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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2일(목) [용서없이 미래없다]
김기석 : 지난 번에는 소금꽃나무를 읽으며 마음이 많이 불편했는데, 이 책 [용서없이 미래없다]를 읽으며 우리가 고난의 역사를 그렇게 지낸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8월초에 휴가차 베를린에 집회 때문에 독일에 다녀왔습니다. 베를린 인근에 있는 몇 군데를 돌아보았습니다. 본회퍼의 흔적-훔볼트대학(예전 베블린 대학), 그루네발트(본회퍼가 10대를 보낸 곳), 본회퍼 가문이 살다가 본회퍼가 체포당한 집(지금은 본회퍼 세미나 같은 학회가 열립니다)을 들리고, 본회퍼가 25살에 목사안수를 받자마다 파송받은 곳이 베딩이라는 곳의 히옹켄헤교회에 견신례담당 목사로 가게되는데 그곳에도 갔습니다. 성니콜라이교회, 강제 수용소가 있던 작센 하우센 교회등을 둘러보았습니다. 수용소를 보면서 이것이 인간인가? 하는 질문을 가졌습니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에서 멀지않은 곳에 홀로코스트(희생당한 유대인)를 추모하기 위한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고, 유디휘에즈 뮤즈음(유대인 박물관)을 보았는데 이 박물관은 전시품 뿐 아니라 건물 자체가 아주 신학적입니다. 나중에 가시게 되면 시간이 없더라도 유대 박물관은 꼭 가보셨으면 합니다. 건물을 보기 위해서라도. 작센 하우센에서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참상을 느끼게 하는 것은 철거를 하고, 대신 사진을 놓아둠으로 가해의 역사를 표백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유슈비츠 이후에 어떻게 신학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참상 못지 않은 참상이 벌어진 곳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었습니다. 저는 70년대부터 아파트헤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악마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라고 생각했냐면, 50년대 60년대 미국 남부에서의 흑인 차별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보다 더 처절한 역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련의 해체이후에 억눌린 독립성이 종족간의 갈등으로 심각하게 드러난 것이 아프리카의 현실이었고, 제노사이드-종족말살의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소말리아, 르완다 등에서 이런 심각한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이 참상을 극복하고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신학은 대안을 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내 놓아야 할 것입니다. 남아공에서 벌어졌던 이 놀라운 화해의 역사는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투투주교가 만델라가 감옥에 있을 때부터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투투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을 알리고 도움이 된다면 노벨평화상을 받겠다고 하고 받았고, 그 이후에 참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1994년은 투투주교가 노벨평화상을 받은지 10년이 지난 후였는데 일종의 시대의 전환을 일으킨 해입니다. 만델라가 27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서 흑인도 선거한 최초의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아공 사회는 백인들이 주도권을 잡은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백인들은 의혹의 눈으로 만델라를 보고 있고, 만델라는 백인들의 도움 없이는 사회를 새롭게 만들 수 없는 모순의 상화이었습니다. 역사를 청산해야 하는데, 그냥 청산은 안되고 그들을 어떻게 끌어 안으면서 정의를 새울 것인가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또한 흑인들의 바람이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다면 아파라트헤이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역사는 한 번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치 전범들에 대하여 전범에 대한 공소시효없이 했는데, 그럴 수 있는 것은 미국을 지배하는 것이 유대인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정의와 보복의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 해결 방식이 한편에는 일리가 있고, 역사가 그렇게 엄중하게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숨고, 진실이 드러나지않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고 이런 문제들이 생깁니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이 책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된 것이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였습니다. 가해자가 위원회에 나와서 그동안 자신의 가해행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사법적 처리를 하지 않고, 피해보상도하지 않는 것으로 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남아공 사람들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의를 행한다고 했는데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행한 것을 보면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아시아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음에도 원폭피해자라는 것을 선전함으로 오히려 피해자의 지위를 얻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투투주교가 위원장이 되면서 거기에 기독적 가치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문익환목사님의 경우도 운동의 현장에서 목사로서 나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가 늘 고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로서 사람들이 놓치고 가는 ‘생명의 가치’를 가지고 가는 것이 내 몫이다라고 자신을 정리합니다. 투투도 이와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우분투’라는 아프리카인의 정신을 가지고 갑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품는 정신인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내면화 되어 있는데 ‘우분투’정신을 가지고 갑니다. 그것은 상처입은 흑인들을 치유함과 동시에 가해자였던 백인들, 비인간화 되었던 그들을 인간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운 역사의 사건들을 드러낼 때, 그 위원회 사람들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놀라는 것은 ‘인간이 참 거룩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처받고, 고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가장 비인간적인, 악마적인 것도 드러나고, 용서하는 것도 드러납니다. 힘있는 사람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역사를 새롭게 할 수 없다. 역사를 새롭게 하는 것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품어 안을 때 새로워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인간 이하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들의 변화가능성을 없앨 뿐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책임도 면하여 주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위험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그는 우리가 자유롭게 지옥가는 것을 강요에 의해서 천국 가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셨다.” “이상적인 사회는 그 속한 멤버들이 자기의 자유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고, 신은 그 사회에서 우리가 변혁의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함께 함으로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 추천합니다. [GOD HAS A DREAM],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하는 것들을 요즈음 ‘회복적정의’라는 말로 많은 이들이 하고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짓거나, 가해자를 응징하거나, 피해자의 손해를 보상하는 누구는 승자가 되고, 누구는 패자가 됨으로 한 당사자는 다른 당사자에 대해 울분을 가지게 됨으로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회복적정의의 목표는 마음으로부터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진정한 함께함을 갖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도 추천합니다.
이광열 :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용서와 화해로 간다는 것은 더 놀라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보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계속적으로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런 화해와 용서를 거치지 못해서가 아닌가한다. 진보와 보수라는 잣대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람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어떤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한다. 우리가 참 하기 힘든 것이 ‘미안하다’는 말인데, 이 말 한마디를 못해서 화해하지 못하고,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많다고 본다.
김기석 : 유승완영화감독이 홍순관 집사의 평화콘서트에 왔는데, 평화가 무엇이냐고 묻자 ‘전철에서 어깨 부딪히지 않는 것.’ ‘부딪히면 미안하다고 하는 것.’
이광열 : 큰 차별을 넘어, 내 주변의 작은 차별을 해결해야 한다.
김기석 : 기독교인들은 온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도스토에프스키는 말한다. 오늘 여기에 책임지기 싫으면 거대담론으로 가려고 한다.
임성호 : ‘우분투’라는 차마번역할 수 없는 그 무언가로 해 놓았는데, 우리의 너그러움, 똘레랑스의 차원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고,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우리 사회에 북녘의 형제들을 향한 우분투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뭔가 베풀면 댓가나 칭찬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기석 : 번역어는 없는 것 같다. 그 문화속에서 만들어진 언어이다. 우리의 ‘정’같은 언어처럼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다. 그 문화에서 정확히 끄집어낸 것이다. 이 말 ‘우분투’를 사용할 때 그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우동혁 : 저는 진보와 보수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긴장과 갈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광열 : 그것으로 선과 악을 나누려고 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동혁 : 책의 제목을 봤을 때와, 책을 읽어갈 때와, 책을 덮고 나서가 다 달랐다. 용서할 만한 힘도 없는데, 진실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용서해야한다고 가르쳤던 지난날 우리사회의 현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용기와 진실이 갖추어 졌을 때 용서가 비로서 행해질 수 있었다고 본다. 정의가 행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는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본다. 용서할 수 있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용기, 진실, 용서, 화해, 확산이 있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일제와, 독재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타인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는 선진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는 후진적인 상태를 넘지 못하고 있다. 자기의 삶 속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 시기에 와도 행할 수 없다고 본다. 이중적 잣대로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 이러한 이중성을 탈피할 수 없는 훈련이 되지 않고는 어렵겠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화해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너무 일찍 싸움을 내려놓은 것 아닌가한다.
김기석 : 오용되기 쉽다는 것에 공감한다. ‘용서’ ‘화해’이런 말들이 오용되기 쉬운데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 어떻게 오용되었는지를 밝혀내고, 진정한 의미를 되살려내야 한다. 성서도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용서는 ‘정의’를 전제로 한 ‘용서’이다. 오용되고, 오염된 언어들의 본 값을 찾아내야한다. 우리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상투어이다. 상투어 없이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제일 치열하게 한 사람이 이청준 선생이다. 광주이후에 용서의 문제를 가지고 20년을 산다. 기회되면 이청준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언어사회학 서설]이라는 소설책이 있는데 거기서도 그렇고, 말들이 제 집을 잃고 떠도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헤메는 말들이 음란하게 교접하고있다고 이청준은 말한다. 용서라는 말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 놓아보아야 한다. 상투어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기만한다. 말을 다루는 목사라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른다.
김진혁 : 저항, 창조, 화해라는 부분들이 힘이나, 에너지 같은 것들을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겠다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는데 전혀 다른 언어로 이해하는 것을 본다. 철학적으로는 통역가능성이 없는 언어들을 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하이라키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이 무너지는 것이 199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고 보는데, 정확하게 자시의 생각이나 상황을 바라보고 어떠한 의미에서 쓰여졌는지를 봐야한다.
김기석 :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의미 찾기, 말들의 제 집 찾기가 필요합니다.
김기석 : 유럽인들은 원전에 대한 공포가 어마어마하다. 독일인들은 전범국가라는 동질감에이해 일본인들을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원전 때문에 계속적으로 거짓말을 해 그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원전기술은 폐기물 처리 기술이 없는 미완성의 기술이다.
한혜흠 : 한 여성의 편지글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첫 사랑의 남자가 비밀 경찰에 가서 헤어지고, 세 번째 남편이 비밀 경찰에 가서 결국 제일 말단의 비밀 경찰의 일을 했는데 그 일을 감당했던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고통, 그가 용서 받았지만 자기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고백을 아내가 편지로 썼는데, 용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되었다. ‘용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용서를 하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기석 : 강용석의원을 제명하지 않는데 전국회의장이었던 모 장로님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다고 한다.
김진혁 :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책을 만들었는데, 탐욕의 복음 을 버려라. 바벨탑에 갇힌 복음을 버려라. 라는 시리즈들을 미국에서 만들어 가고 있다고 하는데 이제 정말 변화가 올 때가 온 것 아닌가 한다.
김기석 : 복음주의권에 엄정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그 힘으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달에 본회퍼를 보겠지만 본회퍼는 아주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가끔 공허함을 느낀다.
강용준 : 저는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 용서받을 사람의 자격이나 이런 것들 보다는 피해자가 주는 일방적인 것이 용서 아닌가 했다. 결국은 형식이나 틀에 갇혀있는 교회나 신앙이 고통과 억압 속에서 진정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고, 앞으로 끝없이 이어져야 할 일들이라 본다.
김기석 : 남아공이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초창기에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리가 화해에 대한 본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당장 혼란스럽다해도, 해방의 역사를 가로막아서는 안되고, 우리가 광주에 대한 채무의식속에 살 수 밖에 없는데, 회복적정의에 대한 노력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이러한 책임을 교회가 해야 한다고 본다.
이광열 : 딤전 1:6 종은 자기 주인을 존경할 분으로 여겨야한다. 그렇게 해야 ~~ 이걸 공동체의 상황 차원에서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김기석 : 성서를 붙잡고 해석을 할 때 그런 해석도 유의미 하다고 본다.
이광열 : 차별을 거세하고 있다.
김기석 : 현상적으로 나타난 자신도 자신이라는 것을 포괄해서 보아야 한다. 조지 오웰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고 있는데, 이 사람의 에세이를 찾아서 보고 있다. 버마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노정하게 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을 이야기 할 때 본질 만이 아닌 우리의 노정 까지도 보아야 한다. 현실적인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직면해야 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도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직면하기 위한 것이다.
박정인 : 299쪽에 “조종석에 백인이 아무도 없다니, 정말 신경 쓰이네. 흑인 조종사들이 이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구조가 우리를
김진혁 : 시스템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고 본다. 우리 사회에도 과거 외국으로부터 엄청난 돈이 들어왔는데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재용 : 종교가 어떻게 돈이 되는가?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대형교회의 역사 속에 나타난 미화의 역사가 있다. 기득권에 저항하지 못 하도록 만드는 것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김기석 : 노자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사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사람을 아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했다. 8할이 같고, 2할이다. 다르면 우리는 2할 때문에 원수가 된다. 그러나 8할이 같으면 그것이 중요하다. 루쉰의 썩은 사과 먹는 법을 보면 우리는 썩으면 그것만 도려내고 먹는 것이지, 썩었다고 다 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보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우동혁 : 어떤 정치인이 ‘당신은 항상 어떻게 즐겁습니까?’ 하고 물으며 가식아닙니까?했는데 자신은 진보라는 것이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이 걸 위해 산다면 내가 왜 즐겁지 않겠습니까? 했다고 한다. 진보가 내 삶을 추동하는 원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가야 한다.
김진혁 : 언어도 그 값을 찾아 주었을 때 그 언어가 제대로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개념의 창출보다는 오히려 값을 드러내고, 닷을 내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 뛰어들어서 느끼는 바다가 중요하다고 본다. 느끼기전에 해석하는 것이 근대화에 여전히 묵히는 것 아닌가한다.
김기석 : 이 둘은 분리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개념적 주추가 바로된데서 형용사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명사로의 발언과 동사로의 행동과 형용사로으 전환이 필요하다.
이광열 : 사람들은 왜 차별의 구조를 만들어 낼까?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대체 그 욕망의 원인은 무엇일까?
김기석 : 불안감 때문이다. 누군가의 눈에 어린 눈물에서 하늘을 볼 수 있는가? 이것이 서로주체이다. 하나님을 온 우주가 찬양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다. 교회는 이를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