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 이옥
김윤배/시인
이옥(李鈺, 1760 –1813)은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시인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었으나 서얼이었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가선대부 호위별장 이만림이고, 할아버지는 어모장군 행용양위부사과를 지낸 이동윤이며, 아버지는 이상오이고,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이성현감 홍이석의 딸이다. 실학자 유득공은 이모의 아들로, 이종 사촌형이 된다.
그는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였다. 정조는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하고 문체반정을 통해 대대적인 문장개혁을 실시했다. 당대의 문장가들인 박지원이나 이덕무, 박제가도 반성문 제출을 왕으로부터 요구받았다.
이옥은 문체반정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과거시험 자격이 여러 차례 제한되기도 하고 멀리 기장까지 쫓겨나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의 불경스럽고 불온한 문체가 늘 말썽이었다.
그는 왕의 미움을 받고 고향으로 쫒겨 내려가면서도 부지런히 글을 썼다. 예컨대 남정십편() 등이 그것인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보고 들은 것들 열편을 쓴 것으로 반성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고 불경스럽고 해괴한 내용들이었다.
이옥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어려서의 이름이 기상이며 호는 경금자()라고 썼다. 별 볼일 없는 무반의 후손으로 당색은 당시 몰락의 길을 가던 북인 계열이었다.
그의 문집은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필사본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들을 2009년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다섯 권의 전집으로 묶어 출판했다. 그의 복권이 이루어지기를 기대 할 만한 분위기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시는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언>은 무엇 하고자 지은 것인가? 어째서 국풍이나 악부나 사곡을 짓지 아니하고 굳이 이언을 지었소?”
이언은 네 여성의 삶을 서로 다른 가락으로 노래한 그의 시다.
“내가 한 게 아니라오. 주재자가 그렇게 시킨 것이라오.”
이 질문은 처음부터 이걸 시라고 썼는가?라는 도발이었다. ‘시경’시대의 국풍도 아니고 한나라 때의 악부도 아니며 송원시대의 사곡도 아닌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왜 썼느냐고 힐난한 것이다.
이옥의 대답은 단순하다.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것이 아니라 조물주가 시켜서 쓴 것이다.”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그는 다시 풀이해 주었다. “공자의 시절에는 국풍의 형식으로 노래했다. 그렇다면 한나라 때는 왜 국풍의 형식을 답습하지 않고 악부 시로 썼을까? 송나라 때는 사()가 유행하고 원나라 때는 곡()이 유행했다. 이들은 왜 국풍이나 악부를 쓰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일까? 다시 묻겠다. 왜 송원 때 시인들이 사곡의 형식을 만들어 제소리를 낸 것은 문제가 안 되고 지금 여기에 사는 내가 이언의 형식에 내 목소리를 담아 노래하는 것만 시빗거리가 되는가? 나도 내가 이렇게 노래하는 까닭을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겠지. 나도 모르는 누가 시켜서 그리 된 것이겠지.”
객이 반박했다.
“그렇다면 저 국풍이나 악부나 사곡, 그리고 그대가 말하는 이언이라는 것도 모두 지은 사람이 지은 게 아니라는 말이오?”
“짓는 자가 어찌 감히 짓겠소? 짓는 자에게 짓게 만든 사람이 지은 것이라오. 그게 누구냐고? 천지만물이 바로 그요. 천지만물에게는 천지만물의 성품과 형상, 빛깔과 소리가 있소. 틍틀어 살펴보면 천지만물은 단 하나의 천지만물이지만 나눠서 말 할 때는 저마다의 천지만물인 것이오. 한편의 온전한 시는 자연 속에서 원고가 되어 나와 팔괘를 긋거나 서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갖춰져 있던 것이오. 천지만물과 짓는 자의 관계란 꿈에 의탁하여 실상을 드러내고 키를 까불러 정을 통하게 하는 데 불과하오.”
이옥의 시론은 오늘날에도 곱씹어 볼만한 것이어서 탁발함이 빛난다. 그는 고향인 경기 남양으로 낙향해 은둔생활을 하며 시문 짓는 일과 학문 하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