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9. 3. 29. 12:26
■ 은열왕(恩烈王) /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李謁平)
신라 건국기의 씨족장으로 BC(기원전) 11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자(字)는 천서(天瑞), 호(號)는 표암(瓢巖), 혁거세 거서간 때에 개국좌명공신에 녹훈되고 각간(角干), 아찬(阿粲)을 역임하였으며 군무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AD(기원후) 83년에 20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사후 BC 536년에 신라 23대 법흥왕(法興王)으로부터 문선공(文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고, BC 656년에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武烈王 6)으로부터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후손들에 의거 '월성(月城 : 신라조의 서울)이라는 지명을 붙여 '월성이씨(月城李氏)'라고 하다가 '월성'이 '경주'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경주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경주이씨는 시조 은열왕(휘 : 이알평)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봉후(封侯) 육촌장(六村長)의 수장(首長)이니 좌장(座長)이니 하고 혁거세(赫居世) 옹립(擁立)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위 태사태부(爲太史太傅) 성국대부(成國大輔) 총재(總宰) 위 섭진도위사(爲攝津都尉使) 섭접왕사(攝政王事) 연위태사공(延爲太史公) 등으로 불리운다.
□ 배(配)
성열왕비(聖烈王妃) 태화공주(泰華公主)로 성은 기씨(泰華公主 箕氏)로 마한(馬韓) 태조(太祖)의 딸이다. 태화공주 기씨(太華公主 箕氏, ?~?)는 삼한시대와 신라 건국초기의 인물로 알천양산촌장 알평의 정실부인으로 기자조선과 마한(馬韓) 준왕(準王)의 딸이다.
고조선 계 사람으로 아버지인 준왕은 위만의 쿠데타에 패하여 남으로 내려와 마한의 왕이 되었다. 사후 남편 이알평이 656년(태종무열왕 6년) 왕으로 추봉되면서 왕비에 추봉되어 성렬왕후(聖烈王后)에 추증되었다. 경주 지역의 전설에 의하면 그는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 부인의 친정어머니였다고 한다.
◇운제부인(雲帝夫人)
신라 남해차차웅의 비. 아루부인(阿婁夫人)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영일현의 서쪽에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에 여기에 빌면 감응이 있다고 하였다.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부인 알영(閼英)과 마찬가지로 운제부인 역시 신모(神母), 즉 농업신(農業神)으로 후세까지 신앙되었다.
◇시조 은열왕 이알평 약사(始祖恩烈王李謁平略史)
字 天瑞 號 瓢巖「天降說에 따르면 박 바위는 표주박 또는 세상을 광명(曠明)하게 한다는 뜻」이다. 紀元前一一七年 辰韓땅 瓢巖峯下에서 嶽降하시니 身長은 九尺八寸(296.94㎝) 이시며 허리띠가 10치이(30㎝=1뼘과 같음) 손은 무릎을 지나고 龍虎視로 위엄이 大將軍의 狀이며 한번 호령하면 山川草木이 떨 정도로 壯大하셨다.
辰韓의 六部村中의 一인 閼川楊山村長이 되시어 紀元前六九年 前漢之節元年壬子 三月一日에 여러村長과 더부러 王을 모시어 建國하고 秩序를 바로 잡고자 德望 높은 사람을 찾아서 임금으로 모시자는 會議를 하던 중 突然南方에서 電光이 번쩍이는 지라 突山村長 蘇代都利(崔氏始祖)를 시켜 가본즉 白馬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형용이라 가까이 가니 白馬는 크게 울며 사라지고 蘿井가에 박통 같은 알이 있어 瓢巖께서 쪼개신즉 玉童子가 誕生함으로 世上을 밝혀줄 사람이라 하여 赫居世라 命名하고 瓢巖께서 보살펴 養育하여 紀元前 五七年(五鳳元年) 甲子에 十三歲로 王이 되시니 이分이 新羅初代王 朴赫居世이시다
始祖瓢巖公께서는 眞骨로 建國功臣의 元勳中에서도 議長役으로 一等功臣에 阿飡(新羅官制十七等級中六等級)○建國八八年後(西紀三二年壬辰三世儒理王九年)에 氏族集團인 六部村을 行政區上六部로 改編하면서 賜姓하였으니 瓢巖公은 及梁部의 長에 李氏로 賜姓되고 大阿飡에 和白會議長으로 新羅開國에 크게 貢獻하신 功績을 枚擧하기 어려운 分이시나 享壽二○○歲로 仙化하시니 五三六年丙辰建元元年(二三代法興王二三年)에 文宣公으로 諡號가 내렸다
壬午에 景德王께서는 齋閣을 창건(刱建)하셨고 三八代 元聖王께서는 大光寶殿이라는 親筆賜額하시고 國家에서 保傳하였으나 견훤(甄萱)의 亂에 소실(燒失)되었다. 後孫들이 始祖의 嶽降遺蹟을 保傳하기 爲하여 一七八四年甲辰(正祖八年)에 永川郡守 集星公이 瓢巖에 「月城李氏始祖謁平公降處」라 새겼으며 一八○六年 丙寅(純祖 六年) 九月에 遺墟碑[新羅佐命大臣及梁部大人李公諱謁平遺墟碑]와 碑閣을 세웠으니 碑銘撰은 左議政敬一公이요 글씨는 刑曹判書集斗公이다
一九五二年壬辰(大韓民國) 後孫들이 表誠協贊으로 瓢巖殿을 再建했으며 新羅建國功勳을 崇奉하는 뜻에서 一九七一年辛亥에 나라에서 嶽降廟宇를 창건(刱建) 하였으며 또 一九七九年十一月十日에 [慶州李氏始祖諱謁平敬慕碑]란 題字로 中央花樹會가 主管하여 높이 二十一尺 幅四尺 두께二尺六寸의 巨大한 碑를 瓢巖齋 옆에 세웠으며 一九八四年甲子에는 全宗親들의 表誠과 國費補助等으로 近世에 드문 遺蹟地聖化事業을 完成하였으니 이것은 오로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뜻에서 血族間의 單合을 表顯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뿌리를 肥培管理하면 枝葉이 茂盛한다는 原則에 따라 自身과 後孫의 榮光을 祈願하는 行動이니 千秋萬代로 이 精神이 繼承하여야 할것이다.
配는 箕氏이니 馬韓太祖準(箕子四二代孫)의 따님이요 저 有名한 太華公主이시다.
祭享定一三月中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