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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빽봉의 일생기★
※참고 : 유아시절은 잘 기억이 안남.
<초등학교>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가 유치원생활 2년을 마치고... 초등학교 입학을 하게되었습니다. 초등학교라고 해봐야 전교생 50명 정도 밖에 되지않는 작은 시골 학교 였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공차는것을 좋아해 점심시간이 되거나, 학교 수업을 마치면 운동장에 형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곤했습니다. 초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일중 하나는 제가 5학년 때의 일입니다. 같은 학년끼리 게임을 하고 싶어도 인원이 나오질 않아 형들과 같이 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을 뽑고 경기를 시작한지 20분쯤이 지났을 무렵에 저의 실수로 골을 먹게 되었는데 그때 형 한명이 오더니 구타를 하는 것입니다. 구타를 당하면서도 그때는 축구가 참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5학년을 마치고 6학년이 될때 전교생이 너무 적어 폐교가 되었습니다. 저는 옆동네인 영전초등학교로 갔고 몇몇 친구들은 합천초등학교로 가게되어 친구들과 동네는 같지만 학교에서는 볼 수 없어 조금 서운했지만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식날이 였습니다. 처음보는 아이 한명이 시비를 걸어 갑자기 마음속에서 욱~하는 것이 올라와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날아갔습니다. 둘이서 치고박고 하다가 보니 두명 다 얼굴에서 붉고 따뜻한 선혈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보고 있던 친구들이 겨우말려 화해를 하고 배정받은 교실로 갔습니다. 교실에는 여러 친구들이 앉아서 담임선생님을 기다리는 중이였는데 저랑 친구 한명은 서있었다는 이유로 담임선생님 한테 엉덩이 10대의 벌을 받았습니다. 중학교 3년동안 소풍을 대구에 있는 우방타워랜드에 가서 안 타본 놀이기구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중학교 3년 시절도 지나가고...
<고등학교> 진주기계공업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지내다 보니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되어 서로 친해지고 나서 처음으로 PC게임방을 가보았습니다. 그 후로는 밤에 기숙사 문이 닫힌뒤에 담을 타고 내려와 밖에 나가 PC게임방에 가기도 하고 술을 기숙사에 사와서 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일정이 기상하면 학교에 갔다가 수업이 마치면 PC게임방에 갔다가 밤에는 술을 먹는 걸로 하루일정이 끝나는 날이 많았습니다. 3학년 말에 취업을 나가게 되었는데 저는 부산에 있는 한국호진공업㈜에 친구 5명과 같이 들어갔습니다. 한국호진공업㈜는 샷시를 만드는 곳이였는데 일을 하다가 보니 4년제대학원서 넣는 기간을 놓쳐 전문대 몇곳에 원서를 넣게 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연암공업대학이 였고 대구에 있는 영진전문대, 사천에 있는 항공기능대 이렇게 세곳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영진전문대와 연암공업대학은 붙었고 항공기능대는 발표나기전에 집에서 연압공업대학에 입학하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군생활> 대학교 1학기 마치기 전에 휴학을 하고 의경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4주, 충주경찰학교에서 3주를 지내고 자대배치 받은 곳이 양산에 있는 기동 5중대였습니다. 동기 5명과 같이 자대에 가서 신병훈련을 2주동안 받고 나서야 각 소대로 2명씩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중대는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는데 오르막길만 해도 500m정도 되었습니다. 이경 때 고참들과 족구를 하다가 공이 철조망을 넘어가는 바람에 저는 길도 아닌 급경사로 되어진 곳으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고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일딴 뛰어 내려 가는데 끝지점에 턱이 하나 있어서 속도를 줄여 볼려고 하는데도 속도가 줄어 들지 않아 그대로 '쿵'하고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군기 때문인지 아픈 곳은 없어 공을 들고 뛰어 올라와 다시 족구를 하는데 계속 발에서 통증이 오더니 다음날에는 발이 퉁퉁 부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몇일간 근무도 못나가고 잔류하면서 고참들의 눈빛을 봐야만 했습니다.
의경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에서 편하게 생활한다고 많이 착각하는데 의경도 사람들이 집회를 하면 출동도 가고 교통근무, 방범근무, 이동 PB근무, 파출소 파견등 여러 종류의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의경들도 부안 핵폐기장 건설 반대등의 출동도 많이 갔습니다. 부안시민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쇠파이프등을 들고나와 의경들도 진압봉 사용이 허락되어 진압을 했습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흩어지기 시작하면서 들고있던 쇠파이프로 근처에 세워두었던 기대마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습니다.
고속도로 위에서 저희 중대 고참 한명이 하는말...
고참 : 저거 어느 중대 기대마고 박살나네.
그러자 후임이 기대마에 붙어있는 2005를 보더니 하는말...
후임 : 저거 우리중대 기대마입니다. (당황하며) 고참 : 야~죽여~
저희 중대원들은 모두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부안시민들은 없고 창문이 깨진 기대마와 기대마에 타고 있던 차방은 논으로 도망치다가 넘어져 부안시민들에게 쇠파이프로 안마를 받은 후였습니다. 그 날 새벽에 자대로 복귀하는데 창문이 깨져 있어 겨울 바람이 그대로 얼굴에 와서 닿아 몸을 벌벌 떨면서 자대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 중대는 6~8개월 마다 한 소대씩 돌아가면서 교통근무를 하기 때문에 이경 때 교통근무 잠시 나가보고 분대장 달고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깨에 견장을 달고 근무를 나가니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 양산에 있는 사촌누나를 불러 면회외출도 나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쳐 서울경찰병원에서 한달 정도 입원하기도 했었습니다.
<대학교> 2002년도에 입학해서 군대 다녀온다고 1학기 마치기 전에 휴학을 하고 1학년 1학기부터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올해에 다시 복학 했습니다. 한 학기, 한 학기 지날때마다 새로운 친구와 형들을 사귀며 지내왔습니다. 현재는 군대 간다고 동생들도 많이 휴학했지만 그 대신 복학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 여전히 A반은 활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3학기가 지나고 저는 총학생회의 인권복지부장을 맡아서 요즘은 예전처럼 공부할 시간은 조금 줄었으나 공부란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딴 총학생회의 일원인 만큼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참고로 중간에 빠진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적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운동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시장갔다 오신다며 하시고는 가출을 하셨습니다. 그 때는 나이도 어리고 해서 울기도 많이 울고 했는데 지금은 세월이 많이 지나 꿋꿋히 잘 살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군생활하고 있을 때 새어머니가 집에 들어와 집안일을 맡아서 하시며 아버지랑도 즐겁게 지내셔서 너무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화목한 가정이 계속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램 뿐입니다.
- 끝 -
이상 저의 일생기를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1학기때부터 이때까지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컴퓨터 응용 기계과 1학년 A반 20243107 주영호 |
첫댓글 아자! 아자! 1학년 A반 홧팅@^,.^@
므~~꼬 .. 빽뽕~~```ㅋㅋㅋㅋ
빽뽕~~인분?복지부장!! 화이팅.. 화장실 휴지 떨어 졌더라. 빨리 갖다 놔라. 버럭!!
글자좀 크게 적어라 눈알 아프다
고속도로 위에서 이야기 재미있어요 ㅋㅋㅋ
빽봉~~~~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대마"..? 뭔 뜻이지..? 내일 좀 설명해 주기 바란다. 교수가 나이들어서 눈까지 침침해 진 줄 알았더마는.. . "깡패"도 글 크게 쓰라 한 것 보니 글씨가 작기는 작은가 보다.. 초등학교 4학년때 엄마의 가출.. 엄청 큰 충격이었겠다.. 아주 글 잘 읽었다.
기대마(의경버스).. 알았다. B반 학생의 글에 있구만..
그 입 다물라 ㅋㅋ ㅡ.ㅡ;;;
군대서 저렇게 많은 임무를 빽뽕이 다했단말이야??역쉬~~인분 복지 부장이야~~한솬해~
빽봉 니일생을 짧은 글로 다 읽을수 있엇다 ㅋㅋㅋ
글을 참 순수하게 적었구나..잘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