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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평화협정"은 오늘날의 캄보디아를 있게 한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설자료가 별로 없어, "크메르 세계"가 독자적으로 기초적인 기사를 작성하였다. 이후 2009년 8월 25일에 "사이버 민주인권 국제관"(http://cyberhumanrights.com)에서 제공하는 자료가 발견되어, 이 자료를 함께 게시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람. |
파리평화협정
(Paris Peace Accords)
성립배경 (기사작성) 크메르의 세계
1991년의 "파리평화협정"(Paris Peace Accords)은 현재의 캄보디아를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는 당시 프놈펜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전 총리 손 산(Son Sann)이 이끌던 "크메르민족해방전선"(KPNLF),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전 국왕이 이끌던 "캄보디아민족연합전선"(FUNCINPEC), 그리고 크메르루즈의 "민주 캄푸치아" 등 캄보디아 내 4대 정파와 유엔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동남아국가연합 6개국, 베트남 등 19개국이 프랑스 파리에서 유엔이 마련한 평화협정안에 서명함으로써 체결됐다.
이 협정은 20년 이상에 걸친 캄보디아의 내전상태(혹은 전쟁상황)를 마침내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캄보디아는 이미 1965년부터 캄보디아 영토 내의 북-베트남 및 베트콩의 군사시설을 목표로 한 미국의 대규모 공습에 시달리고 있었다(미국의 공습은 1973년부터 중단되었다).
한편 1967년 시하누크 통치기부터 공산주의 조직 크메르루즈는 군사적 저항을 시작했다. 이후 1970년 론 놀(Lon Nol)이 쿱테타를 일으켜 시하누크를 실각시키고 친미 정부를 수립하자, 크메르 루즈는 그들과 전쟁을 계속하였다. 1970년 5월에는 실각한 시하누크와 크메르루즈가 동맹을 맺어 "캄푸치아 민족통일전선"(FUNK)을 결성했고, 그 산하 군사조직이 된 크메르루즈 군대가 마침내 1975년 승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캄보디아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매우 호전적이었던 크메르루즈의 도발로 인해, 1975년에는 미국이 껌뽕 솜(현재의 시하눅빌)의 정유시설에 대해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이는 5월에 크메르루즈가 미국 상선 마야궤스(Mayagüez) 호를 나포함으로써 그 선원들을 구출한 특공작전과 병행해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그해 9월에는 베트남 영토 내에 도발을 일으켜, 총 78,000명의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 들어와 다음해 1월까지 전투를 벌이다 철군했다.
한편 크메르루즈의 "민주 캄푸치아"가 수립된 1975년 이래로 , 비-공산계열 반군들의 저항도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지나치게 무차별적인 숙청 등으로 크메르루즈 내부에서도 이탈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베트남으로 넘어가 반-크메르 진영을 구축한다. 1978년 12월에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을 주축으로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NUFNS)이 결성됐다. 그리고 12월 22일 총 12만명에 이르는 베트남군 병력과 함께 캄보디아로 진격해, 17일만인 1979년 1월 7일에 프놈펜을 함락시키며 크메르 루즈 정권을 붕괴시킨다. 이들이 1월 10일에 수립한 정부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었다. 하지만 이로써도 캄보디아의 전쟁상태는 끝나지 않았다.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 밑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국제사회는, UN의 캄보디아 의석을 크메르루즈가 갖는 것으로 합법성을 부여시켜주었다. 또한 1982년부터는 크메르루즈와 손 산의 "크메르민족해방전선"(KPNLF), 그리고 시하누크의 "캄보디아 민족연합전선"(FUNCINPEC)의 3파가 연합해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CGDK)를 결성했다. 이들 3파 소속의 군사조직들도 각기 베트남 및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군과 교전을 계속해 나갔다.
1980년대 말 냉전체제가 붕괴하면서 소련이 개혁의 물결에 휘말렸고, 이에 베트남에 대한 지원이 약화되게 됐다. 따라서 국제사회의 압력은 물론이고, 크메르루즈를 지원하던 중국과의 관계 개선도 필요했던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군을 결정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베트남의 철군으로 위기감을 느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도 대화에 나서게 된다. 그리하여 1988년 7월 자카르타에서 최초의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연이어 1988년 7~8월에 파리국제회의가 개최됐고, 1990년 6월에는 도쿄에서 캄보디아 문제 국제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10월 23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조인되게 되었다.

(사진: 프놈펜포스트) 1991년 오랜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좌)을 훈 센 총리(우)가 영접해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이 협정을 통해 1993년의 새로운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UN이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 체제를 성립시켰고, 그 과정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1993년 현재의 "캄보디아 왕국"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크메르루즈(민주 캄푸치아)는 이후의 정치일정에 참가하지 않고 무장투쟁을 계속하다, 1990년대 후반 주요 지도자의 사망과 항복, 체포 등으로 소멸했다.
이 협정에 대하여 주의할 점은 역사 상 파리에서 조인된 평화협정이 여러 번 있었고, 특히 "파리평화협정"이란 이름으로 1973년 미국-베트남 간에 체결된 체결된 "파리평화협정"과, 1991년의 캄보디아 관련 "파리평화협정"이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으니 유의하기 바람. (크메르의 세계)
● 바로가기: "파리평화협정 전문 (영문: 1991-10-23)"
파리평화협정 개요
"사이버 민주인권 국제관"(http://cyberhumanrights.com)에서 제공하는 자료 (2009-8-25 추가)
1990년 1월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은 파리에서 회담을 갖고, 캄보디아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유엔이 캄보디아를 관리하고 국제평화유지군이 안보를 담당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캄보디아 내전종식과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평화안을 마련한 것은 8춸이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유엔은 베트남이 지원하는 헹삼린 정권의 총리인 훈센파와 시아누크파 등이 포함된 12인으로 된 최고민족회의(국가최고평의회, Supreme National Council: SNC)를 구성하고, 시아누크를 의장에, 훈센을 부의장에 선임하였다. 민주캄푸치아 연립정부의 3정파는 UN의 계획에 동의했으나, 훈센은 생각이 달랐다. 특히 크메르루즈와 연정합류에 반대했다.
어쨌든 이로 인해 1991년 6월 24일 태국의 파타야에서 최고민족회의 회담을 갖고 무기한 휴전과 외국군사원조를 받지 않기로 전격합의를 도출하여 4개 정파간의 전쟁이 일단 휴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1991년 10월 23일 예정대로 캄보디아 내전 당사자인 4개 정파와 19개국의 외무장관들이 파리회담에 참가하여 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캄보디아 내전은 종결되었다.
이 협정 안의 주요 내용은 캄보디아 내전의 4개 정파가 선거 이전에 병력의 70%를 감축하고, 무장해제와 휴전감시, 유엔평화유지군 파견, 유엔의 캄보디아잠정통치기구(UNTAC) 감시 하에 총선 실시한다는 것 등이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엔: 유엔 활동기구는 ‘유엔 캄보디아잠정기구’로 불리며, 유엔사무총장에게 활동사항을 보고한다. 이 기구에는 전투원들의 무장해제, 캄보디아 통치, 자유선거 등을 돕기 위한 대규모 군병력과 민간요원을 포함된다. 269명의 선발대가 1991년 11월부터 작업에 들어간다.
의사결정: 캄보디아 4개 정파 모두가 참여한 최고민족회의(SNC)가 캄보디아의 주권구현을 위한 잠정지도부 구실을 한다. 노로돔 시아누크를 의장으로 한 민족회의 유엔캄보디아잠정기구에 조언을 하며 이 협정의 정신에 따라 정파간에 합의된 조언을 이 잠정기구는 따른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아누크가 결정한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UN 사무총장의 특사가 결정한다.
행정: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행정기관, 기구, 사무실은 유엔이 직접적 감독하고 통치 한다. 유엔 쪽 수석대표는 정당 사무실에 직원을 상주시킬 수 있다. 캄보디아 잠정기구는 또한 경찰력도 감독 및 통제할 수 있다.
외국군과 무기: 캄보디아에 남아 있는 모든, 외국군, 고문관, 군사요원 등은 무기와 탄약, 장비 등을 가지고 즉시 떠나야 하며, 외국의 모든 군사원조는 중단되어야 한다. 캄보디아 임시기구는 외국 무기의 유입 등을 감시하기 위해 해안 및 국경 등을 순찰할 수 있다.
동원해제: 캄보디아 임시기구는 정전을 감시한다. 캄보디아의 전투원들은 유엔에 그들 병력의 규모와 소재지, 장비목록을 넘겨야 한다. 선거전에 적어도 70% 이상을 동원해제하며, 선거 이후에는 새 정권에 속하지 않은 무장집단의 나머지 병력도 무장해제 한다.
인권: 모든 당사자들은 1970년대 중반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의 집권 당시와 같은 학살이 되풀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권 존중을 서약한다.
난민: 모든 캄보디아 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가진다. 유엔 사무총장은 난민들을 그들이 선택한 목적지로 귀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와는 별개로 타이 국경에 대규모 난민수용소를 설치한다.
서명국: 이 협정에는 특히 캄보디아의 중립을 보장하는 18개국이 서명하게 된다. 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브루나이, 캐나다, 중국, 프랑스,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타이, 소련, 영국, 미국, 베트남, 유고슬라비아 등이다. |
관련 화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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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파리에서 협상 중인 각 정파의 대표들. 우로부터 키우 삼판(Khieu Samphan), 이엥 몰리(Ieng Mouly), 시하누크 공, 4번째는 미상, 훈센 총리, 호 남홍 외무부장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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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로부터 시하누크 국왕, 롤랑 뒤마(Roland Dumas) 프랑스 외무부장관, 훈센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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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협정에 서명하는 훈센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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