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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대>독립문공원을 다녀와서!
연세대학교[Yonsei University, 延世大學校]
1885년 궁정어의(宮廷御醫)였던 H.N.앨런이 고종의 명으로 설립한 제중원
(濟衆院:초기의 이름은 광혜원)을 모체로 하여 1899년 한국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로 설립되었다. 교훈은 진리, 자유이다.
1904년 L.H.세브란스에게 기증받은 기부금으로 근대식 세브란스병원을 준공하고
의학교육기관으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세브란
스연합의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17년 전문학교 설립인가를 얻어 1922년 세브란
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교명을 아사히의학전문학
교로 변경하였으나 1945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복귀하였으며, 1947년
세브란스의과대학(6년제)으로 개편하였다.
한편, 연희대학교는 1915년 미국 북장로교·재한 남북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등
선교부연합위원회에서 서울 YMCA 내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
으로 개교하였다.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고, 1923년 신교육령에 따라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변경하였다. 1944년 대학의 재산을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
한 총독부가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고쳤으나, 1945년 8·15광복 이후 연희
전문학교로 복귀하고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하였다.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새롭게 발족하여 초대총장에 백낙준(白樂濬)이 취임하였
으며, 1977년 원주에 제2캠퍼스를 설립하였다. 2011년 국제캠퍼스가 부분개교를
시작하였으며, 2013년 전면 개교할 예정이다.
2012년 기준 학부는 본교는 문과대학, 상경대학, 이과대학 등을 비롯한 13 대학
58학과(전공)이며, 의료원은 3대학 3학과(전공), 원주매지는 4대학 1학부 32학과
(전공), 원주일산은 1대학 3학과(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원은 본교 일반
대학원 1대학원 113학과(전공), 전문대학원 7대학원 38학과(전공), 특수대학원
7대학원 77학과(전공), 의료원 전문대학원 2대학원 2학과(전공), 특수대학원 2
대학원 19학과(전공), 원주매지 특수대학원 2대학원 13학과(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학간연구소는 교육연구소, 미디어아트연구소, ASIC설계공동연구소,
나노과학기술연구소 등의 연구소가 있으며 대학교 부설연구소는 국학
연구원, 동서문제연구원, 미래융합기술연구원, 북한연구원, 빈곤문제
국제개발연구원 등이 있다. 대학부설 연구기관으로는 각막이상증연구소,
경영연구소, 구강종양연구소, 뇌연구소 등이 있다. 부속기관에는
대학교회, 생활관, 천문대, 리더십센터,
김대중도서관, 건강센터, 대학언론사 등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독립문공원(獨立門公園)=옛 서대문형무소
일제강점기에 의병투쟁, 3·1독립만세운동, 항일투쟁 등으로 투옥
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한 선열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이곳의 옥사는 1908년 일제가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하여 지은
근대식 감옥으로, 경성감옥이라는 명칭으로 문을 열었는데 항일
투사들이 늘어나자 일제가 마포구 공덕동에 새로 감옥을 지어
1912년에 서대문감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후 1923년에는
서대문형무소로, 1946년에는 경성형무소로, 1950년에는 서울
형무소로 바뀌었고 1961년에는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에 서울구치소로 바뀌는
등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었다.
건립 당시에는 감방 480평,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으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국에 있는 8개 감옥의 총수용
인원이 300명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4·19혁명
, 5·16군사정변 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어 있던 이곳은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구치소 위치로는
적당하지 않아 1987년 11월 15일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이때 서울시가 법무부로부터 이곳을 매입하여 1988년 조성공사
를 시작하였고, 1992년 8월 15일 광복절 제47주년을
맞이하여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공원 규모는 10만 9193.8㎡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역사전시관
, 제9~13 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추모비, 사형장, 지하옥사를 포함
하고 있고 그외 시설은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문
, 독립관 등이다. 1908년에 지어진 옥사는 일제가 국내외에서 활동
하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가두었던 곳이다. 서울구치소가 의왕
으로 이전될 당시 옥사는 모두 15개 동이었으나 모두 없애고 보존
가치가 있는 제9~13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보안과청사, 사형장,
담장, 망루는 보존하고 있다.
그 중 순국선열들이 옥고를 치른 제10~12옥사와 사형장은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으며 9사, 13사와 구여사(舊女舍) 및 지하감옥
은 매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구여사는 1920년 유관순이 고문
끝에 숨진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 한다. 순국선열추념탑은
이봉창·윤봉길·유관순·안중근 등 애국지사들의 높은 뜻을 추모
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고 3·1독립선언기념탑은
탑골공원에 있었던 것인데 1992년 복원했다.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사적 32)은, 갑오
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는 의미에서 만든 기념물
이다. 서재필(徐載弼)이 제안하고 국왕의 동의를 얻어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받아 완공하였는데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남동쪽 70m 지점인 도로 가운데 있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영은문(迎恩門)은 1407년(태종 7)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대문 밖에 세운 사대주의 상징물인데 1896년(고종 32) 김홍집
내각 때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영은문주초(迎恩門柱礎) 2기(
사적 제33호)가 남아 있다. 독립관은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들
에게 영접연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사용되었던 곳인데,
후에 독립협회가 사무실 겸 집회실로 사용하였다 하여 일제가
강제 철거하였다. 1997년에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
선열들의 위패 봉안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서대문 형무소 건물들
일요산행은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시작된
안산등정을 하기위해 120여명이 독립공원에
집결하여 천연동 등산로를 통하여 봉수대에 오른 후 내려가다
모악정 앞에서 홍제동 방향으로 우회하여 홍제천 주변 식당에서
중식을 마치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이었는데 지금은 사적지가
된 집결지에 대한 의미가 커서 모두가 경건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는(사적324호) 1908년 10월 21일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했고 1945년 해방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1987년까지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경성형무소.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 등의 이름으로 정치적 격변기에
민주화 운동관련 인사들이 수감된 고난과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암울했던 현장입니다.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서울구치소가
이전되면서 1998년 과거의 아픈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착공
다음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후 80년 동안
약 35만명을 수감,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하였습니다.
↓그 옛날 신선사상을 가미한 방지원도(方池圓島)로 꾸민 우리나라 정통양식의 정원
↓연대 교정의 늦게 핀 능소화가 시들어가고 있다.
↓ 연대 교정의 수피가 하얀 플라타나스
연↓연대교정으로 가는 길목에 울창한 토종 소나무 숲
↓모악정
↓봉수대로 가는 길
↓ 봉수대
↓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서울시내
↓능안정으로 가는 길목
가을의 여인
노래/채은옥
낙엽이 지기전에 구월은 가고
시월이 가기전에 그리운 사람
밤하늘 가득히 수놓은 별은
낙엽되어 조용히 비춰만 주네
날으는 기러기도 짝을 이루며
구만리 멀다않고 날아 가는데
낙엽이 지기전에 구월은 가고
시월이 가기전에 그리운 사람
2013-09-0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