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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 1571년 9월 29일 – 1610년 7월 18일)는 이탈리아 밀라노출신의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600년 로마 미술계에 갑자기 등단했다. 그 이후 그는 어떠한 수입이나 후원자도 없었으나 그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에 발표된 그에 관한 비평은 16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앞의 3년간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비평은 이렇게 말한다. "2주간의 작업 후 그는 데리고 다니는 하인과 함께 한 두 달간 칼을 들고 테니스장 여기저기를 으스대며 다녔고 싸움이나 논쟁에 개입되기도 하였다." [1] 그러다가 1606년 5월 29일 테니스 경기도중 말다툼 끝에 상대인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왔다. 이후에도 1608년 몰타에서 말다툼에, 1609년에 나폴리에서 또 다른 말다툼에 개입되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그를 고의로 살해한다. 다음 해인 1610년에 그의 10여 년간의 활동을 뒤로한 채 포르토 에콜레(Porto Ecole)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극적인 조명과 사실적인 묘사로 바로크 양식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 사실적이고 파격적인 주제들로 인해 비난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나 점차 인정받게 되어 유명해진다. 로마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미술의 흐름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사망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재발견되어 거장으로 재평가되었다.
16c 이탈리아를 주름잡던 천재화가
카라바조의 본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쉬(Michelangelo Merisi )다.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 베르가모 근교의 카라바조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인 카라바조는 그의 고향에서 유래했다.
카라바조의 아버지 페르모 메리시는 밀라노의 후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자의 신임을 받던 건축 감독관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1576년 흑사병으로 걸려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카라바조의 평탄치 않은 삶이 시작된다.
그는 13살 때 밀라노의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가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한다.
1590년 모친마저 사망하고 부친으로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써버린 카라바조는 1592년경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갔다. 그리고 근근히 생활하는 중에 토스카나 공국의 대사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이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카라바조의 후견인이 되었다.
카라바조는 추기경의 집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할수 있었고 <행운><사기꾼><류트연주자>와 같은 작품들을 그려낼수 있었다. 그리고 추기경의 소개로 교회에 설치할 공공작품 <성 마태오의 일화를 그린 성 루아지 프란체시 성당의 콘타렐리 예배당 작품>을 통해 로마 예술계에 공식적으로 데뷔하게 된다.
그 작업물 이후 6점의 제단화를 주문받는등 로마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가 되었고 그 당시 컬렉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품목이 되었다. 명문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그의 일화를 생생하게 기록한 전기작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적이고 훌륭한 작품에 비해 그의 성격은 훌륭하지 않았다.
그는 걸핏하면 쉽게 화를 내고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격한 성미의 사람이였다.
1600년11월9일엔 지룰라모 스탐파에게 몽둥이 찜질과 칼부림을 한 죄로 고소를 당했고
1601년2월7일엔 안젤로 성의 감독관을 부상 입히고
1603년8월28일엔 톰마소 살리니와 재판을 했고
1604년엔 로마에서 음식이 담긴 접시를 얼굴에 엎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1604년10월20일엔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 당했고
1605년5월28일엔 불법 무기 소지죄로 체포되었다.
1605년7월29일엔 공증인 마리아노 파스콸로네를 공격한 죄로 체포됐고
1605년엔 창문을 돌로 깨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1606년 5월 28일 테니스와 흡사한 공놀이를 하던중 상대편이였던 명문가의 가문인데다가 군대의 우두머리 집안의 란투치오 톰마소니를 살해하게 되면서 사형에 쳐해진다.
살해동기는 겨우 내깃돈이엿다.
그의 격한 성미덕에 사형까지 쳐해진 카라지오는 사건 3일후 로마의 감옥에서 탈출해 도피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항상 무장한채 다녔고 잠을 잘때에도 옆구리에 찬 칼을 빼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건 사고 속에서도 그의 작품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1607년 나폴리에 머물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1608년 말타에서 붙잡혀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그를 아낀 귀족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1609년 다시 나폴리로 돌아왔으나 말타에서 자객의 칼을 맞고 건강상태가 나빠져 계속 앓다가 1610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해변에서 죽었다.
이런 그가 도대체 어떤 작업활동을 했기에 16C 이탈리아를 주름잡던 화가가 되었을까?
그는 그가 본대로의 진실을 표현하길 바랬다. 그것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고전적인 규범이 아닌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갈망이였다. 그 당시 비평가들은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었는데 그 와중에도 카라바조는 분주하게 작업을 한 너무나 진지한 예술가였다.
카르바조 작업물의 특징은 강조하고 싶은 곳엔 강렬한 빛을 나머진 짙은 어둠으로 처리하여 빛과 어둠의 대비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명암법.테브리즘 기법이라 하고 이 것은 카라바조로부터 시작되어 이후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7c에 자주 등장하는 잔인한 장면이나 죽음의 처참한 순간을 다룬 그림 역시 카라바조로부터 시작되었다.
카라바조는 17c 회화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사람이였다
다윗의 표정 확대사진. 다윗의 슬픈 표정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응징하는 카라바조
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제목 :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크기 125cm X 101cm :켄버스 유채
소재지 :이태리 로마 보르게세(Galleria Borghese) 미술관
이 작품은 작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이며 작가의 천재성과 심원한 작품성의 의미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면에서 작가 후기의 대표작이며 여러 면에서 작가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집약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목숨을 건 대결에서 상대의 목을 잘라 들고 있는 승리자의 모습이면서도 승리자가 짖고 있는 미묘한 표정 때문에 약간 음산한 느낌이 드는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 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갔다가 다시 베들레헴에 돌아 와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었다. 그가 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골리앗이라고 하는 갓 출신 블레셋 장수가 대열에서 나와 전과 같은 말로 싸움을 걸어왔다 ..............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 장수에게 이렇듯 응수했다. 네가 칼을 차고 창과 표창을 잡고 나왔다만 , 나는 만군의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믿고 나왔다. ......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아귀에 넣어 주셨다. 나야 말로 네놈을 쳐서 목을 떨어뜨리고 네 시체와 블레셋 전군의 시체를 하늘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주리라( 1 사무엘 17, 15- 16: 23. 45- 46)”.
작가가 예술에의 열정 때문에 빈털털이로 로마에 와서 당시 실세였던 델 몬테 추기경의 후광을 업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의 작품이 로마 상류사회에 대단한 인기를 얻음으로서 그는 부와 명예를 양손에 쥐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반종교개혁으로 교회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제작되는 제단화나 교회의 성화 같은 종교화로부터 귀족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제작된 풍속화는 선풍 같은 인기를 끌어 유럽 최고의 화가가 되었으나 그의 괴벽은 갈수록 더 심해졌다.
그의 출생 배경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고귀하고 신앙심 역시 대단한 집안이었으나 그는 마치 이런 고귀함을 지키는 것이 삶의 거추장스러움으로 여겨 애써 그의 출신 배경의 고귀함을 지우려는 듯 진흙탕을 뒹굴듯 살았고 이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계속 만들게 된다.
당시 명문으로 평가되던 로마대학을 졸업하고 서품된 예수회원으로서 경건한 수도자로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인 그의 동생 죠반니 신부가 형을 찾아 왔을 때 자기는 동생도 없고 , 또 그 동생이 찾는 형이 아니란 말로 만나길 거절하자 동생은 황당하고 기막힌 처지에서도 형의 안녕을 빌며 기도를 약속하고 떠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부터 그의 일상생활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괴팍하고 격정을 조절할 줄 모르는 성격에다 정상적이며 평범한 사람들 보다 뒷골목의 인생들과 어울리길 더 좋아하다 보니 그의 삶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어떤 때는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도 속수무책이 될 만한 낭패스런 꼴을 만든것이 한 두번이 아니어서 감방 드나들기를 식은 죽먹듯 했고, 그의 수사기록을 보면 고발당한 것이 15번 정도 되고 감옥에 들어간 것이 7번이나 되었다.
카라바죠의 광폭성은 갈수록 도를 더하면서 자기 작품의 모델로 등장한 어떤 여자와의 치정관계 때문에 고소를 당하게 되고 이것을 피하기 위해 제노바로 도망을 쳤다.
로마에서 범법자로 도망친 범인이지만 거기서도 대단한 환대를 받으며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귀족의 보호 속에 작품 활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는 이상한 행동으로 끊임없이 주위를 실망시키면서도 그의 자질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부터는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드디어 자기 업보에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극적인 사건이 생겼다. 1606년 그는 테니스장에서 판돈 문제로 말다툼을 하다가 감정이 격해지자 결투를 신청해서 상대방을 죽이게 된다. 이 살인사건으로 화려하던 그의 로마 생활은 끝장이 나면서 도망치듯 로마를 떠나야 했다. 그의 도피행각은 정처 없이 계속되어 나폴리, 메시나, 팔레르모를 전전하면서 새로운 재기의 길을 열어줄 후원자를 찾게 된다.
이 작품은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친 첫 피난처인 나폴리에서 그린 마지막 그림이다. 자신의 행업에 의해 모든 것이 박살난 처절한 심정을 그는 골리앗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직품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은 위의 다윗처럼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엄청난 악의 화신인 골리앗을 때려눕힌 승리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손에 쥔 적장의 목을 통해 드러나는 비참한 현실에 놓인 자신을 바라보며 경멸하고 슬퍼하는 또 다른 자기의 분신(分身)이다. 소년 다윗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스스로 추악하게 변신한 자신을 응징하듯이 멸시의 눈빛으로 그러면서도 연민의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인물의 의미성은 다윗이 들고 있는 칼에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칼에 새겨져 있는 이름은 사무라이들이 사용하던 일본도나 중세기에 만들어진 서양의 칼들이나 구분이 없이 대부분 그 칼을 만든 장인(匠人)이나 아니면 칼의 주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칼에 새겨진 것은 장인이나 주인의 이름이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노의 <시편35편 주해>에 있는 교만과 겸손에 대한 교훈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거만한 자의 발이 나를 짓밟지 말게 하시고 악인의 손이 나를 내치지 못하게 하소서’.
거만한 자의 발이 자기를 짓밟지 말게 하소서라는 간원을 바치며 겸손의 길을 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작가적 자질을 인정받으면서 얻게 되는 명성에 도취되어 안하무인의 교만의 길을 걷다 회복될 수 없는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진 자기를 고발하고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듯이 겸손으로 교만을 이겨야 한다”는 교훈을 주면서 이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결과의 무서움을 제시하면서 경각심을 주고 있다.
앞에서 본 <탈혼에 빠진 성 프란치스코>에서 작가는 당시 가톨릭 교회의 개혁 의지를 반영한 반 종교개혁에 찬동하여 작품에 대단히 호교적인 성격을 표현했으나 여기에서는 다르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살인이라는 돌이키기 어려운 실패를 하면서 그의 인생관은 더 심원해져서 악과 선, 성과 속에 있어 그는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
여기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다윗은 의기양양한 승리자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착잡하고 기묘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는 패배를 모르는 맹장으로서 어이없이 한 소년인 목동에게 목이 잘린 채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연민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다윗의 모습에서 죄인이 죽기를 원치 않고 회개하여 다시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민의 표정으로 골리앗의 목을 들고 있는 다윗의 오른편에서 쏟아지는 빛은 다윗의 심장 부분을 선명히 비추면서 자기의 악행 때문에 인생을 망친 골리앗의 얼굴도 비추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믿음과 선행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교회의 구원관을 뛰어 넘어, 구원은 다윗 뿐 아니라 골리앗에게도 비추는 빛처럼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자비의 표현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교회의 가르침 보다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 당시 교회가 요구하던 선행이 있어야 구원된다는 울타리를 헐어버리면서 만민 구원에의 큰 희망의 소식을 선포하게 된다.
제목 :골리앗의 목을 벤 다윗(1606)
크기 90.5 X 116 cm : 목판에 유화
소재지: 오지리 비엔나 국립 미술관
작가는<골리앗의 머리를 벤 다윗>이라는 주제로 이 작품을 그리기 전 이 주제로 다른 두 점의 작품을 남긴바 있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윗은 골리앗의 벤 목을 손에 든 승리자의 모습으로서 ,흔히 이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승리자와 패배자의 이분법으로 구분된 모습이다.
이 작품을 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내면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사회적인 외면 치례는 할 수 있는 처지에서 그린 것이며 ,여기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손에 들고 자신만만한 모습에서 자기의 천재성에 의해 여러 작가들을 누르고 유럽 최고의 작가로 부상한 자신의 승리감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베토벤이 자기 생애에 가장 인기 있던 시대, 자기 명성과 인기에 도취되었던 시대, 자신의 이상적 인물이 당시 유럽을 석권하던 나폴레옹 보나팔트(Napoleon Bonaparte: 1769 1821)였고 이것을 모티브로 해서 유명한 교향곡 3번 영웅(Eorica)를 만든 것과 같다.
여기에서의 다윗은 자기 능력과 성공에 한껏 도취된 작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작가의 위대함은 속됨 안에 들어있는 성스러움을 찾아내고, 성스럽게 여겨지는 것 들안에 교묘한 모습으로 위장되어 있는 속됨을 고발한 것이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대는 그의 작품의 특성인 테네브리즘 처럼 삶의 모든 것이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였다. 귀족과 평민 , 부자와 가난한 사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극명히 구분되던 시대였으나 작가는 이것을 뛰어넘어 성과 속, 악과 선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삶 안에 공존하는 것임을 제시하면서 교회가 만든 교리의 울타리안에 감금되어 있기에는 너무도 큰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세상의 통념적 사고 , 즉 선인과 악인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면서 선한 사람은 승리하고 악인은 망하고 만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앞의 작품에 비겨 초보적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다윗과의 대결에 의해 머리가 잘린 비참한 패배자는 바로 카라바죠 자신이다. 작가는 기상천외의 착상으로 작품을 구상했는데, 다윗은 자기의 젊은 시대의 모습에서 골리앗은 살인죄를 짓고 쫒기는 현재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즉 다윗과 골리앗은 바로 작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라는 기막힌 내용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 중 간혹 자기의 얼굴을 작품에 그리는 예가 있었다. 예를 들어 성화해설 26번으로 소개된 <최후심판>에서 미켈란젤로는 가죽을 찟기며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가죽에 자기 얼굴을 그렸고, 25번으로 소개된 엘 끄레코의 <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에서 백작의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 속에 자기 얼굴과 자기 아들의 얼굴을 그린 예가 있다.
이처럼 승리자와 패배자라는 극단의 상반된 모습을 자기 모습을 통해 투영한 것은 그의 대단한 착상이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이 착상의 동기는 그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해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의 생활은 안정되기 시작했으나 그의 내면의 삶은 깊은 데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이것이 작품에서 까지 나타나게 되었는데, 로마 시민들이 경악을 할 사건을 만들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투철한 영성을 실천하는 개혁 가르멜(Discalced Calmerites) 수도회가 사목하는 로마의 산타 마리아 스칼라 (Santa Maria Scala) 성당 제단화로 “성모님의 죽음과 영면(mortem sive transitum)” 내용의 작품을 부탁받아 완성했을 때 주문자였던 가르멜 수도자들과 관람자들은 경악을 하고 즉시 그 작품을 성당에서 철거토록 했다.
이유인즉 가르멜 회원들이 그토록 공경하는 성모님의 모델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여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제작 얼마 전 로마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고급 창부가 있었는데, 무슨 사유인지 이 여자가 깊지도 않은 티베르 강에 익사체로 발견 되었는데다, 공교롭게도 그 여자는 당시 임신 중이어서 대단한 구설수에 오르고 있었는데, 작가는 바로 물에서 건져낸 이 여자를 모델로 성모님을 그렸으니 경악할 만하다.
이 작품은 즉시 성당에서 철거되었으나, 작품의 예술성에 감탄한 루벤스(Rubens)의 소개에 의해 어떤 귀족에게 넘어갔다가 지금은 파리 루브르(Louvre) 미술관 에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작가로서의 명성은 막바지에 떨어지게 되었으며, 그의 천재성을 이해하는 소수의 귀족이나 성직자외의 일반인들에게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기피 인물로 부각되었다.
작가는 목을 잘려 다윗의 손에 들려 있는 골리앗의 모습에 하느님의 뜻을 읽지 못하고 교만에 빠져 흥청대며 살다 비참한 모습으로 인생을 맞게 된 작가 자신을 고발하고 있다.
2번의 작품처럼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면 작가의 작품은 별것이 아니지만 이것을 뛰어넘음으로 작가의 천재성이 드러나고 있다. 작가는 인생을 어느 사회에서나 고정관념으로 정착되어 있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만 보지 않고 악인 안에 도사린 선의 모습을 찾아내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깊은 내면의 성찰을 하는 사람에게는 우리 모두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두 개의 모습 , 즉 다윗과 골리앗, 선과 악, 광명과 암흑의 이중성을 보게 되며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어느 한 부분을 감추며 살아오는 데 익숙한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독자들은 목이 잘린 비참한 모습의 골리앗에게서 인간 안에 있는 악인의 어두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성스러움을 발견하게 한다. 작가는 성(聖)안에 잠복해 있는 위선을 고발하는 한편 자기처럼 진흙탕을 뒹굴며 사는 변두리 인생들 안에 있는 선과 아름다움을 제시하면서 그의 개인체험에서 영근 구원관을 전하고 있다.
구원은 교회가 요구하는 고백성사나 참회나 선행을 통해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어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보지 못하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이 주시는 무상(無償) 은혜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성(聖)의 의미성을 제시하는 종교화였지만 실재 삶에서는 언제나 속(俗)된 것에 찌들려서 그것을 즐겼으나 그는 이 찌들린 속(俗)의 세계에서 성을 찾아 내어 작품화 시킴으로서 어느 종교화가도 줄 수 없었던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있다.
동양적인 표현에서 보면 그는 진흙뻘 수렁에서 연꽃을 피우는 원예사와 같았다. 깨끗한 연꽃을 피울 수 있는 자양분을 주기 위해 그는 속세의 땀내 나고 더러운 끈끈함을 즐겼으며 , 보통 사람으로는 어려운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편력이 다른 작가들이 흉내 낼 수도 없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품은 또 다른 형태의 단테의 신곡을 표현하고 있다. 단테는 로마의 시인 비르질리우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을 방문하고 마지막으로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천국에 이르게 되는데, 비르질리우스는 이성과 도덕성의 상징이고 베아트리체는 사랑과 신앙의 상징이다. 그는 사랑과 신앙의 도움으로 천국에 이르며 성 프란치스코, 도미니코, 베르나르도를 만나면서 큰 위안을 얻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거꾸로 천국에서 시작해서 연옥을 거쳐 지옥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옥은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의 공간으로서 지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만을 믿고 매달리는 그런 공간이다.
다윗이나 골리앗이나 다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죄인이며, 하느님의 큰 사랑은 극악무도한 인생 여정을 살다가 이 그림에 나타나고 있는 골리앗의 꼴이 된 작가도 당신 품에 안으신다는 크리스챤 신앙이 주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미술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획을 그었기에 지난 세기 그의 작품을 연구했던 전문가인 로베르토 롱기(Roberto Longhi)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남겼다.
<카라바죠가 없었더라면 리베라(Ribera)도, 베르메르(Vermer)도, 렘브란트(Rembrant)도, 들라끌로와(Delacroix )도, 쿠르베(Courbet )도, 마네 (Manet)의 화풍이 탄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 앞에 서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참회 시편이 긴 여운을 남기며 우리에게 들려온다.
“깊은 구렁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소리를 들으소서.
내 비는 소리를 귀여겨 들으소서 .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자 누구오리까?( 시편 129, 1-3)”'
CARAVAGGIO, The Cardsharps
c.1596, Oil on canvas, 90 x 112 cm), Kimbell Art Museum, Fort Worth, Texas, USA
예술가의 자유와 창의성을 제약하던 시대에 끊임없이 대항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포기하지 않았던 카라바조는 마치 거리의 부랑아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주 도박이나 내기를 하여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자신의 생활 경험에서 나온 정말로 사실적인 그림이 바로 '도박꾼'입니다. 도박에서 속고 속이는 눈 깜짝할 순간을 포착한 이 그림은 그림의 주제가 되는 모든 사건을 최대한 극적인 순간에 담아 내는 그의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1571년 9월 29일 밀라노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인 카라바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원래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입니다만 출생지를 따라 이름을 부르곤 했던 당시의 풍습에 따라 나중에 카라바조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페르모 메르시는 미장이, 집사, 건축가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족은 아버지가 일하던 밀라노에 살다가 페스트가 돌자 카라바조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576년 밀라노를 떠나 다시 카라바조로 이사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해에 아버지는 돌림병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열 세살 때인 1584년부터 시모네 페테르차노 선생 밑에서 그림을 배우면서 4년 동안 밀라노에 있었습니다.
1590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자 1592년 로마로 갔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경제는 파탄 지경으로 로마도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립을 추구하였지만 자립하려는 욕구는 좌절되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 팔거나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화가 밑에서 제단화를 모사하거나 정물화를 그려 주는 것으로 끼니를 해결하였습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하였던 그는 우연히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나게 되어 그의 후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카라바조가 외부에서 공식적으로 주문받은 콘타렐리 카펠라 제단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그의 실험적인 초기 그림을 수집하기도 하였습니다.
델 몬테 추기경의 후원 아래 교회 제단화를 주문받아 그리는 동안인 1600년경 이후 카라바조는 주문자에 의한 그림 거절과 더불어 경찰 조서에 자주 오르내렸으며, 술집에서 주인의 얼굴에 접시를 던지는가 하면 툭하면 사람을 때려서 다치게 하였습니다. 기물을 부수거나 술집 창문을 박살내어 고소당하는 일이 빈번하였으며, 불법 무기 소지로 고발당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의 그림을 비웃어 분노를 사기도 하였습니다.
1605년 이후로는 그의 삶은 고달픈 방랑 생활과 우연한 행운, 또 잇따른 불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누군가와 결투를 벌인 것이 문제가 되어 더 이상 델 몬테 추기경 집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제노바로 도망가게 되었고, 라누치오와 게임인지 도박인지를 하다가 실랑이 끝에 죽이고 콜로나로 도망하였습니다. 1607년 나폴리에 숨어 있는 동안 기사 수도회 총회장인 알로프 드 비냐쿠르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인정을 받아 몰타 기사단의 기사로 지명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도망 중이긴 했지만 이 시기 동안 카라바조는 훌륭한 그림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 로마에서의 행적이 알려지게 되어 체포되었으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도망, 다시 시라쿠스에서 메시나로 이어지는 도망자의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오인되어 감옥에 갇히고 이틀 동안 옥살이를 한 뒤 석방되었지만 긴장과 피곤으로 병을 얻어 끝내 회복되지 못한 채, 사면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유력가의 말에 따라 로마로 가던 중 1610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 - 1602, Oil on canvas, 107 x 146 cm, Sanssouci, Potsdam
이러한 상황을 '믿음이 부족한 도마'에서 카라바조는 실제로 도마가 철딱서니 없이 예수의 상처에 손을 넣어 보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1591년 병든 바쿠스 : 술의 신 바쿠스 카라바조는 그 당시 병원에 있던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 하여 이것을 그렸다고 합니다.
1594년에 그린것과 1595년에 그린것. 제목은 점쟁이
손금 보는 집시여인이 손금을 봐주는척 하며 청년이 끼고 있는 금반지를 슬쩍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일상적인 모습을 다룬것이 많은데 생활고를 타개하기 위해
대중에게 어필할수 있는 소재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596년 류트 연주자
1596-1597 이집트로 가는도중 휴식
1597년 회개하는 막달리나
1597 년 Basket of Fruit
1601-1602년 Supper at Emmaus
예수의 성체성사(빵과 포도주가 예수로 변함)를 보여주고 있으며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602년 후견인 추기경의 소개로 작업한 성마태오의 일화입니다. 성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의 집필에 영감을 불어 놓어주는 한 천사를 그리도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였던 마태오가 갑자기 앉아서 책을 쓰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대머리에 먼지 묻은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거머쥐고 , 익숙하지 않은 글을 쓴다는 긴장감 때문에 걱정스럽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모습을요. 그리고 천사는 방금 천상에서 내려와 마치 선생님이 어린아이에게 하듯 노동자의 손을 공손하게 잡아 이끄는 천사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렇게 납품된 아래 그림은 성당사람들이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래와 같이 작업하여 납품 했다고 합니다.
1602-1603년 승리의 큐피드 : 미캘란젤로의 포즈를 인용한것. 기존의 천사와 달리 장난기가 가득하다.
천사의 발밑에 놓인 악기와 아무렇게 놓인 악보의 모습도 이전의 천사의 모습과 다름을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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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년 성 예로니모(또는 히에로니무스): 성 예로니모란 미술 작품 세계에 있어 금욕자, 학자, 의사로 자주 묘사되는 사림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로니모는 사자와 함께 등장하는데 그것은 사자의 가시를 그가 빼어주고 사자가 이를 고마워해서 그를 계 속 쫓아 다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사자대신 해골이 등장한다.
1606년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 물에 빠진 창녀를 모델로 성모마리아를 그려 많은 비난을 받았다.
1607년 묵주의 마돈나 :도피중 나폴리에서 그린 그림
1608년 세례요한의 참수 :
어떤 위안이나 구원의 느낌 없이 죽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가로폭이 무려 5미터가 넘는 거대한 작품입니다.
카라바조는 요한의 목에서 흐르는 피로 그림하단에 서명을 했습니다.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 <우르술라의 순교>
1598 년 홀로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
카 라바조는 사실적 묘사와 극적인 효과로 당시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산아고스티노 교회를 위해 그린 〈성모와 순례자들 Madonna with Pilgrims>,〈로레토의 성모 Madonna di Loreto〉는 상당한 반발을 일으켰다. 아래 그림을 보자.
<그림/ Madonna di Loreto >
이 그림에서 카라바조는 순례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순례자의 '더러운 발과 남루한 차림의 모습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남루한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깨끗하고 어느 정도 격이 있는 모습을 원했다.
당시 이태리의 교황청은 신자의 이탈을 방지하고 전교를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시민미술을 지원했다. 그러나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대중적이거나 일반적이 아닌 고상하고 어느 정도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반 면에 카라바조는 당시 가톨릭교회가 원하는 품위 있고 숭고한 표현의 그림보다는 주변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노동자나 하급계층이었던 일반인의 모습에서 모델을 삼아 그대로 가식 없이 그렸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심한 반발을 사고 거절을 여러 차례 거절을 당하기도 하고 제단화로 걸려져 있다 내려지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이러한 태도는 성(聖)과 속(俗)을 일부러 나누고 다른 태도로 대하는 교회의 이중성에 반발한 의도적인 표현이었다. 또 이러한 그의 표현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적인 발로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16 세기 말, 카라바조는 로마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을 그의 그림 속의 성자로 그대로 옮겼다. 거지, 불량배를 순례자로 표현하고 매춘부를 성모마리아로 둔갑시키고 집시, 협잡꾼 등을 그의 그림 속에 끌어들여 예수와 성인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아래 그림〈동정녀의 죽음>에서는 물에 빠져 죽은 임산부의 시체를 성모 마리아로 표현했다.
그림 / <동정녀의 죽음, Death of the Virgin >
이 그림을 주문한 카르멜회 수도사는 그림을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신성해야 할 동정녀의 얼굴이 동네 아줌마 같이 평범한 얼굴로 묘사되어 있었으며 노출된 다리의 모습, 물에 빠져 있는 몰골과 배가 불룩한 모습을 보고 그들은 동정녀를 모욕했다고 화를 내며 그대로 나갔다. 물론 그 그림은 거절되었고 괴팍한 카라바조의 악명은 다시 높아졌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당시 화가였던 루벤스의 권유로 1607년 4월에 만토바의 공작이 구입했다. 그리고 만토바로 옮겨지기 전에 1주일 동안 로마에서 화가들에게 전시되어 다시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는 당시에 일반 시민들에게보다 미술가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작가였다. 진보적인 성직자와 지식인들은 카라바조의 직설적인 묘사법과 거친 표현을 좋아했지만 대부분의 성직자와 보수주의적인 화가들에게는 강항 저항과 부정적인 반응과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수록 명성은 높아지고 수입은 늘어나 다른 화가들의 질투와 시기를 받았다. 돈이 여유가 생기자 그는 고위 성직자와 교제를 하며 사교계에 발을 들여 들여놓게 된다. 괴팍하고 성급한 성격은 이 때부터 터지기 시작하며 체포되는 일이 많았다.
1600년 동료 화가와 폭력 사건으로 고발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한 군인에게 부상을 입혀 다시 고발되고 1603년 또 다른 화가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프랑스 대사의 중재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1604 년 4월 그는 그림을 그리다 급사의 얼굴에 아티초크 접시를 던진 사건으로 고발되었으며, 10월에는 로마 수비대에게 돌을 던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605년 5월 그는 무기를 잘못 사용해 체포되었고 같은 해 7월 29일에는 애인을 지키려다가 한 남자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한동안 로마를 떠나 있어야만 했다.
그 뒤 1년 후 로마로 돌아왔으나 다시 1606년 5월 29일에 테니스 경기 중 점수 때문에 심한 다툼을 벌이다가 라누초 톰마소니라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필사적인 도주는 오직 교황의 사면으로만 끝날 수 있었지만 카라바조는 극도의 피로가 겹친 데다가 열병이 재발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로마로 가는 배를 놓쳐 버리고 떠나가는 배를 보며 바닷가에 쓰러져 며칠 뒤 37세도 안 된 나이로 죽고 말았다.
자신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과격한 성격으로 15번을 고발 당하고 일곱 번에 감옥에 투옥된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미술은 당시 전 유럽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 내었다.
특이한 빛의 효과, 마치 사진 조명을 받듯이 그린 이 기법은 당시 화가들을 매료 시켰다.
카라바조의 그림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사실주의적 리얼리즘이다. 물에 빠져 죽은 임산부를
마리아의 죽음으로 묘사해 떠들썩 하게 만든 문제의 그림이다.
20 세기의 미술평론가인 로베르 롱기는 카라바조가 창안하여 사용한 테네브리즘 기법은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의 발견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테네브리즘 기법이란 자연
현상에서 나타나는 빛이 아니라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작가가 스포트라이트 식으로 설정한
그림의 효과를 증대시키기위한 빛이었다. 극단적인 명암대비를 사용하여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 효과를 높이고 배경인물을 강조시킨다.
그의 이러한 기법은 네덜란드 화가 루벤스, 헤리트 반 혼토르스트, 헨드리크 테르브뤼헨,
렘브란트,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등에게
계승되며 바로크의 미술을 주도했다.
카라바조는 당시 30세도 채 안 된 젊은 나이에 그 시대의 모든 화가들을 능가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인기를 끌며 주문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스타일에 보수주의자
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첫댓글 어제 잠안저고 이프로 밤늦게까지 보느라 아침에 헐레벅떡 일어나 출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