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고 울며 사랑하노라니…
-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 뒷이야기(3)
특별보너스(?) ‘아폴로 소란행진곡’
‘광포동’에 음악실이 없던 시절 음악감상실 역할을 해왔던 ‘비원’ 다방은 1957년 어느날 아무런 통고도 없이 느닷없이 문을 닫았다. 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질 무렵 많은 SP레코드판을 밑천으로 문을 열었던 주인 정모씨가 광주로 이사를 가게 된 때문이었다. ‘비원’이 사라진 것을 계기로 이번에는 정식으로 ‘음악감상실’ 이름을 달고 광복동 미화당백화점 4층에 문을 연 것이 ‘미화당음악실’이다.
고전에서 근대, 현대음악에 이르는 레코드를 꽤 많이 갖춘 이 음악실은 바리톤 김점덕金點德, 바이올리니스트 배도순裵道淳을 해설자로 내세워 음악감상회를 열기도 했다. 처음에는 ‘비원’을 찾던 단골들이 짝을 지어 ‘미화당’을 찾았으나, 날이 갈수록 점차 발길을 끊는 이들이 늘어났다. ‘비원’은 문화예술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던데 비해 새롭게 등장한 ‘미화당’은 학생들이 많이 드나들어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미화당’은 백화점 건물로 깔끔하게 단장을 했지만, ‘비원’다방과 같은 낭만이나 정서가 발붙일 틈을 주지 않았다. ‘비원’에선 간간이 예술인들의 광기가 촉발되었고, 그런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미화당’에선 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음악실 주인 박용규는 ‘비원’에서와 같은 ‘파격’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미화당’ 대신 ‘고갈비’ 골목 ESS학원 2층에 새로운 음악감상실 ‘아폴로’를 열었다.
‘아폴로’가 ‘비원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동원한 카드는 ‘비원’의 음악광 단골 정용해鄭龍海 시인을 ‘아폴로’의 음악감독 겸 플레이어로 초빙한 것이다. ‘비원’파 단골들이 지난날의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정용해가 필요하다면서 그를 플레이어로 적극 추대하였기 때문이다. 정용해 시인이 레코드를 고르게 되면서 지난날 ‘비원’ 다방 고객들이 서로서로 연락하여 다시 ‘아폴로’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정용해는 우선 큼직한 흑판을 홀 앞에 내걸고 들려주는 음악의 내용을 자세하게 적었다. 이를테면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틀 경우 4악장의 합창부에 등장하는 바리톤, 테너,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의 이름과 국적까지 일일이 적었다. 그는 신청곡을 받기는 했으나, 그것을 무시하고 그날 미리 기획했던 곡들 위주로 레코드를 틀기 일쑤였다. 그 때문에 신청곡을 끝내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또 낭만파와 인상파 음악을 시리즈로 묶어서 들려주는 등 다분히 교육적인 의도를 살리는 선곡을 했다. 그래서 감상실을 찾은 학생이나 청년들은 흑판에 떠오른 메모를 노트에 베껴 적기도 하였다. 하지만 방학 때는 너무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어 음악감상보다 잡담에 더 열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실내가 소란스러울 때면 정용해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 정숙한 분위기를 되찾게 했다.
음악실이 젊은이들의 잡담 등으로 시끌벅적해지면 플레이어실의 정용해가 돌아가고 있던 레코드를 갑자기 들어내고는 그 대신 요란한 행진곡을 볼륨을 높여 틀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흑판에다 곡명을 ‘아폴로 소란행진곡’이라고 크게 써두고는 행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는 홀 안이 조용해지지 않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다시 플레이어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폴로 소란행진곡’의 의미를 눈치를 챈 젊은이들이 스스로 입을 닫고 홀이 조용해지면, 그는 비로소 ‘아폴로 소란행진곡’을 지우고 말러의 교향곡 <거인> 등의 본격음악을 틀어 분위기를 압도시켰다.
- 최화수, ‘부산음악감상실 야화’, 월간 『객석』 1984년 9월호.
‘아폴로’는 본격적인 음악감상실로 출범하면서 음악을 감상하는 태도부터 바로잡고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원’을 드나들던 음악애호가들의 낭만과 자유스러운 분위기도 살려야 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정용해는 배타되는 이 양면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고심한 끝에 ‘음악감상회’와 ‘문학의 밤’ 등의 여러 기획행사들을 열기 시작했다.
‘아폴로’가 음악감상실로서 가장 역점을 둔 기획행사는 해설을 앞세운 음악감상회였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린 이 감상회는 부산시향 초대지휘자 오태균吳泰均이 전속해설자로 나섰고, 오페라는 성악가 고태국高泰國과 작곡가 최인찬崔仁贊이 맡았다. 오태균은 이곳에서 200회 가까운 해설을 했는데, 본인은 몰론 듣는 청중들도 대단히 진지하여 항상 통로까지 빽빽하게 감상객들이 들어차는 대성황이었다.
1959년 ‘아폴로’는 11세 소년 백건우白建宇 피아노독주회를 열었다. 그의 아버지 백양이 ‘비원’을 드나들던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비원’의 단골 음악애호가들은 백양에게 피아노 솜씨가 아주 빼어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연주 요청을 하게 되었다. 피아노독주회에서 백건우는 소팽의 소나타 곡들을 연주하여 뜨거운 갈채를 받았는데, 그는 앙코르곡으로 ‘이별의 곡’을 들려주고 유학길에 올랐다.
백건우 피아노독주회가 성공하자 ‘아폴로’는 부산 최초의 현악4중주단을 초청하여 ‘현악4중주의 밤’을 열었다. 제1바이올린 김진문, 제2바이올린 홍선화, 첼로 장규상, 비올라 김진조가 그 멤버였다. 조각가 심형준沈衡俊, 사진작가 허종배許宗培 등은 이 연주회를 듣고 깊이 감명하여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또한 ‘아폴로’는 시벨리우스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시벨리우스 추모의 밤’을 열기도 했다.
‘아폴로’ 최고의 이벤트는 타계한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한 발레리나의 추모 독무(獨舞)가 펼쳐진 것이었다. 부산 음악계의 선구자로 48세의 한창 나이에 타계한 바이올리니스트 김학성(金學成)의 장례식이 끝난 바로 그날 ‘아폴로’에서 발레리나 김향촌(金香村)이 추모 독무를 추었다. ‘비원음악다방파’가 중심이 되어 열린 이날 행사에서 김향촌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제2악장을 즉흥 안무로 연기했다. 이 곡은 고인이 된 김학성이 평소 즐겨 연주했고, 그녀 역시 즐겨 듣던 곡이었다. 그녀는 김학성과의 아름다운 우정을 기려 그를 위한 독무를 자청하여 펼쳐 보인 것이다.
- 최화수, 앞의 책
김학성은 금수현과 함께 부산의 근대 음악 터전을 일군 음악선구자로 서대신동에 ‘바이올린의 집’이라는 부산 최초의 음악교습소를 열어 제자를 양성했고, ‘부산현악합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운동에 힘을 쏟았다. 광복 후 ‘부산관현악단’을 조직하여 부산과 경남 각 지역 순회연주회를 열었고, 48년 부산음악학교를 설립했다. 문학평론가로 일가를 이룬 김준오(金埈五) 부산대 교수가 그의 장남이다.
‘아폴로’에서 열린 ‘문학의 밤’에는 김규태金圭泰 박응석朴應奭 손경하孫景河 등의 시인들이 시낭송을 했고, 조향趙鄕 등의 문학강연도 있었다. 이 행사는 음악을 곁들여 무드를 살렸기 때문에 항상 좋은 반응을 얻었다. 1년쯤 지나 ‘아폴로’의 주인은 최영식으로 바뀌었다. ‘아폴로’는 문화극장 뒤편과 광복동 입구로 자리를 옮겨가며 이름도 ‘칸타빌레’로 고쳤지만, 70년대로 접어들자마자 문을 닫고 말았다.
‘시화전’ 열고 ‘다방결혼식’ 올려
시인과 화가는 예술의 동반자이다. 그들이 서로 아름답게 엮어온 ‘사랑’을 표출하려면 어떤 방식이 좋을까? 시인의 시에 화가의 그림을 담아 선보이는 시화전詩畵展이 이상적일 듯하다. 부산에서도 그렇게 축복받은 시화전이 열렸다. 화랑이 없던 시절이라 다방에서 열렸는데, 시화전 마지막 날, 시인과 화가는 바로 그 다방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른바 ‘다방결혼식’, 그 이상의 축복도 없지 않을까.
1959년 12월22~24일 동광동 소레유 다방에서 열린 시인 조순曺純과 서양화가 김천옥金玔玉의 시화전에 문화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두 사람은 같은 학교(부산여고)에 근무하는 동료교사로 촉망받는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시화전이 끝나는 날 전시장에서 부산 최초의 ‘다방결혼식’을 올렸다. 부산 문화계 인사들의 축복 속에 열린 이 다방결혼식은 다음날 일간지들이 대서특필을 할 만큼 화제를 모았다.
1928년 경남 의령 출신의 조순 시인은 진주사범을 나와 의령중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중앙대 정치과와 경남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육계로 돌아왔다. 그는 1958년 『자유문학』에 시 ‘해녀’, ‘5월의 소녀’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193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김천옥은 12살 때 한국으로 왔는데, 부산여중(6년제)에 재학하던 16세 때 제1회 부산미전 입선, 다음해 제1회 대한민국미전에 입선한 ‘미술천재’였다.
6.25 피란시절 부산의 광포동을 비롯한 동광동, 창선동, 신창동 일대의 다방에서는 소규모 미술작품전이 100여 차례 열렸다. 1952년에는 대한미술협회전이 광복동의 모든 다방에서 분산 개최되면서 광복동은 ‘미술의 거리’, ‘미전의 거리’로 불리게 되었다. 부산 원도심의 이러한 미술 분위기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녀 김천옥에게 오로지 화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가슴속에 각인시켰던 게 분명하다.
부산여중고동창회는 대한민국 미전 입상 등으로 학교의 명예를 빛낸 김천옥의 첫 개인작품전을 실로암 다방에서 열게 해주었다. 그녀는 이를 계기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유학을 한다. 1956년 귀국한 그녀는 집안사정으로 파리 유학의 꿈을 접고 모교인 부산여고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녀는 이곳에서 국어교사로 예술적 동지인 조순 시인을 만나 ‘다방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 김천옥은 기혼이었던 조순과의 만남을 피했다. 그렇지만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밤새 집 앞에 서 있던 조순의 사랑에 감동한 김천옥은 결국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 결혼을 약속했지만, 김천옥은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주관이 뚜렷했던 그녀는 결혼을 감행한다. 1959년 소레유 다방에서 열린 김천옥과 조순의 시화전 겸 결혼식은 세간의 많은 화제를 낳았다. 부산의 예술인들은 서로의 예술세계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시인과 화가의 결합이라며 이 결혼을 매우 축하해 주었다.
- 부산여성가족개발원, 『부산여성사 1』
‘일생의 사랑’을 얻어 더 나은 작품활동을 하리라 믿었던 김천옥의 바람과 현실은 달랐다. 두 아이의 출산과 직장생활로 지친 탓인지 작품 발표는 이전보다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녀는 유치환 시집 『미루나무 남풍』(1961년)과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년)의 표지화를 그렸고, 1960년 광복절 경축미전과 1961년 경남재건예술제 미술전에 초대작품 한 점씩만 출품했을 뿐,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기에 작품 활동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은 아마도 김천옥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이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는 사랑의 배신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입고 있던 스웨터 차림 그대로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1965년 겨울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치는 서울 한복판에 김천옥은 그렇게 맨몸으로 홀로 서 있었다.
- 부산여성가족개발원, 앞의 책
1978년 김천옥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녀에게 부산은 늘 가슴속에 묻어둔 마음의 고향이었음이 분명하다. 부산에 돌아온 그녀는 봉래산과 영도대교가 내려다보이는 초장동에 작은 방을 얻고 다시 붓을 들었다. 젊은 시절 김천옥은 부산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전도유망한 전위화가였다. 하지만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그녀는 잊혀진 여류화가에 불과했다. 생활이 어려워 비정기적인 개인레슨에 의지했다.
‘다락방’과 ‘강나루’ 등의 술집에 김천옥이 곧잘 나타났다. 그녀는 술과 담배로 하여 찌들대로 찌든 모습이었다. 술에 취해 말을 거칠게 내뱉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주위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모 대학 미술강사를 하고자 애썼지만, 술을 마시고 말썽을 일으킨다며 거절당했다. 그녀는 1984년 개인전을 마치고 작고할 때까지 몇 점의 작품만 더 남겼을 뿐 작품활동을 하지 못했다.
부산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동광동 뒷골목의 술집 ‘다락방’은 맛깔스런 안주에다 푸짐한 인심의 주모 강정자로 하여 인기가 높았다. 이 다락방의 단골 ‘기인 4명’으로 해병시인 정용해, ‘황땡초’로 불린 황도학, 경찰공무원 김재룡, 그리고 서양화가 김천옥을 꼽았다. 신병 등으로 하여 말년의 어려움에 처한 김천옥을 주모 강정자가 병원 치료와 잠자리 제공 등 따뜻한 정으로 보살폈다.
여류화가 김천옥은 화려한 경력에 비하여 날카롭고 직설적인 화술 때문에 말년에는 외로워져 위암말기로 미음조차 넘기지 못하는 최악의 경우를 당하지만, ‘다락방’의 억척스런 강정자 여사는 하루걸러 마산의 병원으로 통원치료를 시키고, 가게 곁의 여인숙에 투숙하게 하면서 보살폈다.
- 주경업, ‘다락방시절 멋쟁이들’, 『부산 이야기 99』
맏딸의 증언에 따르면, 김천옥이 남긴 최후의 작품은 평생 함께 하지 못했던 두 딸과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생애 마지막에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종교에 귀의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듯 연필로 성모화를 그리거나 이전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안정된 색채를 사용하여 작업을 했다고 전한다. 그녀의 말년 모습은 어떠했을까? ‘건강을 잃고 어렵고 힘든 삶’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김천옥은 술과 담배로 말미암아 무절제한 생활은 더욱 심해졌고,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그녀는 부산여고 제자들이 마련해준 대청동 화실을 정리하고, 작은 단칸방을 얻어 생활했다. 하지만 생활고가 계속되던 중 췌장암 선고를 받은 김천옥은 자신의 짐을 모두 정리하고, 절친한 친구의 집과 동생집, 요양원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맏딸의 집에서 지내던 중 울산 동광병원에서 1990년 5월3일 숨을 거두었다.
- 부산여성가족개발원, 『부산여성사Ⅰ』
꿈을 먹고 자란 ‘프리마 발레리나’
부산 원도심 광복동 한가운데, 다방도 음악실도 술집도 아니면서 날마다 문화예술인들이 사랑방처럼 즐겨 드나드는 곳이 있었다. 내과의사로 이름난 최기현 박사의 병원 2층이었다. 그의 아내 김혜성金慧星이 일본식 목조건물 2층 넓은 방에 발레연습실을 차린 때문이었다. 1960년 벽두, 부산 최초의 발레단을 만든 그녀는 창단공연을 위해 강습소 학생 30여 명 등을 끌어들여 발레 레슨과 연습을 시작했다.
당시 김혜성은 41세의 가정주부로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필생의 꿈을 접어두고만 있을 수가 없어 남성무용가 송준영宋俊泳과 손을 잡고 ‘푸리마 발레단’을 창단했다. 무용학과가 없던 시기여서 단원 모으기부터 힘이 들었다. 학부모들은 ‘발레’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학생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것보다 부모를 설득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한번은 발레 연습에 몰두하다가 시계를 지켜보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그 바람에 귀가하려던 단원들이 통행금지에 걸려 경찰에 연행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김혜성은 하나의 용단을 내렸다. 자신의 집에 큰 가마솥을 내걸고 슬리핑백을 대량으로 구입, 아예 단원들과 침식을 함께 했다. …훗날로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푸리마 발레단’의 성공과 함께 김혜성은 부산문화계의 팔방미인으로 부산시 문화위원, 예총경남지부 부지부장, 부산국제부인회 회장, PIP(국제민간외교협회) 한국본부 부총재 등으로 활약한다. 대형 가마솥과 슬리핑백을 동원했던 부산 원도심의 그 발레 연습실은 그녀가 1988년 69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장르를 초월한 문화예술인들의 넉넉한 사랑방 역할을 해냈다.
- 필자의 졸저 『부산문화이면사』
부산 최초의 발레 단체인 ‘푸리마 발레단’은 1960년 11월11일 제일극장에서 역사적인 창립공연을 갖게 되었다. 김혜성이 그토록 갈망했던 발레의 주역 여자 무용수, ‘프리마 발레리나’, 그녀는 자신의 꿈이었던 ‘프리마’라는 단어를 발레단의 명칭으로 부르기를 원했다. 40대 중년에 접어든 김혜성, 유명 의사의 아내, 세 아들의 어머니로서 ‘현모양처’의 자리를 지키면서 우여곡절 끝에 꿈을 이룬 것이다.
‘푸리마 발레단’의 창립공연에서 단장 김혜성은 오리엔탈 댄스 ‘무애광無碍光’을 솔로로 선보인데 이어 한국무용 <춘향전> 중 ‘사랑의 장’을 송준영과 듀엣으로 추었다. 하이라이트는 창작 발레 <기혼飢魂>이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바탕으로 비너스의 조상彫像과 청년과의 사랑의 혼이 갖는 갈등을 그렸다. 김혜성 안무의 추상 발레로 당시로선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라며 큰 찬사를 받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김혜성은 ‘푸리마 발레단’ 창립공연에서 자신이 안무하고 주역으로 출연한 창작 발레 <기혼>에 대한 엄청난 기쁨과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1981년 6월, 소련의 망명무용가 발란신이 차이코프스키의 같은 교향곡에 비너스의 조상을 등장시켜 사랑의 갈등을 그린 창작 발레 <비창>을 그녀가 했던 <기혼>과 비슷한 안무와 구성으로 펼쳐 보이는 것을 지켜본 때문이다.
‘푸리마 발레단’의 창립공연은 부산예술계에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부산에서는 1958년 조혜경, 1958-59년 김향촌의 현대 발레 공연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 공연은 개인 발표회 성격에 그쳤고, 창작무용을 공연하기 위해 조직된 전문단체로는 ‘푸리마 발레단’이 최초였다. 창립공연을 끝낸 ‘푸리마 발레단’은 대구 초청공연을 비롯, 1968년까지 10여 차례 공연을 하며 갈채를 받았다.
김혜성(본명 지하)은 1920년 부산 수정동에서 2남 4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8살 때 아버지를 따라 <빈사의 백조>라는 영화를 보았다. 세계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의 발레 공연을 담은 작품이었는데, 그의 춤에 너무 감동한 그녀는 그로부터 그야말로 춤에 미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녀가 온몸을 던져 발레의 길, ‘프리마 발레리나’의 꿈을 안고 매진하는 운명적인 계기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1937년 경남고녀를 졸업한 그녀는 일본 유학을 떠난다. 무용을 배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아버지는 유학을 허락했고, 그 때문에 그녀는 지오다千大田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녀가 일본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무용학원이었다. 세계적 발레리나로 일본에 귀화한 에리아나 파블로바의 무용교실에서 특별지도를 받게 된 그녀는 대학학예회서 가정과 학생으로선 이례적으로 발레 솔로 공연을 했다.
김혜성은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170㎝에 이르는 큰 키에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선조 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구가 작은 일본 여성을 가르치던 파블로바가 그녀를 만나 크게 기뻐하며 열정적으로 지도했다. 1941년 대학 졸업 후 그녀는 귀국 날짜를 미루고 마리 위그만에게는 현대무용을, 이시이 미도리로부터는 창작무용을 배우는 등 발레 이외의 다양한 춤까지 섭렵했다.
1947년 11월 부산극장 무대에서 부산 최초의 발레 공연을 선보였다. 일본에서 발레와 모던 댄스(창작무용)를 배우고 돌아온 20대 미모의 여성 김혜성이 발레 ‘장미와 처녀’를 연기했다. 물론 그녀 단독무대는 아니었고, 경남애국부인회가 마련한 자선공연에서 특별순서로 출연한 것이다. 김혜성이 타이츠 차림으로 슈베르트의 ‘장미와 처녀’ 곡이 흐르는 것과 함께 무대로 나서자 객석은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발레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은 타이츠에 얇은 가운을 걸친 김혜성의 발레 의상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한 관객들은 눈앞에서 김혜성이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광경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당황한 관객들은 김혜성이 발가벗고 춤을 춘다며 욕설과 고함을 치는가 하면, 무대 앞까지 나와 항의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김혜성은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소란으로 음악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관객의 비난에도 상관하지 않고 끝까지 공연을 마쳤다.
- 부산여성가족개발원, 『부산여성사Ⅰ』
김혜성의 타이츠 차림 발레 공연은 부산 중심가 문화사랑방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서양문물을 빨리 접하는 부산에서도 발레 보급은 늦은 편이었다. 1947년 김향촌金香村의 발레연구소(학원)가 개설됐지만, 교습 위주였고 공연은 하지 않아 부산시민들은 발레공연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김혜성의 공연 외에는 1949년 이인범李仁凡이 발레연구소를 설립하고, 1950년 옥파일玉巴一이 공연한 것이 전부였다.
김혜성은 “꿈은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그녀는 1947년 부산극장에서 처음 발레 공연을 선보이던 시기에 자신의 무용에 대한 신념을 노트에 적어두었다. “꿈을 먹고 나는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나는 꿈나무가 되었습니다. 나의 나무 가장자리에는 무지개도 영롱합니다. 청잣빛 가슴에 장미꽃이 마음을 이루듯 꿈의 나무들이 나의 가슴에서 무성합니다.”
김혜성은 무용을 하느라 두 차례 유산을 했으나 남편의 이해와 외조 덕분에 평생에 걸쳐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 그녀는 부산시 문화위원과 예총 부지부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남편 몰래 빚까지 내가며 가난한 예술인들을 많이 도왔다. 자택이 광복동 중심가 일본서점골목에 위치, 그녀의 응접실은 예술 관련 인사들로 다방보다 더 북적거렸다. 그녀는 1988년 69세의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부산 원도심 문화사랑방의 ‘프리마 발레리나’, ‘프리마돈나’와 같은 삶을 꿈결처럼 살았던 것이다.
김혜성은 1962년 부산직할시 승격 기념으로 세워진 서면로터리 ‘부산탑’ 중앙에 자리한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 동상의 모델이 되었다. 부산의 상징이었던 부산탑은 1981년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철거되었지만, 남녀 동상은 부산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안치됐다. 부산 최초의 프리마 발레리나의 얼이 깃든 이 동상을 모사한 조각상도 만들어져 부산진구청과 영광도서 앞 문화의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김혜성의 묘비에는 생전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춤을 추던 그녀를 추모하는 원로 언론인이자 전 부산예총회장 박두석朴斗錫의 시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모란꽃의 화사함과 / 파도의 질긴 생명력을 / 백조의 율동에 실어 / 호랑나비의 꿈은 이제 / 여기 고요히 잠들었다.’
늘 외롭고 추워 술로 데운 가슴
부산 최초의 문학동인지는 1935년 창간호를 펴낸 『생리生理』이다. 이 동인지는 서울에서 서정주徐廷柱 김동리金東里 오장환吳章煥 등이 『시인부락』을 펴내고 있을 무렵 탄생한 것으로 부산문단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학동인 ‘생리’의 동인들은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을 비롯하여 염주용廉周用 장하보張何步 박영포朴永浦 최두춘崔杜春 최상규崔上圭 들이었다. ‘생리’ 동인들은 문학적 업적 못지않게 술에 얽힌 숱한 일화들을 남기고 있다.
청마가 부산문인협회장을 맡았던 1964년, 그는 임시회의를 마친 뒤 집에 맛있는 동동주가 있다며 간부들을 좌천동 자택으로 초대했다. 술상 가운데 오지술항아리가 놓여있고 표주박이 걸쳐져 있었다. 청마는 잔이 비워진다 싶으면 손수 잔을 채워주면서 “드시게, 많이 드시게”라고 권주 말씀만 했다. 한 분이 선생의 애주 변을 듣고자 질문을 불쑥 던졌더니 청마 왈, “술은 마음을 세탁하지”라고 답했다.
- 이유식, ‘부산문단 시절의 나’, 『문학도시』 2014년 7월호.
청마의 동향 후배인 시조시인 장하보(본명 장응두張應斗)는 마치 술을 마시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대단한 애주가였다.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가 ‘모래 속에서 금싸라기를 찾아내는 시인’이라고 격찬했던 그는 일생을 청빈하고 물욕 없이 살았지만 술만은 두주불사였다. 1970년 58세의 나이로 작고한 그는 운명 직전 자식들에게 사오게 한 술을 숟갈로 받아 마시며 무량태평無量太平으로 죽음의 길을 떠났다.
내 죽음의 길엔 촛불도 밝히지 말라 / 나는 울음을 싫어하노니 / 저 삼엄한 밤 풀벌레 소리에 / 아는 듯 모르는 듯 실려 가리라.
- 장하보, ‘진혼가’ 일부
하보는 고향 선배인 청마를 각별히 따랐지만, 남의 눈에 띄게 극성스런 면을 보이지는 않았다. 청마가 부산문인협회장을 할 때 부회장을 맡았고, ‘생리’ 동인 때도 회장과 부회장 자리를 같이 지냈다. 청마가 불의의 윤화로 숨지자 하보는 “얼마 몬가 나도 행님 따라갈 거 같애” 라면서 청마 묘소를 찾아가 손수 새긴 비목을 세우고 무덤 앞에 앉아서 긴 시간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하염없이 앉아있고는 하였다.
하보는 평소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만, 남의 술을 원치 않고, 그 가난 속에서도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처럼 격조와 기품을 갖추어 술을 마시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계산을 치르는 것도 그의 버릇이었다. 술값을 치르느라 생활비까지 다 털어버리고는 다음날 쩔쩔매는 일이 허다했다.
하보에게는 이승을 하직할 며칠 전까지 그의 수발을 다해준 연인이 있다. 그 연인이 있으므로 해서 하보가 살아간 이 세상의 고독은 한층 더 진한 빛깔로 채색된 것으로 알고,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그 여인에게 고마운 마음 간절히 합장을 드리는 것이다.
- 박노석, 장하보의 면모, 『부산문학』 5집
‘생리’ 동인의 한 명인 시인 박영포는 숙환인 결핵으로 26세에 아깝게 요절했다. 그는 지병에 따른 가난 때문이었는지 춘하추동 언제나 단벌 양복을 다듬이질 한 번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입고 다녔다. 또 짙은 하늘색 넥타이에 약칠도 하지 않은 구두를 신고 굵다란 검은 근시안경에 캡을 눌러 쓰고 다녔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말없이 술을 즐겨 마셨는데, 성격은 대체로 차분한 편이었으나, 격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한번은 비범한 글쓰기로 그 이름이 쟁쟁하던 서울의 이상李箱이 부산에 와서 청마를 비롯한 ‘생리’ 동인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런데 이상이 취했는지 부산 시인들을 비하하는 말을 했다. “얼마 전에 동인지를 받아보았는데 청마형 것 빼고는 종이 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그 순간 박영포가 이상의 멱살을 잡고 냅다 뺨을 후려치며 대갈일성 했다. “너만 시인이야? 나도 『문예춘추』 당선 시인이다!”
- 필자의 졸저, 『부산문화이면사』
가난했던 지난 시절 밥은 굶어도 술 없이는 못 견디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그들은 늘 외롭고 추워서 아픈 가슴을 술로 데워야만 했는지 모른다. 엄성관, 장하보와 같은 두주불사의 술꾼으로 부산과 마산을 바람처럼 휘젓고 다닌 시인 김수돈金洙敦이 또 있다. 경남여중과 동래중 교사로 재직한 그는 꽃과 여인을 주로 노래하여 ‘귀족시인’으로 불렸지만, 시와는 달리 상식 밖의 파행을 일삼는 기인이었다.
그는 한번 술자리에 앉았다 하면 주머니를 비울 때까지 시간을 따지지 않고 마셨다. 신입생들에게 거둔 교과서 대금을 몽땅 들고 요정으로 달려간 그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아침에 작취미성인 채 죄없는 우체통과 씨름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부인의 핸드백과 패물을 전당포에 맡겨두고 술집에 틀어박혀 며칠 동안 계속 술을 마시기도 했다. 연극 연출 재능이 탁월하여 부산 연극 발전에도 이바지했던 그는 1966년 49세를 일기로 그토록 좋아한 술을 남겨둔 채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 월간 <문학도시> 201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