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品 第一
5. 답(答)을 청하다 (1)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시니
저희 대중들은 이 세계의 여러 가지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잘 봅니다.
부처님의 신통과 지혜가 희유하여 청정한 광명을 놓으시어 한량없는 세계를 비추시니
저희들은 그것을 보고 전에 없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문수보살이시여, 저희들의 의심을 풀어 주소서.
미륵보살이 대중들을 대신해서 문수보살에게
이러한 상서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러한 것들을
문수보살에게 묻습니다.
문수보살은 지혜가 제일이지요.
미륵보살이 또 누굽니까? 마이트리아 라고 미래불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지요.
미래불 이라면 우리들의 꿈이요. 우리들의 희망이요.
우리들의 어떤 미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래불로서의 역할을 이런 데서 잘 하고 있는 거지요.
여기 이 사부대중들이 문수보살님과 저를 우러러봅니다.
세존께서는 무슨 일로 이러한 광명을 놓으십니까?
보살께서 대답하여 저희들의 의문을 풀어주고 기쁘게 하소서.
장차 무슨 이익이 있다고 이러한 광명을 놓으십니까?
“장차 무슨 이익이 있다고 이러한 광명을 놓으십니까?" 그랬습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그 오신 의미가 무엇이고,
우리 중생들에게 무엇을 이익하게 하시렵니까? 이런 질문은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또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신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
아주 질문을 잘하신 것입니다.
맹자에서도 보면 맹자가 양 나라 해왕을 찾아왔는데,
“노인께서 불온천지 하고 우리나라에 오신 것에 대해서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런 이익을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맹자는 그런 말을 했지요.
“하필 왈 이인이고” “하필이면 왜 이익을 말씀 하십니까? 仁과 義가 있습니다.”
물론 참 현인이지요. 성인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현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분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을 설하시려는 것입니까?
저희들을 위하여 수기(授記)를 주시려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 질문이 중요하지요.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을 설하시려는 것입니까?
보리도량에서 얻은 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6년 고행하고 마지막 칠일 간 바른 사유를 거친 뒤에
큰 깨달음을, 수하항마(樹下降魔)라 하지요.
마구니를 항복 받은 것을 깨달음이라고 그렇게도 표현하고,
팔상성도에도 보면 깨달음의 모습은 없습니다.
‘수하항마’(樹下降魔)만 있어요.
‘수하항마’가 그대로 마구니를 다 항복 받음으로써 깨달음이 이루어졌다.
이런 의미로 ‘수하항마’는 있어도 무슨 성도했다. 성도상은 없지요.
그 다음에 어쨌거나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수하항마’ 뒤의 어떤 결과 아니면 아침에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그 깨달음의 내용, 이것을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부처님의 전체 내용이지요.
부처님의 살림살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이고 부처님의 정신세계의 모든 것이다 라고
이렇게 우리가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한 가지를 물었고요. 다시 말하면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깨달음의 내용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 저희들을 위하여 수기를 주시려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 질문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됩니다.
법화경은 당연하고 그 외 다른 경전도 대개 보면 질문이 있고,
그래서 그 경전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가 나타나는데,
특히 법화경은 보면 깨달음의 내용 그리고 수기 이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깨달음의 내용은 흔히 어떻게 우리가 이야기합니까?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다.’ 그런 표현을 서슴없이 합니다.
부처님이 본래 사실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고행 한 것도 아니고,
또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서 고행을 한 것도 아니고,
모든 존재의 실상이 공이라고 하는, 또는 연기라고 하는 그 이치를 알기 위해서
출가해서 수행 한 것도 아니예요.
사실은 본래는 노병사의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보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연구 끝에 고행도 해보고
그 당시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면서 온갖 그런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하다가 최후로 수하에서 진정한 그런 사유를 거친 뒤에 비로소 깨달음을 이루었는데,
그 깨달음의 내용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을
아주 구구하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흔히 ‘마음을 깨달았다.’ 그런 표현이 많구요.
그 다음에 또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런 표현을 합니다.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다’라고 하는 아주 지극히 교학적이고,
초기 불교적인 그런 표현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또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 흔히 말하고 있는 마음을 깨달았다 하는,
그것도 아주 중요한 그런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재의 불교는 불자들에게 물어보면
대개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나? 하면 마음을 깨달았지요.
불교는 마음 깨닫는 공부입니다. 또는 마음 닦는 공부입니다.
마음만 관리 잘 하면은 됩니다. 이런 대답을 듣기가 일쑤입니다.
열이면 칠 팔 명은 아마 그런 대답을 할거예요.
그만치 대승불교를 거쳐서 선불교를 거쳐서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불교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게 거기에 머물러있지요.
옳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달마스님께서 중국에 와 보니까, 많은 경전이 전해져 있었어요.
한 이백년 전 당신이 중국으로 건너오기 이백년 전부터 불교가 있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불교의 핵심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헤매는 것을 보신 달마스님은 ‘선법을 전하노라’고
다른 것은 시시한 것이니 공부 할 것 없다. 살펴볼 필요도 없다.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다(觀心一法 總攝諸行).” 그랬어요.
마음을 관하는 그 한 가지 수행법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다.
육바라밀이니, 간경이니, 염불이니, 주력이니 하는 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는 것이 관심법이다.
그래서 그 후로 마음에 관해서 상당히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다른 이야기들은 대개 접고 마음 쪽으로 이야기가 많이 전개되지요.
그래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또 그 영향도 아주 큽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르쳐서 부처가 되게 한다.
견성성불 그런 아주 참 촌철살인의 아주 훌륭한 명언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간단명료하게, 불교를 정리할 수 있도록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한 마디로 표현할 때
한 글자로 표현할 때 심(心)이다.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이런 표현도 있고,
그 다음에 일체가 다 마음이고 모든 것이 다 식(識)이다.
이런 어떤 심(心) 식(識)에 관한 그런 표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선문에 특히 보면 심법을 이야기 하는 그런 쪽으로 많이 흐르지요.
지금 우리나라에 선에 관해 고조되고 있는데
특히 선종에서는 이 심법을 제일 우선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심법요”니 하는 그런 책은 황벽스님의 법문을 정리한 것인데
심법의 마음에 대한 도리를 아주 요점을 정리해서 알려준다는 그런 뜻이고요.
또 우리나라의 고려 때 보조 지눌스님같은 이들은
“진심직설(眞心直說)”이라고 해서 우리 마음을 바로 이해하도록
가르쳐주는 명저가 있지요.
한국의 명저 속에 들어가는데, “진심직설” 그런 책이 아주 유명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보면 ‘일체 경전과 어록들의 낱말을 전부 마음의 다른 표현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계세요.
그래서 “진심이명(眞心異名)”, 우리들의 참 마음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그렇게 해서 경전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심지’, 또는 반야경에서는 ‘보리’, 화엄경에서는 ‘법계’, 금강경에서는 ‘여래’,
반야경에서는 ‘열반’, 금광명경에서는 ‘여여’, 정명경에서는 ‘법신’,
또 기신론에서는 ‘진여’, 열반경에서는 ‘불성’, 원각경에서는 ‘총지’,
또 승만경에서는 ‘여래장’, 요의경에서는 ‘원각’,
이런 식으로 경전의 중요한 그런 가르침들은 전부 이 하나의 마음!
그 하나의 마음인데, 천 가지의 이름이 된다, 이렇게 해서,
마음 밝히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체다.
그래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도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
이것은 결국은 마음이기 때문에 그 마음의 이치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조사 스님들의 말씀도 결국 가서는
때로는 바른 눈, 정안(正眼)이라고도 하고, 묘심(妙心)이라고도 하고
주인옹(主人翁)이라고도 하고 , 어떤 데는 무저발(無底鉢) - 밑이 없는 바룻대 -
이런 표현도 있구요.
또 어떤 데는 ‘금시’[有時喚作沒絃琴 韻出今時故]라고도 하고
무진등(無盡燈) - 다함이 없는 등불 - 이라고도 하고
무근수(無根樹) - 뿌리없는 나무 - 라고도 하는등 표현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경전의 모든 표현과 조사어록의 모든 표현들을 빌리자면
한마디로 마음 밝히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법화경에서 말하는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을 설하시는 것입니까?’ 라는,
그 내용 속에서는 대승불교와 또 선불교로 아울러서 추려 말씀 드린다면,
마음[心] 한 자로 요약해서 그 답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또 초기불교와 그리고 반야부 경전, 그리고 대승불교 이면에 또 한면으로 깔려있는,
마음의 이치를 밝히는 것 못지않게 또 많은 시간과 장소를 할애 하면서,
표현 하고 있는 것이 `연기`의 이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화경에도 공성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합니다마는,
이 연기의 이치를 또한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되지요.
불교를 우리가 이해를 한다면 마음 못지않게
연기의 도리를 또 잘 이해하고 있어야 됩니다.
연기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법칙입니다.
존재의 원리! 모든 존재는 존재의 법칙이 있고 존재의 원리가 있다.
예를 들어서 마이크 하면 마이크는 마이크대로의 어떤 존재의 법칙이 있고,
연필 하면은 연필대로 존재의 법칙이 있다.
그래서 그런 존재의 법칙을 연기라고 부처님은 깨달았다. 하는 것입니다.
연기라고 보셨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 이치를 우리가 또 소상하게 잘 알아야 됩니다.
마음 못지않게 잘 알아야 돼요.
마음도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 한다. 이렇게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연기의 문제와 마음의 문제, 이것이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 이렇게 나누어서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공히 중요한 것이고 또 그렇게 상관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마음도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연기의 법칙은 결국은 우리의 마음의 본질을 밝히는데,
꼭 알아야 할 법칙이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리도량에서 부처님이 얻으신 미묘한 법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결국 무얼까? 바로 연기의 이치와 일심의 내용이다.
이렇게 요약해서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했다고 하는 것은
‘수기를 주시렵니까?’ 하는 것 이것도,
다른 경전에서도 중요시 여기지만 법화경에서 제일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최후로 유언같이 말씀하신 경전이거든요.
최후로 유언 같이 말씀하셨는데,
궁극적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고 싶었던 정말 남겨두고 싶은,
최후의 한 말씀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곧 수기라고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수기! 수기는 앞으로 수기 하는 형식이 많이 소개가 되고 또 수기품이 있고,
오백 제자 수기품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왜 우리는 수기를 주지 않는가?
이렇게 궁금해 하는 것을 또 부처님은 아시고서 또 수기를 주고,
나중에는 상불경보살의 입을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과거인류나 현재인류, 미래인류에게 까지도 전부 수기를 주는,
그런 입장으로 법화경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증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하는 것을 보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불사상 이라고 내가 늘 강조하는 바로 그 사상인 거지요.
내용인즉 미래에 그대는 어떤어떤 과정을 거쳐서 성불할 것이다 라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고 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대로가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수기를 주십니까? 하는 내용이예요.
그래서 미륵보살이 누굽니까?
미래의 부처님이시고 우리의 꿈이요, 희망이요, 우리의 앞날인데,
그런 책임을 진 미륵보살이 이미 앞으로 설해 질 그 설법의 내용을
요약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을 설하실 것이고, 수기를 설하실 것입니다.
질문이 그대로 답이다 라고 이렇게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곳을 아주 소상하게 부연설명을 하는 거지요.
그 보리도량에서 얻은 미묘한 법이라고 하는 것을
내가 또 둘로 나누어서 이야기 했지요.
연기의 이치와 일심의 이치, 일심의 이치와 연기의 이치, 그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수기는 앞으로 지루할 정도로 여러 번 나올 것이니까
그때 가서 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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