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7일 '신세계 남산'에서 임현정 피아니스트님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오랜만에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음반과 음원으로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 하더라도 피아니스트님의 연주를 현장에서 직접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날의 연주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임현정 피아니스트님만이 갖고 있는 그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생동감에 극적 표현력이 더해져서 연주를 듣고 있으나 마치 연극까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약 4년 전 임현정 피아니스트님과 함께 했던 '카카오프로젝트100'에서 작성했던 템페스트 감상문이 있어 올립니다. 너무나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주희님께서 올려달라 청해주셔서 (여기저기 수정하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당시의 글 그대로 올립니다. 어차피 위대한 곡과 신묘한 연주에 대한 감상은 완성이나 종결이 없는 것이니, 우리 모두 벅찬 감동과 즐거움으로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63일차] 2020-11-08
063. 템페스트(Tempest)
주호님께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작품번호 31-2)에 관한 글을 올려주신 김에 언젠가 올리기로 했던 글을 오늘의 인증글로 올리기로 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 곡의 제목은 베토벤이 직접 붙인 것이 아닌 쉰들러의 주장, 그러니까 쉰들러가 이 소나타의 의미에 대해 물었을 때 베토벤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보라"고 했다는 데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아울러 얀 카이에르스는 그가 쓴 베토벤 전기에서 쉰들러의 이러한 발언 때문에 이후 수많은 연구자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이 곡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쓸데없는' 노력을 기울이게 했다고 비판했다.
쉰들러라는 인물이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 설령 쉰들러의 주장이 사실이더라도 이 곡이 셰익스피어 희곡에만 한정되어 평가되는 것은 부당한 것일 수 있으므로, 나와 같이 비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비판적 견해를 듣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나는 그동안 베토벤의 음악을 그의 일대기와 작품목록을 고려하면서까지 감상한 것은 아니어서, 사실 이 곡이 "작품번호 31"로 다른 두 곡(31-1, 31-3)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 현정님의 곡 해설을 읽으면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내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쉰들러의 주장에 기반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와 이 곡의 연관성을 찾고 싶어하는 쪽이다. 비록 그것이 '쓸데없는' 일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그 이유는 (주호님께서도 잠시 언급하셨지만) 베토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전집을 2개의 번역본으로 갖고 있으면서 탐독했다는 것, 얀 카이에르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세계 문학으로 평가받는 대작을 기반으로 작업하기를 희망했고, 실제로 <멕베스>와 같은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 생각도 했다는 점 등에서, 쉰들러의 주장을 완전한 거짓일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특히 상식적인 감각의 수준에서 판단하자면, 거짓이라고 하기에는 구체적인 주장이면서 그와 같은 거짓말로부터 얻을 직접적인 이익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여하간 쉰들러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와 이 곡을 주관적으로 연결시켜 본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상상'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다.
제1악장 : 부조리한, 부당한, 억울한, 정의롭지 못한 현실과 덕성으로 계몽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분노
제2악장 :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현재의 고난 따위는 기꺼이 참아내는 인내
제3악장 : 고귀한 이성의 결단으로 관용에 이르는 긴장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연결지어본다면 제1악장은 제1막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억울하게 권력을 찬탈 당하고 쫓겨난 프로스페로의 분노이기도 하고, 칼리반과 같이 아무리 교육해도 변화하지 않는, 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기대할 수도 없는 인간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프로스페로는 칼리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로스페로] : 지긋지긋한 놈, 못된 짓은 무엇이고 다 배우면서, 좋은 인상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군. 난 너를 측은히 여겨 말을 가르치느라고 수고를 하고, 시간마다 무엇이고 가르쳐줬다. 네 입으로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짐승처럼 횡설수설했을 때도, 뜻이 통하는 말로 의사소통이 되도록 해주지 않았느냐. 그랬는데도, 네놈의 비천한 천성은 백번 가르쳐줘도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선량한 사람과는 같이 살 수가 없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바위 속에 넣어두는 것은 당연해. 감옥에 처넣어도 시원찮을 놈이야.
제2악장은 제3막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제2막에서는 마치 현실의 모습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흥미로운 장면들이 전개된다. 특히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것은 곤잘로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피력하는 장면인데 그의 정치적 이상은 왕권을 부정하고, '공상적 사회주의'와 유사하면서도 마치 '무정부주의'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극단적이고 과격한 면모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왕정 시대에 만들어져 실제 궁중에서 공연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비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한) 상상으로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베토벤의 시대에 공연되었을 때에는 사뭇 의미 심장한 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곤잘로] : 그 나라에선 무엇이든지 지금과는 반대로 하겠습니다. 어떠한 매매도 허가하지 않겠습니다. 관리도 없고, 문학도 모르고, 빈부도 없고, 주종 관계도 없습죠. 계약, 상속, 경계, 토지의 구획, 경작, 포도밭도 없고요. 금속, 곡물, 술, 기름도 없고, 직업도 없습니다. 남자들은 전부 놀죠. 여자들도 그렇습니다, 순진 결백하고. 군주권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곤잘로] : 만인 공용의 필수품은, 땀 흘리고 노력하지 않아도, 대자연이 공급해준다는 거지. 반역, 중죄, 창검도 필요 없고, 칼과 통도 소용 없고, 기계 하나 쓰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데도 이 자연이, 오곡이 무르익어서 천진난만한 국민을 먹여살린단 말씀이야.
[곤잘로] : 전 완전무결한 정치를 하겠습니다. 황금시대는 문제도 안됩니다.
제2악장은 제3막과 제4막을 연상하게 한다. 페리드난드와 미란다의 사랑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아울러 그 사랑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프로스페로에 의해 우선 모진 역경을 감수하도록 전개되는데, 페르디난드는 부왕이 죽은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왕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처하게 된 역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페르디난드] : 괴로운 일에도 기쁨이 있는 법이니, 기쁨은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 천한 일도 하기에 따라서는 고상한 것일진대, 비천한 일이 훌륭한 결말을 가져오는 법이다. 내가 하는 이 천한 일은 힘들고 싫은 일이긴 하지만, 아가씨가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고된 일에 기쁨을 주는 한,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그 처녀는 심술궂은 아버지에 비하면 열 배는 상냥해. 늙은이야말로 가혹하기 짝이 없어. 몇천 개의 통나무를 날라다가 쌓아 올리라는 거지. 어기면 처벌한다는 거야. 내가 일하는 걸 보고 처녀는 눈물지으면서, 이런 천한 일은 나같이 고상한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는 거야. 어서 일을 해야지. 하지만 즐거운 생각을 하면 힘드는 줄 모르겠어.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바쁘니까.
또한 페르디난드는 아직 고난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에도 사랑하는 미란다와 혼인을 약속하면서 "노예의 몸이 해방되는 기쁨"이라고 기뻐한다. 자신의 신분이나 권력,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역경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2악장을 들으면 이렇듯 비천한 일을 감내해야 함에도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생각하면서 인내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제3악장은 제5막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흔히 <템페스트>를 설명할 때에는 복수를 꿈꾸었던 프로스페로가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으로 설명을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주의 깊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프로스페로의 용서와 화해는, 그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고 화해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프로스페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로스페로] : 골수에 사무칠 정도로 나를 괴롭힌 그자들이긴 하지만 고귀한 내 이성이, 복수의 분노를 억제하련다. 원수를 덕으로 갚는 것이 훌륭하지.
이 말을 직설적으로 풀자면, 자신이 당한 일이 골수에 사무쳐 복수하고 싶지만 고귀한 이성으로 이를 참고 덕을 베풀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용서'나 '화해'라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복수는 복수를 나을 뿐이므로, 보다 나은 미래(페르디난드와 미란다의 진실한 사랑)를 위해서 모두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것에 가깝다. 나는 제3악장에서 이와 같은 '고귀한 이성적 결단의 긴장', 다시 말해 제1막에서부터 제5막에 이르기까지 프로스페로가 치밀하게 고안하고 실행한 그 숭고한 계획의 고뇌를 느낀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글은 그저 쉰들러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템페스트>를 읽고 굳이 베토벤의 곡과 연결을 시켜보고자 한 내 상상력의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그저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재미로 보아주셨으면 좋겠다.
* 법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프로스페로의 결단은 마치 근대의 형법사상을 연상하게도 한다. 중세에는 범죄자를 권력자의 주관적, 자의적 판단에 따라 온갖 끔찍한 극형에 처했지만 근대의 형법사상은 비록 범죄를 저지른 자라도 적법한 절차에 의해 재판을 받고 미리 법률로 정해진 형벌을 받도록 하며, 유죄임이 판명되어 사회와 격리시키더라도 다시 교화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곧 '인간 이성의 고귀한 결단'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형제 존폐 논쟁을 들 수 있다. 사형제 존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사형폐지론을 마치 '범죄 피해자의 인권'보다 '범죄자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공격을 하는데, 사형폐지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사형폐지론은 한가롭게 '범죄자의 인권'이나 옹호하는 그런 주장이 아니다. 그 사상적 기반은 프로스페로의 결단처럼, 살인자를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똑같이 처벌하고 싶지만, 인간 이성의 고귀한 관용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관용은 단지 목숨을 끊지 않는 것일 뿐, 죽는 그날까지 사회와 격리되어 오직 참회하라는 것이다. (사형존치론자의 분노가 커지는 것은, 극악무도한 살인자에게 이러한 종신형조차 제대로 선고되지 않거나, 선고되더라도 감옥 안에서 너무나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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