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연관이미지 조선시대의 화순 고려가 1392년 이성계일파에 의하여 멸망하고 신왕조 조선이 개창되었다. 개국초의 제제도는 이성계가 즉위교서에서 「 의장법제는 모두 전조의 고사에 따른다 」로 밝힌대로 고려시대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뒤 점차로 조선적인 제도로 개편되어 1405년(태종 5) 무렵에 그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 정치제도의 중요한 것은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최고정무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명백하게 했으며 첨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에 합병하며 중추원을 폐지하고 군기에 관한 사항은 삼군도총부와 병조에서 맡게 하였다. 또한 삼사를 폐지하여 전곡출납의 관장을 호조에서 맡게 하고 또 문하부와 낭사에서 맡고 있었던 간쟁과 봉박의 임무를 사간원을 신설하여 맡게 함으로써 사헌부와 더불어 태간을 이루도록 하여 예문춘추관을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이분, 예문관에서는 제찬을 춘추관에서는 국사기록을 맡도록 하였으며 승정원을 신설하여 왕명출납을 관장토록 하고 관리임명과 보새부언을 관장하던 상서원에서 관리임명의 기능을 떼어 이조와 병조에 귀속되게 하였다. 조선조초기의 도제는 고려시대의 관행상의 행정구획인 5도 양계 대신에 전국을 경기좌. 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풍해도 등 육도와 동북면, 서북면의 양면으로 하여 육도에는 도관찰, 출척사(관찰사 안렴사로 명칭의 변동이 있었다) 동.서북면에는 도선무순찰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그 밑에 주, 부, 군, 현에는 목사 지군사 현령 감무(작은 현 ) 등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화순군현 조선시대의 화순 군현의 변천을 보면 1394년( 태조 3)에 화순현이 겸임하였던 남평현이 독립되어 감무를 두었고 1396년 (태조 5) 에 화순현을 동복현의 감무가 겸임하였고 1405년(태종 5) 에 동복현 감무를 화순현으로 옮겼다. 1407년( 태종 7) 에 동복현 화순현을 합해 복순현이라 하였고 1413년 ( 태종 13)에 복순현을 화순현으로 고쳤고 1416년( 태종 16) 에 화순현 동복현을 다시 분리하고 동복현에 감무를 두고 화순현은 능성현에 합해 순성현이라 부르게 되었다. 1418년 (태종 18) 에 순성현을 다시 화순현 능성현으로 분리 각각 현감을 두었다. 동복지역에는 고려말엽에 자치고을인 수촌현(구성현) 압곡현 대곡현 보령현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초기에 동복현에 합병되었다. 1435년( 세종 17) 에 화순현이 능성현에 합하고 뒤에 다시 화순현으로 복구되었다고 하나 연대미상이다. 1454년에 완성되고 1473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화순현의 인구는 209호에 615명이고 토성으로는 배, 최, 오, 윤, 하씨의 5개 화순본관 성씨가 있었고 외지로부터 옮겨와 살고 있던 토호 성으로는 순천박씨 진주김씨 무진김씨등이 있었다. 능성현은 136호에 인구는 763명이고 토성으로는 구, 정 , 문, 조, 채, 주씨의 6개 본관성씨와 속성으로 진주강씨 김씨(부지래처)가 있었는데 속성, 강, 김은 모두 향이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복현은 90호이고 인구는 289명이다. 토성으로 오, 성, 박, 선, 화, 지등의 6개 본관성씨와 속성으로 김씨가 기록되어 있다. 1597년( 선조 30) 에 정유재란의 병화로 현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 민원에 의하여 능성현에 속하였다가 1611년( 광해군 3) 에 능성현에서 다시 분리되어 화순현이 되었다. 능성현은 1632년( 인조 10) 에 인조의 모친인 인헌왕후 구씨의 성향이라하여 능성현이 능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641년( 인조 19)에 능주목사가 토포사를 겸하였다. 동복현은 1655년( 효종 6) 에 동복현의 연전패가 불타 화순현에 합해졌다. 주: 전패란 조선시대 지방객사에 「殿」자를 새겨 세운 나무 패인데 이는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방에 출장한 관원이나 수령은 여기에 배례하였으며 만일 훼손하거나 모독하는 경우에는 왕에 대한 불경으로 간주되어 본인과 수령및 그 고을이 처벌을 받았다. 1664년( 현종 5) 에 동복현이 화순현에서 독립되었다. 능주목은 나주우영장에 붙였다. 1895년( 고종 32) 5월 1일 지방제도가 개정되어 전국이 23부제로 개편되고 331군을 두면서 나주부관할로 화순군 능주군 동복군으로 개칭하게 되었고 동년 9월 5일 면, 결, 호수의 다소에 따라 각군의 등급을 정하면서 능주군은 3등군이 되고 화순군 동복군은 4등군이 되었다. 그후 1908년 10월 15일 화순군이 폐지되어 능주군( 당시 17면)에 편입되었고 1913년 능주군의 명칭을 화순군으로 고쳤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동복군을 화순군에 편입하였는데 이때의 면수는 17면 188리이었고 1932년 11월 1일에 면수의 조정으로 13면이 되었다.
기묘사화와 화순유학 조선의 건국은 왕조의 교체만이 아니라 사상면에서도 배불숭유의 커다란 전환을 가져 왔다. 정도전, 권근 등이 이태조를 도와 조선의 건국에 참여했고 그들의 학문적 소양을 새로운 시대의 전장제도의 수립에 기울인 즉 유교이념을 조선왕조의 통치강령으로 확립시켰다. 태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동안 유교사상을 서민에 까지 보급시킴으로써 조선조 오백년을 지배하였다. 조선 왕조의 유교적 정치이념이나 전장 문물제도를 이 경제적 학자들이 주도함과 아울러 정치권력도 이들이 장악하고 학문적 경향은 수기치인의 철학적 연구보다 경국제세의 실사구시적 입장이고 현실적인 통치행위의 수행에 필요한 사장학에 기울어졌다. 이른바 훈구파라 불리는 집단이 이들이다. 조선초기의 유학자는 이들 훈구파와는 학문적 경향을 달리하는 일군의 학자들은 수기를 강조하는 도덕적 입장의 주자학을 일으킨 학풍이 있었다. 사상에서 사림파라 부르는 일파를 형성 하였다. 이들은 성종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게 됨에 이르러 이때까지 중앙정계에서 굳은 지반을 가진 훈구계열과의 사이에 심한 반목과 대립을 일으키게 되었다. 연산군때 이 대립이 폭발하여 무오사화, 갑자사화라는 사화가 일어났으며 그 결과 사림파는 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1519년( 중종 14) 11월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재상이 조광조, 김정, 김제등의 젊은 사림들을 몰아내어 죽이고 혹은 귀양보낸 사건인 기묘사화가 있었다. 중종반정 공신중에서 남수자 76명의 공을 깎은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훈구세력의 미움을 받게 되어 「주초위왕」등의 모략으로 조광조 일파의 사림들을 제거한 것이다. 정암 조광조는 소장 사림들의 지도자였고 38세에 대사헌이었다. 기묘사화로 현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 5일만인 1519년 12월 20일 사약을 마시었다. 정암은 이곳에서 그는 임금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도다. 하늘이 이 땅을 굽어 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 밝게 비추리 (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라고 읊으고 갔다. 그의 시신은 같은 사림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인 현 도곡면 월곡리에 내려와 있던 학보 양팽손의 손으로 현 이양면 증리에 가매장했다가 익년 정암의 유족에게 인도하였다. 능주면 남정리 정암의 유적지에는 1667년( 현종 9)에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능주목사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 기묘사화로 현 동복면 연월리에서 적거생활을 한 신재 최산두는 37세때 의정부 사인(정4품)으로 있을 때 유배되어 51세(1533)가 된 14년만에 유배가 풀렸지만 그대로 이곳에 머물러 2년만인 53세에 그의 생을 마쳤다. 기묘사화로 승문원 교리(종5품) 를 파직당하여 낙향한 학포 양팽손은 29세때 현량과에 뽑혀 정자(정9품)를 거쳐 조광조와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다. 조광조 등 신진사림들은 성리학을 숭상할 것과 민풍을 순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정도정치를 이루는데는 먼저 치자의 수양이 이루어져야 할 것과 도로서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다. " 도라고 하는 것은 천도에 근본해서 사람에 의하여 행하여 지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시책이 된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그 도를 얻으면 기강을 힘써 세우지 않더라도 사람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서고 법도를 힘써 세우려 하지 않더라도 틀리지 않고 정해질 것이니 그 기강법도란 것을 억지로 세우려고 문구로 정해보았자 오히려 국가의 체통을 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이 서지 못하고 끝만 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이 말에서 정치의 근본을 도에 의한 다스림 즉 치자의 수덕에 두고 있음을 볼수 있다. 신진사림들이 훈구세력의 반발로 인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처벌을 당했지만 이 기묘사화는 화순지역의 유학에 큰 관심을 고취시켰고 유학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학의 도학화 경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능주로 유배된 정암 조광조와 동복으로 유배된 신재 최산두와 파직되어 낙향한 학포 양팽순은 서로 교유하면서 학문을 강논하며 지냈으며 정암은 능주에 머문 것은 짧지만 학포는 1537년( 중종 32) 에 복관되어 용담현령으로 부임할 때까지 18년간을 능주에 머물었고 신재는 그의 생을 마친 1536년( 중종 31) 까지 16년간 동복에서 머물렀다. 세칭 사학사라고 추앙하는 최산두, 양팽손, 기준, 박세희의 학사중에서 이학사가 화순지역과 인연을 맺고 있어 그들이 심은 유학의 뿌리를 굳건히 자라고 존숭하는 풍조가 일어남으로써 유학이 지역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최산두는 동복에서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과 같은 유학자를 배출시켰고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여 유풍의 고을 동복이라는 유향의 별칭을 낳게 하였다.
기축사화와 화순 중종 명종 때의 사림과 훈구의 대립을 지나 선조대에 와서는 다시 신구세력의 대립에 따르는 이른바 붕당의 분립이란 현상이 나타나 당쟁기라는 시대를 접어들게 한다. 당파의 분립은 대체로 정치적 입장의 차이, 학문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 학문의 방법, 내지는 처세의 방법 경세관의 차이는 사제 교유등의 인간관계및 지연 등과 엉키게 되어 정치상의 당파로서 확립되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인당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과 이중호, 김안국의 문인들이고 영남 지역인들이 많은 정치적으로는 신진세력과 선조초의 노신들이 결합하여 있었고 서인당은 성혼 이이의 학통을 따르는 기호출신이 많고 정치적으로는 소당의 사류들이다. 동. 서인당의 분립이 화순지방의 사류에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589년 ( 선조 22) 10월에 발생한 기축사화의 전개이다. 기축사화의 전개된 과정을 보면 선조22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전주거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하였다. 평소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던 다수의 사림이 연좌되어 화를 입는 등 일대사화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호남의 사림이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동복 유생 창원정씨 정암수를 비롯한 50여명이 동년 12월 14일에 상소하여 호남지방의 사림들이 연루당했는데 이때 화순지방에서는 창녕조씨 조대중 일가인 그의 형 조민중 그의 질인 조수훈, 조수성, 그의 자인 조수홍,조수흠, 조수경, 조수정 등이 피화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590년( 선조 23) 5월에 역적과 상친했던 자들을 수문하라는 조정의 명에 의해 사화가 확대되어 이때 동인으로 지목된 30여명과 호남사림의 나사침, 나덕명 부자와 조대중일가 , 이발이길형제 등이 혹은 처형되고 혹은 유배됨으로써 혹심한 화를 입게되었다. 정암수들이 조정의 다수의 대신을 지목하였기 때문에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되어 정암수와 소두 10여명이 하옥당하기도 했지만 소중사는 불문에 부치게 하여 사화는 일단 마무리 짓게 되었다. 화순지역에서 이 기축사화의 제소측의 주역이 된 정암수는 동복사림이고 화순의 조대중 일가는 화순사림이라 서로 다른 학통의 대립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암 조광조, 신재 최산두가 기묘사화로 각각 능주와 동복에 유배되고 향리에 은거하던 학포 양팽손이 함께 화순지방에서 머물면서 이룩한 사림의 성장을 중종, 명종, 선조대를 거치면서 더욱 활발하여졌다. 이 기간에 능주지역에서는 죽수서원 건립과 사액활동으로 대표되는 사림들의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동복지방에서는 신재의 학통을 잇는 새로운 학맥이 형성되고 있었으며 동복 현감으로 부임해 왔던 석천 임억령(1533년 부임) 과 한강 정구(1584년 부임) 의 학맥이 기축사화를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분기되었다고 보면 큰 착오는 아닐 것이다. 정치무대에서의 당맥의 분립이 지방사회에 까지 파급되어 특히 호남지방의 사류와 화순지역의 사림들이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게 된 것이 기축사화이다. 이 사화의 여파는 그 후에도 계속되고 동인과 서인, 서인과 남인간에 쟁점을 제공해 주어 정권의 향방에 따라 그 관련자들에 대한 평가가 기복을 나타내고 호남의 사류간에 깊은 반목의 씨앗을 남겨놓은 결과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화순의병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일본군의 제1진이 부산포 상륙으로 임진왜란은 개시되었다. 이 임진왜란은 조선 명 일본의 동양삼국을 뒤흔든 대전란이었다. 더욱 전장이었던 우리나라는 참혹한 피해를 당하였고 사회적으로는 호구와 전결의 감소 중요문화재의 유실 사회경제적 제제도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의식구조상으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명에 대한 모화심이 고조되는 변화를 일으켰다. 임진왜란은 외침의 규모나 그 피해에 있어서도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외침이 빈번하였던 우리 역사에서 외적을 격퇴시켰던 것은 언제나 관군의 역할보다 의병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특징이라 할만하다.이들 의병을 규합하고 조직하여 왜병을 격퇴시킨 의병장은 대부분 문신 유생들이었다. 이들 의병장의 수에 있어서나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곳이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이었다. 왜군이 침입한 경상도의 전투경과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부산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등의 현직관리가 용감히 싸워 순국한 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방관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여 그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데 바빴다. 경상병사 이각은 송상현의 만유을 뿌리치고 소산역을 고수하겠다는 구실로 동래성을 빠져 나갔고 경상좌수영 박홍. 밀양부사 박진 역시 보신에 급급하여 왜군의 침입을 방관하였다. 대부분의 지방수령들의 기성도주의 현상은 강폭한 왜군의 침략에 있었지만 또 한가지는 가렴주구에 시달렸던 민중의 불온한 움직임도 간과할 수 없다. 적의 유린하에 있었던 경상도만이 아니라 북상하는 왜군을 방어하는데 약간의 여유가 있는 서울을 비롯한 타지방에서도 관리들의 움직임은 다를 바가 없었다.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였던 호남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왜란이 발발한지 10여일이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관찰사인 이광은 아무런 조치를 한바 없었다. 이광이 호남의 각현에 동원령을 내리고 관병의 동원령을 받은 각현의 수령들은 모군에 노력하였고 이광의 명명은 잘 시행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모집된 8천여명의 군사들은 모두 쓸모 없는 노약자이고 공주에 이르러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령을 내렸다. 공주해산으로 조정의 엄책과 이차 동원령이 이광에게 하달되었다. 형대원 조인 등의 반란이 일어난 일도 있고 남원 구례 순천의 관군이 삼례역에 이르렀다가 해산하는 등의 혼란이 있었지만 이광은 4만의 전라병사들을 인솔하여 북진하여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의 충청도군사 8천명과 김수가 인솔한 경상도군은 백여명의 군관과 기간병이 합치게 되었다. 이광의 전라도 주력군이 용인현의 10리지점에 진군하였을때 권율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수의 적을 물리쳐 승리에 도취하여 소북산부근 왜군과 싸우다가 기습을 받고 대패하였다. 이리하여 이광은 전주로 윤선각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좌도로 물러갔고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만이 휘하병사 전원을 인솔하고 전라도로 환군하였다. 이와같이 관군이 패북하고 물러서자 호남지방에서는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기 시작하였다. 임란 발생 한달 후에 벌써 전주유생들이 궐기하여 전라좌도의 각 군현에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이 통고문에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각자 자기의 능력에 알맞게 군졸로 혹은 납속과 헌마로써 향토의 방어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전주유생의 통고문에 뒤이어 고부유생들의 격문이 발하여졌는데 이 격문은 기병에의 진일보를 나타내고 있었다. 즉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문무전술가 유생 한량 승려아전 역사 농민 노예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은 5월 27일 전라북도 삼례역에 집합할 것을 호소하였다. 광주에서는 고경명이 5월 29일 기병하고 이보다 앞서 김천일은 나주에서 김제민은 장성에서 변사량은 남원에서 각각 기병하였다 김천일과 고경명은 전라도의 초기 의병장으로서 쌍벽을 이루고 있는데 김천일은 5월 16일 창의기병하였다. 이때 의병진에 참여한 군사는 나주관내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경명도 이 때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으며 5월 23일 담양에서 유팽노, 양대박이 회동하여 병사에 관한 일과 전략 그리고 역할분담이 논의되어 전라좌도의병군의 조직이 구체화 되었다. 동월 29일 담양에 의병집결이 시작되고 6월 7일에 대군의 집결이 완료되었다. 화순의병의 서장을 연 문홍헌은 고경명이 전라좌도의병군을 모집하고 있다는 격문을 받고 3백여명의 화순 능주의 의병과 함께 담양으로 달려갔고 모친 상중에 있던 최경운, 경장, 경회 삼형제는 500여명의 의병과 전마, 군량을 모집 경운의 장자 홍재로 하여금 인솔케 하여 고경명의 막하로 보냈다. 6월 11일 출진하여 태인을 거쳐 전주로 진군하였는데 여기에서 남원의병이 합세 그 병력은 7천명에 가까웠다. 22일 전주를 출발하여 한성으로 북상코자 여산에 진격하였다. 이때 권율군에게 이치에서 격퇴되었던 왜장 소조천융경의 이끄는 왜군이 전라도를 침범하리라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보전이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7월1일 연산현에 유진하였던 고경명 의병군은 충청의병장 조헌과 금산의 적을 칠 것을 약속하였다. 7월 9일 고경명 의병군은 금산성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합세하여 공격하였으나 왜군의 역습으로 관군진이 무너지고 이어 의병진도 비장한 결의로 접전을 하였으나 고경명 이하 유팽노 안영 등의 장령과 다수의 의병이 순국하였다. 김천일의병군은 초기활동에 두드러지는 전과는 없었으나 그의 의병군이 경기도에 진격하여 민중들에 용기를 주고 왜군격퇴의 적개심을 높이고 왜군의 거점에 잠입하여 항왜의 의식고취와 왜적을 살상함으로써 민중들에게 항전을 지도하여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전라도 제2기 의병장의 한 사람인 최경회가 기병을 결심한 것은 이광군의 용인패전과 고경명의 금산패전후 의병장으로서 활동하기를 간청한 문홍헌의 호소한 힘이 적지 않았다. 1590년(선조 23) 12월 17일 모부인 평택임씨의 상중이었으나 최씨 삼형제는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규합을 하였다. 최경회는 7월 24일 전라도 의병군의 부대편성을 끝내고 부대기는 "골"자로 하였다. 의병군의 조직은 전부장에 판관인 송대창이고 좌부장에는 군수인 고득뢰이고 후부장에는 현감인 허일이고 우부장에는 경력인 권극평이고 참모에는 진사인 문홍헌이었다. 전라우도의병군의 조직이 정비된 이 때의 의병수는 일휴당실기에는 5천여명이라하였다. 이 진용을 갖춘 후에 북상을 개시하여 장수로 진군하여 주변의 적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9월 22일 에는 전라우도의병군인 최경회군과 전라좌도의병군인 임계영군이 남원에 이진하였다. 이진한 이유는 부산에서 전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으나 함안 의령으로 하여 함양과 안의에 이르러 소백산맥의 험령인 팔량치와 육십령을 넘어 운봉 남원과 장수 진안으로 나가는 것이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최경회의 의병군이 장수에서 전라도에 침입하려는 적을 방어함과 동시에 금산 등지의 잔적에 대한 감시를 하다가 왜적이 경상도로 후퇴하였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인 장수에 유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전라의병군이 남원에 10여일 유진하고 있었는데 경상우순찰사가 첨정 조종도을 보내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최경회장군의 부하들이 '지금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어찌 호남지방을 버리고 멀리 영남우도를 구원해야 합니까" 라며 반대를 하였다. "호남지방도 우리나라 땅이요 영남지방도 우리 국토다 의를 위해 장수가 된 사람이 어찌 멀고 가까운 곳을 따져 구원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최경회장군은 이와 같은 말로 부하장졸을 설득시켰다. 그리고 남원을 출발하여 운봉 함양을 거쳐 왜군이 공격의 목표가 되어 있는 진주성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때의 구원군은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하여 이강, 이원, 최경회, 임계영 등과 기타 관병이었는데 10월 5일에서 10일까지의 제1차 진주성 전투는 금시민이하의 수성군의 선전과 구원군의 외곽에 있는 왜군의 격퇴로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다. 진주성의 승리후에 전라도의병장인 최경회장군의 의병군은 경상도 의병장인 김면의 요청으로 개녕으로 이동하였다. 김면은 동분서주하며 거창 섬천의 치안을 확보하였으나 방어하기에 힘에 겨워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 때 성주방면에서는 경상도 의병장 정인홍과 전라좌도의병장 임계영은 외적과 싸우고 있었으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시급히 구원하라는 요청에 김면은 주력을 성주방면으로 급파 구원하였고 최경회의 의병군은 개녕에 있던 모리휘원의 왜군이 성주성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일이었다. 성주성에 있는 적군은 6백명에 불과했지만 개녕에는 모리휘원의 강력한 왜군 6군이 성주성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탈환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제3차 성주성 탈환전은 관군과의 합동전이 아닌 전라도의병군과 경상도 의병군의 협동으로 훌륭히 수행하여 1593년 1월 15일 월명을 이용하여 성주성내에 있던 왜군이 철수하였음으로 성주성을 수복하게 되었다. 1593년(선조 26) 4월에 최경회장군은 경상우병사가 되었다. 이해 2월에서 5월까지 우리 관군과 의병은 함안을 중심으로 선산 의령 등지에 포진하고 소강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6월 15일 부터 왜의 대군이 작전을 시작하여 함안을 점령하고 이어 낙동강을 건너 의령을 점령하였다. 바로 이와같은 왜적의 양동작전은 진주성이 위험하다는 신호였다. 이에 함안부근의 관군과 의병의 최고 지휘관의 합동회의가 있었는데 진주성 수성에 이견이 노정되었다. 즉 30만의 왜군을 대적할 수 없다는 측은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권율, 의병장 곽재우등이고 서사고수를 주장한 경상우병사 최경회와 전라도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등이었다. 진주성의 고수문제는 전술과 전략상에 이견이 노정되어 합의점을 얻지 못한채 독자적 판단에 맡겨졌다.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권율 등은남원 운봉으로 떠났고 의병장 곽재우는 원성현을 거쳐 산읍으로 갔고 전라도좌의병장 임계영은 사천에서 호남으로 돌아갔고 전라병사 선거이 등의 제장들은 흩어져 버렸다. 입성한 관군과 의병은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6백명과 창의사 김천일의 5백명과 충청병사 황진의 7백명과 복구 의병장 고종후의 4백명과 사천현감 장윤의 3백명과 적개의병부장 이잠의 3백명과 의병장 민여운의 2백명 의병장 이계연의 1백명 이외에 목사 서예원 등이었다. 이에 대하여 왜군측은 가승청정 모리수지 소서행장 등 장수의 군병 9만3천의 대병력이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을 맞이한 진주성의 혈투는 10일간이나 계속 되었는데 첫 달인 6월 19일에 적군은 의령현에서 진주성으로 진격하여 왔는데 아군은 정병을 선발하여 단성현과 삼가현의 적정을 수색하는 한편 복병장을보내 곤양현과 사천현 방면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6월 21일 적이 이미 진주의 동북쪽 산위에 출몰하였다. 그중 백여기는 마현봉에 나타났고 또 성동 북산상에 출몰하였다. 또 이와 동시에 적의 대군이 세겹으로 성을 포위하였으나 공격하지 않아 응전태세만 갖추고 있었다. 적이 성의 서북쪽 호의 물을 뽑고 흙으로 메꾼 뒤에 대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6월 22일 오전 10시경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전투가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수성군은 3차의 파상공격을 선방하였으나 외원군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임우화를 구원사로 보냈으나 적에게 생포되었다. 6월 23일 왜군이 아침부터 성중에 조총을 집중적으로 사격하고 호의 물을 뽑아 말린 뒤 길을 마들고 성벽 밑으로 굴진작업을 하여 성벽의 초석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이날 성중에서는 주간 3회, 야간 4회의 적의 공격을 저지시켰다. 6월 24일 적이 5~6천명의 병력을 증가하여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였다. 목사 서예원의 무능과 비겁한 행동으로 최경회와 김천일이 상의하여 전라좌의병부장이던 장윤을 서예원을 대신하여 그 직을 맡게 하였다. 6월 25일 적이 동문밖에 30보되는 지점에 토산을 만들어 조총을 쏘므로 황진이 성내에서도 토산을 만들어 현자총통으로 대항하였다. 이날도 왜군은 주간에 삼진삼퇴 야간에 사진사퇴하였다. 6월 25일 적이 큰 나무궤(목궤)를 만들어 우피를 씌우고 머리에 이고 성벽에 이르러 성벽을 헐기 시작하니 성중에서는 큰돌을 굴러 떨어뜨리고 또 총통을 쏘아 적을 물리쳤다. 적은 다시 동문밖에 판옥을 설치하고 화전을 쏘아 방화하니 초옥들의 화염으로 장천하였다. 성중에서도 판옥을 설치하여 그곳에 대포를 쏘아 적을 퇴각시켰다. 이날도 주간에 3회, 야간에 4회의 접전이 있었다. 연일의 비에 수성군의 궁시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또한 군사들도 지쳐 있었다. 거제현령 김준민이 용전끝에 전사하였다. 6월 27일 적이 성중에 투서하여 강복을 종용하였다. 적이 귀갑차위에 정병수십명을 싣고 성에 육박한 뒤에 철추로써 성벽을 뚫으니 황진이 기름 묻힌 섶에 불을 붙여 투하하여 귀갑차를 불태웠다. 이날 전투에서 표의병부장 강포보가 전사하였다. 6월 28일 서예원의 경계태만으로 그의 담당구역인 성벽이 야간작업을 한 왜군에 의하여 뚫린 상태에 으르자 이곳으로 등성하려는 적을 황진, 이종인 등의 용전으로 겨우 격퇴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순성장 황진이 전사하여 수성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6월 29일 충청병사 황진의 전사로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겁을 먹고 전립을 벗고 말을 타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가자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이를 보고 군중을 경동케 한다고 대노하여 그의 목을 베려고 하다가 주위의 말림으로 참았으나 곧 사천현감 장윤도 순성도중 적탄에 맞고 전사하였다. 오후 2시경에 연일의 장마비로 성의 동문이 무너지자 귀갑차를 이용한 적이 성벽을 철정으로 파괴하고 이곳으로 성내로 침입하여 왔다. 이종인과 그의 정병이 이를 퇴각하였다. 그러나 적은 서북문도 같은 수법으로 공격해 오자 김천일 창의사군이 밀리기 시작했으며 서예원은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니 모든 군사들이 괴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장령들은 촉석루로 후퇴하게 되었는데 최경회는 문홍헌이 호위하고 김천일은 장자 상건과 양산숙이 부지하고 고종후는 오빈, 김계휘, 고경원이 부조하여 북향재배한 뒤에 남강에 투신하였다. 또한 이종인, 강희열, 오유, 이잠 등 10여명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최경회장군과 순절한 이는 현감 허일, 경정 권극평, 군수 고득뢰, 판관 송대창, 주부 김예수, 진사 문홍헌, 유학 구희, 주부 최희립, 판관 노희상, 생원 이영근, 부장 최억용, 유학 안기중, 수문장 노언경, 만호 오방한, 유학 박혁기, 유학 노자니, 주부 안기남, 선전 정봉수, 생원 정현보, 무과 위정설, 유학 최개 등과 군사들이었다.(일휴당집에 의함) 진주성의 함락은 임란 최대의 비극이었으며 선조때의 명 재상 유성용은 진주성 함락에 대하여 적의 병력이 아군에 비해 강대하였고 진주성 방어에 대한 서예원의 착치가 적절하지 못했고 명령체계가 단일화되지 못하고 각군이 분리되었고 제장의 정세판단의 미숙에 따른 함안에서의 분산된 점과 수성군에 대한 적의 외원로 차단으로 외원이 없었다는 점을 진주성 함락의 원인으로 말하고 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전라의병은 최경회장군의 휘하에서 싸운 화순지역의 의병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오직 불타는 적개심과 왜적의 격퇴만이 민족과 국토의 보전이며 향토의 방어에 직결되는 길이라 믿고 의병장의 입성고수에 대해 순종하였고 불리한 조건에도 의연히 생명을 바쳐 방어하였던 숭고하고 의로운 정신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유재란과 화순 1596년(선조 29) 9월 화의의 교섭이 깨어지자 다시 왜군은 재침하여 왔다. 1597년(선조 30) 정월 15일에 14,500여명의 병력을 선봉으로 침구하기 시작하여 3월 중순부터는 대군이 내도하여 부산을 거쳐 기장 울산등을 점거하고 웅천 김해 진주 사천방면으로 진출하였고 7월에는 전라도 해안으로부터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정유재란때의 왜군의 폭학은 임진란때 보다 더욱 심하였다. 또 이때는임진난때 보전되었던 전라도가 적에게 유린당하였다. 당시의 왜군의 잔학상에 대하여 강항(1567~ 1618)은 수은 간양록에 " 정유지란에 풍신수길이 여러 왜장들에게 명하여 할비로서 수급을 대신케 하였으므로 왜졸들은 아국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빈번히 죽이고 그 코를 베어 이것을 소금에 담아서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유성용(1542~ 1607)도 징비록에서 " 이 때에 적이 삼도를 짓밟아 지나가는 곳마다 여사를 모두 분소하고 백성을 살육 하였으니 무릇 아국 사람을 보기만 하면 모조리 코를 베어서 공으로 삼고 겸하여 시멸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김시양(1581~ 1643)은 자해필담에서 곧 바로 호남이 당한 참화를 지적한 글을 보면 "적이 호남에서 장구하여 진격하였는데 곳마다 임진때 보다 더욱 심하게 약탈 살생을 자행하였는데 사람을 만나면 모두 그 코를 베고 촌락에 들어가서는 모두 분탕하여 재목마저 남기지 않았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화순지역에 왜군이 침입한 것은 7월 말경부터이며 승주방면과 보성방면에서 침략의 독아를 드러냈다. 승주방면에서 내습한 적은 동복현을 유린하고 화순현으로 들어왔었다. 잔악한 만행과 함께 약탈과 방화 등으로 짓밟자 이를 좌시할 수 없어 최경운(최경회장군의 장형)은 각처에 격문을 띄우고 향민 가솔 노비 등 5백여명과 함께 화순현의 수호성인 오성산성에 들어가서 산성을 수축하고 향토를 수호하겠다는 충천하는 적개일념으로 왜병 3천여명과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며 항거하여 삼서야의 사투를 계속하였다. 2백여명의 향민이 산화하였다. 보성방면에서 침입한 왜군을 능성현의 와곽성인 예성산성에서 임란시 이순신장군의 막하에서 싸웠던 김대인이 이곳 거사 김영철과 향민과 함께 장기항전을 대비하여 식량과 군비를 갖추고 완강히 대항하자 왜군은 장기간 산성을 포위하고 있으면 식량과 식수의 고갈로 스스로 항복할 것으로 믿고 장기전을 펴고 있었으나 전술에 능한 김대인의 기습과 완강한 항전이 계속되자 왜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여 갔다. 이 예성산성의 항전을 지휘한 김대인은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서 그 용력을 인정받아 중용되었으나 1597년 이순신이 좌수영을 떠나니 그 후임인 원균휘하에 있었는데 이해 정유재란으로 원균이 패하여 죽자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여 해안 곳곳에서 적을 무찌르고 광양싸움에서 전상을 입었다. 그러나 다시 출전하여 예성산성에 웅거하면서 능주일대를 수호하였다. 임치첨절제사에 임명되었으나 뜻에 맞지 않아 퇴직한후 좌수사 이유직의 비행을 면박하다가 의금부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치사되었다. 선무원종공신에 록하고 병조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숙공이다. 순천 송천사에 배향되었다. 화순읍지 능주읍지 동복읍지에 정유재란시와 관련된 열녀 효자 등의 기사가 많이 기재되어 있는 것은 왜군의 만행으로 수난당한 당시의 이 고장 여성들이 부도를 지키기위해 강에 투신하였고 자결하였으며 부모의 수난을 보고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한 자식의 도리를 다한 예기로서 정유재란의 참혹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화순현은 정유재란의 참화를 입고 현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 민원으로 폐현시키고 능성현에 소속시켰다가 후에 1611년(광해군 3) 에 복현한 역사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병자호란과 화순창의1 1636년(인조 14)인 병자년 12월에 청 태종은 조선의 맹약위배에 대한 문죄라는 명목으로써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왔다.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급속도로 진군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응징을 검찰사로 임명하여 적을 막도록 하였고 종묘사직의 신주와 비빈 원손 봉림대군 등을 강화로 피난가게 하였다. 인조도 강화로 가려고 하였으나 청군의 진격으로 길이 막혔기 때문에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남한산성은 군량이 부족하고 군사들의 사기도 하락되어 있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의 방어전략을 세우고 사기진작에 힘썼고 팔도에 교서를 내려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적의 선봉이 16일에 남한산성에 도달하여 25일에는 남한산성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성중에서는 가끔 출격하여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혹한과 식량부족으로 비참한 지경이고 원병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도원수군을 비롯하여 팔도의 감사병사의 군도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여 흩어지고 있었다. 다만 전라병사 김준용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렸으나 이 또한 역습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민간에서는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였거나 진군도중 화의가 이루어져 부득기통곡하고 해산하였으며 기대하였던 명의 구병도 오지 않고 남한산성은 독립무원속에서 10만의 청군과 대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정세하에서 강화와 주전 두갈림길에서 화의를 위한 접촉이 계속되었다. 1637년(인조 15) 정월 2일에 화의교섭이 이루어져 20여일간 양국사신이 오갔다. 1월 22일 소현세자 및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비롯한 제신이 피난하고 있던 강화의 함락소식을 접한 인조는 충격을 받고 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드디어 1월 30일 삼전도에서 신하의 예로서 청제에게 항복하였다. 화의가 굴욕적 조건하에 체결되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하여 병자호란은 일단락되었다. 병자호란을 맞이하여 격렬한 항쟁으로 전공을 세운 이도 전라병사 김준용을 중심으로 한 전라병사였고 의병이었다. 화순에서 창의한 진사조수성과 그의 종질 조황등의 의병활동이 있었다. 병자년 12월 25일 아침 교서를 받고 즉시 거의하는 격문을 사방으로 보냈다. 이들은 광주유사에 고전립, 박사원등 나주유사에 유준, 홍명기 등 능주유사에 양우전 등 남평유사에 서행 등 순천유사에 김시호 등 동복유사에 정호민 등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화순현의 객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모병과 훈련으로 진열을 가다듬고 다음해인 1537년(인조 15) 1월 11일 500여명의 의병군으로 출정하여 전주부를 거쳐 19일 여산에 도착하여 이흥발, 이기발, 형제의 의병과 합류하고 25일에는 전의병이 회맹하여 도서를 정하였다. 조수성을 의병도대장으로서 통군하고 부장에는 고전립, 유준, 문제극, 윤숙, 임시태, 유함, 서행, 허섬, 정호민, 신필, 이희태, 염성립, 박기호, 남이녕, 김이겸, 윤속, 박진빈, 박춘수, 유영용, 기의헌, 유탁, 최기종, 송욱, 신덕성, 조수, 김태운, 이정순,나위문, 어여길이었다. 중군의 의병대장에는 이흥발이고 부장에는 양산익, 유평, 윤검, 주엽, 이민신, 유정명, 김종지, 이희, 이종신, 임시경, 윤인미, 정호례, 조수헌, 조극눌, 윤유익, 김상경, 정여숙, 강시언, 김여옥이었다. 전군에는 이기발이 의병대장이고 부장에는 김홍서, 임황, 정남일, 김연지, 박광형,임게 , 김경백, 임시준, 오이두, 임득열, 조행립, 정색, 김연, 오정엽이었다. 우군에는 유집이 의병대장이고 부장에는 김지문, 신여의, 김남식, 김홍원, 김려, 김명설, 김공립, 이중겸, 임시계, 정민구, 박종, 이정신, 최신헌, 양제용이었다. 좌군에는 최온이 의병대장이고 부장에는 강시억, 백상하, 윤선계, 이순, 김확, 안처공, 임시민, 유현, 고전민, 최경행, 현속, 이덕양, 박창우, 남수였다. 후군에는 조광이 의병대장이고 부장에는 최명해, 박상진, 공우길, 박사원, 최진강, 이환, 민팽령, 이순, 정반, 박충정,허정양, 강시만, 김성원, 이정태, 운향에는 양만용이 의병대장이고 부장에는 박충겸, 홍명기, 문인극, 위홍원, 서진명, 홍남동, 정지준,박현인, 유사, 정연륭, 송유문, 정환, 김선, 장경흡, 양우전이었다. 향도대장에는 조원겸, 부장에는 한명남, 이필대이고 독전대장에는 박원종, 부장에는 노덕량, 최판용이었다. 돌격대장에는 편성대, 부장에는 정집, 태성길이었고 훈련대장에는 김위징, 부장에는 박득춘, 김여옥이었다. 주병대장에는 배홍립, 부장에는 윤덕화, 박춘열이었고 승병대장에는 혼성, 부장에는 각심 지삼이었다. 상종사에는 조수천, 종사에는 임단, 최휘지, 부종사에는 최신헌, 임기영, 김단, 이휘이고 종군자제에는 조욱, 김지순, 백상후, 임시익, 김전, 조위, 조찬, 공형길, 김지영, 강시건, 조혁, 임시약, 조예남, 김지서, 김기. 장익송, 임시진, 유명익, 신여원, 신금, 이정구, 이정기, 이정근, 배구였다. 이들 의병군은 1월 29일 청주에 도착하여 적정을 탐색하고 교전을 준비하였다. 2월 4일 군비를 갖추고 진군하려할 때 강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조수성은 "천지간무일장부"라 하며 의관문물지방으로서 도리어 견양의 무리에 굴복하니 존양(존중화양제적)의 의가 없다고 크게 탄식하였다. 의병을 해산하고 2월 15일 조수성을 비롯하여 화순지역의 의병은 본가로 돌아왔다. 병자호란에 거의한 의병들은 임진년 왜란시 의연히 의병대열에서 활약한 선열들의 후예로서 국가의 변란시마다 타지방에 앞서 나라를 위하여 거의하였던 화순의 절의는 높이 숭앙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호남병자창의록
● 청강조공수성거의일지(병자호란 창의록 제 5권) 숭정병자 12월 25일 (1636.12.25)에 행궁의 반교문이 이르니 조공수성이 아침식사를 하다가 봉독하였다. 채 절반도 읽지 못해 목이 메어 말을 못하고 상을 물리면서 종질인 진사광을 불러 교문을 읽게 했다. 광역시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공이 광에게 이르기를 "우리 가문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되 보답할 날이 없더니 국가의 위급이 이와같으매 이는 마땅히 임금을 위해 신하가 죽어야할 때이다. 내가 비록 노렬하나 일대의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죽음을 각오코자 하노라. 너도 기꺼이 나를 따르겠느냐" 하였다. 광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종숙부님의 말씀이 없으시면 조카가 청하려 하였는데 이미 명령을 받은 지라 감이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노기가 충척하고 국세가 어려움에 처했으니 시각을 지체말고 즉시 부난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하였다. 공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너의 말이 정히 내뜻에 합당하도다"하고 즉시 관복을 갖추고 근왕사적할 의사를 가묘에 아뢰니 가솔이 슬퍼하며 우는 자 많커늘 공이 꾸짖어 외당으로 보내고 자 욱, 손 정유를 불러 이르되 " 너희는 함께 죽지 못할 것이다. 욱은 당연히 나를 따를 것이요, 정유는 집에 남아 선사를 받들지어다" 하였다. 다시 수노인 산이, 무진금, 용이들을 불러 분부하기를 " 군신과 노주은 곧 일의이다. 내가 장차 신하로써 임금을 위해 죽을 것이니, 너희는 종으로써 주인을 위해 죽은 것이 당연하다. 내가 이미 임금을 위해 죽을 것을 결심하였으니, 조금이라도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 하는데 사기가 강개하니, 노복들이 흐느껴 울고 두려워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광이 말하기를 "양가에 비록 약간의 노복이 있으나 가히 이들로 행군치 못하고 반드시 읍중에 나아가 모의청을 설치해서 제단의 군복 군기를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러면 다소의 날짜가 소요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노배의 부모, 처자가 혹 자주 왕래하는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규율이 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 장차 군정이 해이될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받아 들여 양가 노속의 처자 수십을 불러 뜰 아래 불러놓고 여성분부하기를 "너희 무리가 모두 지우필부이라 어찌 군법을 알리요. 군법에 여자로 군중에 출입하면 참형하며 행군할 즈음에 혹시 바라보고 울게되면 군사가 크게 불리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 무리는 행여나 어미로서 아들을 방문하고, 아내로서 남편을 방문하고, 자매로서 동기를 방문해서 주식을 접대한다는 구실로 의병청에 접근하다가 탄로가 나게 되면 군중에 조리돌려 군문밖에 효수(梟首)할 것이며 범율한 자의 남편이나 아들까지 참형하리라" 하였다. 노복들이 모두 다 두려워 하였다. 다시 따뜻하게 효유하기를 "사람치고 뉘 죽지 않으리오만 국사에 죽는다면 죽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되는 것이요, 또 군에 가는자가 꼭 죽는다고 할 수는 없다. 혹시 적을 죽여 성공한다면 반드시 포상할 것이요. 나 또한 너희들을 속량하리라"고 분부하고 모두 내어 보냈다. 그리고 가정사에는 전연 언급함이 없이 즉시 가동 53명과 종질 가노. 46명을 점검하여 만연사에 패자를 보내어 청색영번 일쌍.동각 일쌍.쟁고 각 하나씩을 가져오게 하였다. 또 집에 있는 마상도 이병을 내어 종질과 나누어 차니, 향중의 대소 인민이 공환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인이 주찬을 올리니, 공은 본래 술을 즐기지 아니하나, 이날을 큰잔을 명하여 종질과 함께 오배를 연음하고, 드디어 말에 올랐다. 이졸이 집기 전도하고 북을 한번 울리니 가동 백여명이 이미 가도에 집합하여 한사람도 뒤에 처지는 자가 없었다. 공이 앞서며 종질이 뒤에서 서서히 행군하여 읍중으로 향해가니 현감 유훤이 공의 숙질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망히 나와 맞아 집수상읍하고 객사중, 대청문밖에 의병청을 설치하였다. 향유 임시태, 최명해가 분연히 내회할 세 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공이 와서 도와주니 대사가 이루어지리라" 한편으로 병기를 주조할새 치장이 7명, 궁장이 5명이었다. 한편으로 열읍에 격문을 놓아 각각 유사를 분부할새 능주에는 양우전, 문제극, 민팽령, 남평에는 서행, 정반, 윤숙, 나주에는 최진강, 유준, 홍명기, 이환, 광주에는 고전립, 박사원, 유동환, 신필, 동복에는 정호민, 김성원이다. 공은 종질과 함께 의청을 지키고 자 욱은 집에 내왕하며 군복 군향의 변득을 맡고, 최명해, 임시태 및 종제 수헌, 종질 찬은 장정을 모취, 마필을 매입하는 등을 각기 분담하였다. 12월 26일 오후에 최명해가 장정 9명을 모래하고 석양에 임시태가 17명을 모래하였다. 공이 제유사에게 말하기를 "국가 존망이 조석간에 매어 있으므로 우리가 만사를 무릎쓰고 이 거사를 일으켰으니 의당 주야로 부난할 것이요, 시각을 지체치 말 일이다. 내가 호남 각읍에 격문할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다못 인근 수읍에만 격문 한 것은 대개 너무 거창하여 천취될까 우려함이라." 행사급무는 양향이 위선이라 하고, 가저한 백미23석을 손출하니. 종질이 20석 최공이 10석, 임공이 8석을 각각 손출하였다. 자 욱에게 말하되 "너는 귀가하여 군복 양향 등을 단속하라"하였다. 그리고 " 양가에서 수습한 군정이 자못 백명에 이르나 모두가 우리 노속이 아니요, 호하양정이 많은지라 대부분 위협해서 몰아온 것이니 어찌 의리를 알아 죽기를 즐거워하랴, 몸은 비록 여기에 있으나 마음은 집에 있을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후히 애무해서 가솔의 기한한 자를 구휼하여, 장정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또한 어융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하였다. 향유 유함이 들어와 말하기를 "제군의 의거를 듣고 와 서로 도우려 한다"하였다. 이에 읍거 한량인 김진성, 김위징, 배홍립, 편성대, 한명남 등을 불러 행군규모 모정방략을 상의할새 유함도 역시 장정을 모취하여 부의할 것을 자원하였다. 손 정유가 양미를 가져오니, 배홍립을 군향색이로 삼아 양미를 청전고중에 봉치케하고, 편성대는 진법에 능숙하므로 대오장을 삼아 군정을 훈련케하며 의거에 응하고 양미를 수급하여 줄 것을 각면 각촌에 두루 고하였다. 12월 27일에 화순 만연사. 능주 쌍봉사, 석천사, 남평 운흥사, 동복 영봉사,유마사, 순천 송광사, 서남사, 광주 증심사, 영암 도갑사, 해남 대흥사 등처에 패자를 보내어 전립 등을 수납하게 하였다. 종질가에서 양미를 수납하였다. 금위징으로서 영병군관을 삼아 군안을 써서 작성케 하고 각사찰, 각동리의 대정중정 및 각 가정의 정 16개를 운반해다가 군졸 16명으로 작번주향하되 장정은 1승, 의청회원은 7합으로 마련하였다. 만연사 승 지삼, 지환, 경훈 등이 별지 10속을 바쳐 군중일기의 자품을 하였다. 향인 장경흡, 노덕량 등이 여력이 과인한지라 각별히 초청하여 동사할 것을 시사하였더니 덕량이 친노로 사양하는지라 공이 말하기를 "너에게 두 형이 있으니 독자나 무형제한 자가 아닌즉 옛적 위공자 군중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너의 귀양할 것을 불허하리라."하고 다시 주진신사의 의리로 효유하니 노 적시 감복하여 다시 사양치 아니하였다. 향유 공우길, 공형길 등이 군정 15명, 양미 각 3석을 , 최기종이 군정 14명, 양미 8석을, 임시민, 임시경, 임시익,임시준, 임시계 등이 군정 18명, 양미 25석, 철 40근을 자당하고 모두가 종의할 것을 자원하였다. 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제군이 이와같이 응모하니, 충의지심이 본래축적한 것이 아니면 어찌 능할손가" 하고 칭찬하였다. 손정유가 오석의 쌀을 수래하니, 공이 말하되 "오합단순약한 군정은 마땅히 한번 호군시켜 사기를 진작시킬 것이라. 너는 즉시 대우 2필을 가져와서 명월 호군에 유급하라." 하였다. 그날밤 공이 종질 및 최 임과 함께 촛불을 밝히고 병서를 볼제 밤이 이미 깊으니 이, 사졸은 다 깊이 잠이 들었다. 유후(현감) 가 몰래 사람을 시켜 엿보고 탄식하기를 "내가 매양 사람을 시켜 밤마다 엿보았으나 종시 해이치 아니하고 더욱더 독실하다. 초야에 묻힌 선비의 충관이 이와 같으니. 식록하는 우리들이야말로 마땅히 부끄러워 죽을 일이다."하고 드디어 보인 관노 30명 양미20석을 허급하고 이르되, "본읍 병기를 상영원군에 이미 수급하였으니, 금방 특별히 궁전 40부, 장창 20병을 만들어 의거를 도우리라"하였다. 공이 말하되 "금일지변은 갑자란에 비할바 아니라 마땅히 성야를 다투어 부적할 것이요, 가히 시각을 체유치 못할 것이니, 이미 허급한 보정만 명효에 보내주면 가할까 한다."하였다. 유후가 허락하였다. 12월 28일 조반후에 유후가 보낸 군정 30명이 일제히 도착하였다. 이중 이자는 건각병이있고 서지금은 부모가 구몰하여 아직 엄토를 못하였다 하므로 특허하여 돌려 보냈다. 종제 수헌이 가동 5명, 군정 10명, 양미 4석,강철 35근을 모래하고, 사제 수천이 군정 10명을 모래하였다. 손 정유가 대우 2필을 변래하니, 공이 말하되 "명일 호군하리라"하였다. 광주, 남평, 동복 유사가 다다르니 공이 종질 및 최 임 양인으로 하여금 군문밖에 나가 영접하여 상읍하였다. 빈주지례를 마치고 좌정하니 광주유사 고전립이 말하기를 "공이 노경으로써 분신거의하니, 이는 소위 대의로 성토하는 자는 당목장담해서 사생을 불고함이라 군정, 양미, 기계를 마땅히 극력 모득하여 언언영송 하리라" 하였다. 공이 말하되 "내가 비록 먼저 창의하였으나 공등의 상응이 아니면 어찌 부난할 것을 바랄 수 있으랴, 원컨데, 제공은 돌아가시어 기한내로 많이 모취할찌어다."하였다. 제유사 응낙하고 돌아갔다. 오후에 눈이 내렸다. 신시에 이흥발, 양만용 드의 창의격문이 올새 격문 중에 공의 숙질 및 최 임 양인으로써 화순 모의 유사를 부탁했다. 공이 말하되 "우리 사인이 이미 의거하였고 이 격문이 마침 이르니 이 어찌 불모이동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약간의 병양을 모취하였으니 합력해서 부적하는 것이 가할 것이요 남의 휘하에 부종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고 즉시 최명해로 하여금 이흥발의 영중에 가서 치군하는 형세를 살피고 또, 회합일자를 고하라"하였다. 능주 유사 3원이 어둠속을 타고 와서 말하되"군정을 졸연히 많이 모취하기 어려워 교생중에서 7명을 얻고 양미는 가중에서 각출해서 10석을 가져왔으니, 검전 마필은 돌아가서 극력 모취하여 송부하리라" 하였다. 공이 말하되 "제공이 다 인읍에 있어 발격한지 누일이 지났으되 한 사람도 내왕이 없어 자못 의아하였더니, 군정 , 양미를 모취하여 영래하니, 가위 일에 민첩하고 의에 용감하다 하리라. 본현 서면에서 모취한 군정 9명, 미5석, 마6필, 궁7, 전20부, 조총, 창3, 전립 9이니 군마기계는 훈련색으로 차지하게 하고, 양미는 군향색으로 차지하게 하고, 이날 밤을 능주 유사로 더불어 상의하며 밤을 새웠다. 12월 29일 평명에 정유가 양미 10석, 우2척을 가져오고 종질 집에서 양미 10석을 가져오니, 제공이 근간함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유시숙하니 유시질이라" 하였다. 조반후에 미 8석이 최명해 집에서 왔고 또 7석이 임시태집에서 왔으며, 유함이 군정 8명, 미 5석, 태 5석 전죽 5백개, 철 30근을 가져와서 말하되 "사급해서 다모하기 어려웠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군가 능력으로 이와같이 근민하니, 가가가상이로다"하였다. 능주 유사가 돌아가려 할 때 공이 만유하여 말하였다. " 금일에 가히 호군 조련하는 절차를 보고 갈지어다." 공우길 공형길이 노정5명, 미 13석을 가져오고, 최기종이 군정 7명, 미 8석을 모래하였으며 임시민등 5인의 소모는 군 15명, 미 10석, 태 7석, 장 5병,염1석이었다. 본현 동면에서 소모한 것은 군정 9명, 양 6석, 태 2석, 철 100근, 창 1병, 마 8필, 포 5필, 전 15부, 전립 7개이니, 즉시 한명남, 배홍립에게 명하여 호군을 설비케하고 편성대에게 명하여 군안을 점검케 하였다. 공이 말하되 우2척으로는 호군에 부족할 것이니 급히 가노 산이를 보내어 이금의 집 우1척을 끌어와서 아울러 도살하였다. 이윽고 한명남이 고하되, "소는 이미 잡아 삶았으니, 술은 얼마나 쓸가요." 하였다. 공이 말하되, "금일의 호군은 사기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일이다. 인인만취함을 기약하니, 어찌 미리 정할 수가 있을까" 하였다. 한명남이 드디어 우주를 의청에 먼저 드리려 하니 공이 만지하여 이르되 조련한 후에 먹으리라" 하였다. 종질이 말하였다. "그러시겠습니다." 또 "위장지도는 사졸 먼저 음식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공이 흔연히 칭찬하고 제공과 함께 한광한 땅에 가서 벌고 휘기하여 방원등진을 결성할 때 일제히 진퇴하여 대오가 엄정한지라 수차에 걸쳐 조열하고 끝냈다. 그리고 우주를 명하여 크게 호군하니, 사졸이 취포하여 희색이 만면하였다. 오후에 능주유사가 사거하였다. 나주 유준이 군정 7명, 전죽 4백개, 궁15, 대도 2를 송래하고, 신병으로 궁삼치 못하니, 병이 소차하면 즉시 달려 가겠다고 도상하였다. 최진강, 홍명기 양인이 군정 17명, 장전 15부, 궁 4, 조총 5를 특래하니, 공이 손을 잡고 기뻐하며 "근민이 마땅히 이와같이 아니 할손가" 하였다. 그리고 주찬을 명하여 접대하고 다시 한명남을 명하여 나주에서 새로운 군정을 후향케 하였다. 향유 박상진은 본래 의기강개한 사람으로 담력이 있으니. 의청 제공이 상의하기를 우리들의 의거가 이미 5,6일이 지났으되 이 사람이 아직 오지 않으니, 심히 괴이하다 하고 드디어 각별히 초청하여 동사할 뜻을 말하였더니 박이 심묵 양구에 비로소 허락하고, 가동 17명 미 10석, 태 3석, 장도 1구를 허급하였다. 편성대는 미 1석, 장 1해를 김위징은 미 2석, 태 2석을 각각바쳤다. 초저녁에 유후가 우주를 보내왔다. 야심에 군정이 술에 취하여 싸우는 소리가 장중까지 들리니 즉시 편성대에게 명하여 범죄자 5명을 색출하여 혼장을 각각 칠도식하였다. 12월 30일 평명에 군정을 점열하고, 편성대, 김위징에게 명하여 지금부터 위시해서 날마다 두번 조열하고 종일 습사하라 하였다. 능주 유사는 군정 10명, 양 8석, 태 2석, 마 5필, 전 13부, 미 4석, 태 2석, 궁전 5부를, 광주 유사는 군정 15명, 미 9석, 장창 6병, 전죽 7백개, 마 3필을 수송하니, 공이 기뻐하여 " 열읍 제공의 응모가 심근하도다"하고 얻는대로 수송할것을 바로 본읍에 고하였다. 친우가 소모한바 포 11필을 가져오니 훈련색이를 불러 묻되, "사졸중에 군복이 없는 자가 어느만큼이냐" 하였다. 편성대가 답하여 "각 택 노정은 각택에서 이미 마련하여 입혔으며 관노, 보인은 관아에서, 또한 마련하여 입혔으나 능주 및 광. 나. 동. 남에서 모래한 군정은 준비하여 입히지 못하였으니, 이제 모포 14필만 있으면 차제로 제급하겠나이다" 하였다. 최명해가 말하되 " 비단 융복뿐만 아니라 사졸중에 의폐동한자는 옷을 지어 주어라"하니, 좌상이 모두 칭선하였다. 임시태가 군중에 대기치가 없음을 보고, 포 4필을 재단하여 대기 2개를 만들어 호표응골의 유를 그릴지어다 하였다. 공형길이 기등 장죽 5개를 보내왔다. 공이 정유보고 이르되 포 14필을 가져오너라 한데 정유가 대답하되 " 아직 현존한 포가 없아오니 3.4일을 기다리소서' 하니, 공이 말하되. "너무 늦도다" 하였다. 인하여 제인으로 행동할 방략을 강논할 때 정유가 밖에서 들어와서 고하였다. " 악장께서도 의려를 창기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악장은 즉 안우산 방준이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차노 평생을 내가 이미 익히 아노니, 거의 규모는 보지 않아도 많으리라" 하고 이서권면하되 "국가의 존망이 조석간에 매어 있으니, 신자되는 자, 마땅히 매혈도인 만사라도 감수할지나 제는 실로 노력함을 불량하고 감히 의려를 모취하여 부난을 도모하였더니 존형께서 또한 창의하셨다는 말을 듣게 되니 그 절제설시하는 규모는 어찌 록록한 자와 비하리요. 극기 동부할 것을 바란다" 하였다. 즉시 종질을 불러 말하되 "이제 군안을 고찰하니, 집궁파창한 자가 이미 4백여수가 되니, 급히 발정하리라" 하였다. 임시태가 말하되 "국위가 급박하니, 잠시라도 지체치 못할지나. 돌아보건데, 소취한 군정이 모두 다 김매는 백정이라. 조궁 승마할 줄모르니 더 수일을 조련하여 방향을 안 뒤에 배도 겸진함이 가능할까 하오" 하였다. 종질이 말하되, " 농민은 승마에 익숙하지 못하고 따라서 마수도 불급하니, 보병으로 순용하고, 소득한 마필은 양계를 운반함만 같지 못할 듯 하나이다."하였다. 읍중에서 장정 27명, 포 6필을 모래하고, 만연사 승이 장오해, 건채 백속을 바치니 장전에 초치하여 사주칭찬하였다. 임시태가 수중에서 소책자를 출시하니, 군중 약속이다. 그 내용은 무릇 8조이니, 1.군인은 훤엽분돌하지 말 것이다. 2. 군인은 10명씩 번갈아 달야 순행할 것이다. 3. 접전시에 적병의 유기물이 있으면 도창만 취하고 기타는 물취할 것이다. 4. 고진금퇴하고, 부탕도화할지라도 퇴보한 자는 참할 것이다. 5. 군중 취반시는 나발로 신호할 것이다. 6. 일제히 밥하고 일제히 먹을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긴자는 취병및 대장을 사출하여 혼장 오도할 것이며 재범한 자는 참할 것이다. 7. 의청 제원이 비록 향인 친우지만, 이미 군중에 들어 왔은즉 장막에 숙경하는 예가 불가능할 것이다. 8. 군인 및 의청 제원은 다 호패를 찰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자초한 조약이었다. 좌중이 한번 돌려보고 칭선불기하니, 임이 사사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모두 고인의 조박이요, 자기가 창출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편성대로 하여금 이것을 군중에 효유케 하였다. 1637년 1월 초 1일 계초명에 공이 군향색이를 불러 경계하여 말하되, "오늘은 다른날과 다를 뿐만 아니라, 또 행군할 기일이 불원하니. 호군하는 절차를 초초히 말 것이라. 대향인 즉 일중에 할 것이나 조전에도 별향이 불가능할 것이요. 또 공장의 무리가 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이미 수일이 되었으니, 오늘만은 반일 휴역을 특허하고 일체 후향하여라" 하였다. 색이가 영명이퇴하였다. 좌중을 보면 말하되,"우리들이 일대의 오합지졸로써 장차 수십만의 불측한 흉봉을 대항하려하니, 이 어찌 당랑이 거철할 다르리요만은 만일 일심일력하면 거의 살일적. 건일기하여 천지생성한 은혜를 갚을 것이요 또 병기를 잡다가 죽는 것은 분내사니라. 원일은 일년중에 상일이니 제군은 다같이 합석음주하여 사의할 맹약을 더욱 굳힘이 어떠하뇨" 하였다. 좌중이 모두가 강개히 영락하였다. 진시에 군이가 와 고하되, "호군할 음식이 이미 마련되었으니 청컨대 먼저 점열하소서" 하였다. 공 및 제공이 한광한 땅에 나아가 다시 좌작진퇴하는 절차를 시열하고 위율하면 안법한다는 군령으로 신신당부하니, 군정도 정오 부수하고 감히 훤화치 못하더라. 주쉬 유후가 나와 보고 탄식하여 가로되, 수일지간에 산야의 백도가 어찌 이렇듯 훈련이 익숙할꼬" 공이 말하되 "민등은 실로 병법을 모르오니 이 모두가 색이 편성대의 힘이라" 하니 , 유후가 가탄함을 마지 못해 편성대에게 두주를 주어 대향하고 파하였다. 이날은 각처에서 소송한 주병어육이 수10기이니, 1우은 군이에게 내주어 호군에 충당하고, 1우는 공장에게 내주어 야간 작역시 요기하는데 충당케 하였다. 1월 2일에 산산하에서 습사할 때 최기종, 임시민이 오고 시민은 국자 백원을 보내왔다. 동복, 광주 제유사가 와서 말하되, "이흥발 등의 격문이 또 왔는데 의견이 다르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와 이공의 의거가 모두 위국사적할 의리니라, 나의 군마기계는 곧 이공의 소용이며 이공의 병갑양향은 또한 나의 소용이라. 그러나 나는 이미 모취하였고 이는 이제야 모취하니, 제공은 마땅히 저에게 가서 말할지어다." 하였다. 제 유사가 모두 탄식하여 말하되"공의 말은 진실로 위국이며 위공이라"하였다. 능주 쌍봉사. 승 유각 등이 전립 40개, 숙마대색2백, 유의 5건을 바치고 광주 유사는 사거하였다. 동복 영봉사 승이 전립 30개, 마화 50, 갈화 1백20, 숙마대색 40파를 , 유마사 승이, 갈화 2백, 유의 3건 철 30근, 지 십속을 바쳤다. 1월 3일에 대우1척을최명해의 집에서 가져왔고 또 1척은 임시태의 집에서 가져왔다. 최주부는 미 5석, 장 3병을 보내왔다. 안우산의 답서가 왔다. 나주 유사는 모정 13명을 몸소 거느리고 왔으며 임시민, 최기종이 오니 종일 군사를 강논하였다. 1월 4일 평명에 최명해가 이흥발 막중에서 돌아오니, 공이 그의 동정을 물어 본대 대하되 초모한 군정이 모두 47명 뿐이오, 열읍에서는 아직 별로 호응한 자가 없으며, 창의 규모는 별로 이동이 없고, 여산에서 상회하기를 고소원한다" 하였다. 공형길, 임시민이 각각 우1필을 보내왔다. 오후에 수차 조열하였다. 1월 5일에 종일 습사하였다. 1월 6일에 폭설이 내렸다. 평명에 군액을 점열하고 양계 등 물을 수습하니, 군정이 424명, 마 45필, 궁 150, 전 380부, 창 85병 총 52, 화약 90근, 검 63병, 양 150석10두이었다. 공이 제유사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행군할 기일은 불과 수일후이어늘 군량 현존자가 심히 적으니, 이 어찌할고." 박상진이 말하기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무엇을 아끼리요. 마땅히 각가의 저곡을 경출하여 양유를 도울 일이다."하였다. 좌중이 모두 칭선하였다. 공이 먼저 10석을 내고, 종질이 10석, 임시태가 7석, 최명해가 7석, 박상진이 7석, 공형길이 4석이었으며 위징, 성대 등이 사사로 12석을 모득하니. 도합 173석이었다. 공이 군이에게 일러 말하기를 "명일의 호군에는 주, 병, 반 세가지를 쓰리니 이를 빨리 준비하여 분부를 기다리라."하였다. 색이가 명을 듣고 물러갔다. 김위징이 사사로 마2필을 모래하니, 유후가 듣고 다시 마2필을 보내왔다. 공 및 제공이 일제히 들어가서 사례하니 유후가 설찬상대하였다. 1월 7일에 박상진이 장전 30부, 유함이 마2필을 얻어왔다. 남평 유사 서행, 능주유사 양우전이 오니 공이 말하되, "이제 사마, 양계가 대략 준비되었으니, 가히 복 일 발행할지어다."하였다. 제유사가 모두 응락하니, 서행이 말하되, "초구일이 좋으며, 11일이 더욱 좋다" 하였다. 1월 11일에 발정할 뜻을 군중에 두루 알리고 사열 습사하였다. 1월 8일에 광주 유사가 마4필, 전립 20개, 창 2병, 량 5석, 태 3석을 보내어 박사원이 스스로 영래하였다. 송광사 승 설학 등 5명이 유의 10건, 전립 40개, 화색 200파 해의 120속 갈화 백개를 바쳐오며, 만도한 죄를 사례하니 주식을 주어 보냈다. 1월 9일에 만연산하에서 습사하고 방포하였다. 1월 10일 평명에 비가 내렸다. 종질 집에서 호군할 우1척, 주 5병을 가져왔다. 또 공형길, 임시민이 각각 우1척을, 종제 수헌이 주 6해, 청어 30속을, 정유가 주5병, 대구어 15미, 병5기를, 임시태 집에서 계 10수, 주 2병을, 유함집에서 주 2병, 청어 10속을, 박상진집에서 병 3기, 주 2병, 소독1척을 보내왔다.
병자호란과 화순창의2 그리고 노덕량, 장경흡 등이 각기 주 2병, 구 3수를 가져왔다. 시일에 향중 사우 및 소민이 주육을 보내온 수는 모두 기록하기가 어렵다. 오후에 최명해집에서 병팔기를 보내오니 합계, 주 80여병, 병반 50여기, 어육 40여기이다. 주 30병, 우1척을 창고에 장치하였다가 명일 발행할 때 호군함을 기다리게 하였다. 편성대가 말하기를 군중에는 행찬이 불가무할 것이니, 원컨대, 우 계 구를 합하여 육장을 만들것을 원한대 공이 허락하였다. 종질이 말하되"당초에 가동친속의 왕래를 불허하는 것은 군정을 요난시킬까 우려하였다. 그리고 금일은 생이사별하는 날입니다. 듣건대 본읍이나 타관, 사졸의 부모처자들이 거리를 꽉 매워 상면치 못하고 우는 자가 많다하니, 금일만은 만나서 전별할 때에 친이 잔을 잡고 공과 제유사를 권하며 말하기를 "제공은 오늘날 의병을 이끌고 군부의 급난에 다다르니, 살아서는 마땅히 열열한 장부가 될 것이며, 죽어서는 명성이 청사에 빛날 것이요, 훤 또한 식록한 사람이라 마땅히 일대 군병을 나누어 이끌고 가다가 죽는 것이 사리에 당연할 것이오나 이 둔렬한 사람이 회록외사해서 제공을 앉아서 보내니 부끄러울 뿐이니이다." 공 및 제유사가 다 절하고 사례하며 말하되, "민등이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쉬연히 거사함에 지혜가 짧고 힘이 약해서 백가지가 모두 부족하거늘 오로지 현명하신 지주의 협조를 입어 발정할 기일을 당하였노이다." 유후가 재삼 사례하였다. 공이 드디어 군색을 불러 그 장재를 신칙하는데 군색이 가로되 "전후에 소득한 말이 50필이니, 군관 색이가 탈 바 8필을 제외하면 다못 42필이나, 그 중에 아마6.7필이 있어 감히 양미를 싣지 못할 것입니다."공이 말하되, "아마는 가히 무거운 것을 싣지 못할 것인즉, 다못 궁전 등 물만 싣고 나머지에다 양미를 다 실어 수송할지니라." 다시 50장정으로 하여금 양미를 지고 즉시 발정하여 판치상에서 등대케 하고, 양미 90석은 창고안에 유치하여 놓고 계속 수송해 줄것을 유휴에게 부탁하였다. 유휴가 허락하고 다시 삼지창 2병, 금번 1쌍을 보냈다. 이날 향인이 와서 전송하는 자, 백여인이 자차, 감탄치 않은 이가 없었다. 공 및 제유사가 일제히 말에 올라 편성대로 하여금 집기선도할새 공이 종질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조금 머무르다가 후군을 감독하여 일제히 오너라" 하였다. 공과 제공이 말을 채찍하여 먼저 나아갈 때 자 욱은 서기 겸, 자제 모료로 뒤를 따라서 판치에 이르니 운량군마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편성대에게 명하여 집동각, 발천아, 사오성에 중군이 이미 산하에 이르러 올라올 때 일일히 점고하였더니 일졸이 뒤에 처져서 올라왔다. 무진금이란 자인데 공의 가노이었다. 공이 노하여 참수하려 하니 제공이 용서해 줄 것을 고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행군한지가 미처 십리도 못되어 사율이 이미 해이하여 졌으니 우리집 노속이라고 그 죄를 용서한다면 어찌 중군을 호령하리오" 하였다. 즉시 참수하여 조리돌리니 중군이 다 고율(股律) 하였다. 종질이 나서면서 말하기를 "아까 팔조 약서 가운데 행군 연로에서 군인이 혹시 민가에서 일물이라도 취하면 반드시 군법으로 다스린다는 일조가 누락되었나이다." 하였다. 공이 옳도다 하고 이 뜻을 군중에 효유하였다. 날이 이미 오시를 지난지라 인마를 재촉하여 광주에 이르니 사인으로 와 보이는 이가 사십여명인데 조석 군향을 자당하였다. 1월 12일 장성부에 이르니 사인 김지보, 김남보, 이비등 3인이 우주를 가지고 와서 보고 마과 태 오석, 초 백여속을 바쳤다. 1월13일에 노령에 이르러 군마를 조금 쉬게할 때 풍설이 크게 날려 영하에서 유숙하였다. 1월 14일에 태인에 이르니 읍인 이경환등이 약간 우주를 가져와서 말하기를 "불의에 초야에서 이 열열한 의려를 일으키니 우리들은 인류의 반열에 서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마 2필, 궁전 5부, 장도 1병을 증정하였다. 1월 15일에 금구읍내에 이르렀다. 1월 16일에 전주부에 이르러 서문밖에 군정을 머무르게 하고 종질로 하여금 가서 이흥발을 뵙고 군병을 이끌고 와서 회합할 뜻을 고하게 하였다. 이흥발 형제가 듣고 전도한다싶게 와서 볼새 군이 3인을 보내어 군문밖에 말을 머무르게 하고 말로 전갈을 두번한 다음에 비로소 들어오니 공 및 제공이 다 나아가 맞아 상읍하고 좌정하였다. 이공이 말하기를 " 비등은 존공이 이미 거의한 줄을 미쳐 모르고 전일 격문 중에 그릇 공 및 영질을 유사로 붙였더니 최군의 말을 듣고 비로소 존공이 이미 거의하였을 뿐 아니라 규모 설시가 실로 비등의 미칠 바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공이 답하여 말하기를 " 비등의 쉬연한 이 의거는 비록 우충에서 나온 것이나 백번 생각하여도 당랑이 거철하는 것 같다고 여겼더니 존공의 격문을 받아보고 비로소 주맹의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으며 또 나 같은 사람을 버리지 않음을 감격하였다"고 하였다. 공이 임시태를 가르켜 이 사람이 공의 격문 중에 부탁한 유사이며 나와 함께 협력거의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니 서로 더불어 서화하고 또 병행할 일을 의논하다가 밤이 되어서 헤어졌다. 1월 17일 평명에 공이 제공과 함께 가서 이공의 조련하는 법을 보고 돌아왔다. 오후에 이공이 친이 우주를 가져와서 호향하고 군오 진퇴하는 절차를 보기를 청하니, 공이 제유사로 더불어 서원 평광한 곳에 나아가 수차를 조련하니 이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협야, 농민이 어찌 이렇듯이 군율에 익숙하는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나의 영병군관, 편성대, 김위징 두사람이 이같이 교련하였다" 하였다. 이공이 역시 웃으며 말하기를 성대의 이름이 대사를 가성할 것이며, 오늘날 위징이 옛날 위징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칭찬하고 황혼에 돌아갔다. 1월 18일에 장차 발행할 때 공이 종질로 하여금 이공의 영에 가서 먼저 여산에 가서 군정을 머무르고 기다릴 것이라는 뜻을 고하게 하니 이공이 즉시 와서 면약하고 돌아갔다. 이날을 삼례역에서 잤다. 1월 19일에 여산에 이르러 이흥발의 군을 기다릴 때, 본도 감사 이시방이 영군하니 호서에 있는 정홍명이 때에 의병대장이 되어 감사와 합력하매, 공이 종질과 상의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수백 거의를 불러 일으켜 행군하여 여기서 이흥발의 군과 합력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가히 타인에게 제제를 받지 말 것이다." 하였다. 종질도 역시 말하기를 " 저는 이미 원수가 되어 감사와 동사하고 있으니 이등이 만일 와서 저들에게(이시방, 정홍명) 합력하게 된다면 우리는 모취한 군정을 거느리고 각별히 일우를 담당할 것이라 그러나 이등의 동정을 살펴서 방략을 결정할 일입니다." 하였다. 공이 암가하였다. 1월 20일에 여산부에서 유숙할때 계명에 배홍립에게 명하여 본읍에 내려가서 유치한 양미를 재촉하여 수래하라 하고 이흥발의 병이 이르니 공 및 제공이 출진 영접하였다. 1월 21일 평명에 이공이 행사할 기일을 물으니 공이 답하여, " 국위가 심급하니, 마땅히 성야로 부적할 것이나 나의 마필이 적어 양미를 많이 수급치 못하여 발정한지 수일에 군량의 현존자가 부족한고로 어제 군이를 보내어 양미 운수을 독촉하였다. 그가 오는 것을 기다려서 진병할까 한다." 하였다. 이공이 말하기를 " 나도 또한 설청한지 얼마 아니되어 총총 발행하였음으로 군기 양료가 미비한 것이 많다"고 하였다. 1월22일 아침에 우설이 크게 오다가 정오에 소헐하니 일차만 조열하였다. 1월 23일에 이차 조열하였다. 1월 24일에 종일 습사하였다. 1월 25일에 이흥발, 이기발형제 및 최온들과 활혈회맹하고 공을 추재하여 의병도대장을 삼고 부서를 권정하였다. 1월 26일에 오후에 배홍립이 유치한 양미 90석을 수래할 때 공이 수래한 상황을 물었다. 그가 대하여 말하기를 본관께서 힘을 써서 민정을 특발해서 수송하여 이미 장성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그저 수령하여 왔다 하고, 유후의 서간을 올리니, 이것이 행중 도상이다. 드디어 편성대로 하여금 이공에게 양미가 이미 이르렀으니 명일에 진군할 뜻을 고하였다. 1월 27일에 날이 이미 저문지라 군병을 현앞에 머무르게 하고 공이 문득 눈물을 흘리니 좌우의 사람이 말하기를 "공이 죽음을 두려워하나이까" 하였다. 공이 눈물을 거두고 사례하며 말하기를 " 어찌 감히 그러리오, 옛 우리 선군이 이고을 옥구 원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실 때 독신인 내가 아직 나이 겨우 성동에 부친 환향하였으니, 그 망극한 애통과 간신한 상황은 가히 입으로 다 형언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여기에 이르게 되니 자연히 비감한 마음이 되살아 난다" 하였다. 좌중도 다 눈물을 흘리었다. 조금 뒤에 읍이 박시춘, 양백엽 등이 주찬을 가지고 와서 현신하고 조석의 마료를 자당하고 궁전 팔부를 바치니 이 양이는 고인이 되신 니성공굉중(청강의 부)이 원으로 계실 때에 이방이었던 박득화 호장이었던 양춘무의 아들들이다. 1월 28일에 풍설이 크게 내리니, 군병을 니성고을에 머무르게 하고 이기발 등과 함께 군사를 강논하다가 오후에 진병하여 공주 경계에 이르렀다. 때마침 충청감사, 정세규가 군패하여 돌아오니 종질이 본래 정공과 교의가 깊은지라 단기로 가보고 적세의 강약을 물었다. 정공이 보고 대희하여 말하기를 " 패군지장은 실로 적세 여하를 알지 못하고 있다. 미처 한번 교전하지도 못하고 붕괴되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공들은 초야에서 거의하였으니, 참으로 열열한 장부의 일이 아닐 수 없다"하고 호군할 우 3척 미 20석, 궁전 30부, 총 10, 화약등 물을 주며, 수10기를 거느리고 와서 의병 제장을 뵈었다. 1월 29일에 청주 서평원에 다다르니 적의 유기가 십리허, 산곡 중에 모여 있어 적수의 다소를 알지 못하였다. 군정이 흉흉하여,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 경솔하게 진군하지 못하고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굳게 지킬 때 열읍에서 모래하여 온 군정이 도망한 자가 많았다. 또 적세가 너무 핍근하므로 의병 제장이 다 한곳에 모여서 상의할 때 혹은 말하기를 " 우리들이 오합지졸, 단약지군으로 저들의 예봉을 경솔히 범하면 이는 고기덩이를 호구에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라리 기치를 많이 세우고 금고가 서로 들리게 하여 의병을 하여 적으로 하여금 원병이 이르러 온줄 알게하여 감히 핍성하지 못하게 하고 남한성중에서 근왕사가 이르러 오는 것을 알게하여 수비를 더욱 견고하게 하면 이것이 상책이 된다"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 적의 유기가 이미 경계에 이르렀은 즉 반드시 중병으로써 먼저 애구를 재단하여 삼남의 원병을 막을 것이다.경진하는 것이 무익할 것이니 차라리 진을 옮겨 험한 데에 웅거하여 소식을 탐문해서 진병을 도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우리 병은 의로써 창기하였으니 죽음이 무서워 두유하는 것은 마침내 조소가 될 것이니, 경중을 버리고 사이길을 쫓아 남한에 바로 이르러 성첩을 보수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공 등이 다 그 의논을 좇기로 하였다. 1월 30일 평명에 각진중에서 산곡 중의 세력을 탐지할 자를 뽑을 새 감히 응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양만용, 이기발이 정신하여 가기를 청하니, 즉시 5.6포수로 하여금 뒤를 쫓게 하고 등산하여 적세를 내려 살펴보니 적기 수백이 곡중에 모여 노략질한 우마를 잡아 먹고 있었다. 기발이 단약함을 속이고자 종자로 하여금 일제히 방포하게 하니 적기가 대해하여 흩어졌다가 다시 합하여 포위하니 기발이 정히 창황하였다. 이때 공이 종질 및 노덕량 편성대 등과 함께 경졸 50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으니, 이공이 포위되었다가 분력 충돌하여 양공과 합력하여 적기를 살산시켜 9급(일급은 20수)을 참수하였으며, 버리고간 병기를 노획하여 돌아오니, 아군의 사자는 2인이며 피상자는 10여인이었다. 제공이 다 설악상하하려 하는데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 사출한지 20여일만에 이와같은 영적 9급을 얻으니, 무엇이 적에게 손해가 되며 무엇이 국가에 이익이 되리오"하였다. 때에 풍설이 혹심하여 의병 제장이 다 산하 대촌에 옮겨 주둔하니 촌인이 다 피난하여 가버리고 모두 다 빈집이었다. 그러나 사졸은 다 유식하게 된 것을 즐거워 하였다. 2월1일 평명에 호군하고 건보한 자 삼인으로 하여금 야인 모양으로 꾸며 전로소식을 탐지케 할 때 토인 한 늙은이에게서 도로의 원근 통새를 묻고, 사졸은 종일 습사하며 척후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기다렸다. 2월 2일 오후에 척후가 돌아와서 보고하되 전로 70리에 적기를 보지 못했으며 남한 소식은 들어 알수가 없다 하였다. 다시 빠르고 ,잘 달리는 사람 2명을 가려 가서 소식을 탐지하게 한 뒤에 20리를 진군하였다. 2월3일 평명에 의병제장이 다시 한 곳에 모여 군병을 점열할 때 각진의 도망한 자는 30여인이고 아진의 도망자도 7인이었다. 그 대장을 조사하여 곤장 삼도를 치고 군약을 거듭 엄히 하며 호군하고 머물렀다. 2월 4일 계명에 밥을 지어 먹이고 장차 행군하려할 때 난시에 후이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전로 소식을 잘 알수는 없으나 적병이 이미 패하여 돌아가고 대노가 이미 경성에 환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제장이 다 불신하여 말하기를 금적이 어찌 그렇게 쉽게 패주할수 있을까 보냐. 이는 반드시 속이는 말이라고 하여 드디어 다시 30리를 진군하여 청주, 부내근처에 주둔하였는데 비로소 강화한 소식을 듣고 제공이 모두 다 북향 통곡하고 일시에 흩어져 돌아갈 때 공이 편성대 등에게 명하여 영군하고 내려가서 양미를 흩어주며, 또 마필 기계는 각기 그 주인에게 돌려 보내라 당부하고 홀로 종질 및 제공과 함께 돌아오니 15일에야 비로소 당도하였다.
실학과 화순 실학은 17세기~18세기에 이르러 발생하여 흥성하기 시작한 실용적이고 실제적이며 실증적인 학문으로 우리나라 역사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왔다. 실학이 발생한 배경을 보면 조선왕조의 기본이념이었던 주자학이 공리 공론으로 흐르고 당쟁의 이론으로 원용되어 학문의 유용성과 현실성을 외면한지 오래였고 조선왕조의 지배층의 이론으로 애용되기 시작하면서 부터 상대방이나 반대되는 당파를 제거하는 이론으로 사용되어 배타성과 독존성을 가지게 되어 비판과 외면을 받아 왔다. 실학의 발생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17세기~18세기의 조선의 사회현상이었다. 왜란과 호란의 상처가 너무나도 큰데다가 당쟁의 격화와 양반관료 등의 지배층과 유산계층에 의해 탄압과 수탈을 강요 받아온 농민은 피폐될 대로 피폐되어 있었다. 그리고 청의 새로운 학풍인 고증학의 영향을 들 수 있다. 고증학은 실증적이며 서양의 과학문명의 영향을 받은 과학적인 학문으로 그것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새로운 학문인 실학을 발달시키는데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서양의 과학문명이 서민생활에 유용하고 편리한 많은 기구를 발명하였으니 새로운 서양의 과학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드리고 객관적인 학문연구방법을 도입하여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실학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실학은 집권지배층이 아닌 재야의 학자들이 민중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면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구국의 충성심을 발휘하여 학자적 신념과 양식에 따라 제세안민의 이론을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실학파의 민중을 간절한 방안은 입장과 관념이 다른 지배층이 무시하는 바람에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실학은 그 당시에 정책으로 채택되어 직접적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기본권과 존엄성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한 참된 학문이었기에 시대를 지나면서 무럭 무럭 자라서 결실을 맺어갔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근대적인 개화사상으로 아름답게 꽃피었던 것이다. 실학파의 비조는 반계 유성원인데 그를 계승한 성호 이익과 더불어 실학의 앞길을 닦아 놓았다. 유성원의 반계수록과 이익의 성호새설은 현실적인 문제 들 즉 정치의 도 지방제도 재정 경제 과거제도 학제 병제 관제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상과 구상을 논한 책이다. 이리하여 실학의 계통을 밟은 학자들이 잇달아 나타났으며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 경제유표, 흠흠신서를 지어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실학파중에서 청나라에 들어가 그 우수한 문화를 직접보고 청조의 문물을 수입하자고 주장한 자들을 북학파라고 하였다. 북학파에는 박제가의 북학의, 홍대용의 잠헌집, 이덕무의 청장관전집, 박지원의 연암집, 홍양호의 이계집등이 있다. 실학은 양반을 위한 학문이 아니고 중인이나 평민을 위한 학문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가 교류한 사람이나 가르친 사람들 중에 중인층이나 불승 그리고 동학의 지도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은 그것을 웅변해 주고 있다. 전남지방은 집권관료보다는 실권양반이나 탄압과 수탈의 대상인 민중들의 생활지였기에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할 수 없었으며 새로운 사상이나 혁신적인 운동의 태동지였으며 실권양반들의 유배지 또는 사약을 받은 땅으로 그들의 피와 눈물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화순지방에서 과학의 뿌리가 되고 있는 실학의 선구자로 현 이서면 야사리출신인 석파 나경적(1690~1762)이다. 서양식시계인 후종과 서양식 천측기인 기형혼천의를 완성하였는데 나경적이 70세인 1760년(영조 36)에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의 재정적 도움으로 그 제자인 보성출신의 안처인과 함께 나주에서 후종과 기형혼천의를 1760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걸쳐서 완성하였으며 홍대용은 이 값진 기계가 비맞을까 염려되어 농수각을 짓고 보관하였다. 이외에도 자전마자전수차도 제작하였다. 이와같은 기록은 홍대용의 문집인 잠헌서외집의 나경적제문에 있고 또 실학자인 황윤석(1729~1791)의 문집 이재유고에 후종을 안처인에게서 매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실학의 뿌리를 이어온 현 이서면 야사리 출신인 규남 하백원(1781~1844)이다. 실학파로서 석성현감을 1841년(헌종 7년) 에 역임하였고 만국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만국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하였으니 그 보다 20여년전에 이미 제작하였으며 이 지도와 함께 동국지도가 있고 그 후손인 하성래가 보관하고 있던중 학계에 제시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양면 오류리 출신인 죽포 양명홍은 학포 양팽손의 8대손으로 실학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실학중에서도 천문과 지리에 밝아 개천도를 저술하였고 고지도를 제작하여 당시 독도가 우산도로 기록하여 우리의 국토임을 고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자 유계 양용관과 그의 손 국파 양선영의 3대에 걸쳐서 실학에 관한 문적을 남기고 오유리에 서재를 마련하고 후학의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임술민란과 화순 1863년(철종 13)의 임술민란은 진주를 기점으로 하여 남으로는 제주에서 북으로는 함흥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영남지방의 15개처를 비롯하여 충청도에서 9개처 전라도에서는 8개처에서 민중의 봉기가 있었다. 그 이유는 당쟁의 격화에 뒤이어 출현한 변태적 양방문벌정치인 세도정치의 여독으로 왕권은 쇠미해졌고 관기는 문란했으며 회뇌와 청탁으로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세도가에게 뇌물을 바치고 임명된 감사와 수령들 그들에게 향이나 향청의 임원들이 임뢰를 주고 행동하는 일이란 백성을 들볶고 수탈하기에 여념이 없고 그 누구하나도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투자한 밑천을 뽑고 치부할 생각에 여념이 없었고 자리를 지키거나 영전하기 위해 상납할 뇌물을 모으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와같이 탐관오리의 착취가 심각해지자 민중들이 관기하여 발생한 민란이었다. 전남지역에서는 함평, 장흥, 순천에서 민중이 가장 격렬하게 봉기하였으며 순천에서는 임술년 5월 15일에 3천여명의 민중이 모여 민가 36호를 소각하고 관아를 습격하고 공전을 약탈하였으며 장흥에서는 5월13일에 천여명의 민중을 모아 전군수 고제환이 읍내의 향유 정방현 임재성과 향리인 오리의 가옥을 파괴하고 소화하자 이향유가 수백명을 모아 고제환의 가옥을 불질렀으니 무법천지의 극을 이루었다. 순천과 장흥의 인근고을인 동복과 능주, 화순은 비록 봉기가 일어났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그 상황은 비슷하여 폭풍전야의 상태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임술록
병인양요와 화순
1866년(고종 3) 8월에 프랑스 함대가 인천을 거쳐 서울의 양화진과 서강까지 침입하여 서울 도성은 공포와 혼란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 원인은 철종 때에 와서 종래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단속의 방침이 완화되자 이 틈을 타서 프랑스신부가 많이 들어와 선교사업에 힘썼으므로 1861년 (철종 12) 에는 교주의 수가 1만 8천명 1865년(고종 2) 에는 2만3천명에 이르렀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를 탄압하지 않았으나 1866년 정월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려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신부와 마종삼 정의배 등을 비롯하여 8천여명의 천주교 신도들을 학살하였다. 이 때 탈출한 리벨신부가 천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오즈에게 보고하자 침입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하며 대원군은 천주교의 탄압을 더욱 심하게 하고 한편 변경의 방비를 굳게 하였다. 병인양요의 소식을 접한 현 춘양지방의 유생들은 김인기가 중심이 된 경주김씨일문인 김종용, 김종천,김종문과 이웃 동지인 홍기주, 윤학모 등과 창의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 병인양요가 일찍 진압되자 김인기등 이 고을 유림들이 기병하지 못했지만 이 충성어린 맹서를 한 이곳을 기리고자 춘양면 가봉리에 있는 호미산에 1867년 11월 6일에 모의정을 건립하였다. 현 모의정은 가봉리 전 601번지에 있는데 1988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원군의 혁신정치와 화순
대원군이 집권한 당시의 국내정치현황을 보면 관찰사와 수령들은 정치세도가에게 엄청난 뇌물이나 배경을 이용하여 부정을 자행하였고 향이들은 수령에게 뇌물로 얻는 자리이라 착취와 수탈을 갖은 수단으로 이루어졌고 지방양반인 토호와 유림의 행패도 심각했다. 그리고 서원이나 향교가 그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기관으로 둔갑하였으니 백성의 생활은 날로 피폐하여 갔다. 이러한 심각한 현실을 몸소 체험했던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뿌리를 뽑고 관이의 부정과 부패를 철저하게 응징하였다. 이 바람에 민폐를 제거하기 위하여 팔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는데 전라도에 파견된 윤자승어사에 의하여 부정이 적발되었는데 화순지방에서는 동복현감 윤홍구는 1867년(고종 4) 6월에 어사의 상계로 파직되었고 능주목사 여중섭은 동년 7월에 파직되었다. 혁신정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신상필벌을 강행하였으며 암행어사를 증파하여 지역을 분담시켜 전라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조리는 뿌리 뽑을 수 없었다. 그리고 향이의 폐단은 악랄하여 백성을 못살게 하였으니 대원군의 추상같은 위업에도 근절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대원군의 많은 개혁정치중에서 백성을 괴롭히는 서원의 철폐는 호응을 받았다. 1866년(고종 3)부터 철폐되기 시작한 서원은 1868년(고종 5)까지에 끝을 맺고 고종8년(1871) 3월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47개의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철폐되었다. 화순지방에도 포충사 죽수서원 도원서원 해망서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서원이 있었으나 1868년(고종 5) 9월에 미사액서원을 철폐하고 1871년(고종 8) 3월에는 전국의 서원을 철폐함과 동시에 화순지역의 서원도 모두 철폐되었다. 출처 : [기타] http://hwasun.jeonnam |
출처: 호요 원문보기 글쓴이: 데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