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 사랑.
이 드라마는 그 어떤 것보다 운명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주인공 남녀는 그 짧은 순간을 함께한 것으로도 서로를 운명이라 느끼게 되지만,
그 운명을 확신하지 못해 서로 다른 타인과 결혼하나 그들을 사랑하지는 못한다.
결국 이혼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와서야 비로소 서로가 운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만약 종혁(차인표)이 자신의 사랑을 조금 더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고,
시집살이를 힘들어하는 지현(이영애)을 위해 현명한 행동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둘은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민경(조민수)이 이모(김해숙)의 말대로 강욱(이경영)을 감싸고 포용했다면 역시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던 것은 작가의 선택이고,
그것은 곧 두 주인공의 운명적인 사랑을 위해 그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야기.
앞뒤없이 처음부터 태국. 그리고 지현과 강욱의 첫만남. 그리고 열정적이었던 둘의 밤을 맨 먼저 그렸던 것은
그들의 불꽃같은 사랑을 최대한 아름답고 뜨겁게 그리려고 했던 것 같다.
서로의 상대가 있는 상태에서 그런 모습이 나왔다면, 분명 도덕적인 잣대로 그들이 좋게 봐질리가 없으니까.
또한 이후에 귀국해서 서로의 상대가 드러났을 때, 평탄하지 않을 앞날을 예고하는 긴장감도 불러일으킨다.
물론 초반에 시선을 잡기 위해 계획된 연출의 냄새도 좀 나지만. ㅋ
다른 사람에게 빠져 허우적대던 남녀주인공들의 곁엔, 각각 그들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연인들이 있다.
아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갖춘 종혁이 아름다운 것(?) 빼면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지현에게 빠져 집착하고 있고,
까다로운 엄마가 그렇게 반대하는데도 민경은 강욱을 고집하며 결혼을 진행한다.
지현과 강욱은 한 순간 그들의 연인에게서 벗어나 서로 함께하고 싶다... 생각하지만,
둘의 관계를 알고 상처받은 민경을, 자존심을 굽힌 종혁을 버리지 못해 그대로 결혼을 감행하여 불행은 시작된다.
자애로운 부모님 아래서 드라마작가로 자유로운 삶을 살던 지현은, 모든 것을 포기한채
종혁만큼 대단한 그의 집안에서 로봇처럼 감정없이 움직이는 삶을 살게 된다. 이젠 그녀가 웃는 것을 쉽게 볼 수 없었다.
사랑은 없었어도 친구와 같은 편안함은 있었던 민경이 지현과의 관계를 알게 된 후엔 시도 때도 없이 강욱을 의심하며 후벼파자
계속 죄인으로 고개를 숙이던 강욱도 점점 민경이 질리고 그만큼 반대로 지현이 그리워진다.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불행은 오히려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고, 결국엔 네 사람을 터지게 만든다.
시어머니(강부자)에 대한 두려움에 떨다 두번째 유산을 하게 된 지현은 결국 집을 뛰쳐나와 도망쳐 숨어버리고,
지현과 강욱의 소문은 소문대로, 지현은 지현대로 막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종혁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다.
하필 지현이 아이를 잃었다는 말을 들은 직후 자신과는 아무런 상의 없이 혼자서 아이를 지운 민경에게 강욱은 정이 떨어지고,
'언제든 달려나가겠다'며 지현과 통화하는 강욱의 충격적인 말을 들은 민경은 더 이상 바보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각각 이혼이 진행되고 서로에게 피해가 될까 알리지 못하는 지현과 강욱은, 종혁과 민경에게 마지막 예의를 갖춰 끝을 맺는다.
1년이 지난 후, 이혼한 서로의 소식을 여전히 모르고 있던 강욱과 지현은 마침내 상대방의 안부를 알게 되고,
길었던 기다림과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에게 달려가 함께하게 된다.
리뷰.
이 드라마가 방영되던 당시엔 끝까지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초반의 영상들은 기억이 나는데 뒤로 갈수록 그 기억이 희미하거나 생각나지 않았다.
어느날인가 대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 올려놓고도 쉽게 읽을 결심이 서지 않아 묻어뒀었고,
1회, 2회의 대본을 보고도 별로라는 생각에 잠시 다른 대본으로 외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 또 문득 읽어볼까...하는 생각에 다시 시작했는데,
그때, 드디어 불꽃이 일어 마지막까지 미친듯이 읽어댔다. ㅋㅋㅋ
'김수현' 선생님의 스타일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깊었었는데
이번에 대본을 읽으며 확실히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대본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흡입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연륜에서 느껴지는 중년 캐릭터들의 생동감, 모든 캐릭터들을 적절히 아우르는 전지전능함,
자를 재고 그은 것처럼 칼같이 깔끔한 줄거리, 끊임없이 이유를 내놓으며 결과를 정당화시키는 노련함.
그런 능력들이 항상 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고 흥미없어했던 나를 자책했다.
하나의 작품으로 판단하면 확실히 완벽하고도 멋진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니까.
캐릭터.
'종혁'의 캐릭터에 푹- 빠져버렸다. ㅋㅋ
물론 차인표가 대본과 같이 그렇게 잘 연기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내 기준에서 차인표는 그다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대본상으로는 종혁이 너무 매력적이다.
'꿈이 없다면' 내가 정말 그런 집에서 잘 살 수 있는데. 하고 생각했다. ㅋㅋㅋ
밝고 명랑하고 잘 웃고, 예의바르고. 어른에게도 잘 하고. 적당한 인내심도 있고. 사리분별 있고.
음.... 종혁에겐 딱 나같은 사람이 필요해. ㅋㅋㅋ
오히려 '강욱'의 캐릭터는 너무 싫었다. 우유부단해.
'지현'의 캐릭터는 어떤 식으론 나와 닮은 것 같아 공감이 많이 갔다.
나 역시 내 삶이 더 중요하고 내 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민경'은 짜증.... -_-;;
민경이모(김해숙)와 초희(양미경), 지태(송영창), 종혁모(강부자), 유자(김나운) 등등등....
나열하니까 참 많네... 너무 짜증나는 캐릭터들이었다. 어쩜 그렇게도 얄미운지. ㅋㅋ
가장 압권이 초희와 유자. -_- 진짜 저런 사람 곁에 있고 싶지 않다.
반면에 현경(장서희)과 같은 친구, 한수(원기준)와 같은 동생, 지현부모(백일섭, 정혜선)가 같은 부모님은 참 좋았다.
이들이 어떠해서 그러한 마음이 드는지를 열거하기엔.... 귀찮다. -_-;;
사랑이 가득한 드라마를 좋아하는데, 이 드라마가 그러하진 않았지만,
주인공들이 타인과 함께 상황이 변해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가슴 졸이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고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