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代 왕들의 딸들
흔히 임금의 딸을 공주, 혹은 옹주라 부르는데 이의 차이는 정궁, 즉 중전의 몸에서 난 적녀인가 혹은 후궁의 몸에서 난 서녀인가 하는 차이이다.
중궁의 몸에서 난 여식을 공주(公主) 후궁의 몸에서 난 여식을 옹주(翁主)라고 불리운다.
고려초기에는 왕의 딸들을 궁주(宮主)라고 불리웠으며 궁주라는 명칭은 황제의 후궁에게도 붙일 수 있는 칭호였다. 고려후기,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되자 본격적으로 임금의 딸들을 공주라 불리우기 시작했고 후궁들을 궁주, 혹은 옹주라 불리우다가 조선초기, 태종임금이 내명부의 품계를 정렬하게 되었고 비로소 공주와 옹주의 구분이 확연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원래 공주라는 말은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에서 왕의 딸을 시집보내야하는데 이를 주관하던 사람들이 바로 삼공(三公)의 벼슬을 가진 관리들이었다. 고대 황실에서 공주들은 나라를 위해 이민족들에게 시집을 가 정략혼인의 증인들이었는데 그 중 행복하게 평생을 살다간 왕녀들은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청나라 순치황제의 딸인 건녕공주의 경우 삼번왕 중 한 사람인 오삼계의 아들인 오응웅과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훗날 삼번의 우두머리 오삼계는 다시 대명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는 삼번의 난을 일으키자 순치황제의 아들인 강희황제는 오삼계와 경중명, 상가희들을 정벌하였다. 이를 두고 역사에서는 삼번의 난이라 부르는데 훗날 건녕공주는 어린 아들을 안고 자결하고 말았다.
왕녀들은 임금들의 금지옥엽이고 왕실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인들이었다. 세상 어느 여인들보다 우아하고 고결한 피를 타고난 여자들이지만 인생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반쪽짜리 행복을 타고난 가여운 여인들이었다.
왕녀들은 본명이 따로 있었고 그들이 효혜, 덕혜라 명호를 넣는 까닭은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조에서 덕과 예, 효를 숭상하라는 의미에서 호와 본명을 따로두었다.
1. 불가로 귀의한 경순공주
-경순공주는 조선을 창립한 태조 이성계의 딸이다. 태조대왕에게는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의 두 부인을 두었는데 왕후가 되기 이전에 신의왕후의 경우 향처라 불리웠고 신덕왕후의 경우 경처라 불리웠다. 당시 이성계는 무인으로서 자주 변방에 발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강씨는 이성계가 지방의 무관으로 활동할 적에 만난 사이라고 되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강씨는 매우 빼어난 외모와 젊은 나이를 지니고 있어 항상 이성계를 흡족하게 해주었고 급기야 한씨가 왕후가 되어보기도 전에 죽자 강씨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왕후가 되었다.
강씨는 이성계와의 슬하에 방석, 방번, 경순공주를 두었는데 방석, 방번이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죽음을 당하였고 신덕왕후 강씨는 태종대왕의 노여움을 사 왕후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동생들의 죽음, 남평 흥안군 이제의 죽음을 슬퍼한 경순공주는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불가로 귀의를 해 비구니가 되었는데 머리를 파르라니 깍고 승복을 입고 있는 경순공주의 모습을 매우 가여이 여겨 이성계는 자주 그녀를 찾아돌봐주었다.
언제 죽었는지 그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다.
2. 세종대왕의 영원한 아픔. 정소공주
-세종대왕은 역대 조선 임금들 중에서 가장 많은 아들을 본 임금으로 아들 19명, 딸 4명을 슬하에 두었다. 그는 소헌왕후 심씨에게서 난 딸 정소공주를 가장 애틋하게 여겼는데 정소공주가 13살의 나이로 죽자 세종은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늘 정소공주가 타고 놀던 그네를 바라보며 딸의 죽음을 애틋하게 여겼고 정소공주의 슬픔을 너무도 격하게 느낀 나머지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지병인 소갈(당뇨)과 안질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3. 공주에서 노비로 전락한 비운의 왕녀, 경혜공주
-경혜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난 공주이고 단종의 누나이다. 한낱 세자 향(문종)의 후궁으로 있던 권씨가 그녀를 낳음으로써 왕후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녀는 영양위 정종에게 시집을 갔으며 훗날 숙부인 세조임금에게서 동생과 지아비를 잃은 슬픔으로 통탄했고 대신들의 주청에 따라 그녀는 공주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노비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노비가 되어서도 공주 특유의 기품과 당당함을 잃지 않아 그 지방 현감을 아주 곤혹스럽게 했다고 하는데 세조는 조카인 경혜에게 다시 공주의 작위를 찾아 주었다.
4. 남편의 주색 때문에 스트레스를 대량으로 받고 살았던 현숙공주
-현숙공주는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풍천위 임광재에게 시집을 갔다. 그녀는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효시를 제공한 임사홍을 시아버지로 봉양했고 성종의 딸인 휘숙옹주와는 사촌지간이면서 동서지간이었다. 풍천위 임광재는 부마라는 지위를 부담스럽게 혹은 당당하게 여겼는데 그는 주색에 능해 공주 몰래 기생과 여종들을 희롱하거나 겁간하는 것을 예사로 삼았다.
제도상으로 부마는 왕녀 이외에 첩을 들이는 것을 금기시 했는데 현숙공주가 매일 울면서 친정인 왕실로 달려오면 안순왕후 한씨는 성종에게 주청하여 사위인 임광재를 처벌해달라고 지청구를 올릴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성종은 임광재에게 벌금이나 형벌을 받게 했는데 그래도 그의 주색잡기는 그칠 줄 몰랐고 공주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고 하여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주를 폭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훗날 공주가 독살 당할 뻔한 사건이 발생되었는데 이 일로 공주를 모시던 상궁과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임광재는 그래도 자신의 잘 못을 뉘우치지 않아 평해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5. 친오빠와 간통을 즐긴 휘숙옹주
-휘숙옹주는 성종임금과 숙의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녀이고 연산군이 통치 할 때 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재물을 모아들이고 연산군과 간통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는 당대의 간신 임사홍의 며느리이고 현숙공주와는 동서지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풍원위 임숭재이다.
당시 조선시대는 유교의 교리가 어느 곳보다 강한 나라여서 남매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만 있어도 간통이 성립되는 나라였다.
훗날 연산군이 진성대군에 의해 폐위당했을 때 그녀도 장녹수와 더불어 직첩을 효수당하고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이 던진 돌팔매에 맞아 죽었다는 설이 있지만 어느 것이 명확한지 아직 확인된바 없다.
6. 시아버지 김안로의 집착이 그녀를 죽게 만들다. 효혜공주
-효혜공주는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낳은 딸로 인종의 누나이다. 본명은 옥하(玉荷)이다. 그녀는 당대를 주름잡던 희락당 김안로의 며느리이고 연성위 김회의 아내이다. 김안로는 며느리 효혜공주를 방패로 중종과 친분을 유지하고 정사를 농단하려고 했지만 며느리가 일찍 죽자 권력을 마저 행사하지도 못한 채 그녀가 죽은 칠개월 뒤에 죽게 된다.
효혜공주는 시아버지의 권력 도구였고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그녀는 몸이 매우 약해 잔병치레를 자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중종은 그런 딸이 걱정되어 직접 그녀를 문병하러 올 정도로 그녀를 귀애했다고 알려져 있다.
7. 일생을 서슬푸른 원한에 사로잡혀 살았던 정명공주
-정명공주는 선조임금의 최초의 적통공주이고 선조 나이 쉰이 넘은 나이에 본 공주라 선조의 사랑을 지극히 받은 공주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계축일기의 주인공인 인목대비 김씨이며 그녀의 남편은 풍산 홍씨 가문의 홍주원이다. 선조는 공주를 너무도 사랑하여 그녀의 혼사만큼 최고로 성대하게 해줄 정도였다.
그녀는 홍주원 과의 사이에서 7남 1녀를 둔 역대 공주들 중에서 가장 다복한 삶을 살았지만 오빠인 광해군의 횡포로 인해 어머니 인목대비와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그녀는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으로 강제로 유폐당해 공주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숨죽이며 살았다가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하자 공주의 신원이 회복되었고 숙종의 사려깊은 배려를 받으며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역대 공주들 중에서 가장 긴 생을 유지했던 공주이기도 했다.
8. 오빠에 서슬푸른 복수의 칼날에 휘둘린 효명옹주
-효명옹주는 인조와 귀인 조씨의 딸이고 인조의 고명딸이다. 귀인 조씨가 인조의 총애를 받자 그녀 또한 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김자점의 손자인 세룡과 혼인하였다. 그녀는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손주며느리이자 권력 도구였으며 김자점은 사돈인 조귀인과 결탁하여 소현세자와 빈궁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말았다.
그 결과,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형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아래 조귀인과 김자점, 김세룡을 효수하였고 동생인 효명옹주의 작위를 박탈하고 목을 치게 되었다. 일설에 그녀는 인조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교만함을 달고 다녔다. 또한 그녀는 오빠인 소현세자와 올케인 민회빈 강씨를 어머니 귀인 조씨와 함께 투기하였고 결국 그들을 죽게 하는데 동조하게 되었다.
그녀는 권력의 희생양일까? 아니면 인과응보의 벌을 받은 악녀일까?
9. 조카의 후궁에게 아들을 잃은 숙안공주
-숙안공주는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딸이다. 그는 현종을 남동생으로 두었고 숙종을 조카로 두었다. 그는 풍산홍씨 가문의 아들인 익평위 홍득기와 결혼을 했고 그 슬하에 1남 홍치상을 두었다.
그녀는 매사 성격이 꼼꼼하고 예리했고 아녀자의 덕과 효, 예를 가장 중시여겼다. 그녀의 시댁은 당시 명문서인가였고 그녀 역시 시댁의 규율에 따라 서인의 편을 들었으며 그리하여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 민씨를 중궁으로 앉히길 권유했다. 당시 숙종은 남인들에게 눈독을 돌리고 있었고 남인들은 거상 장형의 조카딸 장옥정(장희빈)을 천거하여 후궁으로 앉혔는데 그 때문에 숙안공주는 늘 장옥정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본대없는 중인집 여식이라는 모멸감을 늘 주었다.
그 때 숙종은 남인들을 등용하여 서인들을 등한시했는데 그 때 서인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었고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 역시 장옥정의 서슬푸른 칼날을 피할 수 없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는 자신보다 높은 신분인 숙안공주를 죽일 수 없으니 대신 그 아들을 죽여 숙안공주의 비참함을 비웃고자 했던 의도일 것이다.
숙안공주는 서인의 의를 위해 아들에게 죽지 말라 간언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덤덤하게 아들 치상의 죽음을 바라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쏟아냈다.
그녀의 지아비 득기는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난 대신이었고 청나라 사은사로 다녀와 효종을 기쁘게 하였다. 그녀는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해 물심양면 힘을 쓰고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 밖에 현종의 딸인 명안, 명선공주 역시 명문 서인가의 여식이라 인현왕후를 위해 장옥정을 몰아내라 숙종에게 지청구를 드린 사연이 있다.
10. 공주가 열녀문을 하사받다. 화순옹주
-화순옹주는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이다. 알다시피 영조는 두 명의 중궁을 맞이했지만 정성, 정순 왕후에게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들 몸에서 자녀들을 본 임금이다. 화순옹주는 효명세자의 누이이고 월성위 김한신에게 시집을 갔다. 왕녀들은 정략결혼이라는 것을 부부애를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유달리 화순옹주는 남편인 김한신을 사랑하였고 김한신 역시 옹주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김한신이 갑자기 원인도 알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아프더니 결국 눈을 감고, 화순옹주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여 물은 물론이고 곡기를 끊고 몸져눕게 되었다.
당시 영조임금의 나이 칠순이었고 화순옹주 소식을 접한 영조는 딸에게 직접 미음을 떠다먹이는 정성을 보였지만 화순옹주는 쉽사리 미음조차 먹으려 들지 않았다. 영조는 애간장이 끊는 슬픔을 느껴 화순옹주에게 어명을 보태어 미음을 먹으려 했지만 오히려 죽을 각오로 먹지 않았고 결국 단식 17일만에 화순옹주는 스스로 생을 마감해버렸다.
유교를 어느 곳보다 숭상하던 조선에서는 반가의 아녀자가 열녀가 되어도 칭찬이 자자했는데 하물며 왕녀가 열녀가 되니 슬퍼서 우는 사람이 한 두사람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열녀문을 하사받았고 조선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녀가 열녀문을 하사받게 되었다.
11. 둘도 없는 효녀, 둘도 없는 누이, 화평옹주
-화평옹주는 영조와 선희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이다. 영빈 이씨한테는 맏딸이고 기록에는 현숙하고 현명하여 영조가 딸들 중에서 화평옹주를 귀애했다. 수시로 화평옹주가 사는 사가로 납시어 며칠이 가도록 궁궐로 돌아오지 않기 일쑤였다.
그녀는 현명했고 착한 딸이자 누이였다. 당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를 중재하던 이는 바로 화평옹주였다. 화평옹주는 아버지 영조에게 항상 동생인 사도세자의 마음을 헤아려 고하였고 사도세자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타일렀다.
그러나 화평옹주는 원인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영조는 당시 궁궐에도 가지 않고 화평옹주의 침전에서 그녀의 임종까지 돌봐주었는데 화평옹주가 죽자 영조는 며칠을 곡기를 끊어가면서 딸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한 그녀를 공주의 예법으로 장례식으로 치뤄주었고 대신들에게 그녀를 말할 때는 귀주(貴主)라고 부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편 사도세자는 누나인 화평옹주가 죽자 탄식을 하며 가로되 "아. 이제 누가 나의 어려움을 알아준단 말인가? 화평누이...... 왜 이리 일찍 가시었소. 나만 두고...... 이제 나는 어찌하면 된단 말이오."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누이의 죽음을 슬퍼했다.
화평옹주는 금성위 박명원의 아내였고 박명원은 반남박씨의 자손이다. 그는 바로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와 인척관계에 있으며 직접 정조에게 수빈 박씨를 천거하여 후궁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콤플렉스를가지고 있어 아들과 딸들은 모두 명문가의 자손으로 혼인을 시켜주었다.
12. 그녀에 대한 모든 기록은 틀렸다. 화협옹주
-그녀는 앞서 거론한 화평옹주의 동생이고 사도세자의 누나이다. 그녀는 영빈 이씨와 영조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이고 그녀 역시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옹주이다.
일설에는 영조가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를 극도로 혐오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런 낭설이 떠돈 이유는 혜빈 홍씨의 한중록을 바탕으로 그녀를 평가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딸들 중에서 화평옹주를, 며느리 중에서 현빈 조씨를 총애했는데 한중록에 의하면 "성상께서는 화평옹주를 사랑한 반면, 화협옹주를 극도로 싫어했으며 며느리 중에서 현빈을 총애했지만 나 역시 총애를 받았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며느리 현빈조씨와 화평옹주를 끔찍이 사랑한 기록은 있지만 어디서도 혜빈홍씨를 총애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녀는 평산 신씨 가문의 아들인 영성위 신광수에게 출가를 했고 계축년에 죽었다. 그녀는 살아생전 각전(왕과 왕비를 지칭하고 그들이 가진 사유재산을 말하는 것 같음)에 진 빚이 상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영조는 즉시 화협옹주의 빚을 청산해주고 균역을 실시해 그 폐해를 다시는 일으키지 않으려 애썼다.
화협옹주 역시 영문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는데 연이어 일어난 딸들의 죽음에 관해 세상 사람들은 대빈궁(희빈 장씨)과 그 아들 경종의 원혼이 딸들에게 붙어 다녀 죽이고 다닌다며 낭설을 찧고 다녔다.
화협옹주가 죽자 영조는 화협옹주의 시댁으로 가 그녀의 마지막을 보았으며 매우 애통해하고 슬퍼하였다.
13. 왕녀 최초로 정사에 관여한 화완옹주
-화완옹주는 영조와 선희궁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희궁의 막내 딸이다. 그녀는 일성위 정치달에게 시집을 갔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풍모를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그와 사이에서 딸을 하나 두었지만 그 딸이 두 살도 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남편인 정치달까지 죽고나니 그녀는 세상 사는 낙을 오로지 궁궐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부왕인 영조를 찾아뵙는 것이다.
그녀는 왕녀 특유의 오만함과 당당함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영조는 늘 옹주에게 하는 소리가 "옹주가 사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뿐 했다." 라고 우스갯 소리를 했다.
연이어 딸들을 잃어버린 영조는 오로지 화완옹주를 바라보는 재미로 살고 있었고 그녀는 남편 정치달의 먼 친척인 정석달의 아들 정후겸을 양자로 이십대 후반에 맞아들였다. 그 때 정후겸의 나이가 16살이고 좀 더 어린 아들을 원하는 옹주에게 정후겸이 명석한 두뇌로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오빠인 사도세자와 반대의 길을 갔으며 결국 그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당시 사도세자는 정순왕후, 숙의 문씨, 김귀주와 김한구, 문성국 일파들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처지였는데 영조는 나경언이 ?은 세자의 열가지 비행목록을 듣자 분을 참지 못해 나경언을 단칼로 베어버렸고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 명한뒤 그 곳에서 굶겨죽게 했다.
훗날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는 정순왕후는 제외한 숙의문씨와 화완옹주를 폐출시켰는데 숙의문씨는 작위가 효수당하고 문녀라고 불리우다 사약을 받고 죽었고 화완옹주는 성왕이 총애하던 옹주라 하여 정조가 사면을 해주었다. 그러나 옹주의 지위를 박탈당해 정치달의 아내라는 뜻의 정처라고 불리우다가 할머니 숙빈이 묻힌 소령원에 시묘살이를 하면서 젯밥을 얻어 먹고 살다가 말년에 다시 옹주의 작위를 돌려받았다.
14. 오라버니를 살려주세요. 화길옹주와 화령옹주
-화길, 화령 옹주는 영조와 숙의 문씨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들이다. 어머니 숙의 문씨는 처음 화길옹주를 가졌을 때 아들이라 기대를 했지만 낳아보니 딸인 것을 크게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화길옹주는 청송위 심능건에게, 화령옹주는 능성위 구민화에게 시집을 갔는데 당시 구민화의 집안이 곤궁하여 영조가 딸 화령옹주를 위해 직접 인부를 데려다 시댁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특히 구민화는 청나라로 사은사를 다녀왔고 영조의 총애를 받는 부마였다.
그들은 노론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참 아이러니 하게도 오빠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두 옹주가 눈물로 아버지 영조에게 세자를 해치지 말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영조는 두 딸의 청을 무시했고 세자가 죽자 크게 대성통곡을 했다. 훗날 정조가 숙의 문씨의 작호를 빼앗고 그녀를 사사했을 때 두 고모를 살려둔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지 말라고 간언을 했기 때문이다. 두 딸은 정조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 간청했지만 정조는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고 대신 두 옹주의 작호만은 거둬지지 않았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살려달라고 한 그들의 간청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5. 할머니 정순왕후의 지극한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숙선옹주
-숙선옹주는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이고 정조의 애틋한 사랑을 받은 여식이다. 그 어머니 수빈 박씨가 후궁의 도리에 맞게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할 줄 알기에 숙선옹주를 대하는 태도가 모두들 공손했다. 그녀는 영명위 홍현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른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숙선옹주가 시집을 가려 하는 준비하던 찰나, 그녀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으니.... 질문이 재대로 열리지 않은 고민이었다. 어의로부터 옹주가 여자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전해들은 정조는 고민에 빠졌지만 일단 혼례를 시켜야 했기에 그 사실을 숨기고 홍현주에게 옹주를 맡겼다.
홍현주는 아내와의 첫날밤을 기대했지만 옹주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어 그와 잠자리를 하는 것을 며칠동안 거부했고 혈기왕성한 홍현주는 사실을 파헤치려 강제로 옹주의 방에 들어가 그녀와 합궁하려 찰나, 옹주의 비밀을 알게 되고는 그 자리에서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옹주는 이제는 다 틀렸다며 단도로 목을 겨눠 죽으려 하는 찰나, 홍현주가 작은 과도를 가지고 오더니 옹주에게 다가가 옹주의 막혀있던 질구를 벌려주었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아들 하나를 보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후궁들 중에서 수빈의 권력이 가장 좋았지만 수빈은 웃전인 혜빈과 효의왕후를 절대로 불순하게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궁으로써의 도리를 지키면서 두 분을 공경했다. 그러한 연유로 정순왕후는 왕실의 여인들 중에서 수빈 박씨를 가장 총애했고 기록에 의하면 수빈을 지칭할 적에 '수빈 저하' 지칭하도록 권유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혜빈의 오라비 홍낙임이 정순왕후 일가 중 한 사람과 언쟁을 하였는데 이 일로 정순왕후는 심기가 불편하여 홍낙임을 귀양조취 하려 했다. 그러자 혜빈과 효의왕후, 수빈 박씨가 나서 정순왕후에게 홍낙임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왕실에서 아들을 낳은 여자에게 최고의 권력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수빈은 비록 순조를 제 몸으로 낳았지만 엄연히 법적인 어머니 효의왕후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정순왕후의 화를 누그러뜨리는데 성공했다.
또한 정순왕후는 숙선옹주를 두고 대신들에게 명하길 "숙선옹주의 작호를 공주보다 낮고 옹주보다 높은 것으로 채택하여 내게 알리라." 라고 명령했다.
대신들은 당연히 그런 전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했고 수빈 역시 정순왕후에게 그 명을 거둬달라고 간청했으니 그 일은 아예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16. 삼일천하의 겁없는 진보주력의 아내 영혜옹주
-영혜옹주는 숙의범씨와 철종사이에서 태어난 옹주이고 철종의 후궁 소생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지만 1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것도 시집을 가고 나서 죽었다. 반남박씨 가문의 영효와 결혼을 하여 영효는 금릉위에 봉해졌지만 한 살 많은 옹주의 죽음, 결혼한 지 칠개월 만에 본 아내의 죽음.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훗날 중국 상하이 한 객잔에서 의문의 자객에게 암살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17. 고종의 웃음과 눈물 덕혜옹주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이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본 딸이라 고종이 특별히 애지중지 기르던 옹주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복녁당 귀인 양씨이고 옹주를 낳자 고종의 총애를 입어 제일 많은 월급을 받았고 귀인으로 품계가 올라갔다. 양씨의 집안은 천한 어물전 집안이었는데 양씨는 당시 명성황후의 시위궁녀로 있었고 명성황후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고종의 은근한 총애를 입고 후궁이 되었다.
당시 양씨가 후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 양씨의 집안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드안게 되었고, 양씨의 오라비는 누이가 옹주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저자거리 한복판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정도로 기뻐했다.
고종은 늦게 태어난 옹주를 바람에 날려갈까 비에 휩쓸려갈까 늘 전전긍긍하면서 키웠다. 그는 항상 옹주를 안은 상태에서 강녕전에서 함께 뉘어잤고 유모가 젖을 물리기 위해 뒤를 돌아있을 때도 환하게 웃으며 "과인에게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옹주가 젖을 잘 먹고 있는지 보고싶구나." 라며 유독 딸앞에서는 여느 아버지와 다름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옹주는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두살이 되던 해, 상궁 중 한 명이 "옹주자가. 자가의 외가댁은 어디시옵니까?" 라고 물으니 옹주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내 외가댁은 감고당일세."라고 말하여 주변을 감동케했다. 당시 모든 왕실의 자녀들은 죽은 명성황후를 어머니로 생각해야 당연한 것이었다.
고종은 옹주를 위해 손수 궁안에 유치원을 두어 명망높은 사대부가 여식들을 데려다 교육을 받게 하였다.
하루는 민씨집 여자아이가 오줌을 싸 치마를 더럽혔는데 울고 있는 아이에게 옹주가 다가가 손수 치마를 벗어주며 아이에게 입혔다. 자신은 속치마 차림으로 있었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아 주변을 당혹하게 했지만 영민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당시 옹주는 김황진의 손자인 김장한과 약혼을 한 사이라 고종은 아쉽지만 그녀를 시집보내 일본왕실로 시집을 가지 않도록 계획을 짰는데 사전에 이 계획에 누설되어 옹주는 하는 수 없이 대마도주에게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옹주는 정략결혼으로 희생된 자신의 삶을 전혀 위로받을 길이 없었고 그와의 금슬은 좋지 않았다.
급기야 그녀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조발성 치매진단을 받아 자신이 조선왕실의 왕녀라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딸 정혜에 대한 일화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아직 정확하게 파악된 것은 없다.
정혜(마사에)는 원자폭탄을 맞아 죽었다는 설과 등산을 나가 떨어져 죽었다는 설, 그리고 어머니 옹주를 극도로 미워했다는 설과 존경했다는 설이 있지만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다.
1962년, 치매가 완치되지 않은 채로 한국으로 돌아와 순명황후와 함께 낙선재에서 지냈다. 그녀는 1989년 낙선재에서 쓸쓸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낙선재: 순조임금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총애한 나머지 그녀를 위해 지은 전각이고 훗날 경빈 김씨가 살아생전 전각에서 살았지만 순조가 죽고 대신들의 주청에 의해 낙선재를 고스란히 왕실로 헌납했다.
첫댓글 공주라고 다 행복이 그득 한 건 아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