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에 일이 있어서 전남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정읍 동학혁명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동학혁명기념관에 가면 예전 동학혁명 기념 유적지가 있는데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세상을 맑게하는 문이라는 청세문(淸世門)이 있습니다
청세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황토현전적지 기념비가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황토현은 동학농민혁명군이 관군을 대파한 곳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넓은 공터가 보이고 문이 하나 더 보입니다.
보국문(輔國門)이라 하네요, 그 안으로 들어서면
전봉준 장군 및 동학혁명군을 기념하는 동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상 옆으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구민사(救民祠)
구민사 안으로 들어가면 위패(位牌)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중앙에서 우측하단부에 보이는 존함. 갑오의사(甲午義士) 차치구(車致九)
월곡 차경석 성도님의 아버님이십니다.
범증산종단사는 차치구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임감역(任監役)이란 사람이 호암리에 새 집을 지어 이사를 하였는데 구렁이가 많이 나오는데다가 호랑이가 매일 저녁 나타나 무서워 살지 못하고 그 집을 버리다시피 떠나므로 치구가 사들이니 구렁이가 없어지고 호랑이도 사라진 후 이 집에서 월곡(月谷)을 낳았다. (普天敎誌 389쪽)
차치구는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포학(暴虐)한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갑오(甲午1894)년 2월에 쫓아버린 동학접주(東學接主)로서 그 뒤 흥덕에서 관군에게 잡히어 그 앞산에서 포살되었는데 이때 월곡(月谷)은15세의 소년으로 아버지의 시신(屍身)을 업어다가 대흥리에 묻었다 한다
관군이 차치구(車致久)가 은거한 곳을 알고 은거처를 제공한 사람의 가족을 인질로 잡자, 차치구가 스스로 자수하여 처형당했다고 한다.
어제 구민사에서 심고를 올리며 차치구 선생님을 비롯한 동학혁명 신명님들께서 못다 이룬 후천개벽의 꿈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했으며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게 도와 주시라고 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bQafLzlGq4
동학농민운동을 비하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전부 왕후장상의 꿈을 꾸다가 헛되히 망했다는 글도 봅니다. 경전에 그런 내용의 글이 있으니 어찌보면 그렇게 생각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게 너무 힘들어서, 양반이, 지주가, 나라가 다 빼앗아가기에 참고 참다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나도 좀 살자고 일어난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요? 왕후장상의 꿈을 꾸었다구요???
그러면 그 당시 동학농민군이 민주공화제 시민국가 및 복지국가 건설, 최저임금 보장 및 일한 만큼, 땀을 흘린 만큼 보상을 받게 하자 뭐 이런 주장을 했어야 했나요? 불가능입니다. 그런 사회를 본 적도 없기에 상상도 못합니다. 누구나 자신들이 보고 배우고 경험한 세상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이 당시 사회상으로 이 분들에게 후천개벽은 자신들도 왕후장상의 반열에 오르는 것 뿐이었습니다.
동학농민군들이 경험한 조선말의 세상은 왕후장상들만이 잘 먹고 잘사니 나도 그들처럼 좀 편히 잘먹고 잘살자 였습니다. 이게 그리 잘못된 것일까요? 비록 우리가 도의 길을 따르고 있지만 생활에서는 좀 부유했으면 하는 바람을 누구나 하고 있지 않은가요?
더욱이 이씨왕조 및 양반 권력가 집단이 너무 부패하고 무능하여 조선이 외세의 힘에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조국을 지키고자 일어난 분들입니다.
요즘 제가 보기에는 국제정세가 1차 대전 직전 데자뷰로 보이기도 합니다. 상당히 비슷해 지는 것 같습니다.
동학이 일어남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이것이 세계 1차 대전으로 그리고 2차 대전으로 . 동학이 무력항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것이 천하의 난리를 이끌어 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지공사가 이런식으로 되었으니 풀릴때는 반대로 풀릴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쟁 및 난리가 일어나더라도 이 땅은 한동안 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여파가 결국 이 땅까지 들어와서 이 땅에서 또 한 번의 전쟁이 시작될 쯤 참동학이 일어나 이 땅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광구창생 할것으로 보입니다. 이게 진정한 동학의 해원 같습니다.
동학의 진정한 해원을 기원하며 신교를 받은 참동학이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좋은사진과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