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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1.6.1. 20:46
■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대원군의 정치체계
병인, 신미양요는 사실 대원군 집권기에 일어난 일이고 그로인해 오히려 대원군은 집권기반을 더 튼튼히 하였다. 그렇기에 삼군부는 대원군의 개혁 때 다루어야 했지만, 후술하겠지만 병인양요 이후 완전 설치되었고 또 신미양요를 겪었기 때문에 따로 독립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하지만 병인, 신미양요를 논하자면 그 이전 대원군의 삼군부 복설부터 다루어야 한다. 병인, 신미양요는 삼군부의 복설 계기이자 시험대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원군의 삼군부 복설부터 병인, 신미양요의 뒤처리까지 다루기로 하겠다.
사실 삼군부 자체는 고려 말 삼군통제부가 태조 2년(1393)에 義興三軍府로 개편된 것이었으나 임란 이후 오위체제로 바뀌었다. 이후 대원군이 비변사를 폐지하면서 군국기무와 구성원은 의정부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의정부는 행정기관이었고 안정된 권력 확보를 위해서는 병권을 장악해야 했다. 이에 병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삼군부가 필요했다.
고종 2년(1865) 5월 26일 영의정 조두순이 삼군부 설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하지만 조두순이 제기한 삼군부는 단순히 훈련도감에 몇 가지 기구와 오영을 예조 자리에 모이게 해서 삼군부라 하자는 것이었다. 비변사를 대신할 최고 군령기관을 마련하자는 것이 아니라 군무 최고기구를 이름만 갖추고 내용은 각 개별 군영을 모아놓는다는 것이었다. 내용상 미흡했지만 어찌되었던 의정부와 대비되는 최고 군령기관으로써 삼군부가 생길 터전이 마련 된 것이었다.
하지만 복설되지 않았고, 이는 대원군이 의정부는 통제해도 군권장악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종 3년 4월 24일 종2품인 각 군영의 대장을 판서와 같은 정2품으로 승격시켰다. 이제 각 군영을 총괄할 수 있는 최고 군령기관으로서 삼군부가 설치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최고 군령기관은 설치되지 않았다.천주교는 철종 말기 탄압이 느슨해진 틈을 타 차츰 교세를 넓혀 나갔다.
국경을 맞댄 유일한 열강인 러시아가 고종 1년~2년 사이 네 차례에 거쳐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요구하자 두만강 유역 국경 경비가 불안해지고 러시아의 침입에 대한 방어책 수립이 당면과제로 부각되었다. 대원군은 당초 천주교에 대해 종교적 관용정책을 피고 국내에 잠입해 포교하는 선교사 뒤에 있는 프랑스를 이용할 생각을 했다.
나폴레옹 시대 이래 러시아와 대립해 온 프랑스의 군사력을 빌려 러시아를 막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천주교도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개입시켜 러시아를 막을 방안을 세웠다. 이에 천주교도인 고종의 유모 박말따와 운현궁 하인 이연식을 통해 부대부인과 대원군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또 아편전쟁 때 프랑스, 영국군이 북경까지 진격한 것을 고려, 防衙策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영국까지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홍봉주는 조, 영, 프 3국 동맹으로 러시아를 막는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 방아책 건의문을 작성, 대원군의 사돈인 조기진을 통해 대원군에게 전달했다. 허나 대원군은 처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는 전 승지인 남종삼이 유모를 통해 부대부인에 접근했다. 부대부인은 남종삼을 격려했고, 이에 남종삼은 새 건의문을 작성해 대원군에게 직접 바쳤다. 대원군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지방순회중인 주교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하지만 베르뇌 주교는 정치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고, 시일이 지체되면서 신정왕후와 기타 관료들의 반발을 사 오히려 대원군의 분노만 샀다. 그래도 고종 3년(1866) 1월 31일 대원군과 프랑스 선교사와의 면담여부를 타진하기 위해서 운현궁을 찾았으나 대원군은 냉담했다.
마침내 고종 3년 2월 21일, 신정왕후는 금압전교를 발표했다.대원군은 천주교도를 사교로 규정, 대 금압령을 내렸다.
2월 23일 홍봉주와 베르뇌 주교를 체포했고, 25일 정의배와 브르뜨니에르 신부, 27일에는 볼리외, 도리 신부를 체포하였다.
3월 1일에는 남종삼도 체포돼, 다음날 다 같이 의금부에서 대원군의 심문을 받았다. 3월 4일 천주교 대금압의 추가 교명이 발표 되었고, 3월 7일에는 체포한 신자와 성직자를 처형함과 동시에 오가작통법을 시행, 천주교도를 검거할 것을 지시하고 3월 10일에는 천주교도의 은닉을 엄금하고 해서, 호서지방의 선박에서 외국인을 발견하면 무조건 참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주교 둘을 포함한 9명이 처형되었고 이후 병인사옥부터 3년간 천주교도 8천명이 처형되었다. 이 병인사옥 중 페롱, 깔래, 리델 신부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리델신부는 중국으로 탈출 로즈 제독을 만났다.
병인사옥의 소식을 들은 주청 프랑스 공사대리 벨로네는 공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병인사옥에 개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벨로네 공사는 조선 국왕 폐위와 프랑스 황제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조선원정을 선언했다.
청나라는 조선 문제 개입을 거부하고 넌지시 조선에 프랑스의 원정계획을 전하였다. 조선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금지된 전도활동을 벌였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벨로네 공사는 로즈제독에게 프랑스 함대의 지휘권을 이양하라고 요구했고, 로즈제독은 벨로네 공사의 선전포고와 함대 지휘권 이양 요구는 월권행위라고 해군부에 보고했다.
해군부는 1866년 9월8일 로즈 사령관에게 원정을 명령했고, 외무부는 로즈 사령관의 항의를 받아들여 11월 10일 벨로네 공사에게 훈령을 내려 선전포고와 조선 국왕 폐위 선언은 무효이며 조선 원정은 정부의 개입 없이 해군부와 로즈 사령관이 주관한다고 통보했다.
군함 3척, 병력 200명의 프랑스 함대는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강화해협과 양화진, 서강의 수로를 탐사하고 해도를 작성한 뒤 귀환했다. 정찰 결과 목표를 서울까지 잡고, 병력 1500~2000으로 함락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조선에서는 프랑스 함대가 서강까지 진입하자 기정진이 척화정책을 강화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등 척화정책이 강화되었고 서강에 병력 900명을 파견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피난민이 속출하고 프랑스 함대가 한강 하구를 장악해 상선과 조운선이 불통, 물가가 치솟았다.
강화와 한강 하구 일대의 정찰이 끝나자 프랑스군은 요코하마 공사관 경비병력 등 기함 게리에르(Guerriere) 이하 군함 7척, 병력 1500,(주54) 함재포 66문으로 제2차 조선 원정에 나섰다. 목표는 서울이었다. 10월 5일 로즈 제독은 한강 봉쇄령을 선언하고 10월 11일 조선원정에 나서, 10월 16일 갑곶진을 점령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강화부를 공격, 함락시켰다. 강화부가 함락당하자 대원군은 “상하가 疑怯하게 되면 만사가 외해되고 국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묘당에 血誓하였다. 매국론으로 분열을 차단하고 망국론으로 노론 보수세력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이로 인해 지배세력을 전시체제로 끌어들였고, 반대세력을 집권체제에 흡수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이항로, 기정진, 박문일을 끌어들였으나, 대내정치면에서 대원군과 대립하고 있었기에, 이항로는 거듭 사임하고 말았다. 국가의 위기를 이용해 정치노선이 다른 집단을 통합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프랑스군이 한강 하구를 봉쇄하고, 강화부를 함락시키자 조선 선박들의 출입이 통제되고 말았다. 일단 순무영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 중군에 이용희, 천총에 양헌수를 임명했다. 중군 이용희가 2000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출동했고, 지방의 병력을 한강 일대에 재배치 시켰다.
양동작전으로 순무사 이경하가 로즈 사령관에게 격문을 보내 항의하자, 로즈 제독은 학살관계 책임자 3명과 교섭을 위한 전권위원을 파견할 것을 회답하였다. 프랑스군의 유일한 공식반응이었다. 통진에 진을 친 순무영은 문수산성을 방어했으나, 10월 26일 프랑스군 120명이 문수산성을 함락시켰다.
천총 양헌수는 정면승부는 불리하다 생각하고 549명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강화도에 잠입, 정족산성에 진을 쳤다. 11월 9일 올리비에 대령이 야포 없이 160명을 이끌고 정족산성 공격에 나섰다. 반나절 간의 총격전 끝에 프랑스군은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부상자 32명을 냈고, 조선군은 전사자 1명과 부상자 4명을 냈다. 이 전투는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
우선 최초로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이 전투를 계기로 프랑스군은 서울 진격작전과 강화부를 포기, 11월 10일 철수해 버렸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대원군이 이 전투로 자신감을 가지고 이후 척화 및 천주교 탄압에 힘을 가한 것이었다. 하여간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 340권, 197231프랑 어치의 은괴 19상자와 기타 문화재를 약탈하고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고 철수해 버렸다.
로즈 사령관은 성공적인 원정이라 주장했지만, 벨로네 공사를 비롯한 북경의 외교관들은 실패라고 평가했다. 우선 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에서 개항을 위한 교섭조차 벌이지 못하고 맨손으로 돌아왔고, 정족산성 전투 다음날 강화도에서 철수했으며, 보복과 선교의 자유는커녕 오히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만 강화시켰다.
하지만 프랑스 본국은 성공이라고 간주했다. 1867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미국은 병인사옥으로 피해를 입은 프랑스에 공동 작전을 제의했으나 프랑스 정부는 병인양요로 보복을 했다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후 병인양요로 자극을 받은 중국에서는 배외감정을 자극해 1870년 천진교안을 일으켰다.하지만 외국과의 대립을 통해 군사력 정비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상설 최고 군령기관이 필요하였다.
대원군은 당장 국방과 군권 장악을 위해 필요했고, 노론 세력은 역시 국방과 대원군 견제를 위해서 필요했다. 이는 삼군부 복설과정에서 드러났다. 고종 5년(1868) 3월 23일 열병식 후 영의정 김병학이 이미 삼군부가 복설되었으니 각 將臣들을 품계에 따라 직함을 사용하고 3군영의 장신들을 有司로 삼아 삼군부의 일을 살피자고 건의, 승인받았다.
이처럼 영의정 김병학과 병조판서 김수현이 주도하였다. 김좌근, 김경비를 領, 判三軍府使를 맡고, 친대원군계가 제조로 참여하는 삼군부의 인적구성이 이루어졌다. 이는 대원군과 노론 세력의 이해가 동시에 관철되고 있었고, 대원군 역시 노론과 합의를 해야 하는 점에서 노론의 협조가 필요하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셰넌도어호 사건이나 남연군묘 도굴 사건 등에서 의정부가 대응을 주도하였고, 삼군부는 의정부 내 별도로 생긴 군사위원회의 성격에 지나지 않았다. 고종 5년(1868) 6월 8일, 고종은 전교를 내려 삼군부를 의정부와 동등한 정일품아문으로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의정부와 삼군부는 각각 정치와 군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 체제 개편은 친대원군계가 주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대원군은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삼군부 도제조는 대원군의 친위세력인 의정부의 時任三相이 독점하였고, 이들을 통해 삼군부를 통제하였다.
이후 삼군부는 병조의 권한을 흡수하여 상위에서 군무를 총괄하였다.대원군의 통치체제는 삼군부의 조직으로 완결되었다.
의정부와 나란히 권력체제를 형성해 견제와 보완체제를 이루었고, 대원군은 권위를 종친부에 두면서 3부 체제를 완성시켰다.
이후 종친과 친위세력을 삼군부에 배치하고 무반의 정치적 지위를 격상시켰다. 신헌, 이경하, 이현직, 이주길이 판, 지삼군부사가 되어 삼군부를 장악했다. 이후 대원군은 삼군부에 세도세력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삼군부는 비변사의 인사권을 회복하고 구성원을 확충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론 세력은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미 대원군은 실력으로 노론세력을 압도하고 있던 것이고, 노론 세력은 대원군에 대항할 명분도 권력도 없었다. 삼군부의 운영 핵심은 삼정승이 참가하는 도제조와 제조인 병조판서였으나, 대원군은 도제조를 전임 삼정승까지 확대하고 병조판서에 친대원군계 인물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병조판서의 책무를 강조하면서 무반 인사 및 각 영의 군제 관할의 책임을 부여하고 임기를 보장하였다.
이로써 병조판서는 인사, 예산, 군기 통할의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었다. 심지어 고종 8년(1871)에는 좌, 우 포도대장도 삼군부의 제조에 포함시켰다. 치안권을 삼군부에서 통제하려는 의도였다. 치안권을 삼군부에서 쥐어 서원철폐 등의 개혁 정책에 동원하려는 계획이었다.
삼군부는 대원군의 전제권 행사를 위한 마무리 과정이었다.고종 3년(1866) 2월, 영국 상선 엠페러 호가 해미현에 정박하였다.
일주일 동안 머물며 통상을 요구하다가 해미 현감이 퇴거를 요구하자 연해를 타고 북상하였다.
이 배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타고 있었다. 엠퍼러호는 북상하면서 교동도와 한강 어귀에 출몰하며 해안을 측정하고 뱃길을 조사하다 강화도를 한 바퀴 돈 후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돌아갔다. 이는 개항에 대비해 서울로 가는 한강 어귀를 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해 7월 초,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황해도와 평안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한동안 통상을 요구하며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 출몰하다가 7월 12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이후 상륙하여 약탈하고 그들을 감시하던 순영의 중군 이현익을 납치하였다.
19일 상류로 올라와 무력시위를 하고 금품을 요구하였다. 격노한 평양 시민과 수비군은 공격하였고, 이날 오후 늦게 셔먼호에서 이현익을 구출해 왔다. 이 보고를 들은 의정부는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평안감사 박규수에게 일임하였다.
셔먼호는 대동강에서 이탈하려 하였으나 물이 줄어 좌초했고, 박규수는 화공술로 셔먼호를 격침시켰다. 셔먼호 승무원은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고, 셔먼호에서 대포 4문, 포탄 3, 닻과 줄, 각종 쇠 5000여근을 전리품으로 거두었다.
셔먼호는 선주가 미국인이지만 영국 메도우즈 상사와의 용선계약으로 법률상 영국 상사 소유였으며, 셔먼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통역 토마스 목사가 영국인이었지만 영국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미국은 선주가 미국인이었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이는 이후 신미양요의 계기가 된다.
같은 해 12월 경원부의 두만강 건너편에 러시아인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하는 한편, 민가를 약탈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국 군함 워추세트 호가 황해도 장연 월내도에 나타나 정연현감에게 글을 보내 셔먼호 사건의 전말을 묻고 생존자 송환을 요구하였다.
1868년 주청 미국 공사 윌리엄스가 셔먼호의 생존자 4명에 관한 소식을 듣고, 청나라 정부에게 조선 정부에 문의하기를 요청하였다.
한편 군함 세넌도어 호를 보내 생존사 송환을 요구하였다. 세넌도어 호가 대동강 하구에 나타나자 삼화부사 이기조는 이미 청나라에 전말을 고했으며, 생존자가 없다고 알렸다.
이 세넌도어 호의 연안 출몰 과정에서 內江航行에 대한 포격사건이 발생하였다. 한편 오페르트는 상해에서 조선에서 탈출한 페롱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을 만났다. 이들에게서 남연군묘에 부장품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시신과 부장품을 파내 선교의 자유와 통상의 조건으로 삼을 생각으로 도굴 계획을 세웠다. 아산만의 만조 시기와 묘가 있는 가야동까지의 거리, 그 사이의 도시를 파악하고 이동 시간과 발굴 시간대를 계산했다.
오페르트와 페롱 신부는 차이나 호를 타고, 1868년 4월 상해를 출발해 구만포에 도착하였다. 우선 덕산 관아를 습격하고 오후 5시 가야동에 도착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묘의 위치를 묻고 연장을 빌린 후 발굴을 시작했다. 하지만 남연군묘의 단단한 구조로 인해 실패하고 하리의 후포로 물러나 마을을 약탈한 뒤 차이나 호로 돌아갔다.
충청감영에서 100명의 군사를 보냈지만 이미 돌아간 뒤였다. 차이나 호는 동검도에 정박하여 영종도 첨사 신효철에게 남연군묘 도굴 사실 알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때 계략을 써서 오페르트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알았다. 이 남연군묘 도굴 사건은 세상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고종 6년(1869) 3월 러시아 군함 8척이 영종도 앞바다에 나타나 수군을 죽이고, 다음해에는 주일 독일공사 브란트가 탄 군함이 부산 앞바다에서 통상을 요구하는 등 그 후 몇 년 간 외국 함선의 출현이 그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서양과의 접촉이 잦아지자, 정부에서는 대응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고종 3년(1866) 7월 30일 국방정책을 논의할 때 좌의정 김병학은 군사력 강화 대책을 건의하였다. 내용은 각 병영의 편성에 맞는 병력 보충, 군기의 수선, 군사훈련 실시, 전선 보수, 염전과 어장에 부과한 세금을 해당지역 병영에 배정해 군비로 쓸 것이었다.
이에 대원군은 內帑金 5만냥을 풀어 전국의 군비강화에 쓰는 등 군비강화에 착수할 때 병인양요가 발발하였다.
이 병인양요의 경험으로 대원군은 국가 정책의 방향을 국방으로 선회, 군비강화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훈련대장 신헌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권 2선 방어 전략을 수립하였다.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경기해안 및 한강하구 방어와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서울 방어 전략이었다.제1선 방어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경기 해안 및 한강 하구 방어전략인데, 이는 병인양요의 경험을 통해 당시의 주적은 洋夷였고, 주로 강화도 해안을 통해 온다는 경험에서 나온 신념이었다.
특히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한 달 남짓 점령했었고, 이로 인한 한강 봉쇄는 서울의 물자 공급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대원군은 병인양요 이후 강화도에 정이품아문인 鎭撫營을 서리하고 유수가 진무사를 맡도록 하였다.
그 체제는 통제영에 따르도록 하였고, 경기 수영 관할 하의 각 진을 이곳에 이속시켰다. 그리고 삼도수군 통어사를 겸직하게 함과 동시에 진무사의 의정부 당상 보직을 삭제해 진무사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무영은 완전한 군사병영체가 되었다.
경기 수영 소관 변장의 인사권과 교동도, 영종도의 두 방어영을 갖게 되며 탄약, 군기의 자체 제조와 군수 관련 재원도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진무영 설치는 경기도 연해 방어의 상비방어군단이 되는 동시에 다양한 군영체제를 일원화시켜 효율적으로 대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원군은 일선 방어를 위해 강화, 인천, 부천, 김포, 통진, 남양 등 연해지역에 요새를 세우고 정예포수를 모집해 주둔하게 하였다. 또한 병인양요 이후 강화해역에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항행금지 비석으로 세웠다. 특히 대원군은 포군을 집중 양성했다.
사실 병인양요의 수훈자는 포수들이었다. 원래 평안도, 함경도의 포수들에 기대하여 평안 감사에게 강계를 지칭하며 동원을 지시했지만, 실상 평안도 포수들은 거의 활약하지 못하였고, 정족산성 전투의 주력인 鄕砲手 중 대부분이 강원도, 경상도, 황해도의 포수였다.
병인양요 시 효과적인 전술은 포수를 매복시켜 일제사격 한 것이었다. 이에 대원군은 진무영군을 외적 방어에 가장 효과적인 포군 중심으로 조직하였고, 포군 3000명을 양성하였다. 한편 신헌은 해전에서 우리의 함선으로 서양의 군함과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적을 해안 가까이 유인해 해안선에서 격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海口에서 京江까지 100리도 되지 않기에 적이 오기도 좋지만 아군이 방어하기도 좋다는 것이다. 이는 외양이나 해구보다는 내하를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內河戰術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신헌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경기 해안지역의 방어를 가장 중요한 방책을 여기고 있었다.
수도 방위를 위한 제2선 방어는 북한산성을 거점으로 한 경성방어였다. 우선 중앙군의 강화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대원군 집권 초기 중앙 상비군은 훈련도감 5000명을 포함한 16000명이었으나 군기가 해이해지고 노약자가 많아 내부 정비가 필요했다.
정비를 하려 할 때 병인양요가 일어나 잠시 중단되었다가, 고종 6년(1867) 정월, 대원군은 당시 훈련대장 신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 내 핵심인 훈련도감을 정병위주로 개편하였다. 큰 도움이 안 되는 각종 雜色軍을 정군과 대체하고 각초에 분산배치 된 別破陣軍과 火箭軍을 초외로 끌어내 독립된 병종으로 만들어 훈련을 강화하는 등 내부 개편을 단행하였다.
국왕의 친위 금군인 용호영도 병인양요 이후 정비, 강화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대원군인데, 금군별량의 권한 확대와 임기연장, 인원 충원 등이었다. 대원군은 용호영을 정비하면서 병조판서-용호영의 친위체제를 강화하였다. 용호영의 친위군영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병조판서가 용호영을 장악하는데, 선술한대로 병조판서는 친대원군 인물인 것이었다.
이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대원군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이후 훈련도감의 개편은 급료병의 설치로 구체화 되었고, 선술한대로 병인양요의 전훈으로 편제도 삼수병체제에서 포수중심체제로 변했다. 즉, 전쟁을 경험하면서 군사발전이 급격히 진행된 것이다.
또 같은 해 8월에는 총융청에 125명의 善放砲手를 증원시켜 새 부대를 창설했다. 이 새로 창설된 부대가 급료를 받는 포군이라는 것은 총융영의 관할 구역이 북한산성이란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즉, 상대적으로 취약한 총융영에 정예부대를 창설해 강화하면서 만약 1선인 강화도와 경기 해안 방어가 불가능 할 때 정부는 수도방어의 요충지인 북한산성에서 결전을 벌이겠다는 의지의 발상이다.
북한산성 결전 시를 대비한 정예화인 것이다. 선술한대로 중앙군이던 지방군이던 포군을 중시해 포군 위주로 편성하였다. 하지만 우의정 유후상은 중앙군 포군의 허약함을 폭로하였다. 병인양요 때 선술한대로 지방 포수들이 선전했고 중앙군은 무력했음을 지적하며 경군 포수의 훈련 강화를 역설한 것이다.
이에 대원군의 주도 하에 해안 방어 및 육상 전투에도 효과적인 화포훈련이 본격화 되었고, 인원수도 늘려서 포군은 조선군의 핵심병종으로 발전되었다. 1869년, 미국 피쉬 국무장관은 전임 국무장관이자 상해총영사 슈어드와 조선원정계획에 대해 협의했다.
슈어드는 우선 셔먼호 사건 같은 일의 재발을 위해 조선과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체결하되 가능한 한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과, 조선과 교섭하기 전에 청의 협조와 중재를 구하고, 조선원정의 전권을 로저스 아시아함대 사령관에게 부여할 것을 제시했다.
이에 세 번째 방안을 빼고 주청 미국공사 로우를 조선파견 전권공사에 임명하고 조선원정의 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로저스 사령관에게 아시아함대를 총동원해서 로우공사를 수행, 호위할 것을 명했다. 또한 1870년 그랜트 대통령은 교서를 통해 조선과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위해 로우를 조선에 파견할 것과 경호를 위해 로저스 제독에게 아시아함대를 인솔하여 호위할 것을 발표했다.
고종 8년(1871) 2월 주청 미국공사 로우가 청나라 총리아문을 통해 조선에 친서를 보냈다. 자신이 조난선원 구휼협정을 상의하기 위해 조선에 가고, 이에 협상에 응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밝혔다. 협상을 거부하면 힘으로, 즉 포함외교를 통해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암시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로우의 친서는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셔먼호는 스스로 불법을 저질러 파멸했으며, 전통적으로 난파선을 구제하고 있고,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조선은 이렇다 할 상품이 없어서 교역하면 경제적 파탄이 발생하기에 통상관계를 수립할 수 없다고 밝혔다.
로우 공사와 로저스 사령관은 기함 콜로라도(Colorado) 이하 아시아함대 5척과 병력 1230명, 포 85문을 적재하고 나가사키에서 보름간 훈련을 한 뒤 조선으로 떠났다. 로저스 사령관은 일찍이 일본의 개항을 본받아 무력시위와 군사작전으로 개항하는 포함외교 책략을 수립했다.
아시아함대는 제물포 앞바다에 도착, 남양부사 신철구에게 조선과 협상을 하기 위해 왔으니 직위에 맞는 특사를 보낼 것과 서울 가까이 이동하기 위해 해안측량을 하겠으니 방해하지 말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에 조선 정부는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4월 14일 대원군은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 삼아 강화도로 파견했다.
미국함대가 측량을 위해 손돌목에 진입하자, 광성보에서는 무허가 진입이므로 영해침범으로 간주하고 15분간 200문을 동원해 포격했다. 이후 교섭은 끊기고, 대신 해변에 편지를 매단 장대를 꽂아서 서신을 주고받는 장대 외교교섭이 전개되었다.
로우는 측량선에 대한 광성보의 포격은 비인도적이니 조선은 대표를 파견해 교섭에 응해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할 것을 요구했다. 10일 이내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상륙작전을 하겠다고 했다. 이에 진무사 정기원은 미국함대의 손돌목 진입은 불법 영해침범이고, 셔먼호 사건은 예전에 끝났으며, 조난선은 알아서 잘 처리한다고 하면서 미국 함대의 퇴거를 요구해,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로저스 사령관은 지휘관회의를 소집하여 원정군 사령관에 블레이크 중령과 상륙군 부대장에 킴벌리 중령을 임명하고, 4월 23일 군함 2척과 10개 중대 651명을 이끌고 1시 45분 초지진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강화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에는 수비병 30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우선 미군은 함포로 초지진에 2시간동안 포격을 하고 22척의 보트에 분승해 초지진에 상륙했다. 초지진의 조선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은 무혈 입성했다. 다음날 새벽 덕진진을 점령했고, 파죽지세의 미군은 이후 광성보로 향했다. 광성보에는 어재연이 이끄는 수비병 6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우선 미군은 1시간 동안 함포로 제압사격을 하고 광성보를 공격했다.
어재연의 조선군은 용감히 싸웠으나 전멸하고, 미군은 오후 1시에 어재연의 帥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미군은 전사자 3,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어재연 이하 시체 243구와, 익사 100여명 등 전사자 350명에 포로 20여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에 불을 지르고 수자기를 비롯한 각종 군기 50개와 대포 및 총 481문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갔다.
미군은 “조선군은 전근대적 노후한 병기를 가지고 미군의 현대적 총포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라고 평하였다.
이후 미군은 물치도로 후퇴한 후 포로를 방면했다. 20일 간 기다리며 부평부사 이기조와 접촉했으나 별 반응이 없자 조약 맺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5월 16일 철수하고 말았다. 대원군은 어재연의 중군이 전멸하고 광성보 이하 5개 요새가 함락 당했지만 미군이 철수한 것을 승전으로 간주해, 조선군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 신미양요는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긴 하나 어디까지나 포함외교의 방책이었기에 식민지화 전쟁은 아니었다. 미군이 남북전쟁 이래 아시아함대를 총동원해서 조선원정을 한 목표는 조선의 개국이었다. 허나 미군은 예상대로 조선군을 압도했으나 결국 개국에는 실패했다. 미국의 실패원인은 우선 화해적 교섭대신 시종 포함외교책으로 일관했다.
이미 병인양요를 겪은 조선은 포함외교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상호 이해가 부족해 조선은 미국을 어설픈 서양 오랑캐로 보고, 미국은 조선은 꽉 막힌 동양의 야만인으로 생각했다. 결국 서로 똑같이 본 것이었다. 거기다 조선은 이미 병인양요, 셔먼호 사건, 남연군묘 도굴사건 등 서양과의 대립을 통해 서양과의 교섭은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역시 조선의 원정을 각오하고 온 터였다.
로저스 사령관은 페리 제독의 일본개항을 선례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무혈 개국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전멸할 때 까지 싸웠다. 사실 일본은 16세기에 이미 유럽과의 무역을 했고, 비록 에도시대는 쇄국정책이긴 했으나 네덜란드와는 돈독한 사이였기 때문에 개국의 경험이 있고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개항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조선은 서구의 흐름에 둔감했고 로우 공사의 친서에 대답한 대로 아직 개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청나라 역시 종주국으로의 지위를 위해 은근히 개항을 꺼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미군이 물러나고, 대원군은 승전 지도자가 되어 오히려 정계의 주도권을 잡았다. 대원군은 미군이 물러나자 곧 斥和碑를 세워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음은 화친인 것이며,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쇄국정책의 슬로건을 온 나라에 공포하였다. 이런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척화정책은 온 나라의 지지를 받아 국론을 통일하고 대원군의 인기와 권위를 한층 높이게 되었다.
대원군은 비변사를 폐지하면서 비변사를 대신할 군사기구인 삼군부를 만들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아직 대원군이 확실한 주도권을 쥐지 못하였기에 지체되다가, 병인양요 이후 급격한 국방정책을 통해 삼군부를 복설하였다. 그 삼군부의 주요 지도층은 대원권의 심복들이었고, 삼군부는 병조판서가 담당하게 하고 병조판서 역시 친대원군계 인물이었기에 대원군은 병권을 쥐게 되었고, 나중에는 포도청의 치안권도 포함시켜 대원군 체제의 완성의 상징물이 되고 만다.
이후 대원군은 정계를 주름잡는 전제권을 행사하게 된다.병인양요 이후 서양과의 충돌을 통해 보다 체계적인 수도방어전략의 수립이 시급해져 대원군은 신헌과 함께 이중 방어전략을 세워 강화도를 명실상부한 경기해안 및 한강 하구 방어의 중심지로 삼았고, 중앙군의 쇄신과 개편을 통해 전력을 높이는 한편, 대원군의 힘을 바탕이 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조선의 개국을 원하는 서양의 포함외교의 결과였다. 프랑스는 병인사옥을 빌미로 강화도를 점거하여 신앙의 자유와 개항을 요구했으나 정족산성 이후 후퇴하였고,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를 빌미로 역시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공격했으나 별 소득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지지를 받게 되었고, 대원군의 전시지도는 이후 대원군의 정계 장악과 민심 수습에 큰 영향을 미쳤다. <끝>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