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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작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요약 발표한 내용입니다. 관심있는 분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2011.10.21)
논문주제: 대한독립군의 항일무장독립투쟁 전개과정(요약2)
발표자: 황성칠 교수
1. 독립전쟁: 독립전쟁 준비, 독립전쟁 실행, 독립전쟁 결과
본고는 일제시대에 만주지역 일대에서 수행된 무장독립투쟁을 대한제국의 의병활동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으로부터 봉오동․청산리전투까지 전체적인 전개과정을 기존 연구 자료를 활용하여 재조명하고 그 특징과 교훈을 도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본고의 발표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전쟁을 독립전쟁 준비(기간: 1895~1905년) - 독립전쟁 실행(기간: 1905~1945년) - 독립전쟁 결과 순으로 하겠습니다.
1). 독립전쟁 준비 기간(1895~1905년)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국가보위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모여 일제에 항거한 신민군 즉 의병전쟁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의병전쟁은 3차(제1차 의병전쟁: 1895~1904, 제2차 의병전쟁: 1905. 8~ , 제3차 의병전쟁: 1908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제1차는 1895년 10월 7일 국모시해사건 발생으로 충청도 보은의 문석봉이라는 유생이 인근지방의 여러 유생들의 호응을 얻어 궐기한 것이 을미의병의 시작이라고는 하나 의병전쟁을 일으킨 사실상의 직접적 계기는 11월 15일에 발표된 단발령이라고 할 수 있다.(이유: 국왕의 이름으로 단발령, 일제의 강점, 갑오경장, 국모시해 등 일련의 사건이 누적되어 폭발한 것이다.)
2차 의병전쟁(1905. 8~ )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은 제2단계로 접어들었다. 청.일전쟁(10년전) 때와는 달리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구체적인 안으로서 이른바 대한방침이라는 것을 결정하고 이것이 러.일강화조약 직후에 한국에 강요된 을사5조약(1905년 11월)의 사전준비였었다.
제3차 의병전쟁(1908년~)은 1907년 8월 1일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하는 총성이 울리고 "대한제국만세"를 삼창하는 소리가 들리자 시위대 병사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다시 무장, 기관총으로 맞서는 일본군과 시내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 항전소식이 지방으로 전파되자 각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봉기가 있었고 홍주의 분견대는 무기를 휴대한 채 집단탈영이 시도되었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봉기하거나 탈출한 병사들은 대부분 그 지방의 의병부대에 편입되어 항일무장투쟁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3차 의병전쟁은 제1.2차 의병전쟁과는 성격이 다르다. 3차 의병전쟁은 엄청나게 큰 규모의 대한제국군이 상당수가 가담하여 국가간의 전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2). 독립전쟁 실행 기간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로서(의병군의 제3차 독립전쟁인 1907년 8월 1일)
(1) 국방군 해산일이 곧 광복군 창립일부터 한말의 의병전쟁은 1895년 을미(乙未)의병, 1905년 을사(乙巳)의병, 1908년 정미(丁未)의병 등 세 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 중에서 을미의병은 일제의 침략이 시작한 시점이기는 하나 국권상실 이전이고 을사의병 이후는 사실상 국권상실 이후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독립전쟁의 효시가 된다. 전국적으로 모든 국민이 의병전쟁에 참전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하거나 또는 전쟁의 참화를 입게 된 것이다. 또한 정미의병전쟁은 장기간에 걸친 항쟁으로서 어느 한정된 집단이나 신분에 국한된 전쟁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쟁의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면, 1905년 을사5조약의 강제체결에 이어 한국의 국권을 완전박탈하여 일본에 속국화하려는 일제의 음모에 헤이그 밀사사건이라는 호기가 찾아왔다. 1907년 7월 19일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돌려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고 이어서 동월 24일 다시 정미7조약을 체결, 한국군의 해산을 꾀하였다. 대한제국군의 해산은 이 조약에 부수적으로 비밀각서를 만들어 처리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군은 1904년 6월 주한일본 공사관부 무관 사이토(齊藤力三郞)가 작성한 "한국에 있어서의 군사적 경영요령"이라는 계획에 따라 7개연대 병력이 병제개혁이라는 구실로 궁중호위대 수준으로 이미 대폭 삭감되어 전체 병력규모라고 해야 7천명에 미달하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한심한 것은 작전통수권을 일본군이 장악하여 무기와 탄약을 직접 통제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처럼 보잘것없는 국군이지만 주권의 상징인 군대를 두고 한국을 병합하고,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군대해산을 강행하기로 한 것이다.
일제는 1907년 8월 1일 새벽 비밀리에 서울지구 각시위대에 대대장급이상 장교들을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에 긴급소집 하였는데 먼저 군부대신 이병무가 황제의 해산조칙을 대독하고 이어서 일본군사령관이 조용히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부대로 복귀한 대대장들은 중대장에게만 조칙내용을 알리고 총기를 무기고에 반납한 후 10시까지 전부 대원을 훈련원에 집합시키도록 하였다. 훈련원에는 해산식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참령은 유서를 써놓고 자신의 권총으로 사무실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유서에서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軍不能安國 臣不能盡忠 萬事不惜)"라고 자책하면서 군대해산에 죽음으로 항의하였다. 1907년 8월 1일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의 총성이 울리고 "대한제국만세"를 삼창하는 소리가 들리자 시위대 병사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무기고를 부수고 다시 무장, 기관총으로 맞서는 일본군과 시내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 항전소식이 지방으로 전파되자 각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봉기가 있었고 홍주의 분견대에서는 무기를 휴대한 채 집단탈영이 시도되었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봉기하거나 탈출한 병사들은 대부분 그 지방의 의병부대에 편입되어 항일무장투쟁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2).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후에는 1910년에 드디어 한일합방을 단행하였다. 한일합방이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강화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그 한계점에 이르고야 말았다. 의병과 독립운동지사들 가운데는 국내에서 끝까지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무력투쟁을 계속하다가 희생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또한 일부 지사들은 유서를 남긴채 자결로써 대항하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항일투쟁에 한계를 느낀 의병과 애국지사들은 훗날을 기약하면서 조국을 떠나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우면서 광복전쟁에 유리한 중국과 만주, 노령과 연해주 등의 지역을 택해 망명 또는 이동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조국을 강점한 1910년을 전후하여 만주와 노령지역에서는 독립군 기지와 독립운동단체들이 하나 둘씩 조직되기 시작했다. 만주와 노령지역에서 초기의 독립운동은 자체의 실력양성과 기반조성을 다지는 한편,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한국을 강점한 왜적을 구축하기 위하여 주재소와 군사기지를 공격하기도 하는 등 다방면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독립전쟁이 가능하게된 것은 정치적인 망명자의 수가 계속적으로 증가되고 또한 일제의 식민지 무단통치와 토지 및 미곡수탈로 인한 농민의 경제적 이민이 많아져서 재만, 재러 한인사회가 더욱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 확대된 한인사회를 배경으로 이 지역에서의 독립조직이 더욱 강화되어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독립군들은 1910년대에는 주로 만주와 노령에 근거를 두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들어와서 왜적 구축전을 시도하였으며 구체적인 그들의 활동은 일제의 군경공격, 일제통치 기관의 파괴, 일제요인 저격, 친일세력의 숙청, 군자금 모금 등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활동은 1910년대에는 그리 활발한 편이 못되었으나 1919년의 3.1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이 크게 고조되었고, 거족적으로 일어나 일제를 한국으로부터 몰아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아울러 이러한 의지는 평화적인 시위로써는 일제를 구축할 수 없다는 교훈에 의해 더욱 강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민족의식이 가장 강하였고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어왔던 북간도와 서간도에서 3.1독립운동이후 강력하게 독립전쟁론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만주에 군대를 출병시켜 소위 독립군 토벌을 강행하기도 하고 계획에 따라 우선 장강호(장강호)라는 일제의 어용 마적을 이용하여 훈춘영사관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구실로 재만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1920년 10월 2일, 만주지역에 일본군을 출동시켜 독개스 등을 이용, 한국인 3천여 명을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1920년초에는 서간도 지역에서 대한독립단의 대일전투가 각지에서 전개되었고 또한 서로군정서에서도 대일투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3.1운동을 기점으로 항일독립전쟁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의 독립전쟁은 주로 재만독립군에 의해 추진되었던 것이니 그 변천단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격전기(1919~1921)는 3.1운동 이후 100여회에 걸친 국내진공작전이 전개되었던 격렬한 전쟁시기로 봉오동과 청산리전투로 독립군의 열기가 크게 올라간 시기였으나 결국 독립군이 연해주로 이동했다가 자유시 참변의 수난으로 독립군의 조직이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② 정비기(1922~1923)는 자유시 참변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만주에 산재해 있던 독립군과 합세하여 독립전선의 대열을 정비하던 시기이다.
③ 삼부정립기(1923~1927)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각각 결성하여 만주를 삼분하여 동포사회에 대한 민정을 베푸는 한편 독립전쟁을 발전시켜 간 시기이다.
④ 한.중 연합전선기(1931~1933)는 일제의 만주침략(만주사변)에 대항하여 한.중 연합전선을 형성, 항전하던 때로 1933년 재만 독립군 지도자들이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낙양군사학교의 한인특별반에서 활동하게 되던 시기이다.
(3). 광복군의 독립전쟁은 1940년 9월 17일에 비로소 주.객관적 조건의 성숙을 포착한 임시정부는 드디어 정부군으로서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중국군과 협동하여 항일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김구 및 이청천에 의해 주도된 광복군편성에 필요한 군요원 양성이 본토로 건너오는 수많은 독립군들을 포섭 각지 중국군관학교에 보내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는 1932년 1월 8일의 이봉창의 일본 궁성 사꾸라다문(櫻田門) 앞에서의 일황저격미수와 4월 29일의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윤봉길의 거사에 고무된 중국정부 주석 장개석과 당시 임정요직을 떠나 있던 김구와의 회담에 의해 남경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의 한인독립군 간부양성을 위한 특별훈련반 설치로 구체화되었다.
3). 독립전쟁 결과
지금까지 만주지역 항일독립전쟁을 독립전쟁 준비(기간: 1895~1905년) - 독립전쟁 실행(기간: 1905~1945년)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먼저 귀감이 되었던 의병부대들의 활동은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한 의병부대는 각기 적당한 곳에 정착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고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국내로 들어와 일본군과 유격전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이 독립군 무장투쟁에 미친 영향은 첫째, 새로운 활동기지를 우리나라의 국경에 근접해 있는 만주와 연해주에 정착을 함으로써 국내와 정보교류 등 독립투쟁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둘째, 무장투쟁기지의 경영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토지를 개간하여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면서 무기 구입 등 군수지원과 교육훈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셋째,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교관들은 대부분 의병활동에서 전투 경험을 한바 있었기 때문에 무관후보생들에게 실전적인 교육훈련이 가능했다.
넷째, 서․북간도지역 등 중국 동북지방의 한인들의 인적․물적인 지원을 했기 때문에 독립군의 항일투쟁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병부대들의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노력과 희생에 의하여 축적된 잠재력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군 양성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학교의 정신교육은 '구국의 대의'를 생명으로 한다는 목표아래 첫째, 불의의 반항정신. 둘째, 임무에 희생정신. 셋째, 체련에 필승정신. 넷째, 난고에 인내정신. 다섯째, 사물에 염결정신. 여섯째, 건설에 창의정신 등을 체득이었다. 따라서 이 학교 졸업생은 적어도 2년 동안은 교명으로 민족독립운동에 직접 복무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항일 독립투쟁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억압과 민족의 수난을 겪어 오면서도 청산리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일본 정규군을 참패시키고 큰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간도의 한국민족과 국내의 국민들에게는 대한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 전쟁에서 대승을 할 수 있었던 큰 요인은 간도와 노령의 연해주 지방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그들의 아들들을 독립군 병사로 국가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무기 등 모든 자금과 보급품을 지원한 한국민족 농민들의 역할이었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이었던 이범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가지고 빗발치는 총알 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덩이 두덩이 동지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어린이를 기르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로..., 그 얼마나 성스러운 사랑이며 고귀한 선물이랴! 그 사랑 갚으리, 우리의 뜨거운 피로! 기어코 보답하리, 이 목숨 다 하도록! 우리는 이 산과 저 산으로 모든 것을 잊은 채 뛰고 달렸다.
청산리전투에서의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이범석은 독립군의 승리 요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①만주의 특수한 지형을 잘 이용한 것. ②망국 10년의 치욕을 뼈에 사무쳐서 용전분투한 것. ③우수한 사관청년학도가 있었던 것. ④왕성한 공격정신이 있었던 것. ⑤마을 사람들의 열렬한 협조가 있었던 것. ⑥독립군은 그 곳 지리에 정통했던 것. ⑦독립군은 홑옷과 초선(짚신)으로 민첩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 ⑧독립군은 전투의식이 적보다 더 강했던 것. ⑨독립군의 지휘력이 적보다 더 우수했던 것. ⑩적이 피동적 위치에 있었던 것. ⑪적의 무거운 외투와 가죽구두 차림이 산악전에 불편했던 것. ⑫민중들이 흉악한 적을 미워한 것. 등 총 12가지이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승리요인은 한민족들의 적극적인 인적․물적 지원 이었다. 예를 들면, 한민족들은 작전지역의 지형과 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독립군에게 사전에 알려줌으로써 성공적인 작전수행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게는 허위정보를 전파하여 혼란을 야기 시켰다. 손자병법에 "사간자 위광사어외 령오간지지 이전어적간야(死間者 爲狂事於外 令吾間知之 而傳於敵間也)"와 "고삼군지사 막친어간 상막후어간 사막밀어간(故三軍之事 莫親於間 賞莫厚於間 事莫密於間)"이 있다. 즉 전쟁에서 "허위정보를 꾸며서 흘려 적에게 불리하게 한다", "군대의 일 중에서 정보활동이 대단히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손자병법 중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한인민족과 독립군의 혼연일체가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첫째, 독립전투에 참전한 장병들의 대한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다. 독립군 병사들은 1910년에 일제의 침략에 나라를 잃어버리자 간도와 노령의 연해주 지방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독립의 날을 기약하던 농민의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3․1 운동 후 독립군부대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자 항일무장투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자원한 청년들이었다.
둘째, 국외에 이주하여 간도와 연해주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민족동포들의 애국적인 헌신이다. 독립군이 무장한 무기와 군수품들은 간도와 노령의 한국인들이 가난 속에서도 나라를 찾기 위하여 자진하여 헌납한 성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셋째, 간도의 한국민족 농민들은 독립군에게 정보를 공급하여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을 수행하게 하였으며, 반면에 일본군에게는 허위정보를 제공하여 독립군의 작전을 성공하게 하였다.
넷째, 간도의 한국민족 농민들은 독립군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할 수 있는 지형을 이용하게 하여 승전의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다섯째, 신흥무관학교에서 양질의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학생들의 훈육과 양질의 교육 훈련을 담당한 우수한 교관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신흥무관학교의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이 향후 대한독립에 미친 영향의 관점에서 보면, 만주항일독립전쟁은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와 독립역량을 무장투쟁으로 한 차원 더 발전시켰으며, 한국민족 독립운동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 금번(2012. 7.9~16) 만주 항일 투쟁 유적지 답사는 뜻있는 전국 대학생을 모집하여, 연변대학생과의 세미나 및 항일 유적지를 답사함으로써 민족적인 역사의식과 국가관을 고취하는데 있습니다. 이 행사는 매년 실행하고 있으며, 금번 유적지 답사 사진은 가까운 시일내에 공개하겠습니다.
첫댓글 * 금번(2012. 7.9~16) 만주 항일 투쟁 유적지 답사는 뜻있는 전국 대학생을 모집하여, 연변대학생과의 세미나 및 항일 유적지를 답사함으로써 민족적인 역사의식과 국가관을 고취하는데 있습니다. 이 행사는 매년 실행하고 있으며, 금번 유적지 답사 사진은 가까운 시일내에 공개하겠습니다.
-광복청년아카데미 해외 유적지 답사에 관한 내용은 '중국 답사 여행'에 기고하였으니 참고바랍니다.
그리고 사진은 카페사진에 등록할 예정이니 참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