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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일본에 의해 강제 통합되어 오키나와로 이름을 바꾼 ‘류큐 왕국’의 역사를 다룬다.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군사기지로서 새로운 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갈등이 전개되는 오키나와 역사의 한 축을 형성했던 류큐 왕국의 존재를 알려준다.
오키나와의 땅에 일찍이 류큐 왕국이라는 독자적인 국가가 있었고, 이는 유사 이래 일본 사회가 하나의 국가로서 변천해 왔다는 단일국가론의 신화를 깨부수는 진실이다. 일본 사회 속에 존재한 또 하나의 국가, 류큐 왕국을 제시한다.
저자 : 다카라 구라요시 (高良倉吉) - 1947년 오키나와현 이제나 섬에서 태어남
1971년 아이치교육대학 졸업. 류큐사 전공
오키나와사료편찬소,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우라소에시립도서관장, 오키나와역사연구회 대표 간사 역임
1994년~현재 류큐대학 교수
저서로는 <류큐의 시대>, <류큐 왕국의 구조>, <류큐 왕국사의 과제>, <오키나와 역사론 서설>, <오키나와 역사에의 시점>, <오키나와 역사 이야기> 등이 있다.
역자 : 원정식 - 1982년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문학사)
198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사학과(문학석사)
1996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사학과(문학박사)
2001년~현재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주요논문 및 역서로는 '乾.嘉年間 北京의 石炭需給問題와 그 對策', <淸代 福建社會 硏究: 淸 前.中期 南社會의 變化와 宗族活動>, '淸中期福建的族正制', '明中期 福建의 新縣 設置.運營과 宗族社會'(2007), <중국소수민족입문>(공역, 2006) 등이 있다.
한국어판 서문
서장
신들린 듯한 방문자/ 역사가의 ‘현장 감각’/ 주점가를 다니다/ 젊은이들 앞에서/ 전체상의 필요성/ 전근대사로의 길
제1장 ‘왕국’의 발견
1. 오키나와 연구의 선도자
이하 후유(伊波普猷)의 묘/ 일본 언어학의 초창기
2. ‘가와카미 하지메 설화 사건’
가와카미 하지메의 오키나와 방문/ 충군애국사상(忠君愛國思想)/ ‘동지(同志)’ 이하 후유
3. 독자성의 원점이란
이하 후유의 고투/ 불문에 부쳐진 논점
제2장 고류큐(古琉球)의 시간
1. 변혁의 시대가 시작되다
오키나와 역사의 새벽/ 구스쿠 시대의 도래
2. 왕국에의 길
3개 세력권의 출현/ 통일왕조의 수립/ 류큐사를 규정하는 것/ 제1쇼씨(尙氏) 왕조(1406~1469)의 멸망
3. 쇼신(尙眞)왕의 시대-왕국의 확립
책봉의식/ 아지의 집거(集居)에 성공하다/ 지방통치의 강화/ 신녀(神女) 조직의 확립/ 왕성한 조영사업
4. 변동의 시대로
사쓰마군(薩摩軍)의 침공/ 근세 류큐로의 전환
제3장 아시아 속의 류큐
1. 열린 활동의 장
책봉체제 하의 류큐/ 아시아 국제사회에의 데뷔/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으로서
2. 해외무역의 조건
국영사업으로서의 해외무역/ 거대한 ‘조공선(朝貢船)’/ 기술선진국 출신자의 거주지=구메촌/ 공무역 속의 사무역/ 책봉사 내항에 따른 사무역/ 중국인 네트워크/ 조선 무역의 변용/ 끼어 든 일본 상인/ 일본과의 외교를 둘러싸고/ 포르투갈인과의 만남/ 빛나는 시대의 종언
3. 류큐사의 가능성을 찾아서
동남아시아를 두루 방문하다/ 취안저우(泉州)에서의 경험/ 류큐와의 교류의 흔적
제4장 사령서(辭令書) 왕국
1. 사령서의 재발견
왕부제도에의 착안/ 사료는 악기다/ 사료 조사를 시작하다
2. 무엇이 반영된 것인가
헤나치의 사령서를 읽는다/ 사령서의 원리란
3. 기술형식이 보여 주는 것
사령서의 3가지 타입/ 세습제를 배제/ 방대했을 발급 건수
제5장 ‘왕국’의 제도를 탐구하다
1. 다양한 관인들
엘리트층=왕족과 중앙관인/ 지방제도=마기리(間切)?시마제도/ 다양한 지방관인/ 신녀 조직은 어떻게 되어 있었는가/ 보증된 수입원
2. 히키란 무엇인가
히키가 등장하는 사령서/ 슈리성 경비대라고 기술한 문헌/ 사령서와의 간격/ 무역선과 일치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상의 무역선
3. 군사방위체제와 고리?히키 제도
비문이 보여 주는 군사조직/ ‘고리’란 무엇인가/ 고리?히키제도
종장
1. 고류큐가 제기하는 것
막번 체제 속의 이국(異國)/ 왜 ‘일본’에 속하는가/ 새로운 일본 역사상의 필요성
2. 자기를 회복하기 위하여
프로듀서로서의 역사가/ 슈리성의 복원에 몰두하다/ 반출된 왕조 문화유산/ 류큐사 연구에 부과된 것
참고문헌
후기
류큐.오키나와 역사 연표
옮긴이의 말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이 책은 1879년 일본에 의해 강제 통합되어 오키나와로 이름을 바꾼 ‘류큐 왕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군사기지로서 새로운 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갈등이 전개되고 있는 오키나와 역사의 한 축을 형성했던 류큐 왕국의 존재를 알려준다. 오키나와의 땅에 일찍이 류큐 왕국이라는 독자적인 국가가 있었고, 이는 유사 이래 일본 사회가 하나의 국가로서 변천해 왔다고 하는 단일국가론의 신화를 깨부수는 진실이다. 일본 사회 속에 존재한 또 하나의 국가, 류큐 왕국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심적인 연구과제이다.
1.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된 류큐 왕국
류큐 왕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 현대사로의 접근이 필요하다. 류큐사란 다름 아닌 1879년 메이지 정부의 일방적인 강행 조치에 의해 류큐 왕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일본 사회 속에 편입된 오키나와현의 역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가 근대사의 출발을 알린다면, 류큐 왕국은 오키나와의 전근대사에 해당하는 셈이다.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역사상 일본 본토인과는 다른 민족이며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독자적인 국가를 잃고 일본 사회로 편입되면서 오키나와는 역사적인 질곡을 겪게 된다. 일본 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풍속과 습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본토 일본인에게 차별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일본 사회에서 잘려 나가 미국의 군사적인 직접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인권조차 무시되기도 했다.
오키나와현에서 출생한 저자는 자기 민족의 어두운 역사를 통해 역사가로서의 정체성 찾기를 희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사학개론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역사란 무엇이고, 역사가란 어떤 존재인가. 왜 류큐 왕국을 연구해야 하는가. 류큐 왕국 연구를 위한 기본 사료는 무엇이며 어떻게 수집하고 분석하고 종합해야 하는가 등 역사학개론서에서 흔히 봄직한 주제가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일본 및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등장한 류큐 왕국
저자는 오키나와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류큐 왕국의 존재를 복원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이미 사라진 왕국에 대한 복원을 회복하려는 저자의 열정은 류큐 왕국이 일본 열도의 ‘원일본문화(原日本文化)’와는 서서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국가 체재를 형성해 왔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를 위해 선사 시대의 유적과 유물로부터 202점의 남겨진 사령서 사료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구체적 증거들을 꼼꼼히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류큐 왕국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되었을까?
일본 사회가 고대 율령제 국가 시대로 변동하고 있을 때,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조용한 섬 생활을 보내며 동중국해(東中國海)의 여러 지역과 해상무역을 통한 일정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는 명도전, 오수전, 개원통보 등 중국 전국 시대부터 당 시대에 걸쳐 주조된 화폐가 오키나와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도 확인된다. 이렇듯 고대로부터 일본 본토와는 다른 문화와 체재를 유지하며 살아 왔던 오키나와는 12세기를 전후하여 구스쿠 시대라는 혁신적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는 내부적으로는 아지(按司)라는 수장층의 작은 정치집단이 형성되고, 대외적으로는 일본 열도와 중국 대륙의 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오키나와 섬들에 선진적인 문명들이 전해지던 시기였다.
결국 구스쿠 아지들의 항쟁이 류큐 왕국을 건설하는 계기로 이어지는데, 처음에는 나키진 아지의 잔호쿠(山北), 우라소에 아지의 주잔(中山), 오자토 아지의 잔난(山南)으로 대표되는 삼산(三山) 시대를 거쳐 ‘왕’이 지배하는 통일권력의 형성을 향해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가속시킨 힘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의 명 나라였다. 1372년에 명의 사절단이 류큐 왕국에 파견되어 입공을 촉구하였는데, 이는 중국 황제 권력에 대한 복속을 표하는 외교적 행위였다. '명실록'에 의하면, 입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대 류큐는 중국의 동남, 바다 멀리 있기 때문에 아직껏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특별히 사자를 파견하여 설명토록 하니 잘 알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류큐’란 글자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잔호쿠와 잔난이 주잔에 의한 통일정권 아래 흡수됨으로써 아지들의 300년간의 항쟁은 마침내 ‘류큐 왕국’이란 독자적인 통일국가를 탄생시켰다. 슈리성을 정점으로 제1쇼씨 왕조가 성립됨으로써 중국 외교가 일원화되어 ‘책봉체제 하의 류큐’라는 입장이 고정화되었고, ‘아시아 속의 류큐’라는 위치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즉, 류큐 왕국은 종주국인 명과 조공국 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조선 및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외교 및 무역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비로소 국제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3. 아시아 세계 속의 류큐 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역사의 재구성
류큐(琉球) 왕국사는 우리의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다루어진 적이 없을 정도로 생소한 영역이다. 단지 조선과의 관계사에서 ‘유구국(流球國)’으로 알려져 부분적으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이 책은 류큐사를 통해 동아시아 역사의 재구성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점에서도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 그렇다면 아시아 속의 류큐는 어떤 국가였으며, 동아시아 질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명나라가 여러 외국 왕의 지위를 인정하면[책봉冊封], 책봉 받은 여러 외국의 왕은 문서 및 공물을 사신에게 보내 황제에게 충성을 보이는[조공朝貢], 이른바 사대외교의 형식인 책봉체제를 형성하고자 했다. 중국과 책봉 및 조공관계를 맺지 않은 나라들의 선박에 대해 중국 입국을 불허하고, 당시 중국 연안을 황폐화시킨 왜구?해구 등 무장 민간무역 세력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이 정책의 중요한 포인트였다.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책봉을 받고 조공국이 된 나라들의 진정한 목적은 대 중국 무역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에 1401년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 측의 무로마치 막부 또한 명나라의 책봉체제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당시의 중국 상품은 강한 국제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류큐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동아시아 세계에서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즉, 조공무역 루트를 통하여 경쟁력이 강한 중국의 상품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 류큐의 지위를 단숨에 상승시켰던 것이다. 입수한 대량의 중국 상품은 다시 무역선에 실려 일본, 조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운반되었다. 동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류큐 왕국의 장대한 무역 루트는 중국 도자기의 주요 운반 루트로서 ‘해상 실크로드’ 혹은 ‘도자기의 길’이었다. 류큐는 이 무역 루트를 통해 중국 상품을 일본, 조선, 동남아시아에 팔고, 각국의 특산품을 중국에 파는 이른바 중계무역 국가로서 번창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과의 관계에서는 직접 무역의 형태를 취하기가 어려웠다. 조선으로 가는 류큐 무역선의 항해 루트는 규슈, 쓰시마 등의 민간무역업자나 왜구가 활동하는 바다였기에 류큐의 배들은 종종 이들 왜구의 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에 류큐는 15세기 중엽 조선에 직접 무역선을 파견하지 않고 규슈와 쓰시마의 일본 상인을 매개로 한 간접 무역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대표되는 유럽 세력이 진출했고, 명 왕조도 약체화되어 류큐의 해외무역은 점차 후퇴하게 된다. 게다가 일본 상인이 직접 동남아시아로 진출했기 때문에 이제까지 류큐가 차지해 왔던 중계무역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 속에서 중국과의 조공무역과 일본 상인을 매개로 한 대일 무역만이 남게 되면서 14세기 말부터 16세기 중기까지 아시아 세계에서 활약했던 류큐는 ‘대교역 시대’에 종언을 고하게 된다. 저자는 사라진 왕국 ‘류큐’를 아시아 세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무역의 이익이 물질적인 기초가 되었고, 국제사회와의 교류가 왕국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강조함으로써 류큐사를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재구성해 냈다.
4. 국가가 사라졌어도 민족은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가
저자가 사료를 바탕으로 복원해 낸 류큐 왕국의 내부 조직, 즉 슈리 왕부의 이미지는 1523년부터 1874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작성된 202점의 사령서를 통해 드러난다. 사령서란 특정 지위에 있는 사람을 임명하기 위한 공문서다. 저자는 고류큐 사령서 58점, 과도기 사령서 35점, 근세 류큐 사령서 109점을 통해 왕국의 내부 조직을 복원해 냈다. 그리하여 사령서의 주체는 류큐 왕국이고, 사령서 자체가 독자적 국가였던 류큐 왕국의 정체성을 드러냄을 확인했다.
일본 열도의 사회와 공통의 문화적 기반으로 출발했으면서도 류큐 제도의 사회가 서서히 독자적인 개성을 띠는 과정을 밟았고, 고류큐(중세) 시대에는 일본 열도의 국가와 명확히 구별되는 독자적 왕국을 형성했던 것, 그 왕국이 아시아의 국제사회와 교류하면서 역사를 형성해 왔다는 것, 그리고 왕국에는 통치를 위한 여러 제도나 조직이 명료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왕국은 시마즈 침입사건(1609년)을 계기로 한 제1단계, 류큐 처분(1879년)에 의해 왕국이 붕괴하고 ‘오키나와현’이 설치된 제2단계를 거쳐 일본 국가 속에 단계적으로 편성되어 갔다. 이후 미국 통치 시대에는 본토(=평화헌법체제)와 오키나와(미국 통치체제)로 ‘분단’되었다가 1972년 ‘일본’에 복귀했다. 하지만 일본 복귀운동(일본 본토에서 보면 오키나와 반환운동)의 과정에서 오키나와의 정체성은 그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가로서 저자는 새로운 역사상을 재구성할 의무를 피력한다. 일본은 유사 이래 하나의 국가적 틀 아래에서 변화해 왔다고 하는 단일국가관이나, 태곳적부터 ‘일본 민족’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변해 왔다고 하는 단일민족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 일본 사회는 태곳적부터 한 덩어리였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를 흡수하면서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음을 제시한다. 이는 종래의 일본 역사상이 안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모순을 드러내는 작업이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큐사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은 국가가 사라졌어도 민족은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지, 또한 오늘날 일본의 역사 인식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