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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륜차 달리던 내 고향 대전 둔산동 신작로 길>
부릉부릉 새파란 연기를 내 뿜으며 삼륜차가 신작로 위를 흙먼지를 일으키며 냅다 달린다.
7살 나와 동네 친구들은 서로 휘발유 냄새를 맡아 보려고 삼륜차 뒤를 쫒아 다니다 숨이 차고 목이 마르면 동네 한가운데 있는 우물로 달려갔다.
우리들 가슴 높이까지 녹강을 쌓아서 만든 우물이었는데 이음새 부분 벌어진 틈으로 언제나 항상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어서 목마른 우리들이 입대고 마시기 아주 편했다.
가끔씩은 먹을 게 귀한 시절이라 물배를 채우기도 그만이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나와 친구 주영이는 모래밭에서 자동차 놀이를 했다.
나는 흰 고무신을 접어서 자동차를 만들었고 친구 주영이는 주황색 장난감 트럭을 갖고 왔다.
집안 친척이 선물로 준 트럭이라고 자랑을 했는데 난생 처음 보는 장난감 트럭이었다.
나는 고무신으로 접은 초라한 내 자동차 보다 친구의 장난감 트럭이 너무너무 만져보고 싶었다.
주영아 한번만 만져보자 응..했지만,
주영이는 안된다고 했고 나는 자꾸 만져 보려고 옥신각신 다투다 결국은 주영이가 나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나는 너무 쓰라리고 아파서 울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엄니께서는 성구야! 왜 울어 하셨다.
나는 주영이가 자기 트럭 만지려 한다고 할퀴었어 했더니 엄니는 나를 부엌으로 끌고 가서는 부지깽이로 마구 때렸다.
등신 마냥 친구에게 왜 맞고 다녀! 얼굴 꼴이 이게 뭐야 하시면서 당신도 속이 상하셨는지 후다닥 나가셨다.
나는 부엌 한 군데 쪼그려 앉아서 서럽게 울다 이내 잠이 들었는데 깨어 보니 방안 이었다.
할퀴어진 얼굴이 쓰라려서 손으로 만져 보았더니 미끌 거리는 연고가 잔뜩 발라져 있었다.
엄니는 나를 두둘겨 패다 약국에 다녀오셨던 것이다.
<강원도 홍천으로 이사>
직업군인 이셨던 아버님께서 강원도 홍천으로 발령이 나서 초등학교는 강원도 홍천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방과 후에는 집에서 기르는 토끼풀을 뜯으러 나갔다.
토끼가 코를 벌렁거리며 풀을 뜯어 먹을 때는 동생하고 낄낄 거리며 웃었다.
저녁 해질 무렵에는 군인 아저씨들의 훈련 후 귀대하는 모습은 아주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탱크가 지나갈때는 땅이 흔들려서 무섭기 까지 했다.
당시 동네 또래 친구들과 군인 아저씨들이 지나가면 부르던 노래는 “군바라 군바라~~ 껌바라 껌바라~~” 이었다.
대부분 직업군인들의 자식들 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노래를 배웠는지 모르겠다.
아침에는 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기상 나팔 소리에 주민들도 함께 깨곤 했는데 꼭 이렇게 들려왔다.
국은 국은 된장국~` 밥은 밥은 꽁보리밥~~ 싸우지 말고 먹어라~~
강원도 홍천의 겨울은 굉장히 추었다. 눈도 만만치 않게 내리는 지역이었는데 눈이 펄펄 내는 날 엄니는 산에서 청솔가지를 잔뜩 등에 지고 오시는 날이 많았다.
당시 직업군인들 봉급과 복지는 형편없었기 때문에 겨울 철 땔감은 항상 부족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1학년을 다녔는데 겨울 방학 후 아버님이 다시 대전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래서 대전성남국민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고 4학년 때에는 자양국민학교로 또 전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아침 조회는 저 학년생을 빼고는 대부분 운동장에서 했는데 맨 먼저 애국가를 부르고 그 다음은 국민교육헌장을 전교생이 큰 소리로 외우면서 시작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학교에서는 방과 후 옥수수 가루로 만든 손바닥 크기만 한 빵을 어떤 날은 하나씩 통째로 주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반쪽씩만 나누어 주었다.
손바닥은 교실 바닥을 들기름 걸레로 밀고 다녀서 항상 퀘퀘한 냄새가 베어 있었다.
나는 여동생에게 빵을 주려고 반만 뜯어 먹을때가 더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에 전학을 세번씩이나 하다 보니 학교생활 적응이 많이 힘들었고 공부하기도 쉽지 않아서 성적은 늘 중간 이하를 맴돌았다.
<짱돌을 들고>
나는 중학교 시절 덩치기 큰 친구들이 나와 친구 누군가를 괴롭히면 참기 힘들었다.
언제 하루는 덩치 큰 녀석 몇이 나에게 집단적으로 약을 올리고 발로 툭툭 걷어차면서 시비를 걸어왔다.
처음 몇 일은 그러지 말라고 좋게 말해도 녀석들은 더 못되게 심술을 부려왔다.
나는 참다 참다 못 참아서 결국은 손에 조그만 짱돌 하나를 쥐고는 녀석 중에 제일 큰 놈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팼다.
덩치 큰 녀석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한방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나머지 녀석들이 뒤로 물러서며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난 녀석들이 담임 선생님께 이를 줄 알았는데 녀석들은 얻어맞고도 찍소리도 못했다.
당시에는 학생들 대부분이 자건거 통학을 하였는데 나는 그 못된 녀석의 자건거 바람을 매일 빼 놓았다.
녀석은 방과 후 하교 길에는 항상 자전거 바람을 넣느라 자건거포에 들리기 바빴다.
한번은 녀석의 도시락 반찬을 숨겨서 친구들에게 반찬을 얻어 먹게도 했다.
<이공계로 나의 운명을 선택>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공고생을 육성하는 시기였는데 나는 공부도 잘못했지만 인문계 보단 공고진학을 선택했다.
대전에 있는 계룡공고 통신과에 입학을 했는데 무선통신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무선설비 기능사 2급 자격증도 따게 되었다. 당시에는 3학생도 따기 쉽지 않은 자격증이었다.
고등학교시절 부터는 직업군인들 급여와 복지가 개선되기 시작했는데 육사를 나오지 못한 아버님은 윗선에 비비시는 것을 못하셔서 중령을 12년 달고도 대령으로 진급을 못하시고는 결국엔 33년간 군생활을 끝으로 전역하셨다.
나는 공고를 졸업 후 공대 전기과를 택했다.
그리고 군대는 1학년 졸업 후 공군에 통신병으로 지원입대를 하였다.
형님은 당시 군에서 제대할 무렵이었는데 당시 우리 집 형편으로 대학생 둘의 학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내 스스로가 군대에 지원입대를 하였다.
군생활은 청주 17전투비행단에서 레이더 정비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다양한 형태의 유무선 통신기기에 대하여 많이 경험을 쌓은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33개월 16일간 군복무를 한 후 2학년에 복학을 하였는데 그 때부터 공부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미래를 준비하는 대학 시절을 차분하게 보내게 되었다.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서 철이 든다는 어르신들 말씀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반장학금도 꾸준히 타게 되었고 졸업 시에는 운 좋게 충청도 시골 촌놈이 서울에 있는 중견 컴퓨터 회사에 취직도 하게 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직장생활>
10만원 달랑 들고 상경 후 첫 월급 탈 때 까지는 회사 사무실에서 아침밥에
점심을 먹고 잠은 근처 24시간 하는 목욕탕에서 자면서 버텼다.
수원 성균관 대학교 근처에 보증금 없는 월세방 생활을 시작으로 서울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직장 출근길에 뭔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와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신념 하나로 열심히 살았다.
주인 아주머님께서 퇴근이 늦은 날이면 연탄불도 갈아주시는 인정 깊은 분이셨다.
대표이사부터 회사의 주요 경영진과 간부들이 서울대와 연고대 출신들이라서 지방대학을 나온 내가 커나가기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나는 다른 서울대 출신 동료들 보다 진급도 더디고 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노력이 단기간에 많은 업무와 관련된 다양한 경함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향후 IT 업계의 동향과 비즈니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결국은 창업을 하기로 작심하였다.
<창업준비>
무일푼 신세라 자금 마련을 위해 벤처 투자전문 창투사를 찾았지만 너무 앞서가는 사업계획서라서 매번 퇴짜를 받았지만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장기신용은행 계열의 장은창업투자사로부터 3억원 이라는 거액의 투자유치를 성공하게 되었다.
회사 초창기에는 미국 회사의 국내 대리점을 시작으로 선진 원천기술을 도입하면서 자체적인 사업을 위한 제품개발에 대한 전 세계 IT 기술 동향과 차별화 전략을 위해 영어도 못하는 촌놈이 미국으로 무작정 날아가서는 인터넷으로 조사했던 미국의 IT 핵심전문 개발자들을 만났다.
이런 계기로 결국엔 내가 꿈꾸던 자체 제품을 현실세계에 완벽히 구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직장 생활을 통해 고객이 필요한 제품의 성능과 기능에 대한 꼼꼼한 사전준비가 국내시장 점유율 90% 석권을 가능케 하였고 미국의 나스닥에 상장된 유명 제품들과 성능평가 시험에 매번 이길 수 있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국내사업에 대한 기반을 성공적으로 구축한 사례는 당시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하면 된다는 신념하나로 이를 악물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 금융권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 사업진출 2년 만에 미즈호 은행를 비롯해서 UFJ 은행 등 일본의 대형은행 7군데에 런칭도 성공하면서 승승장구 하였다.
<삼성과의 악연>
그러나 그 꿈과 희망은 2002년 4월 우리은행 사무자동화 시스템 입찰에서 삼성SDS를 잘못 만난 악연으로 인해서 접어야만 했다.
삼성SDS를 검찰에 고소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한참 법적 공방중에 회사의 창업자 이면서도 지분 60%를 갖고 있던 대표이사였던 내가 삼성의 협력업체였던 콤텍시스템의 주도로 2005년 11월 17일 기업사냥을 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젊은 청춘을 다 바친 회사를 한순간에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회사의 ‘엑스톰’ 제품개발비를 위해 은행으로부터 빌린 대출금에 대한 연대보증 책임도 억울하게 떠안게 되었고 담보로 제공했던 집도 경매로 날린 후 처자식과 함께 한겨울에 쫒겨나게 되었다.
2006년 2월 재벌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싸우기 위해 대중소기업상생협회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하여 4년간 처절하게 싸우다 누군가로 부터의 미행과 상식이하의 일들을 겪으면서 2009년 12월 5일 눈이 펄펄 내는 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전주로 이사를 가서는 생선장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생선 값 폭등으로 더 힘든 생활을 하였고 부인이 동네에서 조그만 옷가게를 시작하였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아 오랜 세월 생활고에 시달리다 2011년 5월 6일 집을 나가게 되었고 6살 윤채와 9살 우찬이의 뒷바라지에 손발이 꽁꽁 묶이게 되었다.
2010년 11월과 2011년 3월 회사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기업사냥한 콤텍시스템 사장과 회사의 등기이사를 상대로 충분한 증거와 함께 검찰에 고소하였지만 검사는 아예 수사도 않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서울고검에 항고를 하고 법원에 재정신청까지 했지만 법원 역시 억울한 기업사냥에 대해선 외면하였다.
목차
1. 충청도 시골 촌놈 서울 직장에 합격하여 10만원 달랑 들고 상경
-지방대 서러움에 남보다 몇 배로 더 노력하면서 향후 자신만의 비즈니스 준비
-국민은행과 금융결제원 담당으로 금융자동화 시스템과 사무자동화에 공부
2. 창업 후 사업계획서 하나로 한달만에 3억원 투자유치와 20배 수 CB 발행
(기술신용보증기금에서 보증)
-또 한 놈 인생 골로가는구나
-반대없이 투자회의 통과
-입국 심사대는 어떻게 통과하나?
-한국 벤처들의 허와 실
3. 직장생활 시 경험으로 전 세계 최고의 성능 제품개발과 시장점유율 90% 석권
-돈 안주셔도 좋으니 한번 설치해서 테스트 라도...
-IT 제품개발의 최적 입지조건은 역시 대한민국
-이거 정말 국산이야?
-전 직원과 함께한 사이판 바닷가에서의 시무식과 종무식
4. 2년의 단기간에 일본의 주력은행 7군데 런칭 성공(미국 회사 아닌가요?)
-한국에서 이런 소프트웨어 업체가 있다니...
-수차례 반복 확인하는 일본의 검증 체계와 신뢰?
-히다찌,스미토모와 비즈니스 파트너 계약체결
5. 우리은행 사무자동화 시스템 입찰로 삼성SDS와 악연의 시작
-삼성의 가격 후리기 수법들...
-검찰에 고소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하는 삼성(알면 어쩔건데!)
-대구은행 계약취소!
6. 삼성SDS의 끝도 없는 뒤통수 치기와 중소기업 말려 죽이기,
-계약서 무시하는 삼성
7. 조사장님! 심상정입니다...
8. 삼성이 아직도 이럽니까?(NEC @@키 사장)
9. 삼성을 고소 후 믿었던 사외이사들의 반란과 음모
10. 미국 연구법인 직원들의 배신과 작퉁제품의 발표
이후로 약 70여개의 목차가 더 있습니다.
첫댓글 창원의 현서윤서아빠 유태수입니다.
주말과 휴일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저는 회사일로 일요일도 바쁘께...ㅋ. 중소기업이 많이들 그렇지요...ㅋ
7월20일 공판 참석관련하여, 이주연님의 글을 보고, 참석의사를 이주연님께
보냈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때 뵐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까페에 로그인 하면 조성구의 하루 폴더를
가장 먼저 확인합니다.
회장님 근황의 새로운 소식이 가장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회장님의 안위(?^^)가 이번 싸움의 가장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긴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저희에게도
나누어 주시길 바랍니다. 꾸벅...
저는 책 알갱이들 구성하느라 조금 부산했었습니당.ㅎㅎ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ㅋㅋㅋ 아..재밌어요. 10만원 들고 상경에 크게 공감(전 100만원 들고 상경했어요 ㅋㅋ)
목차 보니 기대됩니다.^^
컨텐츠 구성을 백개 정도로 해보겠습니다.^^
저도 IT 업계 종사자로서 큰 기대를 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회장님의 책을 통해서 말뿐인 IT강국의 숨겨진 병폐들이 드러나고 척결되길 바라며 응원하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넵, 최대한 자세히 써서 우리나라 IT업계가 건설만도 못하게 전락하게 된 근본적인 문제를 국민들께 알리겠습니다.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꾸벅!~
작가로서 나가볼 생각이옵니까..^^
아무쪼록 경제계 정치계 썩은 일당들의 형태를 낱낱이 표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민서님, 저는 글을 잘 못 씁니다만, 하도 억울하고 분해서 그리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실상을 국민들께 알려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적어 보고 있습니다.고맙습니다.꾸벅~~
빨리 글이 완성되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네요.
네, 제가 좀 차분하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글 완성되면 iBooks에도 올리시길 바랍니다. 한글판, 영어판 같이 올려야죠. 아이패드 전세계적인 보급대수 생각한다면 홍보효과가 상당할 듯합니다. 애플이 삼성 압력 받을 일도 없을 거구요. 영어 실력은 짧지만 영역을 하는데 도움드리겠습니다. 감수는 원어민이 하더라도 초벌번역 정도는 해드릴수 있습니다. 물론 국내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길도 알아보시구요. 글 쓰시는 것도 너무 천천히 쓰시지는 말구요. 대선 지나가기 전에 나와야 좋을 것 같습니다.
올 가을에는 출판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