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월간불광 2008-6-13
캄보디아 불교 1
고승 / 부크리(Bour kry)
김나미 _ 종교전문작가로 20여 년간 구도하는 마음으로 전국과 세계 각지를 다니며 종교의 벽을 넘어 수도자, 성직자, 명상가, 성자, 은자, 도인들을 만났고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글을 써왔다. 저서에 『환속』, 『파란 눈의 성자들』, 『이름이 다른 그들의 신을 만나다』, 『하늘 아래 아늑한 곳』,『갠지스 강가에서』 등을 펴냈다. |

역사에서 극과 극을 달렸던 나라, 캄보디아는 대 크메르 제국의 찬란한 문화와 킬링필드라는 대학살의 참상을 겪었던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다. 미얀마와 함께 남방불교의 순수성을 대표하는 캄보디아 불교는 역사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있다. 불교를 국교로 전 국민의 95%가 불교신자인 나라, 불교를 떠나 일상의 삶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오렌지 색 승복을 입은 승려의 숫자만 보아도 캄보디아는 초기 원시 불교시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자그마한 마을의 거리에서도 승려의 탁발 행렬을 흔히 보며, 무대만 바뀐 이 21세기의 풍경에서 2,500여 년 전 금강경의 부처님과 불제자들 모습까지 그리게 한다.
4시간 거리에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은 우리의 60, 70년대와 흡사하다. 시내 한복판에 바쁘게 돌아가는 건 오토바이뿐, 삶의 속도는 느리고 여유로워 보인다.
시내 왕궁 바로 옆에 위치한 사찰인 수간다마하상하라자 디파티는 우리의 조계사와 같은 사찰이다. 마침 사시예불을 마친 시간에 이 사찰에서 캄보디아의 최고 고승을 만나는 행운을 만났다. 캄보디아 불교신자들 사이에 ‘부크리(Bour Kry)’라고 불리는 스님은 우리의 종정과 같은 위치이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없는 캄보디아에는 고승이 왕가의 정신적인 스승이자 국가적인 대사에 조언자도 된다. ‘노로돔 시하누크’공의 왕위 대관식에 부크리가 예식을 집행했었다.
우리는 다 같은 불자, 대·소승 구분하지 말아야
남방불교식의 앉은 상태의 삼배를 올리고 나니 푸근한 얼굴 모습이 사람의 긴장부터 풀게 한다. 한국 사람에게 특별한 반가움으로 친절을 보이는 부크리는 남한사람을 처음 만난다 한다.

“남한사람 만나서 반가워요. 언젠가는 남한에도 가봐야지요. 시하누크공과 김일성과의 친분이 유난히 가까워 저도 동행하여 북한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부크리를 통해 북한 소식과 왕가의 근황도 듣는다. 불란서 식민지를 겪었던 캄보디아 1세대는 누구나 불어를 하는데 부크리도 예외는 아니다. 어린 나이에 출가해 오늘의 부크리가 있기까지의 이야기에, 캄보디아 국민과 왕가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전체적인 남방불교의 전통처럼 캄보디아의 불교 역시 개인의 깨달음에 더 큰 초점이 있어 보인다는 나의 언급에 법문을 주신다.
“우리는 일단 다 같은 불제자들이니 대승과 소승을 구분하지 않았으면 해요. 불교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우리는 전통상 아라한과를 얻어 아라한이 되는 데 더욱 치중하는 건 사실이지만, 대승의 보살 또는 성불하여 부처가 되는 것 역시 같은 것이고 단어만 다를 뿐 아닐까요.”
예류(預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阿羅漢)의 네 위(位) 가운데 아라한을 최고의 자리에 놓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성불과 아라한과 증득은 같은 것이니 굳이 구별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대화는 2,500여 년 전의 부처님에게서 현재로 돌아왔다. 난 한국을 모델로 하여 캄보디아에 불어닥친 경제, 산업 개발에 염려를 표했다. 경제발전과 행복지수는 반비례한다는 근거는 바로 한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그것에 비례해 행복지수는 높지 않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 말에 부크리가 한국 사람들에게 특별 법문을 주신다.
행복은 각자의 ‘마음조절’에 있다
“어디든 경제가 발전해 갈수록 사람은 물질에 묻히거나 갇히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의 기준이 오로지 돈에만 가 있고 도덕, 윤리적인 가치가 돈에 흔들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욱 더 몸에만 집착을 하게 되지요. 탐진치 삼독심은 불같아 사람의 눈을 멀게 해요.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지만 점점 행복과는 멀어져만 가고 있지요. 하지만 그런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 믿어요. 끝까지 가다보면 사람들은 인생에서 과연 무엇이 중요한지 점차 깨닫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을 조절하게 되고 또 행복은 물질적인 가치보다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과연 사람에게 무엇이 중요할까요. 우리의 마음을 조절하는 것, 행복은 다 마음 안에 있지요. 이것을 아는 것이 수행입니다. 부처님은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이것을 알았기에 출가하지 않았습니까?”
수행보단 기복을 강조하는 풍토에서 나부터라도 ‘마음조절’ 하는 수행이 힘든 점은 마음의 움직임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 뭔가 비법이 있을 것 같다.
“생활 중에 수행을 따로 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난 신자들에게 ‘믿으라’, ‘수행해라’ 강요하지 않아요. 일상생활 가운데 시시각각 마음의 흐름을 살펴 항시 마음을 조절하세요. 마음조절은 자신에 대한 자비이고, 밖으로는 마음을 필요한 곳에 나누며 남을 향한 자비를 실천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마음조절로 오래 전 이미 잘사는 인생의 비법을 아는 불제자, 무척 행복해 보인다. 이런 고귀한 분들에게도 소원이 있을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 여쭙자, 내생은 금생의 연장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잘 살자는 현실로 돌아온다.
지나던 객을 대하는 부크리의 말소리, 몸가짐 하나에서도 순간에 집중되어 자비로움으로 퍼져 온다. 가슴 벅찬 행운의 만남에서 인연을 떠올리며 행복에 주신 정답인 ‘마음조절’만은 깊이 새겼다. 불제자 고승이 계신 캄보디아의 불교가 적어도 현재의 상태로 지속되길, 난 이 마음을 간절하게 기원으로 대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