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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혜명을 드날리고
정토선을 힘써 전하라
굉원(등원, 북한산 영취사 주지)
1) 관정 큰스님 친견과 영취사 초청법회
(1) 경주 남산 백운암 법회에서 만난 큰스님
어느 해 수행인들만의 공간에서 좌선 후 잠간 쉬는 여가에 우연히 옛 타자기로 친 복사본 유인물을 얼핏 스쳐보게 되었다. 극락 다녀온 중국스님의 이야기로 매우 기이한 내용이었다. 여러 부수가 있는 것으로 봐서 법공양 차원에서 누군가 갖다놓은 것 같았는데 오타가 많고 맞춤법의 오류가 상당해서 유인물을 제자리에 그냥 갖다 두었다.
그 뒤 2000년 봄 법장 스님을 뵈러 경주 미타사를 들렀는데 스님은 출타중이시고, 백련 스님이 안내하는데 ‘관정 법사’님의 염불법으로 정토선을 수행한다며 미타사 법당 앞에서 관정 스님과 단체로 찍은 기념사진을 보여준다. 그 사진에 중국 가사를 수하고 있는 일타 스님 상좌 ‘자해’스님도 보였다. 머지않아 경주 남산 백운암에서 극락에 다녀온 스님의 초청법회가 있다고 했다.
당시 천도재 소대에서 집전 모습 (사진, 굉련 제공)
백운암, 앞줄 맨 끝이 필자
나는 몇 년 전 슬쩍 봤던 인쇄물이 생각나서 관정 법사님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법회행사를 앞둔 하루 전 백운암에 찾아가 처음으로 관정 큰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그 때 선용 스님이 큰스님 시자를 보고, 대주 스님이 큰스님 법문 통역을 하고 있었으며, 진성(眞聖) 스님이 큰스님 법회일정을 잡으며 함께 시봉하고 있었다. 강거사님은 큰스님과 함께 방을 쓰며 가까이 모시고 통역하고 있었다. 나는 큰스님께서 요사채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아래쪽에 있는 해우소에 가시는 길에 부축하여 동행하기도 했다.
법회 당일 날은 미타사 법장스님을 비롯 여러 스님들과 많은 신도들이 운집했고, 법회는 성황리에 이뤄졌다. 법석에서의 관정 큰스님은 풍모가 의연하셨으며 법문 내용을 그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야말로 사자후를 하셨다. 참으로 열과 성의를 다 하시는 것이 역력히 보이는 것이다. 주관적인 견해를 밝히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통역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것이 백운암에서 큰스님과 가진 인연의 실마리다.
(2) 2001년 영취사(靈鷲寺) 법회
내가 큰스님을 본격적으로 가까이 하게 된 것은 2001년 10월 28일 서울 북한산 영취사에서 법회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사찰 위치상의 형편 때문에 말씀을 드려도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 망설였지만 큰스님께서 쾌히 승낙하셔서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 큰스님 초청 영취사법회 가능여부를 물었을 때 강거사님은 불가능하다고 답했었다. 하지만 소식을 전해 들으신 큰스님께서 그 정도의 등산거리는 아무 문제없으시다며 쾌히 수락하셨다고 한다.
영취사는 북한산에서도 꽤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세밀하게 준비해야 했다. 우선 건강한 성인이 한 시간 남짓 등산해야 닿게 되는 사찰의 높은 곳까지 당시 80세 가까이 연세 드신 노스님을 어떻게 모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선 등산하시기 전에 신도 집에서 잠깐 쉬셨다가 등산하시면서부터는 피로를 느끼시면 언제든지 접이의자에 앉아서 쉬시게 하는 방법으로 무사히 2시간여 만에 절에 모실 수 있었다. 산중턱의 작은 절이어서 불편하셨을 터이지만 아무런 불만 없이 아주 즐거워하셨다. 당시 만덕 스님이 와서 시봉을 하고 강거사가 통역을 하였다.
법회 당일 많은 신도들이 참석하였고, 마정수기 할 때는 등산객들이 고승으로부터 가피를 받기 위해 법당 앞 층계에서부터 마당에 이르도록 길게 늘어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는 낮에 법회에 참석했던 자칭 공신소(空辛小)라고 하는 공도사(空道士)도 있었다. 공도사는 신설동에서 기공(氣功)센터를 운영하며 재주가 많은 인사였다. 침도 잘 놓고,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멀리 있는 사람도 알아보고, 몸 안에 무슨 짐승 영가가 든 것까지 보는 이로서 내가 ‘공도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마정수기를 받으며 그 공도사가 큰스님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다.
“제가 기공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 기공센터가 잘 되게 축원을 해주십시오.”
그러자 큰 스님이 정색을 하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대답은 참 뜻밖이었고, 나는 큰스님이 왜 축복을 해 줄 수 없다고 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통역에게 들었는데, 당시 중국 본토에서는 기공 단체인 ‘파룬공(法輪功)’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혹시 파룬공(法輪功)인지도 몰라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공개적인 석상에서 축원하는 것을 꺼리셨다고 한다.
저녁에도 쉴 시간이 없었다. 20명이 넘는 신도들이 큰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찾아왔기 때문이다. 친견하는 신도들에게 큰스님께서 관음도 한 장씩을 나누어 주시고 덕담도 해주셨다. 공도사에게는
“당신은 천안이 열렸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해서 한국에서 제일가는 수행자가 되십시오.”
낮에 기공센터 축원을 거절하셨지만 개인적으로 대하자 큰스님은 공도사의 공능을 인정하고, 특별히 ‘굉공(宏空)’이라는 법명까지 내리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큰스님이 중국에서 수많은 절을 불사하면서도 극락세계 유람기나 정토선 정의를 한 번도 펴내거나 보급한 적이 없었던 것은 그만큼 본국 중국에서는 신중하게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법회가 의미가 있었던 것은 현대불교에서 ‘임연태’기자가 큰스님을 취재하여 대서특필하였다는 것이다. 큰스님 이야기가 신문에 크게 나가자 많은 사찰에서 영취사에 전화하여 큰스님 초청의사를 밝혔다. 영취사에서 3일간 머무르시고 나서 곧바로 강원도 영월로 모셨다. 당시 영월에는 등인 스님을 비롯하여 몇 분이 깊은 산골에서 불사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먼 길을 가시는데 내가 운용하는 화물봉고차로 모시기가 그래서 신도에게 부탁하여 당시로는 고급 승용차를 대기시켰다. 그런데 큰 스님이 굳이 승용차를 타시지 않고 내 화물봉고차를 타고 가시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신도가 준비한 차를 물리고 화물봉고차로 모시면서 영월에 전화해서 다른 차를 내보내라고 연락했다. 그래서 여산(濾山) 거사가 구입한지 얼마 안 된 새 승용차로 모시겠다며 멀리 치악휴게소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때도 큰스님은 그 승용차를 타지 않으시고 계속 내가 운전하는 차를 고집하셔서 할 수 없이 불편한 화물봉고차로 영월까지 모시고 왔다. 이처럼 큰스님은 형식이나 겉치레를 극히 싫어하셨다.
2) 2002년에 있었던 두 가지 일
(1) 허운 노화상 제자 맞습니까?
이 해 봄철에 등공(騰功) 스님과 강릉 등 삼척에서 활동하는 보문회 신도들이 중국 복건성 선유현(仙遊縣) 큰스님을 찾아 방문했다. 큰스님의 안내로 큰스님이 중건한 여러 절들을 참관하였다. 이때 샤먼(厦門)에서 여행사 직원인 한 한국인이 통역을 맡았는데,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은 한국 강원도 강릉에서 온 일개 사찰의 신도회장을 ‘한국불교신도회(韓國佛敎信徒會)’ 대표부라고 소개한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선유현(仙遊縣) 관리들이 이 대표단을 극진히 대접하기 시작하였다. 가장 좋은 호텔에 묵게 하고, 최고급 식당에 초대하는 등 마치 외국 사절단을 대하듯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공무원들이 이렇게 극진히 대접한 것은 ‘한국에서 온 대표단이 선유현(仙遊縣)에 투자하여 절을 지어달라’는 속내가 있었다. 당시 지방단체로서는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큰 과제였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한국 불교신도 대표단이 된 일행은 융숭한 대접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이리저리 안내받으며 환대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또한 적절한 절을 지을 수 있는 부지를 안내받고 싶다는 등공 스님의 요청에 의해 옛 절터 등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부지를 안내하는 것이다. 일행의 중국 방문은 현지에 당장 절을 지을 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현지 공무원들은 외국에서 어떤 대표급이 현(한국의 郡단위)에 찾아오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에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한 일이었다.
이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달 뒤인 음력 8월 보름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큰스님이 한국에 입국하시며 통역인 강거사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강거사의 연락으로 우리는 급히 인천공항에 함께 가서 큰스님을 영접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한 달 전 한국 불교신도회 대표단이 음력 8월 보름 한국에서 법회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고 초청해서 오셨다는 것이었다. 강거사와 나는 급히 큰스님이 건네준 쪽지에 적힌 번호로 교대로 연락하며 확인하였다. 강릉 쪽 사찰의 신도회장이 거듭 연락을 받으며 응답하였다.
전혀 ‘그런 초청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이왕 오셨으니 보름법회 때 큰스님을 모실 의향이라도 있는지 물어 봤다. 하지만 그럴 의도가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큰스님은 한국에 오기 위해 북경에 가서 며칠을 묵으며 한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았고, 스스로 비행기 표까지 끊어서 왔는데 한국에서는 초청한 적이 없다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 사람끼리는 통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쉽게 알 수 있고, 아울러 믿고 의지할 기관이나 통역이 없던 큰스님이 한국 다니기 얼마나 어려웠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고, 싫든 좋든 한국에 있는 통역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은 큰스님을 대하는 한국의 불교계도 마찬가지다. 말이 통하지 않아 수없이 많은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있었으며, 그에 따른 오해도 많이 생겼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우선 큰스님을 편히 쉬실 수 있는 강원도 영월의 망경산사로 모시기로 하였다. 망경산사는 작년에 다녀가셔서 벌써 가는 길의 중요지점을 알고 계셨다.
나는 오는 길에 차안에서 여쭈었다.
“허운 노화상 연보를 검토해 보면 관정 법사님의 법명이 어디에도 안 나옵니다. 사부님께서는 허운 화상의 제자가 맞습니까?”
사실 이 문제는 나 혼자만의 질문이 아니라 한국에서 큰스님을 비판하는 다수 사람들의 물음이고, 중화권 인터넷에 들어가 보아도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해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큰스님에게 확실하게 묻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질문을 받고 큰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으신 채 한참 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허운 스승님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였다. 오랜 기간 동안 스승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었지….”
너무나도 진지한 모습에 우리 모두는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어지고 말았다. 큰스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2) 중국 사찰 순례에서 생긴 일
2002년 11월 오송암 등정 스님을 비롯한 망경산사 스님들과 함께 큰스님을 따라 중국에 가서 큰스님이 창건하거나 중건한 사찰들을 순례하였다.
단체의 안내를 책임 맡은 나는 불만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일행의 일정은 바쁘지만 매우 즐거운 분위기였다. 한국에서는 강거사님이 통역을 해 주었지만, 이번 여행에는 통역이 없이 큰스님과 한국 스님 5명이 함께하는 특이한 여행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글씨로 써서 이야기 하는 필담이 시작되었고, 필요하면 온몸을 써서 이야기 하고, 다급하니 큰스님이 평소에 전혀 쓰지 않던 영어를 쓰시기도 했다.
마지막 날 포전(莆田) 광화사(廣化寺)도 참배하고 선물구입도 한 이후 채식식당에 갔을 때 그곳에서 결국 약간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다. 포전은 바로 큰스님이 태어난 곳이다. 극락세계 유람기에 보면, 큰스님은 이곳 읍내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큰스님의 생가를 가보고 싶다고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글씨를 써서 ‘큰스님 태어난 곳을 가봅시다’라고 했더니, 갑자기 큰스님 표정이 굳어지면서 화를 내셨다. 우리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곳에 가려면 돈을 내라’는 말씀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큰 스님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주지로 있으며 일주일간 선정에 들었었던 삼회사도 보여주었다.
극락 다녀올 때 몸을 찾은 미륵동굴도 보여주었다.
허운 화상 사리탑도 보여 주었다.
동굴에서 수행하다가 극락세계 갔던 맥사암사를 보여주었다.
내가 미리서 세운 나의 부도탑 연탑(蓮塔)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나에 대하여 무엇을 더 추적하려 하느냐?’
앞줄: 靑夏, 騰仁, 騰正, 寬淨 큰스님, 騰圓(필자), 청천암 젊은 스님
사실 구선산 영취암사의 안내판이나 미륵대전에는 큰스님 관련한 소개와 사진도 걸려 있었고, 허운 노화상 사리탑에는 큰스님의 글씨도 있었기 때문에 큰스님의 근본에 대하여 의심할 수는 없었다. 이번 방문으로 은근히 보이는 큰스님의 수행력에 감화되며 더욱 큰스님을 믿고 공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몇 가지의 확신으로서도 덮을 수 없는, 당시 국내의 큰스님에 대한 소문은 너무 나빠져 있었다. 예를 들어 큰스님은 맥사암사 가까이 있는 ‘석관정대화상 탑(釋寬淨大和尙塔)’을 보여 주셨지만,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이 보기에는 ‘석관정이란 스님은 이미 입멸하셔 탑이 섰고, 지금 이 스님이 그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솔직하게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도 현장에서 그 말을 했을 정도다.
3) 2003년 13차ㆍ14차 방문
(1) 너희들은 왜 나를 떠나지 않았느냐?
3개월 뒤인 이듬해 2월 큰스님은 13번째 한국을 방문하셨다. 그 때 마중 나온 우리를 보고 차에 타자마자 통역 강거사님을 통하여 물으셨다.
“중국에 다녀와서도 너희들은 왜 나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마중 나왔는가?”
마치 ‘중국에서 너희들이 나를 떠나버리도록 심하게 대했는데, 왜 아직 남아 있느냐?’는 어투였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사부님을 존경하고 믿습니다. 사부님을 부정하는 소문이 파다해도 지금 우리하고 마주하고 있는 분은 진정한 수행자라고 보기 때문에 우리가 사부님을 떠날 이유가 없고, 오히려 중국 다녀온 후 더욱 사부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답변을 듣고 큰스님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묵묵하셨다. 통역 강거사님이 한국제자들이 큰스님 계시는 중국에 다녀와서는 종종 등을 돌린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충 설명을 하였다. 우리는 큰스님께 별도로 질문했다.
“그 때 포전현 채식식당에서 사부님 태어난 곳을 가보자고 했는데 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까?”
큰스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답하셨다.
“가 봐도 별 의미가 없지 않느냐? 거기 가면 모두 가난한데 어떻게 빈손으로 가느냐?”
만일 통역이 있었더라면 중국에서도 이처럼 간단하게 끝났을 이야기가 당시는 매우 큰 오해를 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도 그때 섭섭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큰스님을 떠나게 할 만큼의 사유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것은 사실 별개의 이야기이고,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그 뒤로 큰스님을 더욱 믿고 모셨기 때문이다.
(2) 대구 지하철사고
2003년 2월 방문 때는 서울 여래선원을 들려 망경산사에서 며칠 지내셨다가 영월에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대구 광덕사로 가셨다. 나중에 강거사가 그때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평소 관정 스님은 저녁 공양을 하시고 나면 바로 주무시고, 12시에 일어나 씻은 뒤 조용히 참선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새벽에는 갑자기 소리 내서 우시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강거사가 깜짝 놀라 일어나서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처럼 펑펑 울면서 말씀하셨다.
“세상에 이렇게 불쌍할 수가 있나!”
“이곳 지하철에서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
“정말 너무 참혹하다.”
그리고 새벽 내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원하셨다고 한다.
다음날 뉴스는 온통 대구 지하철 사고 소식이었다. 지하철에서 화재가 일어나 200명이 넘게 사상자가 발생한 끔찍한 사고였다.
(3) 강거사의 통역 이야기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시자마자 2월 20일 서초구민회관에서 법회가 있었다. 이때 박병규 변호사의 주선으로 1,000명이 넘는 불자가 참여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때 대주 스님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다. 강거사님은 연변에서 태어나 중국어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일반 회화는 능숙하지만 불교 교리에 대해서는 그래도 대주 스님이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국적인 강거사님도 큰스님이 심한 사투리를 쓰면 알아듣기 어렵다고 하는데, 큰스님이 불교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그것도 심한 복건성 사투리를 쓰면 대주 스님이 알아듣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에서 큰 사고가 일어났다.
큰 스님은 이틀 전 대구 지하철역 화재 사고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던지 법문하시며 처음에 그때 희생된 영가들을 위해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다. 그러나 복건성 사투리를 얼마나 심하게 쓰셨는지, 대만에서 유학했던 대주 스님도 그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이렇게 통역했다.
“날씨도 좋지 않은데, 지하철 타고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강거사님이 이 통역을 듣고 놀래서 나에게 곧바로 들려준 이야기다.
강거사님 이야기 하나 더 덧붙인다. 어느 날 산책길에 길가에 있는 대추나무에서 대추 몇 개를 따서 큰스님께 드렸다.
“주인에게 허락 받았느냐?”
“주인이 없는 나무입니다.”
대답을 듣고 큰스님은 대추를 드시지 않으셨다.
서초문화회관 법회. 진행을 맡은 필자와 통역 맡은 대주 스님
(사진, 현대불교 제공)
(4) 정토선 보급단체 결성을 위한 움직임
2003년에는 대구 광덕사의 운성(雲惺) 스님과 거제 오송암의 굉송(宏松) 스님이 정토선 보급을 위해 꽤 열심히 노력하였다. 두 스님 모두 정토선을 위해 필요한 토지나 사찰을 내놓겠다고 하였고, 한 번은 광덕사 운성 스님이 정토선을 하는 스님들을 소집한 적이 있어 나도 대구에 가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이때 실제 큰스님을 모시고 정토선을 크게 선양해보려는 스님들이 몇 분 계셨기 때문에 잘 진행되었더라면 한국에서 큰스님이 크게 뜻을 펼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뒤 진행 소식이 없었다.
(5) 금강선원 총재 활안스님과의 인연
2002년 9월에 오셔서 등인 스님 계를 주시고 한 달 만인 10월에 갑자기 오셨기 때문에 일정을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 신촌 봉원사에 가서 만봉 스님(당시 94세)도 만나고 했지만 쉬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법회도 없이 하루 이틀너머 며칠씩 한가히 쉬게 할 수도 없었다. ‘법회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법회를 마련해야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꿈에 한정섭 박사(활안 스님)가 보였다. 어찌된 일인지 꿈속에서는 내가 활안스님을 엄청 꾸지람 하고 있었다. 평소 교분도 없었고, 현실에서는 어이없는 일이겠지만 꿈에서는 가차 없었다.
스님은 국내에서 출가자를 3,000명이나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분으로 한정섭 박사로 이미 널리 알려졌고, 일찍이 불교계에 공로가 많으신 분으로 남방에서 수계마치고 삭발 염의하여 활안 스님으로 불리며 청량리 금강선원에 주석하시며 불교방송 등 여러 곳에 다니시며 교화를 펼치시고 계셨다.
나는 간밤의 꿈을 내심 두고 관정 법사님을 소개하고자 여러 경로를 통하여 활안 스님과 통화를 시도하였다. 마침내 통화할 수 있었고, 관정 큰스님을 초청하여 법회를 가지면 어떻겠는지 여쭸다. 친절한 활안 스님은 당장 초청법회는 어렵고, 큰스님께 공양을 한 번 대접해드릴 수 있겠다고 답하셨다. 다음 날 약속대로 나는 큰스님을 모시고 청량리 금강선원에 찾아가서 활안 스님의 따뜻한 영접을 받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때 한순남 연당(蓮堂) 보살이 큰스님을 처음으로 친견하였고, 인사동 여래선원에 오게 되며 등인 스님과 만난 뒤 중국에서 큰스님 오실 때마다 정성껏 모셨다.
4) 2005년 이후 : 어려웠던 마지막 초청
2000년 이후 큰스님과 인연으로 정토선을 접하며 우리는 어느 사이 자신들도 모르게 정토로 가고 있었다. 큰스님을 친견하러 왔던 위강원한의원 전병롱 원장이 자신의 임대 상가 건물을 이용하여 포교하면 좋겠다는 제의가 있어 점포 건물을 전면 수리하여 인사동 ‘여래선원’을 그쪽으로 옮기면서 ‘아미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4년 만경사 중창불사 회향 및 점안식 행사를 가진 다음해인 2005년 7월 10일 아미타사 포교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아미타사 개원을 기념하여 효란 스님을 초빙하여 ‘무량수경 강좌’를 개설하였다. 효란 스님은 정토계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셨는데(당시 88세) 일본 정토진종으로 출가하신 이력이 말해주듯 일본 정토진종의 개조 ‘신란(親鸞)’에 대한 경외심이 남다르신 분이셨다.
무량수경 강좌가 끝난 이후, ‘정토불교대학’을 열어 정토관련 강습회를 열었는데 강사는 2000년 화두 놓고 염불하세를 써서 불교계에 신선한 정토의 깃발을 나부낀 전남대 김지수 교수, 일본 유학에서 박사학위 마치고 귀국하여 불화강습을 통하여 정토세계를 설명한 강소연 박사, 3000배 일만 배를 밥 먹듯이 하며 불력회를 이끌고 있는 박종린 거사, 신심 수행과 원력전법으로 아미타사 도량을 세울 수 있게 뒷받침한 위강원한의원 전병롱 원장 등 주로 정토 수행과 관련 있는 학자와 수행인들이었다.
또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정토계 명사 특별초청법회를 열었는데 건봉사의 만오 스님, 정토에 관한 상설 강습을 하고 계시는 밀양의 정목 스님, 정토선을 직접 펴는 선용 스님, 홍련암에서 기도정진으로 유명했던 강릉 성원사 창건주시며 강청화 큰스님의 제자인 주경 스님, 울산에서 호스피스활동으로 유명한 정토마을 자재병원 원장 능행 스님 등이다.
당시 서울 도심인 종로에서 이처럼 전문적으로 정토를 강의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정토 수행하는 많은 불교인들이 강습에 참여하며 성원하였다.
그런데 아미타사 개원하며 최초 ‘무량수경 강좌’를 맡았던 효란 스님은 관정 큰스님의 한국 방문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역할을 하시기도 하였다. 이것은 큰스님 영향으로 정토 수행에 한 걸음 다가선 불자들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 강좌에서 오랜 기간 무량수경을 강의한 효란 스님은 강습 도중 일부러 마음먹고 큰스님을 비판하고 나선 것 같다.
“관정 스님 극락세계유람기는 정토삼부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다.”
“관정 스님은 한국에 와서 법회하며 여러 스님들과 불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내가 직접 중국에 가서 관정 스님에 대하여 조사해 보았는데, 관정 스님이 주지라는 삼회사는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 되어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고, 관정 스님이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갔다 왔다고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1997년 관정 큰스님이 한국에 와서 정토선을 펴고, 2000년 화두 놓고 염불하세가 정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고취시켰다면, 2005년 설립된 삼보제자가 정토를 선양하는데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삼보제자는 대만에서 출발한 정종학회의 지원으로 출발하였고, 정종학회와 마찬가지로 출판된 책을 모두 무료로 법공양하였다. 2005년도 삼보제자가 출판사 등록한 후 가장 먼저 펴낸 책이 바로 효란 스님의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나이다. 이 책은 관정 큰스님의 ‘극락세계 유람기’에 관한 것을 효란 스님 임의로 재편집한 것이다.
이 당시 효란 스님의 큰스님 비판은 미리 준비된 것이고, 또 그 비판을 바탕으로 자신이 속한 일본 종단인 정토진종의 교리를 펴려는 별도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집요하였다고 본다. 또 한 가지는 한국정종학회 설립 건이다. 이 문제로 처음부터 효란 스님과 상의하게 되었지만 당초 얘기한 바가 중간에 변질되고, 당신 의도대로 진행이 안 되자 또다시 나를 부르는 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정토선 염불을 하는 수강생들
강의하는 효란 스님과 필자(사진, 혜명 제공)
여러 번 전화하고, 장문의 편지도 내게 보내는 일을 하셨지만 응대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있었다. 효란 스님 자신은 설득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큰 괴로움이었고 그만큼 타격도 컸다. 사실 이 영향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효란 스님의 관정 큰스님에 대한 비판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효란 스님의 주장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① 관징 스님이 주지라는 삼회사(三會寺)는 지금 폐허가 되어 사람도 살지 않은 곳이다.
- 2002년 우리가 중국에 갔을 때 삼회사(三會寺)는 아주 오래된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경내에서 많은 스님들이 살면서 직접 경작하는 논밭까지 있었다.
② 관징 스님은 미국으로 건너간 지 오래 되었다.
- 2000년 이후 여러 번 우리가 직접 중국에 가서 만나 뵈었다.
이처럼 효란 스님의 비난과 회유로 안타까워하는 중에 함께 큰스님을 친견하고, 아미타사를 통해 함께 정토를 펴시던 분들도 관정 큰스님을 비판하고 나서는 일이 있었다.
“자성염불이라고 하는데, 자성이 뭡니까? 그 자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아미타사의 강좌는 마치 큰스님을 성토하는 장이 되는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국내 사정을 전혀 모르시는 큰스님은 북경의 홍(洪)거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초청을 해달라고 여러 번 연락을 해오셨다. 큰스님은 2004년까지 미국의 영주권을 가지고, 늘 재입국비자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한국 비자를 신청하면 언제든지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미국비자 기간이 만료하여 새로 중국 여권을 만드셨기 때문에 한국에서 초청장이 없으면 비자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시 상황에서 우리가 초청장을 보낼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너무 비판세력이 많이 생겨 한국에 오시면 오히려 여러 가지 면에서 비난을 크게 할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하도 여러 사람이 중국에 가서 보니 큰스님이 가짜라고 해서 우리가 중국에 갈 때 통역을 했던 북경의 홍거사에게 삼회사 주지 스님에게 관정 큰스님의 실체에 대한 사실을 물어서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답장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부정적인 답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믿음이 변하지 않은 등인 스님이 아니었다면 나조차 비판하는 쪽에 나설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서길수 교수님이 큰스님 일대기인 극락과 정토선에서 자세하게 조사하여 분석한 결과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극락과 정토선 972쪽 이하 참조). 그 제자가 큰스님이 투병 중일 때 자기가 직접 한국과 교류하기 위해 악의적인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5) 맺는말
이글을 쓰고 있는 요즈음 보정 거사가 우리 절에 와서 큰스님 일대기를 쓰고 있다. 그런데 큰스님 7살 때 허운 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여 15세에 구족계를 받은 계첩을 입수했고, 1958년 허운 화상이 큰스님에게 조동종 법을 전한 정법안장도 찾아서 분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큰스님 입적하신 뒤 유품에서 허운 화상 100살 때의 사진이 나오고, 사진 뒤에 큰 스님 이름과 함께 허운 화상이 사부(師父)라는 큰스님의 자필까지 확인하고 있다. 이런 자료들을 대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다.
‘큰스님이 당시 이런 자료들 가운데 하나도 우리들에게 내보이시지 않으셨다. 만약 그 때 자신의 품속에 있는 귀한 자료들을 조금이라도 확인해 주셨더라면 우리는 더 큰 믿음을 가지고 힘들지 않게 큰스님을 당당하게 변호했을 것 아닌가?’
2001년 이후 큰스님을 가까이 모셨고, 2005년 이후부터는 한국에 모시지는 못했지만 큰스님이 편찮으실 때 중국에 직접 가 뵈었다. 자신에 쏠린 수많은 비난과 모함에 대해 단 한 마디 변명 없이 묵묵하셨다.
원적하신 뒤에도 등인 스님이 신도들과 함께 두 번이나 큰스님의 유지가 배인 사찰을 찾아가 사리를 비롯한 몇 가지 유품도 모셨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큰스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큰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 게송의 요지로써 불제자의 도리를 헤아린다.
불타의 혜명을 드날리고, 정토의 가르침 힘써 전하라!
불타의 혜명을 드날리고 宏揚眞慧命
원만 빛 자성 절로 밝아져. 圓光性自明
정토의 가르침 힘써 전해 騰契淨土法
연꽃 마음에 가득 채워라. 滿上蓮花心
<덧붙임>
이 글은 극락 가는 사람들 원고이다.
극락 가는 사람들은 불자님들의 관정 큰스님과 관련한 법연담(法緣談)으로 이 시대 진정한 선지식인 큰스님의 면목을 생생히 알려줄 것이다.
앞의 글은 내가 필자로 되어 있지만 실은 온전히 서길수 교수님께서 바탕을 써 주신 것이다. 그냥 써 달라고 하면 안 쓰기 때문이다. 서교수님은 이것을 빤히 아시고 당신이 들은 내용을 참고하여 원고를 미리 다 써 주신다. 그리고 나서 본인에게 수정할 것이 있으면 고치라고 요청한다. 나도 그 매뉴얼에 따라 써 주신 원고를 받아 몇 가지 단어와 토씨만 수정했을 뿐이다. 불과 몇 사람 이외는 다 이런 식이다. 노교수님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중국 근현대불교사의 큰 별 허운(虛雲) 노화상의 전법제자 관정 큰스님을 조명하는 일은 백사장에 떨어뜨린 바늘 찾기와 같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첫째는 큰스님 관련 자료가 희박하며, 둘째는 한국과 중국에서 큰스님과 관련된 분들의 무관심이요, 셋째는 중국에서 큰스님 관련한 사실을 알거나 자료를 가진 분들이 드러내놓고 밝히기를 꺼려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 국공내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아 나오신 관정 큰스님의 파란 만장한 수행 삶의 역정을 밝혀내기란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국적이 다른 상황에서 이 일을 진행한다는 것은 보통 열정과 인내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보정(普淨) 서길수 교수님은 해내셨다.
작년 2014년에는 관정 스님 저작집 淨土와 禪을 출간하셨고, 금년 10월에는 관정 큰스님 의 대서사시인 일대기를 極樂과 淨土禪이라는 이름으로 펴내셨다. 이제 곧 極樂 가는 사람들도 나오게 된다.
교수님은 강원도 영월 해발 900m 만경사 무문관에서 3년 기도수행을 온전히 마치고 하산하여서 관정 큰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미국 동부와 서부, 대만, 싱가포르 등 동남아 일대와 중국의 곳곳과 국내 여러 곳을 수 회 왕래하며 발품 팔아 인연 있는 분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샅샅이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마침내 교수님의 8년에 걸친 노력 끝에 방대한 분량의 관정 큰스님 일대기를 완성하신 것이다.
교수님께서 온몸으로 세계 각 곳을 뛰어 밝혀낸 새로운 사실의 원고를 대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 많이 부끄러워졌다. ‘큰스님을 좀 더 잘 모실 것을….’ 하는 뼈아픈 후회가 엄습한 것이다. 한 때 우리 곁에 가까이 오셨던 참다운 선지식이 자칫하면 그 면목이 오도되고, 사장되고 기억에 사라질 뻔했는데 다행히도 서길수라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불자께서 나타나 숫제 진흙 속에서 진주를 캐내듯 묻혀 있던 큰스님의 면목을 유감없이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자- 보시오!
여러분들이 한 때나마 가르침을 받았던 분의 진면목이 바로 이러합니다.”
서교수님이 외롭게 외치는 광야의 울림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출가사문의 한사람으로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갖는다. 우리 곁에 가까이 오셨던 진정한 보살이요, 선지식을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던 지난날이 회상되며, 또 큰스님의 발자취를 탐색하는 서교수님의 노력을 대수롭지 않게 평가했던 날들을 돌아보며 깊이 참회하게 된다.
그러나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極樂과 淨土禪이라는 큰스님 일대기를 통하여 또다시 진정한 선지식이요, 우리 모두의 스승인 관정 큰스님을 조명하며 진실된 수행심을 깨우치고, 겸허한 마음으로 기꺼이 선지식을 공경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의 실상에 대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밝혀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던 고구려 관련 실증연구의 화신답게 ‘보정 서길수’ 교수님의 집념어린 열의와 끈질긴 실증탐사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 번 진정한 학구정신으로 일궈낸 서교수님의 선지식에 대한 애정과 공경심으로 일로매진한 쾌거인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불교인물사에서는 관정 큰스님은 그야말로 감춰진 보물의 발견이며 이 일을 이뤄낸 일은 커다란 불사 공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큰스님의 행적이 유감없이 펼쳐진 極樂과 淨土禪이라는 일대기는 서교수님과 부인 불모화(佛母華) 보살님 두 분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속에서 함께 수행하며 세상의 수모를 무릅쓴 인고의 답사세월 속에 오랜 시간 공들여 일궈낸 피땀어린 대작불사(大作佛事)인 것이다.
두 분께 이 자릴 빌어 깊이 고개 숙여 감사 올린다.
덕분에 ‘정토선(淨土禪)’의 불조혜명은 다시 천년 세월 두고두고 사바예토의 중생 성불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