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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扶餘郡]
충청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논산시, 서쪽은 서천군·보령시, 남쪽은 금강을 경계로 전라북도 익산시,
북쪽은 공주시·청양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44′∼ 127°03′, 북위
36°04′∼ 36°23′에 위치한다. 면적은 624.57㎢이고, 인구는 7만 1143명
(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5개 면, 433개 행정리(191
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다.
서북쪽은 차령산맥의 여맥이 지나 산지를 이루며 남동쪽은 차차 높이가
낮아져 금강 유역에서는 평야가 발달되었다. 북서쪽에 성대산(星臺山, 631m)·
아미산(峨嵋山, 577m)·월명산(月明山, 544m) 등의 산이 솟아 있고, 중남부
에 성흥산(聖興山, 268m)과 서부에 만수산·노고산·석천산 등이 연이어 있다.
금강이 군의 동부에서 곡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금강 유역에는 넓은 범람원이
발달되어 있다. 특히 금강의 서쪽에 있는 구룡평야는 땅이 기름지고 관개시설도
잘 되어 있어 군내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밖에 금천(金川)·구룡천
(九龍川)·은산천(恩山川)·석성천(石城川) 일대에도 비옥한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논의 토양은 남부금강저지계(南部錦江低地系)에 속하는 부여통(扶餘統)
이고, 밭의 토양은 충남하성토지계(忠南河成土地系)에 속하는 금강갈색토통
(錦江褐色土統)으로 사양토와 사토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세미사(細微砂)
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부식(腐植)과 질소가 약간 부족하며 산도(酸度)가 약한
편이다. 암석은 주로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서해안이 인접한 관계로 해풍의 영향을 받아 대륙성기후의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12.9℃, 1월 평균기온 -0.2℃, 8월 평균기온 25.5,
연 강수량은 1,420㎜이다. 평균초빙일은 11월 11일경, 평균 해빙일은 3월
28일경으로 서울에 비해 약 2주일의 차이를 보일 만큼 따뜻한 곳이다.
1975년에 발굴, 조사된 초촌면 송국리 선사취락지는 농경생활을 하던 청동기
문화인의 유적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이곳에서는 주거지를 비롯해 민무늬토기
·간석기·돌널무덤 등이 발굴되었으며, 탄화미도 발견되어 벼농사의 기원을 무문
토기문화와 확실하게 연결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이곳과 연관성이 있는
초촌면 산직리와 규암면·은산면·충화면·석성면 등지에 고인돌을 비롯해 청동기
시대의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초산국(楚山國)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부여군은 백제시대의 소부리(所夫里)·
대산홀(大山忽: 지금의 鴻山)·가림홀(加林忽: 지금의 林川)·진악산(珍惡山:
지금의 石城)에 해당된다. 특히, 부여읍 일대는 소부리 혹은 사비(泗沘)라고
했으며, ‘부리’라는 말은 ‘밝다’, ‘붉다’ 등에서 나왔다고 한다.
538년(성왕 16)에 백제는 웅진(熊津)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
(南扶餘)로 바꾸었다. 그 뒤 6대에 걸쳐 120여 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서 전성기
를 누렸다. 번성기에는 가구수가 13만여 호에 달했으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의 문무왕이 총관을 두었고 686년(신문왕 6)에는
사비주를 군으로 삼았으며, 경덕왕 때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면서 부여를 그 속군
으로 하였다. 이때 석산현(石山縣: 지금의 석성)·열성현(悅城縣: 지금의 청양군
정산면) 등이 부여군의 속현이 되었다. 신라 말에는 후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려
태조가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고 후삼국을 통일한 뒤 곧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 뒤 성종 때 하남도(河南道)에 예속되었고, 예종 이후에는 청주목의 속군인
공주에 속하여 부여군이라 하였다. 현종 때는 일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며,
1028년(현종 19)에는 정림사(定林寺)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고려 말엽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는데, 1376년(우왕 2)에 최영(崔瑩)이 홍산면 일대에서
왜구를 크게 토벌하였다.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채택해오다가
태종 때 팔도제(八道制)를 정비하면서 공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부여군은
부여현·홍산현· 임천군· 석성현으로 나뉘어 있었고, 4개 군현에 각각 향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6개의 사액서원을 비롯해 많은 서원·사우가 세워졌다.
1895년(고종 32) 팔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구획하면서 공주부 관하
의 부여군으로 승격하였다. 1896년 13도제로 변경했을 때 충청남도의 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통합령의 실시로 홍산·임천 전 지역과 공주의 일부 지역
을 편입해 16개 면을 관할하였다. 1960년 1월 1일부여면이 읍으로 승격했으며,
1973년 7월 1일석성면 현북리가 부여읍에, 장암면 사산리가 세도면에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을 뿐 큰 변화는 없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여지(扶餘誌)』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한국지리』지방편(권혁재, 법문사, 1996)
『우리고장 충남』환경과 역사(충청남도교육위원회, 1986)
『한국지지』(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6)
『충청남도지』(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979)
『부여군지』(부여군지편찬위원회, 1964)
부여군(http://www.buyeo.go.kr)
부여군 [扶餘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 많은 백마강
2019-04-27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