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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사람들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호도알
중세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이해
- 서영석 -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ⅰ. 문제제기
ⅱ. 연구방법
Ⅱ. 초기 암흑한 중세기 (A. D.500~A. D.950)
ⅰ. 역사적 상황
ⅱ. 종교적 상황
Ⅲ. 활력을 되찾는 중세기 (A. D.950~A. D.1350)
ⅰ. 역사적 상황
ⅱ. 종교적 상황
Ⅳ. 몰락하는 후기 중세기 (A. D.1350~A. D.1500)
ⅰ. 역사적 상황
ⅱ. 종교적 상황
Ⅴ. 중세교회의 다양한 성령 이해
ⅰ. 본체론적 성령 이해
ⅱ. 성례주의적 성령 이해
ⅲ. 주의주의적 성령 이해
ⅳ. 공동체론적 성령 이해
Ⅵ. Filioque문제
Ⅶ. 현대의 Filioque 논의
ⅰ. Filioque의 찬 반론
ⅱ. Filioque의 현대적 논의
⑴ 바르트
⑵ 몰트만
⑶ 새로운 접근
Ⅷ. 나가는 말(신학의 새로운 모색)
Ⅸ. 참고문헌
Ⅰ. 들어가는 말
ⅰ. 문제제기
성령(聖靈)은 암시(暗示)와 지시(指示) 그리고 조명(照明)을 통한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우치신다. 이처럼 성령은 많은 사역 중 우리를 가르치시는 교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전 이해(前 理解)의 부족으로 과거 많은 논쟁의 모습이 현재까지도 지속되어오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특히 현대 오순절 운동을 통해 성령의 사역을 새롭게 조명하게 됨으로써, 과거 잘못된 것으로 해석되었던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우리의 삶의 자리(Sits Im Leben)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로 오순절 교단의 범주를 넘어 루터교, 감독교회, 장로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 등 수많은 주요 교단에서 성령의 은사인 방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오순절 교단에 가입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교단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강조하며, 은사집회를 가지며, 방언을 중시하는 새로운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교단간의 이해 차와 정확한 성령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개혁교회의 입장에서는 성령을 다분히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오순절 교단 입장에서는 성령을 감정적인 것에 기인하고 있다.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있어야 하며 성령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시고자 하는지 겸손히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인 것 같다.
ⅱ. 연구방법
성령의 이해를 위해서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본 글은 중세 교회사 속에 드러난 성령의 다양한 모습, 즉 역사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하에서 드러난 모습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서 세밀히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고, 동 서방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재조명해 보고, 재인식코자 한다.
특히 동 서방 교회의 분열 원인이었던 Filioque논쟁의 쟁점을 살펴본 후 현대 신학자 바르트와 몰트만의 견해에서 재 이해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Filioque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중세교회사]와 [성령, 그 다양한 얼굴]와 [역사신학 개론]을 주 텍스트로 하여, 중세교회의 역사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을 살펴보았으며, [피니의 조직신학]과 [심프슨의 성령 충만], [토레이의 성령의 위격과 사역], [이성희의 성령론] 그리고 [성령과 교회]를 살펴봄으로써 현대적 상황하에서 중세교회에 나타났던 성령운동을 재 이해보고자 한다.
특히 역사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은 역사 신학적 입장에서 기술하려 노력하였으며, 아울러 시대 상황 속에서의 성령 이해는 조직신학적 입장을 삽입하여 정리하였으나 조직신학적 관점에 의한 분류는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현대적 입장에서 재조명하여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철학과 실천신학적 면이 개론적인 측면을 첨가하여 개혁교회와 오순절교단 사이의 성령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Ⅱ. 초기 암흑한 중세기(A. D.500~A. D.950)
ⅰ.역사적 상황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이 넓은 지역에서 기독교의 놀라운 실패들 가운데 하나를 발견한다. 이 지역은 그리스도께서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신 지역을 포함하고, 성지로부터 가까운 곳들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복음이 설교되었고, 최초의 기독교회들이 탄생하였고,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대 카톨릭 교회의 5교구 중 3교구(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다. 그리고 초기에는 창조적인 신학사상들도 나왔다.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이상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실현코자 했던 수도원 운동의 발상지도 이 지역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상 이곳은 기독교가 가장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처음 1,000년 동안 그 어느 곳에서보다 분열을 경험하였고 사랑의 일치에 미치지 못했던 곳이다. 어떤 지역들은 다수가 기독교인들이 되기도 했으나 피상적 기독교에 머물렀고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없었다. 이슬람교가 압도해 왔을 때 이 지역의 기독교는 지반을 잃었다. 물론 아람 점령 지역의 동쪽에서 네스토리우스적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약간의 개종자들이 생겼으나 이들은 소수 무리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나라들에서 기독교는 이슬람 지배하에 있는 그 어떤 다른 종교들보다도 훨씬 힘있는 생존 능력을 과시했고, 새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ⅱ. 종교적 상황
592년 교황 그레고리 1세로 시작하는 교황 권의 확대로부터 800년 신성로마제국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중세교회의 선교와 수도원제도가 확립되었다. 이 기간동안에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정리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소위 말하는 반-어거스틴의 신학의 정립으로 중세 전반에 걸쳐서 어거스틴을 이해하는 구체적인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중세교회가 외부적인 침입을 받아서 기독교권의 침체와 축소를 맞이하였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의 기독교는 수적으로 기울어졌고 생기 넘치는 신앙운동을 펼치지 못했으며, 교회의 도덕적, 영적 자질에 있어서 크게 퇴보하였고, 인류에 대한 공헌에 있어서도 그 몫을 충실히 하지 못했다.
특히 야만족들의 침입과 로마제국의 붕괴와 희랍·로마문화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수도원운동과 교황주의의 형태 등으로 살아 남았다.
Ⅲ. 활력을 되찾는 중세기(A. D.950~A. D.1350)
ⅰ.역사적 상황
신성로마제국의 설립과 더불어서 교황 권의 확대를 꾀하던 기간으로서 각종 문서의 조작으로 인한 교황 권의 확립을 이룩하였다. 더 나아가서 교회가 황제와 세력다툼을 벌여서 교권의 확보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교회의 세력확보는 내부적인 부패를 의미하였다. 중세교회는 정치적인 결탁에서 오는 재력의 확보를 인한 시몬주의(Simony), 교황 권을 둘러싼 음란주의(nicho- laitanism)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패를 반대하는 개혁으로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오토 대제의 개혁운동, 수도원의 개혁운동 등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권내에서의 개혁운동은 한계가 있었으며, 이 시기 동안에 제도권 교회에 대한 각종 반항운동이 있었다. 첫째는 제도권에 도전하는 개혁운동으로서 영국과 폴란드에서 일어난 운동, 둘째는 제도권을 떠나서 도피적인 입장을 취하는 수도원적 공동체운동, 셋째는 각종 이단운동, 그리고 넷째는 신비적인 미신 신앙의 유행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운동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도미니크 교단과 프란체스코 교단 등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였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자 결국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서 중세 교인들의 반발을 해외로 돌림으로써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특히 이 기간동안의 기독교의 변화는 양적 성장보다 질적인 심화와 성장을 보인 기간이었다. 그리고 십자군의 영향하에 있던 시기였다.
ⅱ. 종교적 상황
서방교회는 유럽의 공식적인 기독교 국가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소수 교회들도 신약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이나 어떤(카톨릭 입장에서 볼 때) 이단적 성향을 띤 기독교 운동들이 일어나 보다 완전한 기독교를 지향하려 했던 것은 아시아의 소수 기독교에서보다도 유럽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수세에 몰리는 소수 기독교 공동체들보다도 압도적으로 다수 기독교인을 지녔거나, 아주 소수 기독교인들을 지닌 기독교 공동체들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완전히 실현시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특히 십자군 운동으로 인한 동·서 문화와 통상교류 이외에 서방쪽의 세계를 향한 시야가 넓어짐과 동시에 지적 계몽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회내에 개혁의지를 가진 종교운동이 일어났고, 대학들이 건립되었으며, 중세 서방교회의 신학으로 발전될 스콜라주의 신학이 발달되기 시작했고, 사회개혁이 일어났으며, 근대 자국어문학이 생기기 시작했고, 예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동방교회는 대체로 950~1350년(400년) 동안에 동방 기독교의 확장이 있었는바, 특히 13~14세기에 그러했다. 기독교 신앙은 발칸반도의 슬라브족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렸다. 러시아의 대평원에도, 그리고 1350년에는 북부 몽고 점령 지역의 접경과 그 너머로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었다. 유라시아를 넘어 대서양과 지중해 서부 해안과 동부 해안으로부터 중국 해안에까지,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와 모스크바 북쪽으로부터 남 인도에까지 기독교 공동체들이 확산되었다. 이 같은 기독교의 동부 진출 가운데 일부는 프란시스 칸과 도미니칸 선교사들의 노고였는데, 이는 서유럽 기독교의 대각성의 열매였다. 그러나 동부로 향한 기독교 확장의 대부분은 동방 교회들, 특히 희랍 정통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 사람들에 힘입었다. 하지만 동방의 기독교는 대단히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동방 기독교의 주된 정치적 보루인 비잔틴 제국이 무너져 갔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대부분에서 기독교는 소수가 되었고,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배세력이 된 모슬렘세력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들 가운데 새로운 갱신운동을 보이는 공동체는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기독교는 서유럽의 기독교가 경험했던 생동성과 갱신의 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동방 교회는 1350년 이후 서방 교회보다 더욱 내리막길을 달렸다.
Ⅳ. 몰락하는 후기 중세기(A. D.1350~A. D.1500)
ⅰ.역사적 상황
후기에 들어서면 교회는 십자군 전쟁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교황 권이 확대되는 목적을 달성하였으나, 곧바로 아비뇽 교황청으로 교황 권이 둘로 나누임으로 인해서 교권의 실추가 가속되었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회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유명론 신학이론을 들여옴으로써 교회의 타락을 더욱 가속시켰다. 중세교회는 신학적으로 인간의 힘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회가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부담 없이 판매하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미신적 신앙을 그대로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기에 덧붙여서 중세교회는 문예부흥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의 사치와 치장이 극에 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소위 말하는 문예부흥 교황들은 앞을 다투어서 화려한 교회당을 건축하고서 각종 조각품과 미술품으로 치장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곧바로 중세의 패망을 가져오게 하였다.
ⅱ. 종교적 상황
1350~1500년 어간의 서유럽의 교회역사는 기독교적 이상에 도달하려는 사람들과 기독교를 명목상으로만 받아들이거나 기독교를 경멸하는 사람들의 대조를 보여주었다. 이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과 '땅의 도성', 루터의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 왕국'의 대조에 해당한다.
기독교를 명목상으로 받아들이거나 실제로는 기독교를 거부하는 일들이, 사람들을 기독교적 이상에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찍이 만들어진 제도적 교회들 안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예외가 많기는 했으나 교구성직자들, 사제들, 주교들, 대주교들, 교황청 및 교황 자신이 부패하였다. 서유럽의 많은 지역들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섬기고 그것을 기독교적 표준에로 고양시킬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발전해 왔었던 구조들이 이 같은 목적에 도움을 주기보다 장애물이 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특히 교황주의가 초기에는 전 교회개혁의 진원지 역할을 했고, 사회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에 순응하도록 만들었는데, 이 기간 동안(1350~1500년)에는 교황제도 자체가 목적 수행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황이 약 2세대에 걸쳐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 포로로 잡혀갔었고,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한 나라(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이 같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분열을 경험해야 했다. 아비뇽 포로로 인한 대분열 이후 교황청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상적 측면에 굴복하게 되었고, 이태리의 정치게임에 말려들었다. 본래 교회의 구조를 통해서 이상적인 기독교 세계를 실현하려던 제도적 카톨릭 교회가 이 같은 이상의 실현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황청의 대분열을 치유하고 교회를 정화시킬 것으로 기대했던 공 의회주의 역시 성공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서유럽은 교회를 지배하고 교회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려는 절대 군주들을 통한 민족 국가들의 발흥을 경험하였다.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에게 이는 교회에 대한 위협으로 보였음에 틀림없었다. 교회의 세속화를 막으려는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싸움은 여러 전선에서 일어났는데 이중에는 새로운 싸움들도 있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어느 정도 성취된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이 위협을 받았다.
완전한 기독교적 삶을 갈망하여 생긴 수도원운동 역시 활기와 생기를 잃었고 도덕성과 영적 비전을 줄 수 없었다. 심지어는 4~5세대 이전만 해도 명목상의 기독교인 무리들을 그리스도께 헌신케 하며 불신자의 세계를 선교하려고 등장했던 구걸 승단 역시 서방 기독교 세계의 울타리를 넘어서기를 멈추었고, 이 울타리 안에서도 사기를 잃어갔다.
950~1350년 어간에 동안에 서유럽에 발흥했던 수많은 기독교 신앙운동의 불길은 1350~1500년 어간에는 더 이상 타오르지 못했다. 그나마도 타오르려던 불길은 민족주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통해서 부활한 이교주의 및 부와 권력에 대한 집착 등으로 질식되고 말았다. 이 같은 불길은 로마제국의 멸망에 따른 무질서의 서유럽을 복음에 의해서 회복하고 새로운 기독교 문명을 건설할 꿈을 품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불길이었다.
Ⅴ. 중세교회의 다양한 성령 이해
ⅰ. 본체론적 성령 이해
중세 서방 교회의 성령 이해는 대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전통을 따랐다. 서방의 성령 개념은 성령을 내면적 사랑으로 이해하는 내면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11차 톨레도회의(675년)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제 3위격이시며, 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였다. 성령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등하시고, 동일본질(consubstantial)이시라고 하였다. 이것이 후대 스콜라 신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방법론적으로 이용하여 신앙을 설명하였다. 그는 삼위 안에 두 가지 나오심, 즉 '태어나심'(generation) 과 '나오심'(proce- ssion)이 있다고 하였다. 중세 서방교회의 성령론은 대체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시작한 방향, 즉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연합의 띠로 본다든지, 혹은 그가 인간 영혼 분석을 토대로 제시한 마음-지식-사랑, 혹은 기억-지성-의지의 유비를 따라 삼위와 성령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가운데 지성과 의지 작용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설명 예화에 그치지 않고,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내적 생산 방식을 해명하는 열쇠처럼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성령을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으로 본 서방 교회는 자세한 설명 방식이 달랐지만, 성령의 이중발언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까지 이어져서 현대의 스콜라 신학에서도 역시 지성과 사랑이라는 모델에 큰 비중을 두었다.
ⅱ. 성례주의적 성령 이해
중세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다분히 성례전 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나 은혜의 시여도 그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성령의 인격적인 사역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대신에, 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라는 용어들이 나타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와 같이 중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의 사역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례전의 체계와 위계 적인 교회 기관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분배되고 주입되는 은혜, 즉 창조된 은혜였던 것이다. 중세의 은혜론을 성령론 적인 면에서 평가한다면, 성령의 은혜가 인간의 의지와 관계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단순히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과 미덕에 관계된다고 본 점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된다.
ⅲ. 주의주의적 성령 이해
성령의 사역을 우리의 삶의 성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은 오랜 기독교 전통이었다. 성령은 문자 그대로 거룩한 영이요, 우리의 마음(의지)과 행위와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영이다.
동방교회의 전통에서 성령은 신화를 위한 신적 에너지인데, 그 에너지의 활동 결과는 전인적이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면에 있어서는 인간의 의지의 협력에 의한 열심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동방교회의 성화론은 의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ⅳ. 공동체론적 성령 이해
중세 교회에서는 살아 계신 성령의 주권 적인 사역보다도 객관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인 '은혜'에 대한 가르침이 발전하였다. 삼위일체론과 Filiopque 논쟁의 형이상학적 관심을 제외하면, 성령의 사역은 성령이라는 말로서보다는 은혜라는 말로서 대치되었고, 은혜는 여러 가지로 분류되었다. 그리하여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머무르며, 그리스도를 믿으며,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심지어 '창조된 은혜'요, 우리 안에 하나의 잠재적 습성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는 교황을 멀리로 하는 계층 질서의 기관인 교회와, 거기서 집행되는 성례전을 통해 기계적으로 전달되는 것인 양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성령의 역사가 인간의 제도와 기관 안에 갇히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기관의 우두머리들의 인간적 통제에 따라 은혜가 나누어지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중세시대에는 또한 일반 신자의 신앙은 맹목적으로 교회가 믿는 것을 믿는다는 식의 묵종적 신앙 혹은 교회 안에 함몰된 신앙의 개념이 등장하여 교회의 중요성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성령의 주권적 역사는 뒤로 밀려나고 인간의 제도와 기관이 관건이 되게 되었다.
Ⅵ. Filioque문제
Filioque 논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가 서방 교회가 전반적으로 받아들인 내용이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각자의 접근방식과 사고방식의 차이에 따라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드러났다. 특히 이 시기 성령론의 주요 쟁점은 성령의 발원에 관한 것이었다. 'Filioque'란 '아들'(Filius) + '그리고'(que)이라는 말로서 문제는 이 한마디의 말을 교회의 에큐메니칼 신조에 첨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동방 측과의 격렬한 논쟁이 발발하게 된 것은 809년 아아헨 회의에서 샤를마뉴대제가 이것을 동 서방이 공히 받아들이고 있던 에큐메니칼 신조인, 니케아 신조에 삽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발발하게 되었다. 교황 레오 3세는 삽입을 반대하였지만,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이렇게 논쟁이 이어지다가 1014년에 이르러, 서방측의 교황 베네딕트 8세는 공식적으로 Filioque를 신조에 삽입할 것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동서 관계에 치명적이었고, 동서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1054). 서방측에서는 안셀름 이라든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등은 계속 Filioque를 지지하는 이론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제4차 라테란 공의 회에서 페트루스의 견해를 따라 삼위일체와 성령론을 확정지었으며, 드디어 Filioque를 에큐메니칼 신조에 삽입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반면 동방교회측은 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그들은 일단 독자적인 세 위격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였으므로, 서방처럼 성자와 성령을 구분하기 위한 특별한 논리적 해명, '반대적 원천관계' 같은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다.
동방교회는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 전통을 표준으로 고수하려 한 반면, 서방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발전되어 온 전통을 따르려 하였다.
Ⅶ. 현대의 Filioque 논의
ⅰ. Filioque의 찬 반론
Filioque에 대해 찬성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실히 말할 수 있어서 아리우스에 대한 확실한 반론이 된다는 점, 반대적 원천관계로 인하여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와 성령의 구분에 유리하다는 점,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특성이 분명해진다는 점등이다.
Filioque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Filioque를 지지할 경우 신성의 근원이 다중이 됨으로 다신론에 빠지거나 혹은 양태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 성령의 종속적 위치가 심화된다는 점등이다.
ⅱ. Filioque의 현대적 논의
⑴ 바르트
바르트는 '나오심'(procession)과 '보내심'(mission)이 일치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바르트가 강조하는 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일치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그는 성육신이라는 경륜적 행위를 고려할 때, "무슨 권리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는가?"를 질문한다. 즉 하나님의 성육신은 어떤 변덕스럽고 임의적인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의 존재 안에 이미 그가 우리를 위해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적 사건에서 삼위일체로 나타나신다면, 그 하나님의 내적 본질에 그럴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일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오, 자기해석이오 자기반복인 셈이다. 만약 양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은 셈이 되고, 우리의 삼위일체론은 공허한 사변이 되고, 그렇게 되면 계시마저도 공허한 것이 된다. 즉 자신과 다른 어떤 모습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세상에서 본래의 자기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께서 경륜적으로 성령을 보내신다면, 그보다 "먼저 하나님 존재 내적으로" 하나님 존재 안에서 성령은 성자에게서 나오실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오한 신론적인 성찰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논리에는 헛점이 있다. 만일 바르트의 논리를 따른다면, 성령의 Filioque는 이해가 되지만, 성자의 지상 사역을 위해 성령이 성부로부터 성자에게 보내어졌다는 경륜적 사건의 하나님 내적 근거는 무엇인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면은 잘 설명되었지만, 그리스도가 영의 그리스도였다는 점에 대하여는 어떤 하나님 내적 근거를 설명해야 하는가? 그러나 바르트는 이에 대하여 고려하지 않고 있는 듯 하다.
⑵ 몰트만
몰트만은 그의 초기 작품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하나의 새로운 경륜적 삼위일체를 제안하였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Filioque에 대해 다루지 않았지만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서는 입장의 차이가 나타난다. 그는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에서 동 서방 교회의 입장을 중재하려고 한다. 그는 Filioque 문제는 내용적으로 사실상 동 서방의 의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논쟁을 야기한 서방측에서 먼저 취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다. 그러면서 그가 내놓은 절충안은 다음과 같다.
성령의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는 존재론적으로 성부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고, 성령의 얼굴(prosopon)은 미학적으로 성자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성령은 결국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자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 한다. 그의 최근 작품 [생명의 영]에서는 조금 더 나아간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맥락에서 우리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넘어서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향한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서방측의 Filioque에 반대하면서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결국 성령은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와서 성자 안에 쉬며 성자를 통해서 빛난다고 한다. 이것을 그는 전통적인 동방의 용어인 상호침투 관계로 설명한다. 그는 '보내심'과 '나오심'을 동일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는 일면 경륜적 삼위일체의 성령을 '보내심'과 내재적 삼위일체의 성령의 '나오심'의 일치에 반대하면서도, 다른 일면 '그리스도의 영'과 '영의 그리스도'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삼위간의 온전한 상호순환을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일치시킬 수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다.
⑶ 새로운 접근
사실 Filioque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성령의 그리스도였으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사실이다. Filioque지지 여부에 관계없이 중요한 점은 성령이 직접적으로 임재하면서도 어떤 매개를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지성주의의 영향에 물든 서구인들에게는 아마도 Filioque지지 여부에 관계없이, 성령의 사역 자체를 중요시하는 각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다분히 감정적이고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무시한 영성이 강력한 한국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Ⅷ. 나가는 말(신학의 새로운 모색)
이상에서 중세교회의 역사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중세 교회 시대의 모습은 두 가지 '복음의 넘쳐흐르는 능력'으로 표현되었다. 첫 번째 모습은 풀뿌리로부터 솟아오르는-스페인 등에서의- 개혁운동인데, 이들은 기성 교회조직을 파고들었다. 이는 서유럽 기독교를 개혁시킬 수 있는 저력에 속했다. 이들은 많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에 반하여 의식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였다.
두 번째 모습은 지리적 요인으로서 처음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로마제국의 멸망 이전 라틴 문화에 전적으로 동화되었고 6세기 이전에 회심을 경험한 지역들의 경우에는 새로운 운동의 형태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전통적 모형을 따랐다. 반면에 라틴문화에 동화되지 않았거나 영국의 경우처럼 야만족들의 침략으로 라틴문화가 소멸되었거나 6세기 이후까지 기독교적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던 지역들의 경우에는 새로운 형태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위의 두 모습은 향후 여러 세기에 걸쳐 특별한 의미를 갖게 한다. 풀뿌리 기독교인들로부터 솟아오르는 샘물은 큰 강을 이루었다. 한때 로마제국에 해당했던 지역 내에서는 대체로 이 강물이 로마 카톨릭 교회 안으로 넘쳐흘러 들어갔고 이 카톨릭 교회의 도덕적 부패를 깨끗이 씻어내야 했다. 그러나 한때 로마 제국이었던 지역들의 경우에는 이 강물이 로마 카톨릭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를 그만두고 소위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물결로 일어나게 되었다.
성령은 분리보다는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영이시다. 동 서방이 Filiopque 논쟁과 성만찬을 위해서 무교병을 사용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갈가진 것보다는 더욱 중요한 그 뿌리는 문화적 배경과 신학전통의 상이성과 정치적 이유 등이었다. 1988년부터 대두되었던 조용기 목사의 이단시비로 인한 장로교측과 기하성의 매끄럽지 못한 면도 이 동 서방 교회의 일면인 것 같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단지 상대방의 신학에 대한 전 이해의 부족으로 생긴 현상이라 생각한다. 오순절교단이 1997년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 계기로 인해 중세교회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로 좀더 열린 가슴, 따뜻한 마음으로 상대를 보듬어 안을 때 이 시대를 향한 진정한 성령의 메시지가 우리의 귀에 더욱 가까이 들려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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