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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Love사랑”
Scripture: Lk.10:25-37
Word: 25, “Καὶ ἰδού, νομικός τις ἀνέστη ἐκπειράζων(aneste ekpeirajwn: eternal life영생) αὐτὸν Καὶ λέγων, Διδάσκαλε τί ποιήσας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ληρονομήσω”
27, “ὁ δὲ ἀποκριθεὶς εἶπεν Ἀγαπήσεις κύριον τὸν θεόν σου ἐξ ὅλης τῆς καρδία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ψυχῆ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ἰσχύο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διανοίας σου καὶ τὸν πλησίον σου(ton plesion sou: the neighbor of you너의 이웃) ὡς σεαυτόν”
1. Introduction:
지난 2004년 인디아 선교사로 있을 때 인디아에서 설교한 내용이다. 또 이 내용은 2014년까지 몇번 설교한 내용이기도 하고, 인터넷에 몇번 올린 내용이다.
This is what I preached in India in 2004 when I was a missionary in India. Also, this content was preached several times until 2014, and it was also posted on the Internet several times.
인터넷에 올렸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이웃 사랑”에 대하여 잘못 번역된 번역과 해석에서 빗어진 잘못된 견해를 마치 진리인 것처럼 인식된 주장의 글들을 보면서, 왜, 그렇게 잘못된 주장을 믿음이라고 확신하는지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이다.
The reason why I posted it on the Internet is that many people see the wrong view of “love of neighbor” in the Bible, which was taken from mistranslated translations and interpretations as if it were the truth. It is from the pity of the weather, you are sure.
아무리 성경을 똑 바로 읽으라고 충고하며, 원어적으로 문법적으로, 문장의 구문법적으로 설명을 해줘도 그동안 배워왔던 잘못된 해석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이것은 네 생각, 네 주장으로 해석한 잘못된 사탄의 변개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No matter how much I advise you to read the Bible correctly and explain it in the original language, grammatically, and syntactically, we cannot abandon the wrong interpretations we have been learning so far, and instead say, “This is Satan’s wrong change, interpreted according to your thoughts and arguments...” you retort.
참으로 안타깝다.
What a pity.
지난 주, 신대원에서 “야웨 나라 건설을 위해 갖어야 할 우리의 비전”이라는 주제에 맞는 특강 요청이 있어서 “사랑”이란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Last week, Theological Seminary requested a special lecture on the theme of “Our Vision to Build the Kingdom of YHWH,” so we gave a special lecture titled “Love.”
전에 “이웃 사랑”이라는 제목의 설교 내용에 주제에 맞는 특강 내용을 더하여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 를 더 정확히 설명하려 한다.
What is “love” that the Bible talks about under the title of “love” by adding special lectures appropriate to the subject to the previous sermon titled “Love your neighbor”? I will try to explain more precisely.
이 글을 질문과 대답의 형식을 갖고 대화 형식의 글을 작성하였다.
This article was written in a conversational format with a question-and-answer format.
2. “야웨 나라”는 무엇인가? What is “the kingdom of YHWH”?
기독교에서는 신학자이든 신앙인이든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야웨 나라”이다. 야웨 나라가 무엇이냐? 고 질문하면 대답 못할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다.
In Christianity, whether a theologian or a believer, the most fundamentally important thing is “the kingdom of YHWH.” What is the kingdom of YHWH? There is no Christian who can't answer the question.
그런데, 난 이글의 독자들에게 “야웨 나라는 어떤 나라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먼저 질문하고 싶다.
By the way, I would like to ask the readers of this article first, "What kind of kingdom is YHWH's kingdom?"
“야웨 나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먼저 정리해보라.
First, organize your thoughts on “the kingdom of YHWH.”
논자는 “야웨 나라”에 대하여 간단히 대답하면, “야웨가 다스리는 나라 즉 야웨가 통치하시는 나라”라고 정의하다. (여기에 반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같다.)
To give a brief answer to “the kingdom of YHWH,” the writer defines it as “the kingdom ruled by YHWH, that is, the kingdom ruled by YHWH.” (I don't think anyone would argue here.)
그럼, 야웨 나라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Then, how is the kingdom of YWH structured?
간단히 설명하면, 야웨는 통치하시는 왕이 되시고, 그를 왕으로 섬기는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될 것이다.
Simply put, YHWH will be the reigning King, and we who serve Him as King will be His people.
그럼, 또 다시 질문한다. “야웨가 통치하는 곳은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질문하면, 아마 당신은 두가지의 대답을 할 것이다.
Then, ask again. “Where is the place where YHWH reigns?” If you ask this question, you will probably give two answers.
하나는 “하늘 나라”, 왜냐하면 야웨께서 지금 하늘 나라에 계시니까!
One is “Heaven” because YHWH is now in Heaven!
둘째는 “내 마음에”. 왜냐하면 천국은 여기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성령이 내 마음에 있으면 천국이니까!
The second is “in my heart”. Because heaven is here, not there, but when the Holy Spirit is in my heart, it is heaven!
그렇다, 대답은 막둥이다.
Yes, the answer is the youngest.
그런데, 이런 대답에는 너무 많은 모순이 있다. 즉 한마디로 말하면 잘못된 신앙고백일 뿐이다.
However, there are too many contradictions in this answer. In other words, it is just a false confession of faith.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이렇게 대답한 사람은 야웨의 통치를 받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은 야웨의 통치권 밖에 있다는 말이 된다.
Because, fundamentally, those who answered like this do not live under the rule of YHWH. In a word, this world is outside the dominion of YHWH.
이 세상도 야웨의 통치권 안에 있다. 그러기에 이 세상도 야웨의 나라이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반박의 질문을 할 것이다. “이 세상이 야웨의 나라인데, 왜 세상 사람들은 죄를 짓고 살고 있느냐?”라고…
This world is also under YHWH's dominion. Therefore, this world is also YHWH's kingdom. Then you would ask a rebuttal question like this. “This world is YHWH’s kingdom, so why do people in the world commit sins?”
여기에 대한 대답은 차후에 설명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차후에 나오기 때문이다.
The answer to this will be explained later. Because the explanation of the reason for committing a sin comes later.
우리는 분명 야웨의 나라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야웨의 백성이니까! 그럼 또 다시 질문한다.
We definitely live in the kingdom of YHWH. Because we are YHWH's people! Then ask again.
“야웨의 나라에서는 그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이 이상한가!
“How are His people living in YHWH's kingdom? Or how should I live?” Strange question!
성경에는 아주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눅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The Bible explains it very directly. Luke 10:25 “A certain lawyer stood up and tested Yeshua, saying, “Teacher,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영생”이 무엇인가? 모르는 사람없다.
What is “eternal life”? No one knows.
말 그대로 “영원한 삶”이다. 성경에는 “영생(영원한 삶)과 영사(영원한 죽음)”을 이야기한다. 영생은 야웨 나라에서의 삶을 말하고, 영사는 지옥에서의 영원한 심판을 말한다. 사실 “영원한 죽음”이라는 말도 성경에는 없다. 차후에 “영생과 죽음”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Literally, "eternal life". The Bible talks about “eternal life (eternal life) and death (eternal death)”. Eternal life refers to life in the kingdom of YHWH, and death refers to eternal judgment in hell. In fact, there is no such thing as “eternal death” in the Bible. I will explain “eternal life and death” later.
눅10:26-27에 예수는 무엇이라 대답하고 있는가? 26절 예수께서 말하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는냐?”
What is Jesus answering in Luke 10:26-27? 26 Jesus said, “What is written in the law, and how do you read it?”
왜, 예수가 율법을 이야기하는가?
Why is Jesus talking about the law?
야웨의 나라에서 살려면, 그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나라의 법을 지키면 영생이 있고, 그 나라의 법을 안지키면 죽음이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To live in YHWH's kingdom, he must obey the laws of that land. If you obey the laws of that kingdom, there is eternal life, and if you don't keep the laws of that kingdom, there is death. This is a natural story.
한국 사람이 한국에 살려면, 한국법 지켜야되고, 지키지 않으면 심판 받는다. 이것 틀렸나! 아니다 맞다.
If Koreans want to live in Korea, they must abide by Korean laws, and if they do not, they will be judged. Is this wrong? No, that's right.
율법사의 대답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너의 신 야웨를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습니다.
This is the lawyer's answer. “Love YHWH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이것은 율법사가 알고 있는 야웨 나라의 법이다.
This is the law of the kingdom of YHWH that the lawyers know.
당신은 야웨 나라의 어떤 법을 알고 있는가? 예수를 음은 천국 간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렇게 알고 있지는 않는지!
What laws of the kingdom of YHWH do you know? Jesus goes to Heaven. You are saved only by faith. Don't you know this!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야웨 나라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아직 구원 못 받은 사람이다.
Those who say this frankly do not live in the kingdom of YHWH. He is still unsaved.
구원받은 사람은 또 야웨 나라에 사는 사람은 율법사처럼 대답해야 한다.
Those who are saved and those who live in the kingdom of YHWH must answer like lawyers.
28절을 잘 살펴보라! 예수가 말했다. “네 대답이 옳도다(네 대답이 정답이다.) 이(사랑)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영생).”
Take a close look at verse 28! Jesus said. “Your answer is correct. Do this (love). Then you will live (eternal life).”
영생하는 것 즉 야웨 나라에서 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To live forever, that is, to live in the kingdom of YHWH is to love. In other words, not living by faith, but living by love.
3. 사랑이 무엇인가? What is love?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Verse 29: “The man, in an attempt to justify himself, asked Jesus, “Who then is my neighbor?”
어느 설교가는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에 강조 점을 주어 설교한다. 솔직이 이건 틀린 해석이며 잘못된 설교이다. 옳게 보이던, 그릇되게 보이던 상관없이 율법사의 질문은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라는 질문이다. 율법사가 옳게 보이려고에 초점을 두지 말고, 율법사가 사랑해야 할 율법사의 이웃이 누구이냐? 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Some preacher preaches with emphasis on “the lawyer tries to make himself right.” Frankly, this is a false interpretation and a false sermon. Regardless of whether it seems right or wrong, the lawyer’s question is, “Who is the neighbor he should love?” The focus should not be on the lawyer trying to look right, but on who the lawyer’s neighbor should be loved.
30-35절까지는 강도만나자에 대한 비유이다. 이것은 너무 많이 들은 이야기라서 생략한다. Verses 30-35 is a parable about the man who met the robber. This is a story I’ve heard too many times, so I skipped it.
36절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이다.
Verse 36 is Jesus’ question, “Which of these three would be a neighbor to the man who met the robber?”
37절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율법사의 대답입니다.
Verse 37 “He is the one who showed mercy.” This is the lawyer’s answer.
38절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의 대답 즉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Verse 38 “Do you likewise.” This is the answer of Jesus, that is the teaching of Jesus.
여기에서 당신에게 질문합니다. 예수가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말씀은 비유에서 누구와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까? I ask you a question here. When Jesus said, “Do you likewise,” with whom did he mean in the parable?
이렇게 질문하면 당신은 분명히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If I ask this question, you will surely answer, “Be like the good Samaritan.”
이것은 비유의 본질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대답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배웠고, 이렇게 알고 있었다.
This is an answer very far from the essence of the parable. This is how you learned, and this is what I knew.
이건 아주 크게 잘못된 해석이다.
This is a very big misinterpretation.
38절을 좀더 쉽게 풀어서 당신에게 질문한다. 예수가 “너도 이와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비유에서 누구와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까? 이제 좀 정확히 알았습니까?
I ask you for a simpler version of verse 38. When Jesus said, ‘Love you in the same way,” in the parable, who is it to love like? Are you a little clear now?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도와주라는 말씀이다.
Like the Samaritan, it says to help those in need.
강도만난 자처럼 자기를 도와준 사마리아인(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It says to love the Samaritan (neighbor) Who helped you like a man who met the robber.
둘 중에 어느 것인가?
Which of the two?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와주었나? 아니면 사랑하지 않고 그냥 불쌍해서 도와주었나? 정답은 그냥 불쌍해서 도와주었다.
Did the Samaritan help the man who met the robber because he loved him? Or did he help because he didn’t love and was just pitiful? The answer was just pity and help.
구제는 사랑으로 하면 좋겠지만, 사랑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제는 그냥 선한 일이다. 구제는 우리에게 항상 있어져야할 기본이다. 그러나 구제는 사랑이 아니다.
Salvation would be nice if it was done with love, but it can be done even without love. Salvation is just a good thing. Salvation is the basis that we should always have. But salvation is not love.
사랑은 무엇인가?
What is love?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어떤 노래의 대답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If you ask me what love is…?” One song answered, “Love is the seed of tears….”
사랑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대답은: ….
What is love? Your answer is….
어떤 철학자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사랑은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 3가지가 있다고… 아마, 당신도 이 대답에 동조할 것입니다. (내 추측)
Some philosophers replied: There are three types of love: Agape, Phileo, and Eros. Perhaps you will agree with this answer. (My guess)
하지만 성경에서는 “아가페(사랑)”하나만 이야기합니다.
However, the Bible only talks about “love”.
당신은 “연애” 해 봤습니까?
Have you ever been in a “loving”?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손잡고 싶겠죠! 손잡았으면 입 맞추고 싶고, 입 맞췄으면 끌어안고 싶고, 끌어안았으면,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자고 싶고, 같이 잤으면 사랑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열매를 위해서 뼈빠지도록 일해도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건 에로스, 저건 필레오, 요건 아가페…. 이렇게 구분합니까?
If you have someone you love, you want to hold hands with him or her. If you held hands, you would want to kiss him or her, if you kissed, you would want to hug him or her, if you hugged, you would want to sleep with him or her, if you sleep together, you will bear the fruit of love, and you will be happy and happy even if you work hard for the fruit of love. This is eros, that is phileo, and that is agape. Do you differentiate like this here?
아니다. 모두가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면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한다.
No. Everyone is love. You can’t do this without love.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어본 사람 있습니까?
Has anyone ever been far away from a loved one?
사랑하면, 보고 싶고, 그리워지고, 마음이 쿵쿵거리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하면, 걱정도 하고, 걱정이 심해지면, 머리가 돌것 같고… 그렇지 않나요?
If you love me, you miss me, your heart beats, if you can’t meet me when you want to meet me, you worry about me, and when you worry about me, you seem like your head is spinning… isn’t it?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꼭 이런 대목에 오면, 드라마 같은 소리 하는 사람 있지요! “너를 사랑하니까 보내준다. 다른 남자하고 잘 살아라…ㅎㅎㅎ” 이런 것은 절대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Love is like this. When you come to this part, there are people who say something like a drama! “Let you go because I love you. Live will with another man…hahaha.” This kind of thing can never be called love.
강도 만나자는 자신을 구해준 사마리아인을 사랑할까요? 아니면 사랑하지 않을까요?
Would he love the Samaritan who saved him from falling in love with the robber? Or will he not love?
내가 인디아에 선교사로 있을 때, 아주 큰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When I was a missionary in India, there was a very big car accident.
저녁 9시경 라자스탄의 어느 사막을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다 큰 트럭과 박치기를 했는지 잘 모르지만 사고가 났습니다.
Around 9:00 in the evening, while riding a motorcycle in a desert in Rajasthan, I don’t know if I had a head-butt with a big truck, but there was an accident.
다음날 새벽4, 5시경 어떤 한 인디안의 도움으로 병원에 갔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경찰서에서 2일동안 있었습니다. 2일동안 경찰서에 있었던 이유는 내가 2일동안 기억상실증에 있었기 때문이다.
The next day, around 4 or 5 am, I went to the hospital with the help of an Indian, received treatment at the hospital, and stayed at the police station for two days. The reason I was at the police station for 2 days was because I had amnesia for 2 days.
기억이 돌아온 후 나는 나를 구해준 인디안을 찾아다녔다. 몇 일동안 사고 났던 지역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After my memory returned, I went looking for the Indian who rescued me. I searched around the area where the accident occurred for several days, but I couldn’t find it.
나는 그 사람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죽음의 상황에서 구해준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지금도 나는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언제든 만나면, 그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
I don’t know his name or face. But I want to meet the person who saved me from a death situation. Even now I miss him. Whenever I see him, I want to do anything for him.
내가 해 줄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내가 그의 종이 되어 평생을 그를 봉사하면 살고 싶다.
If I can’t do anything for him, I’d rather be his servant and serve him for the rest of my life.
바로 이것이 이웃 사랑이다.
That is love of neighbor.
고전13:4-8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Cor.13:4-8 "Love suffers long and is kind, does not envy, does not parade itself, is not puffed up. does not behave rudely, does not seek its own, is not provoked, and keeps no record of evil, does not rejoice in iniquity but rejoices with the truth. Bears all things, believes all things, hopes all things, endures all things, Love never fails. Whether there are prophecies, they will pass away, whether there are tongues, they will cease, whether there is knowledge, it will pass away.
당신은 말로만 사랑해 봤지… 진짜 사랑해 봤나?
You’ve only loved with words… Have you ever really loved?
이렇게 열심히 이웃 사랑을 이야기했는데도, 당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나!
Even though you talk so hard about loving your neighbor, you don’t know who your neighbor is!
그렇수 있다. 왜냐하면, 강도를 안 맞나봤으니까! 죽게 될 상황에 처해보지 못했으니까!
It can be. Because you have never been mugged! Because you have never been in a situation where you were about to die!
말로만 예수가 나를 죽음의 죄에서 구원하셨다고 하니까! 예수가 당신을 진짜로 죽음에서 건지셨다면 당신의 이웃은 예수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웃을 사랑 안하나?
Because only words say that Jesus saved me from the sin of death! If Jesus really delivered you from death, your neighbor would be Jesus. But why don’t you love your neighbor?
왜, 당신은 이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려고 하는가?
Why are you trying to be a good Samaritan in the name of loving your neighbor?
야웨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구제하며 사는 삶이 아니다. 진정으로 당신이 야웨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강도 만난 자처럼 당신을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Those who live in the kingdom of YHWH do not live a life of giving alms like a good Samaritan. If you truly live in the kingdom of YHWH, you must live to love the good Samaritan (neighbor) who saved you like a man who met the robber.
4. Conclusion:
우리는 이미 야웨 나라에 살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야웨 나라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야웨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은 많은 율법이 있겠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사랑하는 것이다.
We already live in the kingdom of YHWH. Because of this, we must abide by the laws of the kingdom of YHWH. There may be many laws to obey the laws of the kingdom of YHWH, but to put it simply, it is to love.
야웨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
To love YHWH, to love you neighbor…
너 스스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지말라. 너는 강도 만난 자가 되라. 그래서 너를 죽음에서 구해준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Don’t be a good Samaritan yourself. Become one who met the robber. So, love your neighbor who saved you from death.
지금까지 모두는 아니지만, 우리의 많은 선교와 목회사역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구제와 자비를 베풀어왔다. 그래서일까! 겉으로는 엄청 부흥하여 바벨탑 같은 교회들이 여기 저기 많이 세워졌다.
So far, not all, but many of our missions and ministries have become good Samaritans and have provided relief and mercy. Maybe that’s why! Outwardly, there was a great revival, and many churches like the Tower of Babel were built here and there.
결국 사랑없이 세워진 교회는 화려하고 웅장해 보이지만, 그 내실은 썰렁하고, 허무하고, 기쁨이 없고, 오직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차 있다.
In the end, the church built without love looks splendid and magnificent, but its inner room is lame, empty, joyless, and filled only with abhorred and hatred.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사랑으로 세워진 교회는 작고, 허름하지만, 그 속은 따뜻하고,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고, 희망이 있다.
The church built with the neighborly love of the man who met the robber is small and shabby, but inside there is warmth, joy, peace, and hope.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제로 야웨의 나라를 건설하지 말고,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사랑으로 야웨 나라에서 살기를 소망한다.
Do not build the kingdom of YHWH with the salvation of the good Samaritan but hope to live in the kingdom of YHWH with the unneighborly love of those who met rob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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