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15일 02시 00에 공대 사거리에서 출발한 일행은 밤세워 달린끝에 인천공항에 06:00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집결 후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10:20분발 하노이 행 비행기에 올랐다. 붉은색 아오자이 차림의 여 승무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내식을 먹고 한 숨을 자고나니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001:00에 도착하였다. 현지 시간으로는 한국과 2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03:00분이다.
비행기에서 현지 기온이 평균 28도라고 하였는데 공항 에 내리니 스콜이라도 지나갔는지 빗물이 고여 있었고 기후는 한국의 비닐 하우스나 한증막에 들어선 것처럼 매우 무덥다.
간단한 입국절차를 마치고 공항로비에 기다리다 휴게음식점을 찾아 커피를 한잔시켜놓고 있었다. 흡연자들이 모여들어 오소리굴을 방불케하는듯 하얀 연기를 내뿜어 댔다.현지 가이드의 말로는 베트남은 흡연자의 왕국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 걸쳐 흡연자가 찬 밥 신세가 되어가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잠시 후 버스에 승차하였다. 버스는 우리나라 버스인데 에어컨이 좋아서인지 매우 시원했다. 베트남에 45인승 버스는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들여온 차들이다. 시내에서 가끔 한국 백화점 셔틀버스를 볼 수 있는데 한국말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운행한다. 이유는 베트남에서는 차량만 소유 하면 누구나 시외버스 사업을 할 수 있는데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말이 쓰여진 버스를 골라 탄다고 한다. 물론 가격도 6-70년대 한국처럼 차장이 한 명이 있어 손님을 유치하는데 한국차가 더 비싸다. 그 외에도 승용차도 유달리 한국차가 많은데 GM대우 합작 공장이 현지에 있어서인지 대우차가 유달리 많았다. 우리나라의 국민차에 해당하는 마티즈가 미화로 3만불이다. 그런데 벤스가 3만2천불 한다. 하지만 마티즈를 더욱 선호하는데 이것은 가격 탓만이 아니라는게 현지인의 설명이다.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 150여 km 이지만 버스로는 3시간에서 3시간 30분이 걸린다. 이유는 국도의 제한 속도는 시속 40 km이고 고속도로가 시속 60km이다. 과속으로 경찰에 걸리면 그들의 한 달 봉급에 해당하는 200불을 과태로로 내야 한다. 그러나 경찰이 단속하는 기준도 매우 애매해서 스피드 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고 눈짐작으로 한다. 그러니 경찰만 보였다고 하면 아예 거북이 걸음을 걸을 수 밖에...한국에서 빨리빨리에 길들여진 우리로는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고속도로에 1차선은 차와 오토바이 통행로이고, 2차선은 우마차, 자전거 전용도로이다. 자전거 오토바이는 물론 우마차가 함께 통용되기에 오토바이가 버스를 추월해 가는 것은 예사로 볼 수 있다.
차안에서 현지 과일들을 맛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빠오라는 과일은 한국의 으름과 같은데 매우 맛있었다. 그 외 망고스틱, 망고, 바나나를 먹었다.
베트남은 북부에는 홍강이 흐르는데 중국 운남성에서 발원하여 중국 사토(沙土)가 많이 말려와 강물 색깔이 매우 붉다. 서남부에는 메콩강이 흐르고 있다. 로라델타는 경기도 2배에 달하는 면적인데 범람원의 델타는 비옥해서 쌀 수출 세계 3위 국가이다. 그럼에도 GNP가 450불로 급속성장을 지양하는 국가 시책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상업지역도 주택 규모가 매우 일정한데 국가에서 임대하기 때문에 일정하게 임대 분양하기 때문이다. 모형이 마치 직사각 성냥통을 고추세워 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호치민은 공산주의자 티우는 민주주의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호치민은 민족주의자라는게 현지인들의 주장이다. 호치민은 프랑스 식민지를 몰아내기 위해 미국에 원조를 신청했는데 초기에는 미국이 도와주다가 미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마찰로 미국이 손을 떼자 그는 그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단지 공산권과 손잡았다는 이유로만 그를 사회주의자로 몰았으니... 호치민은 통일 후 결혼을 종용하는 주위의 권고에 “나는 우리 조국과 이미 결혼한 몸이니 가정을 가지면 조국에 게을러지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반면 티우는 종전 후 영국으로 도망가며 수톤의 금괴를 몰래 가지고 가서 호의호식하다 죽었다고 한다. 호치민의 곁에는 원지압 장군을 빼놓을 수 없는데 역사교사였던 그는 개릴라전의 대가 였다고 한다. 사이공을 함락시킨 후 그는 “나의 할 일은 이제 끝났다.”고 하며 농촌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교사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하롱베이로 갔다. 하롱베이는 4000여개 섬으로 이루어졌다. 하롱은 한자어로 하룡(下龍) 즉 용이 하강한다는 뜻이고, 베이는 한자어로 만(灣)의 뜻이 합성어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곳도 역시 한자 문화권이며 동시에 용문화권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내려오다 여의주를 으깨어 뱉었다는 전설이 숨어있는 하롱베이에 소재한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저녘 식사 후 시내 구경을 나갔다. 치과대학에 유학와 있는 지양의 안내로 해수욕장이 위치한 야시장에서 맥주도 먹고, 구경도 하면서 해수욕장을 거닐고 있노라니 마음이 하롱하롱하며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네가 손짓하는 듯싶었다. 남국의 정취에 흠뻑 취한 우리 일행은 호텔로 돌아와 호텔 앞에 있는 실외 풀장에서 놀다가 내일 본격적인 하롱베이 여행을 생각에 마음을 설레며 피곤한 몸을 눕혔다.
이튿날 일찍 기상하여 시내산책을 하였다. 주민들이 아침운동을 나와 나름대로의 여유있는 삶과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열심히들 살아가는 아침의 정경이 좋아 보였다. 건물이나 시내의 여유공간이 있는곳엔 배드민턴 코트가 세워져 있었고 남녀노소 할것없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관심이있어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더니 한게임 해보라고 권유를 하였다.
나이가 쉰이넘게보인 부부가 한조를 이뤄 나는 다른 여인과 한조를 이뤄 즐거웁게 한게임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세면후 아침식사를 마치고 하루일정을 점검하였다.
아침부터 찌는듯 무더위가 시작됐다.
2척의 배에 일행은 나누어 타고 본격적인 하롱베이 답사에 들어갔다. 국내 모 여행사 CF에 등장하는 그 코스를 따라 가며 하롤하롱 기분을 만끽하며 점심 식사를 선상에서 했다. 수상 가옥에서 ‘다금바리’란 횟감을 보았는데 이미 한국 사람에게 고급 어종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어서 부르는 값이 만만치 않았다. 몇 몇 꾼(?)들은 입에 침을 흘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눈요기만 하고 지나갔다.
하롱베이에서 다시 하노이로 돌아가 하루밤을 먹고 다음날 하노이대학을 방문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하노이대학 공과대학에 해당된다. 베트남은 각 학부별로 켐퍼스가 떨어져 있다. 그래서 하노이 대학 분교란 생각이 들었다. 학장이 대학 운영의 자치권을 같는다 한다. 한국의 대학들도 이런 씨스템에 대하여 조금은 고민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호치민 시로 들어가기 위해 노이바이 공항에서 탄손노트 공항행 국내선을 탔다. 그런데 국제선보다 국내선이 비행기가 더 크고 고급스러웠다.
호치민시는 베트남 경제의 심장부로서 인구 750여만이 베트남 상업과 경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베트남 최대도시이다..북쪽으로는 티네운하 동쪽으로는 사이공강 남쪽으로는 벤너운하를 끼고 있어 물에 의해 3면이 보호되는 천해의 요새로서 서쪽으로 뻗은 낮은 평양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호치민시는 2천 30km²의 광활한 면적에 12개 중심구와 6개 외곽구로 구성되어 있는 통상적으로 3개 지역으로 구분하는데 행정구역상 1,3,10군이 베트남인들 사이에[사이공]으로 불리는 시내 중심지역이고 5군을 중심으로 6,8,11 군의 차이나타운을 [촐롱]지역이라 부른다.
사이공은 프랑스에 의해 1세기 가량 통치되는 동안 도시계획에 의해 프랑스식 건물이 들어섰고 그 후 오랜 시간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풍부한 물자와 외래문화 유입으로 발전을 거듭해 동양의 진주란 별명을 가졌다,,
호치민 시의 출 퇴근길의 그네들 말로 쎄마라 불리는 오토바이와 자전거(쎄탑)의 행렬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어디서 그 많은 오토바이가 숨어있다 나왔는가 싶게 온통 시내 도로를 자전거 오토바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시내에 신호등은 거의 없어도 교통사고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혼돈속의 질서’인 카오스 이론이 생각났다.
호치민 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서호(호따이)호수 가에 자리잡은 식당으로 향했다. 이 식당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동남아에서 두 번째 큰 호수라는 이 호수주위에는 밤에 청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와서 다른 사람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키스등 신체접촉을 서슴없이 한다고 한다. 식사 후 호치민 시에 음주 가무를 즐기던 한민족의 혼을 살리며 즐겼다. 조춘기 행정과장님의 현란한 춤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 되었고, 단장님의 노래에 이어 원우들의 한 바탕 축제의 무대를 펼쳤다.
다음날 아침 호치민의과대학을 방문하여 여러곳을 살펴보았는데 마침 시험기간이어서인지 도서관은 꽉차서 발디딜 틈이 없고, 복도 곳곳에 삼삼오오 짝지어서 야외용 돗자리를 깔고 책과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 나라나 시험이 무서운가 보다. 해부학 실습실에 들러 해부 시험보는 장면을 보고왔다. 평소 이런 기회가 없었던 일행은 포르말린에 담겨있는 시체와 부위별로 실습을 하고 있는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거나 아예 고개를 돌리던 원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구찌동굴을 가기위해 정부에서 운영하는 거대한 고무나무 숲을 지나야 했다. 고무나무 숲에서 잠시 내려 사진도 찍고, 둘러보는데 장방형으로 계획 조림이 잘 되어 있었다. 프랑스인에 의해 조성된 고무나무는 프랑스 식민지당시 현지 관리인을 두고 만일 나무 한그루만 죽으면 그 관리인을 나무에 메달아 죽이는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도 왕실에 쓸 소나무를 안면도에 식재해 놓고 나무 한그루라도 죽으면 관리인도 같이 죽이는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고무나무 숲을 지나쳐 ‘두리앙’이라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들어갔다.돼지 삼겹살을 맛있게 먹고 구찌 동굴로 향했다.
호치민에서 서북쪽으로 약 7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구찌라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땅굴이다. 구찌시에서도 20km를 더 들어가야 하며, 독립유공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국에서 광주에 버금가는 도시로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다. 베트남 전 당시 베트콩들이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 근거지를 두고 호치민을 공격하기 전 오랜 시간에 걸쳐 땅굴을 파서 만든 지하요새로, 원래는 프랑스인에 대항하기 위해 1948~1954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전쟁 때 48km의 땅굴이 먼저 만들어졌다. 그후 베트남 전쟁 때인 1967년까지 2백km를 더 파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하터널의 깊이는 30m, 지하 3층 규모이며 50km 거리에 1,3000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에 달하며, 관광객들은 구찌터널 내부에 직접 들어가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줄 수 있는 유물이 남아있다. 구찌터널 옆에는 권총 소총들을 쓸 수 있는 사격장이 있다. 실탄 1발에 1달러, 5달러를 주고 사격을 해보았다.
">호치민시에서 남쪽으로 125km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안 휴양도시이며 프랑스 통치 시절 총독 및 고관들의 휴양지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베트남전 당시에는 미국관 한국군 주월 사령부의 휴양소가 있었다..붕따우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티우전 대통령의 별장을 중심으로 호텔과 도로가 있는곳은 구 붕타우 큰 예수상이 있는 산을 지나 붕따우에서 가장 긴 해변이 있는 곳은 신 붕따우라고 부른다..
> 메콩강은 6개국에 걸쳐 4700KM흐르는 강으로 줄기가 9개로 나뉘어 흐르기도 하는데 구룡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베트남에는 52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주민등록에 한국의 본적처럼 본적대신 민족 표시를 한다. 3권이 분립되어 있는데 서기장이 권력 서열 1위고, 수상, 주석이 그 뒤를 따른다.
> 5-6년 전까지 마약과 매춘의 도시에서 이제는 정화 사업이 잘 되어서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메콩델타여행을 마치고 호치민 기념관을 구경하고 나오다 첫날 만나지 못하고 헤어진 형님 일행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낯선 타향에서 우연한 기회에 형제간의 상봉 그 기쁨은 상상이 가리라.
궁 붕타우에 위치한 백궁은 원래 프랑스 총독의 별장으로 있다가 티우가 개보수 사용하였다. 앞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있고 왼쪽은 붕타우 시내가 예전에 티우 대통령이 살았던 거실과 침실등이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이곳은 월남전 패망 당시 티우 대통령이 머물다 해외로 탈출한 장소이가도 하다
베트남 최초의 왕조가 이씨 왕조인데 이 왕조의 세 번째 왕자가 권력다툼에 밀려나 표류하다 우리나라 화산 지방에 정착하며 화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베트남을 떠나며>
누구나 여행은 설레겠지만 이 번 여행을 통해 베트남이 나의 마음속에 더욱 가까워 졌다. 베트남 민족중 중국 한족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 조선족과, 몽고족의 공통 특징이 40프로 정도가 나타난다고 하니 더욱 친근감이 들었다. 외모로 보아도 우리의 6-70년대의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을 출발하기 전 수상보트에서 저녘 식사를 마치고 놀이 한 판은 베트남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멋지고 즐거운 한때였다.
<베트남어 한마디>
- cam on.(깜언): 감사합니다.
- ~o dau?(어 더우): ~은 어디입니까?
- Khoang may phut?(코앙 머이 풋): 얼마나 걸립니까?
- Toi Muon goi dien ve Nhat.(또이 무온 고이디엔 베 녓): 일본으로 전화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Han Quoc.
- Cho doi sang tien Viet Nam.(쪼 도이 상 띠엔 비엣남): 베트남 동으로 환전해 주십시오.
- O day co phong trong khong?(어 더이 꼬 퐁 쫑 컴): 빈방 있습니까?
- Mot ngay bao nhieu?(못 응아이 바오 니에우): 하룻밤 자는데 얼마입니까?
- May gio xe chay?(머이 저 쎄 짜이): 몇 시에 출발합니까?
- Co can phai dang ky truoc khong?(꼬 껀 파이 당끼 쯔억 컴): 예약이 필요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