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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전
<앞부분의 줄거리>
조선 인조 때,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른 이득춘이 있었는데, 결혼한 지 40년이 되어도 자식이 없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7일 기도를 드리니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열 달 만에 이시백을 낳았는데, 사람이 총명하고 비범하였다. 이득춘이 강원 감사로 부임할 때에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금강산에 사는 박 처사가 시백을 보고는 자기 딸과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이득춘 또한 박처사의 재주가 범상하지 않음을 알고 쾌히 응낙했다. 시백은 첫날밤에 박씨가 천하에 박색임을 알고 실망하여 그날 후로는 박씨를 돌보지 않았다. 가족들도 박 소저의 얼굴을 보고는 모두 비웃고 욕을 하였다. 이에 박소저는 시아버지께 후원에다 피화정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홀로 거처하였다. 비록 얼굴은 못생겼으나 어질고 현명한 박소저는 비루먹은 말을 사서 백 배 이윤을 남기고 꿈에서 본 백옥 연적으로 남편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도록 하는 등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차설, 모든 재상이 공(公)을 향하여 분분히 치하(致賀)하니 공이 여러 손님들을 이끌어 술을 내어 즐기더니, 날이 저물어 파연곡을 아뢰매 모든 손님들이 각각 집으로 돌아가니라. 공이 아들을 거느려 내당(內堂)으로 들어와 저녁밥을 먹고 촛불로 낮을 이어 즐기나, 박 소저(朴小姐)가 외모 不美하므로 손님들을 보기 부끄러워하여 깊이 들어 있음을 서운히 여겨 심히 즐겨 아니 하니, 부인이 의아하며 물어 가로되,
“오늘, 아들의 과거 본 경사는 평생에 두 번 보지 못할 경사이어늘, 상공(相公)의 낯빛이 좋지 아니하심은 필연 추악한 박씨가 자리에 없음을 서운히 여기심이니, 어찌 우습지 않으리이까?"
공(公)이 얼굴빛을 고치며 가로되,
“부인은 아무리 지식이 얕고 짧다고 한들, 다만 용모만 보고 속에 품은 재주를 생각지 아니하느뇨? 자부(子婦)의 도학(道學)은 그 신통함이 옛날 제갈무후(諸葛武侯)의 부인 황씨(黃氏)를 누를 것이요, 덕행(德行)의 뛰어남은 태사(太姒)에 비할 것이니, 우리 가문에 과분(過分)한 며느리어늘, 부인 말이 우습지 않으리오?"
말을 마치매 부인의 안색이 심히 좋지 아니하더라.
이 때 계화가 공자(公子)의 장원 급제(壯元及第)함을 듣고, 소저를 향하여 기쁨을 치하하고, 또 탄식하여 가로되,
“소저가 시댁에 오신 후로 상공의 자취 한 번도 침실에 보이지 아니하고, 우리 소저의 어진 덕(德)이 대부인(大夫人)의 박대하심을 당하사, 적막한 후원에 밤낮 홀로 거처하사, 집안의 크고 작은 일에 참여하지 못하시고, 잔치에도 감히 나가지 못하시며, 수심(愁心)으로 세월을 보내시니, 소비(小婢) 같은 소견(所見)에도 신세를 생각하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소저는 태연(泰然)히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의 팔자(八字)는 다 하늘이 정하신 바라, 인력(人力)으로 고치지 못하거니와, 예로부터 운명이 기박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어찌 홀로 나뿐이리요? 분수를 지켜 천명을 기다림이 옳으니, 아녀자 되어 어찌 남편의 은정(恩情)을 생각하리오? 너는 괴이한 말을 다시 말라. 바깥 사람들이 들으면 나의 행실(行實)을 천히 여기리라."
계화가 소저의 넓은 마음과 어진 말씀에 못내 탄복하더라.
이 때 박소저가 시가(媤家)에 온 지 이미 삼 년이라. 하루는 시부모께 문안 올리고, 다시 옷깃을 여미고 여쭈오되,
“소부(小婦)가 존문(尊門)에 시집 온 지 삼 년이로되, 본가(本家) 소식이 묘연하매, 부모의 안부를 알고자 잠깐 다녀오려 하오니, 대인(大人)은 허락하심을 바라나이다.”
하거늘, 공이 듣고 크게 놀라 가로되,
“이곳에서 금강산이 오백여 리요, 길 또한 험하거늘, 네 어찌 가려 하느냐? 장성한 남자도 출입하기 어렵거든, 하물며 여자의 몸으로랴! 이런 망령된 생각은 행여 하지 말라."
소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소부도 그러한 줄 아오나 부득불(不得不) 다녀오고자 하오니, 과히 염려하지 마소서."
공이 소저의 남다른 점을 아는지라, 이에 허락하여 가로되,
“부득불 한번 다녀오고자 하거든 내일 근친할 제구(祭具)와 인마(人馬)를 차려 줄 것이니, 속속히 다녀오라."
박씨 여쭈오되
“소부가 수삼 일(數三日) 동안에 다녀올 道理가 있사오니, 인마와 제구가 쓸데가 없나이다."
공이 소저의 재주를 짐작하나, 이렇듯 신속히 다녀올 도리가 있음은 몰랐는지라, 이 말을 듣고 더욱 신기하에 생각하여 흔연히 허락하거늘, 소저가 시부모께 재배(再拜) 하직(下直)하고 후당(後堂)에 돌아와 계화를 불러 분부하여 가로되,
“내 친가(親家)에 잠깐 다녀오리니, 너는 내 행색을 바깥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하고, 뜰에 내려 두어 걸음 걷다가 몸을 날려 구름에 올라, 잠깐만에 금강산 비취동에 다다라 부모께 재배하고 문안을 드리니, 처사(處士)가 이에 소저의 손을 잡고 가로되,
“너를 시가에 보낸 지 삼 년에 너의 운명이 기박함을 슬퍼하였으나, 이는 하늘에 매인 바요 인력으로 움직이지 못할 바이어니와, 이제는 너의 액운(厄運)이 다하고 복록(福祿)이 무한할지라. 이 달 십오일에 내 올라가리니, 너는 잠깐 머무르다 가라."
소저가 재배하고, 부모 슬하에서 몇 해의 회포를 풀며 수일을 머무르더니, 처사 부부(處士夫婦) 재촉하여 가로되,
“너의 시댁에서 기다리시니, 빨리 돌아가 시부모께 뵈어라."
소저가 마지못하여 부모를 하직하고 다시 구름을 타고 잠깐 만에 후당에 돌아오니, 계화가 바삐 소저를 맞아 신속히 다녀옴을 기뻐하더라.
소저가 곧 의복을 갖추고 나아가 시부모님께 문안드리고, 다시 꿇어 공께 여쭈오되,
“소부 올 때에 가친(家親)의 말씀이, 이 달 십오일에 갈 것이니 너의 시부(媤父)께 아뢰라 하더이다."
공이 흔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사람을 시켜 술과 안주를 갖추고 처사 오기를 기다리더니, 과연 십오일에 이르러 달빛 맑고 바람 맑은데, 홀연 하늘에서 학의 소리가 나며, 처사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거늘, 공이 황급히 뜰에 내려 처사를 맞아 방에 들어와 예를 마치고 좌정(坐定)하매, 공자가 또한 의관(衣冠)을 갖추고 처사를 향하여 절을 하고 문안을 드리니, 공자의 뛰어난 풍채가 일대(一代)의 영웅 호걸이라. 처사가 황홀하고 귀중히 여겨, 공자의 손을 잡고 공을 향하여 가로되,
“영랑(令郞)이 거룩한 재주로 높은 벼슬에 올라 계화(桂花) 첫 가지를 꺾어 옥당(玉堂)에 참여하니 이런 경사가 또 없음을 아오나, 이 시골 사람의 천성이 졸렬하여 공께 치하를 드리지 못하였더니, 금년은 여아의 액운이 다하여 지금 저의 흉한 용모와 누추한 바탕을 벗을 때가 되었으므로, 존문에 나와 사위의 과거 급제한 경사를 치하하고, 아울러 여아를 보고자 왔나이다."
공이 처사의 말씀에 무슨 뜻이 들어 있음을 짐작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주객(主客)이 술을 나누며 밤이 깊음을 깨닫지 못하더니, 문득 닭의 울음 소리 요란하매, 처사 비로소 소저의 침소에 들어가니, 소저 급히 마루에서 내려와 부친을 맞아 절을 올리고 문안하니, 처사가 흔연히 소저의 손을 잡고 마루로 올라 남향하여 소저를 앉히고 웃으며 가로되,
“금년으로 너의 액운이 다 하였도다."
하고, 진언(眞言)을 외며 소매를 들어 소저의 얼굴을 가리키니, 그 흉하던 얼굴의 허물이 일시에 벗어지고 옥같이 고운 얼굴이 드러나거늘, 처사는 쾌히 웃어 가로되,
“내 이 허물을 가져가고자 하나 남의 의혹을 없앨 길이 없으리니, 시부께 말씀하여 궤를 얻어다가 이를 넣어 시모(媤母)와 가장에게 보여 의심을 풀게 하라. 오늘 이별하면 이후 칠십 년이 지나야 부녀가 다시 만나 미진한 정회를 풀리라."
하고, 밖으로 나가 공을 이별하며 가로되,
“이후 혹 어려운 일이 있거든 자부에게 물으소서."
뜰에 내려 두어 걸음 가더니 홀연 간 곳이 없는지라. 공이 신기히 여기더라.
<중략>
박소저가 하루는 시부모께 저녁 문안을 드리고 침실에 들어오니, 시백(時白)이 밤이 깊어 들어오거늘, 소저가 판서를 맞아 좌정하니, 판서가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히롱하며 소저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더니, 밤이 이슥하여 소저가 비로소 판서를 향하여 가로되,
“내일 해질 즈음에, 강원도 원주 기생 설중매(雪中梅)라 일컫고 상공의 공부방으로 올 이 있으니, 그 아름다움을 탐내어 가까이하시면 큰 화를 당하실 것이니, 그 계집더러 여차여차(如此如此) 이르시고 첩의 침소로 들여보내시면, 첩이 마땅히 여차(如此)하리니, 상공은 첩의 말을 가볍게 듣지 마소서."
하거늘, 판서 웃어 가로되,
“부인의 말씀이 우습도다. 장부가 어찌 한 조그만 계집의 손에 몸을 바치리오?"
소저가 눈썹을 찡그리고 가로되,
“상공이 첩의 말을 믿지 아니하시거든, 그 계집을 후원으로 들여보내시고 상공이 그 뒤를 따라 들어오사, 그 계집이 말하는 것을 살펴보면 사실을 아시리다."
판서가 응낙하고 소저와 같이 밤을 지낸 후에, 이튿날 부모께 문안하고 조정에 들어가 공사(公事)를 보고 날이 늦은 후에 돌아오니 손님들이 모였거늘, 이에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날이 저물어 손님들이 각각 돌아가니라. 판서가 저녁을 마치고 공부방에 한가로이 앉았더니, 과연 밤이 깊은 후에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재배하거늘, 판서가 눈을 들어 보니 나이 이십은 되었는데, 그 얼굴이 백옥(白玉) 같아 천하의 미인이라. 놀라 물어 가로되,
“너는 어떠한 계집이냐?"
그 여자 가로되,
“소녀(小女)는 원주 사는 설중매이온데, 상공의 위풍(威風)이 시골에까지 유명하기고 한번 뵙고자 하여 험한 길을 왔사오니, 어여삐 여기심를 바라나이다."
판서 가로되,
“너의 말이 기특하나, 여기는 손님들의 출입이 잦으니, 후원 부인 있는 곳에 들어가 있으면, 손들이 다 흩어진 후에 너를 부르리라."
하고, 시녀를 불러 후원으로 인도하게 하니, 설중매가 부인 처소에 들어가 박씨께 뵈니, 박씨 웃으며 가로되,
“너는 바삐 올라오라."
하니, 설중매 사양하지 아니하고 들어오거늘, 소저는 자리를 주고 계화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가져오게 하여 술을 가득 부어 주니, 설중매가 가로되,
“첩은 본디 술을 먹지 못하오나, 부인이 주심을 어찌 사양하리까?"
하고 받아 마시기를 이어 사오 배(杯) 하니, 두 눈이 어지러워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 쓰러져 자거늘, 소저가 그 여자의 자는 모습을 보니, 얼굴에 살기가 어려 그 흉하고 독한 기운이 사람을 쏘거늘, 가만히 행장을 뒤지니 삼척비수가 들어 있는지라. 소저가 그 칼을 집으려 하니, 그 칼이 변화무쌍(變化無雙)하여 사람에게 달려들거늘, 놀라 급히 피하고 진언을 외어 그 칼을 제어하고, 잠 깨기를 기다리니, 날이 밝은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거늘, 박씨 가로되,
“너는 모름지기 바삐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
설중매 가로되,
“첩은 강원도 원주 사는 계집으로서, 부모를 모두 여의어 의지할 곳이 없사와 가무(歌舞)를 배웠삽거늘, 어찌 본국(本國)으로 돌아가라 하시나이까? 소저의 높은 이름을 듣고 왔나이다."
박씨가 소리를 높여 꾸짖어 가로되,
“네 끝까지 나를 업신여기어 이렇듯 속이니 어찌 통분하지 않으리요? 네 호왕(胡王)의 공주 기룡대(奇龍大)가 아닌가?"
기룡대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사죄(謝罪)하여 가로되,
“부인이 신명(神明)하사 첩의 행색을 아시니 어찌 조금이나마 속이리까? 첩은 과연 호왕의 공주로, 부왕의 명을 받아 귀댁(貴宅)에 들어왔사오니, 부인의 너그러우신 덕으로 용서하시면 본국에 돌아가 여공(女工)을 힘써 평생을 마칠까 하나이다."
소저 가로되,
“네 본색을 바로 고하기로 용서하나니, 이 길로 곧 떠나 너의 나라로 가 너의 국왕더러 이르라. 이 판서의 부인 박씨에게 행색이 드러나 성사(成事)를 못한 바, 박씨의 말이, 네 잠시라도 지체하면 큰 화를 만나리니 빨리 가 화를 면하라 하더라 하라."
기룡대는 정신이 어지러워 엎드려 사죄하여 가로되,
“바라옵건대, 부인은 첩의 죄를 용서하소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옵심을 비나이다."
소저가 가로되,
“너의 국왕이 분에 넘치는 뜻을 두어 우리 나라를 침범하고자 하니, 이는 우리 나라의 운수가 불길(不吉)함이나, 너의 병력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마음대로 침범하지 못하리니, 너는 바삐 나가 자세히 이르라."
하고, 다시 술을 권하여 먹이고 나가기를 재촉하니, 기룡대가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한 후 하직하고 나왔으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여 사면(四面)으로 돌아다니기를 밤이 새도록 하되, 나갈 길이 없는지라, 기룡대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가로되,
“호국 공주 기룡대가 이시백의 집에 이르러 죽을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하니, 문득 박씨 나타나 가로되,
“네 어찌 가지 아니하고 날이 새도록 그저 있느냐?"
기룡대는 땅에 엎드려 가로되,
“첩이 부인의 덕을 입어 돌아가려 하였사오나 사면이 층암절벽이라 갈 바를 모르오니, 바라건대 부인은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소저가 가로되,
“너를 그저 보내면, 필연 임 장군(林將軍)을 해하고 갈 듯한 고로, 너로 하여금 나의 재주를 알게 함이라." 하더라.
<뒷부분 줄거리>
이시백과 임경업의 암살에 실패한 호왕은 용골대 형제에게 삼만 대군을 주어 조선을 치게 하였다. 호국 세력이 강성해짐을 안 박씨는 시백을 통하여 왕에게 호병이 침공하였으니 광주 산성으로 피란 갈 것을 청했다. 도성에 도착한 용골대는 왕이 이미 피란 간 사실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광주 산성으로 향했고, 그의 동생 용홀대는 도성에 남았다. 왕은 광주 산성에서 호국 군대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나 피해가 너무 커서 박씨의 의견대로 호국과 화친을 했다. 왕대비전과 세자, 대군을 데리고 도성에 도착한 용골대는 도성에 남았던 그의 동생 용홀대가 박씨에게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 박씨의 피화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뛰어난 박씨의 도술을 이기지못해 겨우 목숨을 보존했다. 세 명의 대군을 데리고 퇴군하던 용골대는 그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임경업을 만났다. 임경업은 후일을 기약하자는 내용이 담긴 박씨의 편지를 받고 용골대 부대를 호국으로 돌려보넀다. 인조는 박씨 부인의 지략을 칭송하며 충렬 정경부인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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