면서 정상공격 기회를 노렸다. 7월 16일 새벽 5시 1봉팀의 두 대원은 정상을 향해 떠났다. 폴란드 여성산악인 봔다와 에바도 함께 정상공격에 나섰다. 암벽지대와 설릉지대를 로프 확보 없이 통과한 일행 4명은 오전 9시경 7,800미터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유승태대원은 너무 지쳐 포기하고 박대원만이 폴란드대원들과 등반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인 12시 5분, 일행은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이들의 하산길은 순조롭지 않아 7,800미터 지점에서 비박을 하고 다음날 귀환했다.
한국대의 고산원정 열기는 가을시즌 네팔히말라야로 이어졌다. 한 시즌에 9개 팀이 한꺼번에 네팔히말라야로 러시를 이룬 것이다. 에베레스트에 2개 팀, 캉첸중가, 마칼루, 안나푸르나 등 8천미터급에 5개 팀이 몰렸고, 닐기리 북봉, 타르케 캉, 추렌히말, 안나푸르나 3봉 등 7천미터급 산에 4개 팀이 출사표를 던졌다.
최고봉 에베레스트에는 어김없이 한국대가 찾아들었다. 이번에는 부산산악인들이 일본팀과 합동으로 남동릉에 도전장을 냈고, 남서벽에서 3회나 고배를 마신 박영배대장이 5명의 대원을 이끌고 네 번째 도전장을 던졌다. 이로써 에베레스트에는 84년 이래 7년 동안 한국팀이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등반활동을 펼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가을시즌에는 2개의 한국대와 미국,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유고팀을 합쳐 모두 7개 팀이 최고봉에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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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에베레스트 합동원정대
노종백대장(41·부산클라이머스)이 중심이 된 한일합동 에베레스트원정대는 부산산악인 11명과 일본산악인 3명으로 구성되었다. 한일합동 등반은 85년 타우체 원정(대장 오인환) 이후 두 번째였다. 한국측 대원은 노대장을 비롯해서 김석태(42), 김영환등반대장(31), 정영규(36), 안광춘(34), 복진영(30), 김재수(29), 최진순(여·28), 함상헌(27), 박창우(24), 이상표(25) 등 주로 부산과 대구산악인들이었고, 일본측에서는 구와하라(58), 야나기하라(30), 스기야마(22) 등 오사카산악연맹 소속 대원이 참가했다.
▲ 90년 10월 6일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한일합동대의 김재수(오른쪽), 복진영대원
한일합동대는 9월 14일 로체 페이스에 3캠프(7,250m)를 세웠다. 이어서 23일에는 사우스 콜(7,986m)에 4캠프를 설치하고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10월 1일 김영환을 조장으로 해서 복진영, 김재수, 야나기하라, 그리고 셀파 1명이 사우스콜에 올라가 정상공격 기회를 노렸다. 다음날 새벽 바람이 심하게 불자 김등반대장은 더이상 등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후퇴를 결정했다.
10월 6일 이번에는 복진영, 김재수, 박창우, 스기야마 대원 등 3명이 2차 공격조로 지명되어 두 셀파와 함께 자정에 사우스콜을 떠났다. 일본대원은 도중에 포기하고 3명의 한국대원은 빠른 전진을 보여 오전 6시 등정에 성공했다. 이들은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셀파들을 기다리느라 2시간 30분이나 정상에 체류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렇게 오래 머문 것은 보기드문 기록이다. 이들의 장기 체류는 복진영대원의 동상으로 이어져 그는 후에 발가락 전부를 절단해야 하는 불운을 맞았다.
원정대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등정조를 지원하기 위해 사우스콜에 올라온 대원 중에서 함대원이 실종되는 사고가발생했다.
원정대는 남서벽을 등반중이던 한국팀에게 수색을 요청했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그가 단독등반을 감행하다 실족사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함대원은 에베레스트에서 첫 번째 한국인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한일합동대의 등정으로 한국은 총 12명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를 배출한 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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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에베레스트 남서벽원정대
한편 남서벽에 네 번째 도전장을 낸 박영배대장(43)의 합동대는 9월 19일 쿰부빙하에 들어왔다. 대원은 박대장 외에 김홍경(32), 엄홍길(30), 김창선(30), 김기환(25) 등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팀이었다.
이 시즌 남서벽에는 스페인팀이 먼저 등반중이었기 때문에 한국대는 그 뒤를 따라 비교적 쉽게 루트를 만들어갔다. 9월 23일 2캠프를 건설하고 곧바로 남서벽 등반에 들어가 24일 3캠프(7,200m)를 설치했고, 10월 7일에는 김창선, 김기환대원이 7,800미터 지점에 네 번째 캠프를 올렸다. 이때 스페인팀은 꿀루와르를 통과, 8,300미터 록밴드 위까지 진출했으나 낙석으로 대원이 부상을 입자 철수를 결정했다.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던 한국대는 12일 다시 3캠프까지 올라 등정 기회를 엿보았으나 계속되는 악천후와 물자 부족으로 결국 등반을 단념하고 말았다. 이로써 85년부터 네 차례나 시도한 남서벽 등반은 다시 한국산악계에 커다란 숙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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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첸중가, 마칼루, 안나푸르나 연속 패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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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가을시즌에는 에베레스트 외에도 충북연맹합동대가 캉첸중가 중앙봉(8,482m), 울산 청산악우회팀이 마칼루(8,463m), 그리고 서울의 어센트산악회가 안나푸르나 1봉(8,091m)에 각각 도전장을 냈다. 결과는 3개 팀 모두가 등정에 실패, 에베레스트와 여름시즌 낭가파르밧의 두 한국대 패퇴까지 합하면 무려 6개 팀이 연속해서 8천미터급 자이언트봉에서 고배를 마시는 저조한 기록을 남겼다.
대산련 충북연맹이 파견한 90한국 캉첸중가원정대는 8월 13일 본대가 출발했다. 이들은 캘커타 화물의 통관 지연으로 카라반 출발이 늦어져 9월 21일에야 얄룽빙하 5,35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이들의 목표는 캉첸중가 산군에서 아직 한국대가 시도하지 않은 중앙봉이었다. 주봉은 87년 겨울 부산 대륙산악회 이정철대원이 동계 2등을 기록하며 올랐었다.
▲ 캉첸중가 2캠프(6,250m) 바로 밑에서 발견된 예티(?)의 발자욱
23일부터 등반을 개시한 원정대는 두 번에 걸친 폭설로 일주일 만인 30일에 제 1캠프(6,000m)를 설치했고, 10월 2일에 2캠프(6,250m), 8일에 3캠프(6,900m), 그리고 10일에는 4캠프(7,200m)에 진출,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10월 12일, 공격조 박경식대원과 셀파 2명은 새벽 5시 마지막 캠프를 출발했다. 커다란 크레버스를 우회하여 65도 경사의 꿀루와르를 오르는 데 5시간 걸린 끝에 소련대가 비박지로 사용했던 커다란 바위를 만났다. 고도는 7,900미터. 이곳에서 동상으로 발의 통증을 호소하던 셀파는 하산하고 박대원과 1명의 셀파만이 계속해서 정상으로 나아갔다. 산소통 없이 등반을 감행한 공격조는 중앙봉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향해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곳은 중앙봉이 아니라 전위봉이었다. 등반을 속개한 두 사람은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오르다가 오후 3시 30분 역부족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들이 도달한 지점은 8,350미터, 정상을 불과 130여 미터 남겨두고 아깝게 돌아선 것이다. 원정대는 이후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캉첸중가는 끝내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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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청산악우회 마칼루원정대
한편 쿰부히말의 세계 5위봉 마칼루에 도전한 한국대는 9월 3일 선발대가 베이스캠프(4,800m)를 건설했다.
이 팀은 또한 울산 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8천미터급 원정대로 주목을 받았다.
원정을 위해 사재를 쾌척한 김관준대장(50)을 비롯 이건욱부대장(41), 이상호 등반대장(31), 박규호(28), 김영태(26), 신영호(39), 김미애(여·30), 황두환대원(44·의사) 등 모두 8명으로 구성된 울산팀은 모두 청산악우회 소속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캉첸중가팀과 마찬가지로 캘커타로 선박 수송한 화물의 통관 지연으로 9월 9일에야 본대가 카트만두를 떠났다. 먼저 도착한 선발대는 본대가 합류할 때까지 동남릉루트에 제1캠프(5,400m)와 2캠프(6,100m)를 구축해 놓았다.
본대가 헬기 두 대를 동원해 눔까지 장비를 수송하여 9월 16일 합류하자 나머지 캠프에 대한 루트공작이 이어져 17일에는 6,700미터의 동남릉 콜에 3캠프를 설치했다. 말로만 듣던 이곳의 바람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워낙 바람이 심해 텐트 대신 설동을 팔 것을 고려해 보았으나 눈이 단단하지 않아 포기했다. 그런 바람을 뚫고 19일에는 4캠프(7,200m)가 설치되었다.
일단 하산한 이들은 9월 23일 제5, 6캠프를 설치하기 위해 다시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심한 바람으로 이미 설치해 놓은 텐트들이 일부 파손되어 있었지만 26일에는 4캠프까지 전진했다. 그런데 28일 새벽 2시경 2캠프에 눈사태가 덮쳐 텐트와 장비들을 흔적도 없이 쓸어가버렸다. 그곳을 혼자 지키던 셀파 1명은 극적으로 탈출하여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고로 등반보다 전대원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김관준대장은 철수를 명령했다.
84년 겨울 은벽산악회의 김영자대원이 올라 산악계를 떠들썩하게 했고, 후에 프랑스대가 의혹을 제기해 다시 화제를 모았던 안나푸르나에 6년 만에 한국대가 도전장을 던졌다. 어센트산악회가 추진한 이 원정은 노멀루트인 북면이 아니라 히말라야 거벽등반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남벽을 노린 것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이 벽의 제8등을 노리고 안나푸르나빙하에 들어온 한국대는 박봉래 단장(58)과 전두성대장(37)을 비롯 김융기부대장(36), 조양호(40·의사), 노영수(32), 유순복(31), 안충근(27), 노원일(28), 이정권(25), 신동석(25), 황규화(24), 김민성대원(34)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되었다.
▲ 90년 안나푸르나 1봉 남벽 원정대 발대식
한국대는 본격적인 등반을 개시한 일주일 만에 4,800미터에 제1캠프와 5,100미터 지점에 2캠프를 설치했고, 8월 31일에는 6,100미터에 3캠프가 구축되었다. 중간에 셀파의 우두머리인 사다가 말썽을 부려 해고하자 셀파들이 등반을 거부해 대부분의 루트공작은 대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캠프부터는 등반이 매우 어려워졌다. 루트의 난이도도 문제였지만 매일같이 폭설이 내렸다. 한국대는 일주일간 시도하던 리지를 포기하고 500미터가량 좌측으로 우회하여 4캠프 예정지가 바로 보이는 꿀루와르로 진입했다. 70여도 경사에 400미터에 달하는 이 꿀루와르를 등반하다 눈사태를 만나 4명의 대원들이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꿀루와르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등반이 재개되어 4캠프 예정지를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식량은 물론 대원들의 체력도 거덜나 버렸다. 여기서 대장단은 숙의끝에 철수를 결정했다. 이미 10월 하순으로 접어들었으나 이때까지 이들이 오른 고도는 6,700미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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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시즌 7천미터급 네 팀 모두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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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가을 네팔히말라야로 진출한 9개 한국원정대들 중에서 8천미터급에서는 다섯 팀 중 한 팀 만이 등정하는 저조한 기록을 보인 반면, 7천미터급 산에 도전한 4개 팀은 모두 등정하여 대조를 보였다. 이들 4개 팀은 모두 네팔 중부의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 산군에서 등반활동을 펼쳤다.
7천미터급 4개 팀 중에서 가장 먼저 승전보를 올린 것은 닐기리 북봉(7,061m)원정대였다. 산비둘기산악회가 꾸린 이 원정대는 강한철대장(35), 정기화부대장(34), 박주홍(27), 박용환(26), 김연수대원(25) 등 5명으로 구성된 소규모팀이었다.
이들은 일찌감치 카트만두를 떠나 8월 17일 3,800미터에 1차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안나푸르나 산군에 있는 닐기리는 북봉, 중앙봉, 남봉으로 이루어졌는데 주봉이라고 할 수 있는 북봉의 초등정은 1962년 일본대가 북벽을 통한 서릉으로, 2등은 81년 일본대가 동릉으로 이룩했다. 한국대가 택한 루트는 남동릉, 이곳은 80년 봄 한국대(대장 오인환)가 루트 초등을 노렸으나 6,200미터에서 역부족으로 돌아섰고, 그후 82년 봄 일본대가 초등을, 83년 가을 호주팀이 재등한 루트였다.
원정대는 8월 5일 카트만두를 떠나 12일간의 카라반끝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했고 26일에 제1캠프(5,200m), 9월 1일 2캠프(5,800m), 6일에는 3캠프(6,500m)를 설치했다. 비교적 순조로운 등반이 계속되었다.
9월 7일, 오전 8시 박용환, 김연수대원과 셀파 2명이 마지막 캠프를 떠나 4시간 만에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들이 오른 정상은 83년 호주팀이 오른 곳으로 이곳을 초등정한 일본대의 정상과는 다른 곳임이 밝혀졌다. 일본대가 오른 정상은 좌측 칼날능선을 10시간 정도 가야만 하는 거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오른 곳이 닐기리 북봉의 정점이었는지는 명확한 자료가 없어 가려지지 않았다. 산비둘기팀은 9월 8일 두 번째 등정길에 나서 박주홍대원과 셀파 1명이 오전 7시 36분 정상에 올랐다.
같은 안나푸르나 산군의 글레이셔 돔에 도전한 동아대산악회 원정대는 9월 2일 베이스캠프를 건설한 지 8일 만에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올렸다. 글레이셔 돔은 이미 84년 10월 27일 강릉합동대 엄개성대장에 의해 북면루트로 등정된 바 있다. 글레이셔 돔이란 산명은 1956년 마차푸차레봉을 정찰하러 안나푸르나 남쪽 빙하로 들어온 영국의 로버츠가 빙설로 덮인 둥근 모양의 산을 발견하고 명명한 데서 비롯된 것인데, 86년 네팔정부가 ‘타르케 캉(Tarke Kang)’이란 네팔명을 붙였다.
이 산에 도전한 동아대팀은 정민규대장(34)을 비롯해서 이석호등반대장(28), 김인숙(여·26), 윤종호(24), 백진국대원(23) 등 5명으로만 구성된 단촐한 원정대였다. 이 원정은 동아대학교 개교 44주년 및 부속병원 설립 기념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6년 전의 강릉팀과 같은 북면으로 등반루트를 잡은 이들은 초반부터 속공전략으로 나섰다. 9월 3일 제1캠프를 설치하고 5일에 2캠프(6,200m), 그리고 7일에는 3캠프(6,400m)를 설치하면서 등정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8일 새벽 4시 윤종호, 백진국대원과 셀파 2명이 2캠프를 떠나 정상을 향했다. 그러나 이들은 고도차 1,000미터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상을 200여미터 남겨두고 후퇴했다.
9월 10일, 이번에는 백진국대원과 셀파 2명이 재차 정상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3캠프에서 새벽 3시 40분에 출발했다. 이들은 전날 퇴각지점을 8시경 통과해서 12시 40분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마지막 캠프를 떠난 지 9시간 만의 등정이었다.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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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거봉산악회 추렌히말원정대
한편 마나슬루 산군의 추렌히말에 출사표를 던진 포항 거봉산악회는 이 산의 서봉과 중앙봉을 동시에 등정하면서 기염을 토했다.
▲ 추렌히말 중앙봉으로 이어진 날카로운 설릉으로 등반중인 거봉산악회 대원들.
김규영대장(29)을 비롯해서 오흥일부대장(29), 김육년(27), 홍성춘(26), 장이석(26), 임종걸(23), 권오수대원(22) 등 7명은 모두 포철공고 동문으로 개교 20주년을 맞아 포항제철의 지원을 받아 원정대를 꾸렸다. 이들은 모두가 히말라야 초행길이었는데도 전대원 등정이란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8월 14일 74명의 포터를 거느리고 카라반을 시작한 원정대가 카페빙하 최남단 4,55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한 것은 8월 26일, 이틀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등반을 개시했다.
9월 2일, 구스퉁 북릉 하부의 빙하에 제1캠프(5,050m)를 설치하고 다음날에는 구스퉁 북릉을 올라서 추렌히말의 3개 봉우리가 잘 보이는 곳에 2캠프를 설치했다. 6일에는 다울라기리 6봉 서릉의 하단부에 3캠프(6,280m)를, 9일에는 복병처럼 숨어 있는 크레바스지대를 통과하여 추렌히말 동봉의 삼각형 설벽 밑에 4캠프(6,600m)를 설치했다. 그리고 11일에는 부대장과 두 셀파가 동봉으로 이어지는 급경사의 설벽을 통과, 중앙봉 남면쪽으로 고정로프를 이용해 하강하여 5캠프(6,870m) 설치를 마쳤다.
9월 13일 전대원이 4캠프를 출발하여 5캠프를 향했다. 중도에 홍성춘, 장이석대원은 역부족으로 후퇴했고 나머지 5명의 대원들은 눈보라에 시달리며 마지막 캠프에 도착했다. 9월 14일 새벽 4시 40분, 먼저 오부대장과 김육년, 권오수대원, 그리고 두 셀파가 서봉을 향해 출발했고, 5시 10분에 김규영, 임종걸대원이 중앙봉을 향했다.
중앙봉 공격조는 날카로운 설릉상의 조그만 암릉을 몇 개 넘어 오전 9시 20분 정상에 다다랐다. 서봉 공격조는 5캠프에서 중앙봉의 남쪽면으로 오르다가 좌측 설사면으로 길게 트레버스하여 설릉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9시 30분에 그 설릉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날카로운 정상에 도달했다. 7명의 대원 중 5명이 그것도 2개의 정상에 동시에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중앙봉은 70년 가을 일본대 이후 두 번째 등정이었고, 서봉은 네 번째 등정으로 기록되었다.
90년 가을시즌의 마지막 승전보를 보내온 팀은 부산 한오름산악회의 안나푸르나 3봉원정대였다. 송표명대장(42)과 박봉립부대장(39), 김길우(25), 김양섭(30), 유정남대원(여·27) 등 5명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는 한국인에게는 아직 미등으로 남아 있던 안나 3봉에 도전, 베이스캠프 설치 13일 만에 정상에 오르는 개가를 올렸다.
안나푸르나 3봉은 1984년에 조선대산악회팀(대장 고광수)이 남면루트로 시도했으나 6,700미터에서 패퇴했고, 86년 서울산악회가 역시 남면으로 강가푸르나와 연속등정을 노렸으나 제대로 등반이 이루어지 못했었다. 따라서 1봉, 2봉, 4봉은 이미 한국대에게 등정이 되었지만 3봉만은 정상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한오름산악회는 이 산의 북면으로 등반루트를 잡고 9월 18일 베이스캠프(4,500m)를 건설했다. 25일 제1캠프(5,400m)를 설치하고 27일 급경사의 설벽을 통과하여 2캠프(6,150m)를 올렸다. 10월 1일, 셀파들만으로 루트공작을 한 끝에 6,450미터에 3캠프를 설치했다. 여기서 4캠프를 생략하고 김길우대원과 셀파 셋이서 정상공격을 시도했지만 등반속도가 느려 스노우밴드 지점에서 후퇴했다. 10월 5일 다시 정상공격에 나선 김대원과 세 셀파는 13시간 18분간 등반끝에 마침내 정상에 섰다. 한국대의 이 등정은 인도, 일본, 이태리, 영국, 스위스, 네팔팀에 이어 8번째 등정으로 기록되었다.
90년 겨울시즌 히말라야로 향한 한국대는 유일하게 계명대산악회가 파견한 히말출리(7,893m)원정대뿐이었다. 계명대 팀은 전년도 원정에서 숨진 고 정재홍대장을 추모하고 이 산의 겨울철 초등을 목표로 다시 등반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네팔 중부 마나슬루 산군에 있는 히말출리는 주봉 외에도 서봉(7,540m)과 북봉(7,371m)으로 이루어졌는데 서봉은 78년 봄 일본대가, 북봉은 85년 가을에 울산원정대(대장 이규진)가 초등정했다. 주봉은 60년 일본대가 남벽루트로 초등정한 이래 17회의 도전이 있었으나 단지 6회의 등정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86년 폴란드대가 시도했으나 서릉 6,200미터에서 단념하고 어느 팀도 등정에 성공하지 못했다. 산명 히말출리(Himalchuli)는 네팔어로 ‘날카로운 산’이란 뜻으로 등반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봉의 동계초등을 목표로 한 계명대팀은 박동설대장(31)의 지휘아래 류구열(25), 이석환(25), 박근영(25), 이종선(23), 홍정기대원(24) 등 대부분 재학생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일찌감치 카라반을 떠나 11월 18일에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했고 24일에 제1캠프(5,750m), 29일에 2캠프(6,350m)를 올리면서 사실상 동계시즌 이전에 등반을 개시한 셈이었다. 12월로 접어들어 히말출리 등반의 가장 큰 관건인 100여미터 급경사의 대설벽을 돌파하여 12월 4일 3캠프(6,750m)설치를 마쳤다. 12월 7일에는 4캠프(7,240m)가 어렵게 설치되고 류구열, 이석환대원과 셀파가 계속해서 7,500미터에 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공격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이때부터 눈보라가 불어닥치면서 악천후가 계속되자 이들은 이틀간이나 버틴 끝에 3캠프로 후퇴하고 말았다.
원정대는 여기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최종 캠프에서 주봉 정상까지는 불규칙한 크레바스와 깊은 눈으로 접근이 곤란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목표를 주봉에서 서봉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서봉 등정길에 나선 원정대는 한 차례 정상공격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그리고 12월 19일 3캠프를 홀로 떠난 이석환대원이 8시간의 사투끝에 마침내 강풍이 몰아치는 서봉 정상에 올라섰다. 베이스캠프 설치 32일 만의 일이며 이 산의 겨울 첫등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