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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의 천도교의 전개
(천도교중앙총부 홈페이지에서 펀글 )
1. 3.1운동이후의 위기
3.1운동이전에도 천도교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의한 탄압을 가장 전면에서 받아내야 했다. 즉 일제는 일본의 신도와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국내의 천도교와 대종교등 민족주의적 종교는 ‘종교유사단체’로 규정하여 차별적인 탄압을 가하였다.1)
결국 천도교는 비밀 정치결사로 인정되어 공인종교와는 차별화된 감시를 계속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천도교는 과거 동학혁명을 통해 일제침략에 정면으로 항거한 주체였을 뿐아니라 현도이후 다시 재기하여 국내최대의 종단으로 성장, 각종 교육및 출판사업을 통한 민족 계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제국의회설명자료’에 보면 “... 천도교는 동학란을 계승하여 일본을 이나라에서 축출해야 잘 살수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우리가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종교, 특히 천도교에 관해서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2)
3.1운동이후 천도교는 일제의 탄압과, 독립운동의 실패로 인한 일부 민중으로부터의 배척까지 겪어야 했다. 그들은 3.1운동으로 양민을 소란케 했다고 비난하였는데 당시 ‘매일신보’의 기사를 보면 “평북 구성군 지방에서는 천도교의 선동으로 소요 참가하여 인명 살상하였을 뿐 아니라 시장과, 농상업상에도 다대한 손해를 입었슴으로 천도교도에 대한 반감이 생기어 천도교를 절멸하고 교도를 죽이자고 떠드는자도 많았고, 평일의 교제도 피하는 자가 많다하며, 시장상인등도 자의단을 조직하여 천도교도나 소요 관계자의 왕래를 막어 힘써 경계하는 중이라더라” 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반감을 일반민중과 천도교와의 이간책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사회로부터의 배척과 일제의 탄압으로 장진교구장, 대구교구장을 비롯한 수많은 교인들이 탈교하였고 탈교하지 않은 교인들은 타지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상황에서 지방교구는 유지조차 어려웠다.
* 천도교청년회80년사, 92-94, 461-464
2. 위기극복을 위한 부문단체 활동.
3.1운동이후 교단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지도부가 대부분 구속되어 공백상태였고, 일경은 교인이 이탈하도록 탄압하였고, 간부가 체포되거나 피신중인 교구에서는 정상적 활동이 어려웠다. 월성미 수납액도 4분의1로 떨어졌고 은행의 예금도 몰수당하는등 재정적으로도 어려웠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움직임이 청년지도자들속에서 시작되었다.
포덕 60년(1919) 9월2일 정도준, 박래홍등 8인의 발기로 ‘천도교청년 교리강연부’를 성립하고 9월7일 시일식후 첫 교리강연발표회를 가져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3.1운동이후 민심수습을 위해 일제가 소위 문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어느정도 집회, 결사, 출판, 언론을 허용함으로서 가능하였다. 이들은 규약에 따라 편술부, 음악부, 체육부를 두었고 월간잡지 간행과 천덕송 작사 작곡에 착수하고 생활체육을 보급하였다.
포덕 61년(1920) 1월15일부터 4월1일까지 천도교청년임시 교리강습회를 열었는데, 이돈화, 오지영등이 강사로 활동하였고 이를 통해 ‘천도교서’라는 최초의 교사를 체계화시켜 발행하는 부수적 성과도 얻었다. 4월25일에는 청년교리강연부를 통해 지방조직의 확대와 지도자 양성, 교리체계화등이 자리잡아가자 이를 천도교 청년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5월하순에는 지부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이돈화, 박사직, 김기전등의 강사가 지방을 순회하며 특별 대강연회를 열어 천도교를 널리 선전하였다. 각지방마다 적게는 4백명에서 4천명에 이르는 인원이 집회에 참석하여 교인들에게는 자긍심을, 일반인들에게는 천도교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6월25일에는 개벽사라는 출판사를 만들고 시사종합잡지 ‘개벽’을 창간하여 당시의 잡지계를 선도하였다. 창간사에 보면 “다수 인민이 목마르게 우러러 바라고 또 요구하는 소리는 곧 신의 갈앙하고 요구하는 소리요 곧 세계 개벽의 소리”라고 하여 민중의 소리와 개벽의 소리를 전하겠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종교, 학술, 문화분야에서 시작해 이후 정치, 경제, 시사분야까지 확대하여 간행되던 개벽은 포덕 67년(1926) 8월호까지 72호를 발행하는 동안 발행금지 34회, 정간1회, 벌금1회등 수많은 탄압을 받다가 끝내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포덕 62년(1921) 4월에는 소년부를 두어 40여명의 소년들을 모아 지도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인원이 늘어 5월1일에는 김기전, 방정환, 박래홍이 주도하여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각 청년회지회에도 소년회를 만들고 음악, 연극, 학습운동을 벌여 이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어린이’라는 말도 방정환이 해월신사의 내수도문중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라는 말에서 지은 것이다. ‘어린이’ 잡지도 간행하였고, 포덕 63년(1922) 5월1일 소년회 창립 1주년을 맞아 ‘어린이 날’을 정하고 기념식을 올렸다.
청년회는 위의 활동들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으나, 전국지회를 통할하는 보다 유기적인 활동을 위해 포덕 64년(1923) 9월2일 보다 강력한 조직력과 이념을 바탕으로 ‘천도교 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농민부, 노동부, 청년부, 학생부, 여성부, 유소년부, 상민부의 7대 부문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소년회, 학생회, 내수단, 勞友會등을 직접 간접 지원하였다. 그 결과 포덕 65년(1924) 4월에 청년당의 지도아래 최초의 여성단체인 ‘천도교 내수단’이 창단되었고, 6월8일에는 ‘천도교 재경 학생 친목회’를 조직하여 후일 이를 ‘천도교 학생회’로 발전시켰다. 포덕 66년(1925) 10월29일에는 ‘조선농민사’를 창립하여 농민운동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의 전국적인 당세확장과 부문별 운동의 성과는 눈부신바가 있다.
포덕 67년(1926) 4월 신구파의 분열에 따라 구파청년당은 ‘천도교 청년동맹’을 만들어 신파 청년당과 분립하였다. 청년동맹은 6.10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왜경에 발각되어 많은 천도교인들과 함께 대표 박래홍등이 체포되었다. 이후에도 신간회운동에 처음부터 적극 참여하였다.
포덕 71년(1930) 12월에 신파의 청년당과 구파의 청년동맹은 합동하여 포덕 72년(1931) 1월에 ‘천도교 청우당’으로 재출발 하였다. 청우당은 노동부문운동의 일환으로 포덕 72년 5월12일 조선노동사를 창립했다. 이는 청우당 규약 제2조에서 노동대중의 단결을 통한 全的運動, 즉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목적실현을 위한 일환으로 창립된 것이다. 또한 당시 우리나라의 산업구조가 농업을 근간으로 한 1차산업 위주였고 천도교의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도 천도교의 분포비율이 도시보다 농촌에 치중되어 있는 현실에 따라, 청우당은 조선노동사를 통해 도시포덕의 가교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 천도교청년회80년사, 73-81, 113-158
3. 천도교 혁신파의 주장을 정리하고 비판해 본다.
포덕60년(1919)에서 62년(1921)까지 3년간 성사님과 대도주 박인호이하 많은 교역자가 수금되어 교무가 마비되자 남은 천도교 유지들간에 교무수습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포덕 62년 천일기념일에 모인 부구총회에서 의사기관을 만들기로 하여 13인의 임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천도교 의사원으로 이해 지일 기념일에 위원회에 보고된 의견들은 1. 연원제의 폐해를 제거할 것. 2. 부.구 조직체의 계급차별제도를 개정할 것. 3. 의절을 개정할 것. 4. 의사원을 일층 쇄신할 것. 5. 대헌을 개정할 것. 등이었다. 그중 핵심은 의사기관인 의정회를 설치하여 대도주제 대신에 중의제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포덕 63년(1922) 의사원에서 교헌 수정안이 통과되어 대도주의 인준을 받아 1월7일 공포되었는데 종신직인 대도주는 4년 임기의 교주로, 종령은 敬告로, 장노 도사 도훈 교훈등은 종법사로, 중앙총부는 종무원으로 바뀌고, 의사원은 일반교인의 투표로 공선하였다. 중의제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옥중에서 만기출옥한 천도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천도교대헌을 복구하고, 총부 직원의 명의와 지방교구장 명의도 회복하며, 연원제도 복구하여 교주중심의 교체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로써 천도교에 혁신파와 복구파가 분리되어 대립이 시작되었다.3)
천도교혁신파에서 처음 의사원에서 의결한 내용이 미흡하다하여 추가로 의결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無頭制로 할것(각 연원 및 지역의 두령제를 폐지)
2. 연원제는 일체 타파할 것
3. 미신식은 일체 타파할 것(청수와 기도식)
4. 집중적 권리를 타파할 것
5. 계급적 조직체를 타파할 것
포덕63년 9월에 이미 소수파가 된 혁신파에서 의결한 조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교의 입교문 및 축문등은 폐지할 것
2. 천일, 지일, 인일등 명칭과 기타 생일 사망일 기념식은 없애버리고 다만 4월5일 하나만 기념할 것
3. 청수는 폐지할 것
4. 기도식은 폐지할 것. 단 필요에 의해 수련을 행함
5. 1세, 2세, 3세, 신사, 성사등의 말은 폐지할 것. 단 선각자면 선생이라 함.
6. 시일회는 법회라 할 것
7. 성미는 종래의 반분은 지방에, 반분은 중앙에 하던 것을 고쳐 이것을 셋으로 나누어 3분의 2는 지방교회에 3분의 1은 연합회로 할 것
8. 교회는 각 지방 면과 리에 편의에 따라 설립하고 연합회는 중앙지에 두어 기맥을 상통할 것
9. 개인을 본위로 지방교회를 중심으로 할 것
10. 간부는 서무, 경리, 선전 3부로 하되 평등으로 할 것
11. 공약장을 간행하여 혁신당의 명분을 명료하게 할 것.
** 공약장
1. 미신적 종교식은 타파하고 인본도덕을 창명할 것
2. 편당적 연원제는 타파하고 대중 해방에 노력할 것
3. 계급적 차별제는 타파하고 평등생활을 특별히 도모할 것.
결국 지나친 정치적 입장을 강조한 혁신파는 소수파로 전락하였고, 이들은 본래 교구를 없애고 단위교회로 만들어 중앙기관은 연합체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포덕 63년 12월 31일 이른바 천도교 연합회를 별도로 조직하고 이탈하게 되었다.4)
* 오지영, 동학사 231~254
* 천도교청년회80년사, 81-85
4. 신.구파 분열
포덕 63(1922)년 5월19일 의암성사께서 환원하신후 6월6일 춘암상사가 교주를 사임하여 무교주제가 되었다.
포덕 64년(1923) 4월에 임시 종법사 회의에서 교무규정을 개정하여 중앙총부를 중앙종리원으로 바꾸고 중앙종리원에 종리사총회를 두어 교단의 일체 중요사항을 결의하도록 했다. 교주가 아닌 교인전체의 의사를 기초로 하는 衆議制가 된 것이다.
포덕 66년(1925) 4월 종리사총회에서 대신사득도일을 천일로 해월신사 승통일을 지일로, 의암성사 승통일을 인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춘암상사에 대해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추대하고 교중 중요사항을 품신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평소 교주제 부활을 주장하던 오영창일파는 새 의절을 반대하면서 8월14일 지일기념식후 교인대회를 개최, 이를 성토하면서 중앙종리원측과 분립하니 이것이 신구파의 최초의 분규가 되었다. 이때 오영창측을 구파, 중앙종리원측을 신파라고 불렀다. 다음해 1월에는 신구파가 각각 중앙종리원을 구성하고 천도교회월보가 구파측명의로 발행되고 있었으므로 신파측에서 ‘신인간’을 창간하여 기관지로서 발행하였다. 포덕 68년(1927)에는 구파의 일부가 황해도 사리원에 오영창을 대표법도사로 하여 분립하니 이를 ‘사리원파’라 하였다.
포덕 71년(1930) 10월17일 신파의 최린이 분규의 주요원인이었던 춘암상사의 승통에 대해 이를 인정하고 구파에 합동을 제안하였다. 사리원파까지 3파 합동을 추진하였으나 사리원파가 응하지 않아 신구파만 합동위원회를 구성하고 합의에 성공, 포덕 71년 12월23일 대교당에서 합동대회를 개최하였다. 신구 합동에 따라 신파의 청년당과 구파의 청년총동맹도 합동하여 포덕 72년 2월16일 천도교 청우당을 출범시켰다.
포덕 72년(1931)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국내의 치안강화를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동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신간회등이 해체되는등 국내의 사회종교단체들이 보다 심한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천도교에도 지방교구에 압력을 가해 교인들을 무고하게 납치 구타하거나 강제로 탈교케하고 심지어는 그 지방에서 살지도 못하게 이주시킬뿐만 아니라 교당을 폐쇄하는등 온갖 박해를 가했다. 이렇게 폐쇄된 교구가 전국적으로 수십 郡에 이르러 중앙 종리원에서는 이러한 보고를 접수하기에 바빴다.
포덕 72년 8월19일 춘암상사는 ‘正水月執義春’이라는 법문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선수하는한편 篤信부인들에게 재호(齋號)를 만들어 수여했다. 이에 대해 신파측에서는 춘암상사가 법문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선수하는 것은 신성사의 계통을 파괴하는 것이며, 교회에 당호(堂號)가 있는데도 별도로 재호를 만들어 구파 부인들에게 수여하는 것은 따로 기관적 행사를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포덕 73년(1932) 4월2일 중앙종리원합동대회에서 이를 취소하는 안건을 상정해 통과 시켰다. 그러자 이에 구파측에서 반발, 대회가 예산 결산을 심의하지 못한채 폐회되었다. 4월3일 구파측은 단독으로 대회를 열고 종리원을 단독구성하였고, 4월5일에는 신파측에서 별도 대회를 열어 신파측 중앙종리원을 구성하여 2차 분열이 되고 말았다.
포덕 77년(1936) 8월14일 지일기념일을 기해서 춘암상사가 구파의 중요 연원대표를 통해 비밀리에 멸왜기도를 하도록 하였는데, 사건이 79년(1938)초 일제에 발각되어 연원대표와 중앙간부등 수많은 교역자가 검속되어 고문으로 희생된 사람도 많았다. 일제는 이때 구파천도교대헌을 폐지시키고 중앙간부전원을 강제교체시키는 야만적 탄압을 자행하였다. 멸왜기도사건의 후유증과 대외적으로 점차 가열되는 중일전쟁으로 인한 전시체제의 강압속에서 2월26일 춘암상사께서 노환으로 대도주직을 사임하고, 침략전쟁지원에 광분하는 총독부의 요구에 따라 구파의 중앙교회와 신파의 중앙종리원모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하여 천도교는 대외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고 산하의 청년당과 청년회도 해체되었다.
포덕 81년(1941) 4월4일 창씨개명과 내선일체를 강요하며 황국신민화에 광분하는 총독부하에서 모든 민족운동이 지하로 잠적하는등 백척간두의 위기속에서 8년동안 분열되었던 신구파가 합동했다. 그러나 최악의 외부상황과 함께 장기간의 분규로 청년조직과 조선농민사등 천도교내수회를 제외한 모든 부문단체가 문을 닫는등 교단은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있었다.5)
* 천도교청년회80년사, 122-125, 152-155, 165, 167-168, 214-215,
5. 해방후의 상황
해방직후 국내외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민주당등이 창당되었다. 천도교에서도 포덕 86년(1945) 9월 14일 천도교 청우당을 부활하였다. 청우당은 포덕 86년 10월 일제에 의해 폐쇄 되었던 개벽사를 다시 설립하였고 각 부문운동단체들도 속속 부활시켰다.
포덕 86년말 신구파의 갈등이 재연되어 구파에서는 신파의 청우당에 대해 천도교 보국당을 결성하였고, 천도교 연합회에서도 동학당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청우당은 포덕 87년(1946) 8월경, 170개 당부와 15만당원을 갖고 있었고 그 해 말에는 50만명의 당원을 갖게 되었다. 그 대부분의 주력은 평안도와 함경도등 소련군정의 영향을 받던 서북지방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미군정하의 서울 청우당본부는 정치활동에 큰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청우당은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 및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정치이념을 수립하였는데 그 일단을 보면 “우리는 미국형인 자본가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자본제도의 내포한 모순과 폐해를 잘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련류인 무산자독재의 프로민주주의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조선에는 일찍이 자본계급의 전횡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선의 현단계에 적응한 ‘조선적 신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이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경중선후의 차별없이 동일한 목적으로 취급하는 민주주의이다.”6)
포덕86년(1945) 11월 23일 천도교 총부는 ‘환국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자주의 완전한 정권을 수립하자’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해말 모스크바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고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며 반탁운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포덕87년(1946) 1월23일 임시정부와 각계의 정치인들이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구성된 최고정무위원회는 2월14일 남조선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으로 재편되었다. 이때 천도교 구파인 권동진, 오세창등이 민주의원에 선임되었는데 이들은 포덕 87년(1946) 2월8일, 이승만이 이끌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함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였다.
천도교 구파가 주로 민주의원에 참여한 반면 신파가 주도하던 청우당은 사회주의자와의 제휴를 모색하여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결성에 참여하였다. 이는 청우당의 당원들이 주로 농민과 소시민들이었고 현실적으로 당원의 대부분이 소련군정의 영향하에 있는 북한에 있기 때문이었다.
천도교청우당은 38선의 장벽을 실질적, 전반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소 양군이 동시 철군해야하며, 현재의 민족적 분열과 제정당의 행동 불통일은 연합국의 남북분할점령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미군정을 민족분열과 통일정부수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인식하였던 청우당은 미군정 정책을 계속 비판하였다.
포덕 88년(1947) 1월 이승만과 한민당계열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단독정부수립을 기도하자, 청우당은 이를 거세게 반대하며 단정수립을 저지하고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촉구하기 위하여 민전에 적극참여하였다. 그러나 청우당의 민전참여 확대는 이승만의 독립촉성회와 한민당과 미군정으로부터 탄압받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포덕87년(1946) 2월8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발족되었는데 북한의 공산체제하에서 친김일성, 친북로당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북조선청우당의 정책은 미군정과 이승만계의 우익이 서울에 위치한 천도교 청우당을 의심하고 공격하도록 만든 또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포덕 89년(1948)초 평안도를 중심으로한 이북지역의 교인들은 천도교중앙총부와 청우당의 비밀지령에 의해 3월 1일을 기하여 남북한의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자주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북한전역에서 1만 7천여명이 검거되어 많은 교인들이 희생되었는데 후일 이를 ‘3.1 재현운동’이라 불렀다.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후 포덕90년(1949) 8월10일 육군은 청우당당원 30여명을 “북로당과 북조선청우당의 지령을 받아 천도교내에서 남조선 천도교의 중심세력을 분리시키고 북한 청우당의 세력을 부식시키며, 파괴 암살을 위한 지하당원”이라며 검거하였고, 포덕 90년 12월26일 천도교 청우당은 끝내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정리, 해체되었다.
포덕 91년(1950) 한국전쟁으로 최린과 조기간등 천도교의 명망있는 숙덕과 간부들이 납북되는등 희생되었다.
* 천도교청년회 80년사, 659-689
6. 오늘의 과제
동학이 창도된지 올해 144년(2003년)이다. 창도된지 100년안밖의 종교나 사상이 이만한 깊이와 폭으로 인류사에 영향을 끼친예는 유례가 없다. 그 영향이 한반도라는 지역에 국한되긴 했지만 동학이 태동하던 시기의 한반도는 동서양의 문명이 치열하게 부딪치던 현장이었다.
전래의 선도와 불교, 유교세력과 기독교를 앞세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복합세력, 그리고 공산주의와 현재의 환경-생태주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인류사의 가장 치열한 실험장이다. 그러한 모든 실험의 결론이, 그리고 앞으로 인류의 삶의 양식을 제시할 해답이 한울님-스승님들의 가르침안에 있다. 제자들의 할일은 이러한 가르침을 정확하게 공부하고, 오늘에 맞게 용시용활하며 널리 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스승님당시의 동학수행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다. 깊고 튼튼한 수행이 바탕이 되야 현실의 다양한 상황에 흔들림없이 대처할 수 있지만 수행이 없는 실천과 현실참여는 공허할 수밖에 없는 탓이다. 그것이 짧은 교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스승님 재세시의 깊은 수련은 동학혁명과 일제를 지나는 광풍속에서도 오히려 민중의 앞길을 제시하고 선도했지만, 근현대사의 과도한 압박과 그를 이기기위한 투쟁속에서 스승님들의 수행전통이 상당부분 잊혀진 오늘에는 스스로의 앞가림에도 급급한 것이 교단의 현실이다.
이것을 되살리는 것이 오늘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겠다. 동학수행의 전통이 되살아나 오늘의 사회현실에서 다양하게 적용되면서 우리에게 바른 삶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이 제자들의 몫인 것이다.
1) 포덕 56년(1915)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
2)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 혈사’를 보면 “종교단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날마다 경찰을 파견하여 중앙총부와 각지의 교구를 감시하며, 달마다 제무, 회계의 장부를 보고하게 하여 없는 흠을 억지로 찾아내어 다수 징벌을 행한다. 교회의 중요한 인물은 날마다 그들의 정찰과 속박을 받는다. 지방교구의 심상한 출입도 구금당하여 곧 노예나 가축 따위의 대우를 받는다. 교인이 비교인과 송사하는 일이 있으면 옳고 그름을 불문하고 반드시 교인을 패소시킨다. 이 교의 시일은 곧 예배일이다. 집회나 강연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관청에 보고해야 하고 헌병과 순사의 감시가 있다. 그 강연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자칫하면 한 구절의 말을 따내어 구속 심문한다.” 고 하였다.(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남만성옮김, 서문당, 1999, 137-140)
3) 혁신파와 복구파의 대립은 천도교가 3.1운동을 전후해서 현실문제에 정치적 개입을 시작하면서 어느정도 예견되었던 문제이다. 종교본연의, 마음을 수련하여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며 사회제도가 변화해도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하지 않으면 진정한 개벽이 될 수 없다는 측과 교리에 바탕을 둔 시각으로 사회에 부단한 개입과 참여해야한다는 측이 갈등해온 것은 이미 동학혁명때 부터이다. 이러한 입장차이가 훌륭한 지도자에 의해 잘 조정되었을때는 상승작용을 하며 교회와 사회에 순기능을 하였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서로의 입장이 극단으로 흐르며 사회와 교회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특히 혁신파가 대부분의 종교적행위를 미신으로 치부하여 타파하려는 입장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입장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한다. 차라리 청우당처럼 교회에서 파생된 정당으로 교회와 별개의 활동을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3.1운동이후의 지도부 공백과 혼란, 일제탄압 등은 막 싹이 움튼 천도교가 종교적으로 성숙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4) 현재의 교구는 카톨릭의 교구와 같이 성직자도 중앙에서 파견 임명하여 관리하는 것이 아닌, 지역교인들이 독립단위의 교회를 설립하고 독자관리하면서 중앙에 인준을 받는 형태이므로 연합회와 느슨한 형태의 중앙집중제의 절충형태라 할 수 있다.
5) 신.구파의 분쟁은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이후의 교단운영및 노선과 관련된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불교나 기독교등의 경우 그 과정에서 제자들의 수많은 난상토론등으로 많은 교파가 분립되기도 했지만 교조의 행적등을 다양한 시각에서 정리하고 그럼으로써 포교의 저변이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천도교의 경우 일제의 악랄한 탄압으로 그럴 여유를 갖지 못하고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은채 오늘의 교세위축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혼란기에 정리되지 못한 스승님들의 말씀과 행적들을 발굴, 복원, 정리하여 후학들의 길잡이가 되도록 해야한다. 실제로 해방이후 현재까지 천도교 경전이 몇차례 새로운 말씀들(특히 해월신사, 의암성사편)이 추가되어 양적으로 풍부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6) 천도교정치이념, 동학 제1집, 1990, 303쪽 재인용
결국 해방후에도 천도교가 북한에서는 종교탄압에, 남한에서는 좌익으로 몰려 탄압받는 정치적 상황이 전개된다.
또한 현재까지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을 극복한 남북한을 아우르는 정치철학과 환경을 가지지 못한 현실은 외세에 민감하고 토착세력을 억압하는 양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외래문화와 종교등을 받아들이되 그와 조화롭게 어울릴수 있는 토착 문화와 종교를 가지는 것은 정치적 주권보다 더 중요한 문화적 정신적 주권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 문화적 주권부재의 현실이, 스승님들의 사후 교리의 부단한 정림과 해석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교단내 리더쉽과 시스템의 부재와 함께 천도교가 역사적 위상과 종교적 저력에도 불구하고 오늘 부진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내외의 대표적 요인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