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영주 10대 뉴스
1906. 4. 7. 신교육(新敎育) 시작 고종43년, 순흥면 내죽리에 사립 소흥(紹興)학교가 세워지고, 2년 뒤 풍기에 사립 안정(安定)학교가, 영주에 사립 강면학교가 개교하면서 이 지역의 신교육이 시작된다. 그 후 일본어 교육과 일본화 촉진을 위한 한국인 교육 방침을 규정한 조선교육령이 1911년 8월 23일 공포되면서, 강명학교가 영천공립보통학교(영주초등학교·1911. 4. 1.)로 개교하고, 소흥학교는 순흥공립보통학교(순흥초등학교·1911. 7. 24.)로, 안정학교는 풍기공립보통학교(풍기초등학교·1912)로 바뀌게 된다.
1913. 대한광복단 조직 1910년대에 국내에서 활동했던 대표족인 항일 결사 조직중의 하나. 1913년 풍기에서 채기중(蔡祺中), 유창순(庾昌淳), 한훈(韓勳) 등에 의해 조직된 후, 전국으로 확대됨.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 한다는 목표를 세운 뒤,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부호들에게 군자금 모집 취지서를 발송하고 친일파 처단 활동을 했다. 의병활동 단체와의 차이점은 공화국 건립을 위한 독립 운동 단체의 시작이었다는 것인데, 이는 곧 이 광복단이 대한민국 창립의 맹아(萌芽)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1914. 8. 1. 영천군·순흥군·풍기군의 통합과 영주군 개설 조선총독부의 도(道), 부(府), 군(郡)의 관할 구역 변경으로 인하여 영천·순흥·풍기군이 폐지되어 영주군에 통합되었다. 이 때 면(面)의 폐합(廢合)도 이루어져 영주군의 12개 면이 5개 면으로, 풍기군의 10개 면이 5개 면으로, 순흥군의 6개 면이 3개 면으로 폐합되었다. 당시 봉향면·망궐면·가흥면을 합해 이루어진 영주면이 1940년 읍(邑)으로 승격이 되었고,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되며 영주시와 영풍군이 분리된다.
1942. 2. 중앙선 개통 일본은 조선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경부선에 이은 조선 제2의 종관선(縱貫線)을 건설하여,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경기도등 4개 도에 걸친 내륙 일대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수탈하고, 날로 증가하는 조선·만주·일본 간의 여객·화물의 수송을 원할히 할 목적으로 이 노선을 건설했다. 1935년 345.2㎞의 이 노선은 1936년 실측공사, 1941년 영주∼안동 구간의 개통에 이어, 1942년 2월에 영주∼단양 구간의 개통으로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전구간에 걸쳐 험준한 소백∼차령산맥을 통과함에 따라터널 95개소, 교량 305개소가 설치되었다.특히 길이 4.5㎞의 죽령터널과 죽령역과 희방사역의 고도차이 때문에 만든 나선형터널(일명 따뱅이 굴)은 공사의 험란함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 후, 영암선(1955, 이후 영동선), 경북선(1966)의 개통으로 영주는 철도 십자로(十字路)의 정점에 위하게 되어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는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서, 지하자원과 임산물, 농산물의 집산지 및 유통지로서 영남(嶺南) 북부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48. 8. 희방사 월인석보 판각 소실(燒失) 1948년 8월,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 설치되면서 태·소백산 일대의 공비들을 저지하는 활동이 시작된다. 산간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가옥을 집단으로 만들어 공비의 접촉을 막고, 외딴 가옥 거주자들은 소개(疏開)시키는 작업을 한다. 이로 인해 희방사를 비우게 되었는데, 이 때 불이나 이 절에 보관되었던 세계 유일의 월인석보 판각이 소실된다. 100여장의 판목으로 된 ?판각의 머리엔 훈민정음 언해본판이 15장이 얹혀 있어 국어사 연구에 있어서도 너무 소중한 보배였다. 또 이 시기에 풍기 욱금동에 위치한 영전사의 소실('49), 군민의 희사금(喜捨金)으로 지어진 영주농업중학교(영주공업고등학교, 지역 중등교육의 효시)의 교사(校舍)에 공비들의 방화('49) 등 좌·우 대립으로 인한 안타까움이 많았다.
1961. 7. 11. 영주 대홍수(大洪水)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두 달, 지역에 큰 재앙이 닥친다. 그것은 수해(水害)였다. 전국에서 119명이 사망하고 130면이 실종되는 큰 수해였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영주의 2/3가 침수(시가지 는 전체)된다. 역(舊譯)과 불바위 사이의 제방이 무너지면서 시가지가 물속에 잠기게 된다(현 분수대에 있는 수해복구기념비의 높이가 물의 뫂이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의 결정에 의하여 영주에 수해복구 제2지부를 설치하고, 한절마을 서편 객산(客山) 허리를 끊어 서천의 유로를 변경하면서 수해 복구와 건설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 사업과 함께 영주에 많은 관청이 들어서게 된다. 세무서('62, 봉화)·대한석탄공사 임무소('62, 장성)·철도청('64, 안동)가 이전(移轉)되고, 태백산건설국( )·노동청출장소( )·대한생사공장( )·영주상공회의소('64)·연초제조창('70) 등이 신설되었다.
1973. 12. 23. 영주역 이전 영주역 이전은 수해 복구 공사의 마무리였다. 남산 평야를 매립하여 철도를 직선화시키고 그 한가운데 새로운 역을 건립하여, 영주역(舊譯) 주변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던 시가지를 넓혔다. 논 바닥에 불과했던 남산평야(휴천2동) 일대에 도로가 시원하게 뚫린 신영주(新榮州)가 만들어 진 것이다. 그 후 이 일대엔 새로운 시장(市場) 뿐만아니라, 전문대학이 들어서고, 시청사(市廳舍)가 건립되고, 대형아파트가 건설되며 도시의 중심이 이동하게 되었다.
1980. 4. 1. 영주시 승격 1940년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이 될 때만해도 영주 읍의 인구는 이만명이었다. 그후 중앙선과 영암선의 개통을 하면서 급신장을 이루고, 영주 대수해 이후 도시 기반이 조성되면서 1979년 인구가 8만에 이르러 이듬해 4월 시(市)로 승격이 된다. 하시만 이 시승격은 영주시와 영풍군의 분리라는 지역 이분화를 초래했고, 1990년대에 이르러 영풍군의 명칭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하는 사태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1997년 영풍군과 다시 합친 영주통합시를 만들어 화합된 마음으로 21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2. 원당천 수로 변경 지금의 원당로 자리는 예전엔 원당천이었다. 원당천은 시가지 복판을 관통하여 수해의 염려도 있었지만 도시를 두 동강이를 내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시 승격 후 첫 번째 대역사(大役事)를 실시하였다. 이산고개를 끊고 4.26㎞의 물길을 뚫어 원당천을 산너머 외곽으로 돌렸다. 이로인해 수해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렸을 뿐만아니라 양분되었던 시가지의 연결, 남북을 가로지르는 큰 길(원당로)과 택지조성, 새로 낸 원당천 둑을 안동-봉화의 외곽도로로 만들어 교통 혼잡을 해소 하는 등 일석사조(一石四鳥)의 효과를 올린다.
1990. 4. 1. 동양대학교 개교 1972년 5월 20일, 영주전문학교의 개교는 지역의 큰 선물이었다.영등산 자락에 남산평야를 바라보며 세운 이 대학은 지역의 전문인력 양성은 물론 신영주 시가지형서에도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 지역뿌난아니라 충청·강원 등 외지 학생들까지 유치하여 영남 북부의 교육 중심도시의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 대학을 설립한 현암재단(이사장:최현우)은 지역의 찬란했던 유·불(儒彿)문화의 전통을 이을 더 큰 인재를 양성한다는 건학이념으로 풍기읍 교촌리에 동양대학교를 설립, 지역의 미래에 대한 꿈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권외의 주요 사건 ·1930(?) 영주시가지 대화재 ·1943. 국도5호선, 죽령고개 신작로(新作路) 열림 ·1948. 8. 이승만대통령 부석사 방문 ·1949. 8. 18. 죽령터널 열차사고 발생(48명 사망) ·1993. 6. 3. 삼양금속 영주공장 준공 ·1994. 5. 11. 경북 도민체육대회 영주 개최 ·1999. 10. 7. 담배인산공사 영주신제조창 기공, 김대중대통령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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