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겨울날, 차를 마시며 나를 본다
박숙희 / 한문교육학 박사, 우리 협회 충북지부장
시간은 흘러간다. 지난겨울 시작된 코로나19의 기습으로 제약된 낯선 생활이 답답하고 암울하기만 하더니 어느새 훌쩍 또 다른 겨울이다. 병마로부터 안전하기 위한 마스크의 답답함은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고 굳이 화장을 안 해도 되는 편리를 슬쩍 누리게도 한다.
겨울 들판이
텅 비었다.
들판이 쉬는 중이다.
풀들도 쉰다.
나무들도 쉬는 중이다.
햇볕도 느릿느릿 내려와 쉬는 중이다
간결함과 작은 것들에 귀 기울이는 1974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상교 시인의 <겨울 들판>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질병으로 초조하고 두려운 올겨울은 모든 것을 멈추게 한다. 제발 잠시 쉬는 시간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그러했던 겨울을 그려본다.
崔滋(최자)의 ≪보한집(補閑集)≫에 수록된 이인로의 「僧院茶磨(승원다마, 절에서 떡차를 갈다)」에는 소박하게 앉아 떡차를 가는 모습과 그 속에서 참된 자재(自在)의 세계를 찾는 진정한 구도의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風輪不管蟻行遲 바람이 일지 않게 천천히 움직이며
月斧初揮玉屑飛 초승달 같은 도끼 굴리니 옥가루가 날리네
法戱從來眞自在 법희는 원래 진실로 자유롭나니
晴天霄吼雪霏霏 맑은 하늘 우레같은 소리 따라 눈발처럼 흩날리네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중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승려가 되었다가 후에 환속하여 벼슬길에 오른 문인이다. 어느 절에선가 떡차를 갈고 있는 스님을 보았다. 더디고 조심스럽게 월부(月斧)를 앞뒤로 굴리며 차를 가는 스님은 바쁜 것이 없다. 오직 차 가는 일에 전념하여 옆에서 보는 이조차 세월 가는 것을 잊을 지경이다.
초승달처럼 생긴 차맷돌(茶磨)에 떡차를 가는 모습이 생생하다. 한번씩 굴릴 때마다 옥같은 찻가루가 눈발처럼 휘날리며 피어오른다. 딱딱한 떡차를 갈려니 그 소리는 우렛소리인 양 크게 들린다. 차 갈기에 몰두하다 보면 모든 것을 잊고 몰입하게 된다. 그 자체가 구도이다. 마음은 거슬림 없이 마냥 자유롭고 일말의 장애도 없다.
앞부분에서는 차를 가는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했다. 미세한 차가루가 바람에 휘날릴까 조심스레 차를 가는 모습은 흡사 인생을 관조하는 듯 여유 있어 보인다. 그 속에서 작가는 편안한 이상의 세계를 보았다. 이인로가 꿈꾸는 이상향은 특별한 곳이 아닌 차빛처럼 편안하고 담담한 세계이다. 참된 이치와 법열(法悅)의 기쁨이 가득하여 누구나 화평한 곳이다. 마지막 구에서 작가는 다시 떡차 가는 소리 속에 눈가루같은 차가 휘날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고려의 차는 오늘날처럼 잎차가 아니라 떡 모양으로 만든 덩이차이다. 떡차는 차잎을 따서 시루에 찐 후 절구에 찧어 돈이나 인절미 모양으로 만들어 건조시킨 딱딱하게 굳은 차이다. 이것을 마시려면 차맷돌에 곱게 갈아 체에 친 고운 찻가루를 솔처럼 생긴 다선(茶筅)으로 다완에 풀어 마셨다.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는 ‘원효가 와서 사니 사포(蛇包)도 또한 와서 모시고 살았는데 차를 달여 원효께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게 여기던 차에 갑자기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왔는데 맛이 젖같이 매우 달았다. 사포는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欲試進茶曉公 病無泉水 此水從巖罅忽然湧出 味極甘如乳 因嘗點茶也)’고 한 것을 보면 고려조 문인들은 점다법(點茶法)을 즐겨 음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다법은 가루차를 끓일 때 쓰는 방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다례의식 때에 행하다가 잎차를 우려 마시는 전다법(煎茶法)이 성행하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이인로에게는 차 가는 일조차도 참다운 자재(自在)의 모습이다. 스님이 초야에 묻혀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수도에 전념하는 모습은 선(禪)의 경지이다. 선수행(禪修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잔의 차를 마시기 위해 진심으로 준비하고 행하는 실천행(實踐行)을 통해 선의 요체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잔의 차를 만들기 위해 떡차를 가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차에 내재된 강인한 생명을 끌어내어 평온으로 감싸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본연의 참마음을 찾은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솟아나는 동적인 수행의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스님의 떡차 음다(飮茶) 모습은 바로 선의 모습으로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또다른 피안의 세계로 다가들게 한다. 흰빛 거품을 물고 은은한 향기를 뿜으며 담겨진 차. ‘맑은 하늘 우레소리(晴天霄吼)’인 양 갈고 갈아 차그릇에 옮겨진 한 잔의 차는 다마(茶磨) 속 신고(辛苦)의 선물이요 각고(刻苦)의 결과이다. 마치 수행자가 선의 요체를 발견한 것에 대비될 만한 청정무구한 차는 번뇌를 씻어주고 ‘무심(無心)의 경지’를 안겨다 주고 있다. 모두가 바라는 이상향으로 넘치는 물욕을 채우는 것이 아닌 ‘무심의 경지’에서 우러나는 강렬한 ‘진심(眞心)’이요, 내재된 강인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떡차는 오늘날의 가루차처럼 녹빛이 아니고 흰빛이 최고품이다. ‘흰눈처럼 날리는(雪霏霏)’ 찻가루에 마음을 빼앗기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정겹다. 차 한 잔의 기쁨과 만족감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이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차를 대하면 찻일에 집중하게 되고 시름을 잊게 된다. 찻일은 단순한 마실거리를 준비하는 단계가 아니라 마음을 모으는 일련의 수련 과정이므로 ≪고려사≫ <최승로전>에서 볼 수 있듯이 임금도 차를 직접 가는 찻일을 한 것이다.
차는 단순한 몸에 이로운 음료가 아니라 정신을 고양시키는 음료이다. 정갈하게 정성을 다하여 떡차를 만들어 다마에 갈아 체에 치고 맑은 물을 끓여 차를 마시는 과정은 신비롭다. 한 잔의 차는 특별한 것이 아니지만, 작은 것을 소중히 다루는 일련의 행동은 ‘다도(茶道)’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노자의 ‘九層之臺 始於累土(높디높은 누대도 흙은 쌓는 일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처럼 차를 다루는 사람은 일의 서두에서부터 말미까지 작은 것도 소중히 다루고 아끼며 함부로 언행을 하지 않는다. 일찍이 초의선사도 《다신전》에서 ‘차를 만들 때 정교하게 하고, 건조하게 보관하고, 우릴 때는 청결하게 함이야말로 다도를 다함이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다마는 내란과 외란의 풍파 속에서도 고려 사인(士人)들의 기우는 국운을 염려하고, 시국의 개탄과 아울러 변혁의 행로를 정하려는 의지를 확고히 하며 작은 희망으로 가슴 뿌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던 상징물로 삼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