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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안 통하는 법정" 꿈꾸는 전직 판사의 참회록
‘봉투’에 판결 팔고, 차 할부금은 변호사가…
[신동아 2006.09.01 통권 564 호 (p220 ~ 231)]
신 평 경북대 교수(헌법학, 변호사 lawshin@knu.ac.kr)
*****************************************************************************************************[ 여기에 올린 3편의 글 중, 첫번재 글은 1933년 대구지법, 판사로 근무하던 중 사법부 개혁을 요구하는 글을 썼다가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한 바 있는, 지금의 신 평 경북대 법대 교수가 온갖 로비가 횡행하는 사법부의 세태를 고발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 소중한 글로서, 지난 2006년 9월, ‘신동아’에 실린 바 있습니다.(이곳에 실린글은 '신동아'에서 누락된 내용을 다시 복원하여 게재함) 당시, 신평 교수의 판사 재임용 탈락은 사회적으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켜 결국 국정감사로까지 이어진 바 있지요. 그 후 그는 변호사 생활과 농사일을 병행하다가 몇 년 전부터 경북대학교 강단에서 헌법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김명호 교수 사건을 당하여, 진정,그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이 오히려 그들로부터의 무자비한 사법폭력에 치를 떨고 있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올바르고 양심적이었던 한 판사가 지난 날 몸소 체험했던 사법부의 비리를 폭로하고 그 개혁을 피맺히게 절규하고 있는 이 글들을 읽어 보면서, 작은 위안을 구해 봅니다. 판사와 변호사 그리고 방청석을 두루 거치면서 그의 법운용에 대해 변화되는 생각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한 인간의 처절한 인격수행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절로 마음이 경건해지는군요. 지금 이 순간, 그의 의로운 절규가 유난히도 가슴속 깊이 파고듭니다.
* 바쁜 시간에 빠른 가독을 위해 주요부분에 색깔을 칠해 보았네요. 빨강색은 주로 부정적/절망적/퇴보적인 문제점들, 파랑색은 긍정적/희망적 /발전적인 제안과 주장들로 구분됩니다. /천수향] <신 평>님의 사이트 : http://lawyersh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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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회칠한 무덤이여!-로비가 통하지 않는 사법부를 만들기 위하여-
[이 글은 신동아 2006년 9월호에 실린 본인 글의 원문입니다. 신동아의 글은 편집상의 필요에 의해 일부 정리, 수정된 것입니다. 이 글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우리 시대가 갖는 비극의 하나인 사법피해자 문제에 관하여 정식으로 조명이 되어 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글쓴이]
길었던 장마
올해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 수해를 입은 곳도 많았다. 20년 가까이 시골 농촌에서 사느라 밭농사도 지어보고 논농사도 지었다. 밭농사는 노동의 강도가 유난하여 무척 힘들고 따분하기도 하나, 논농사는 모내기와 추수를 제외하곤 그리 큰 힘이 들지 않는다. 졸졸 논고랑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을 보며 커가는 벼를 바라봄은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올해처럼 큰물이 지거나 또 태풍이 지나가 벼가 쓰러져 다시 이를 일으키는 작업을 할라치면 그 노역의 끔찍스러움에 고개를 흔든다. 진창에 빠진 두 발을 옮겨가며 작업함이 상상하기 힘든 중노동을 요구한다. 한 시간 꼬빡 해보아야 한, 두 평밖에는 벼를 묶어세우지 못한다. 그런 중에도 진흙뻘에 묻은 물은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온 몸을 덮는다. 아! 이때 느끼는 불쾌감!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장맛비의 우울한 이어짐도 이보다는 낫다.
그칠 줄 모르는 법조부정
올해는 장마만 길었던 게 아니다. 유난하게도 윤상림 게이트가 터져 온갖 추문이 쏟아지더니 그 사건이 재판과정에 들어가 조금 숙지자 이어 김홍수 게이트가 터졌다. 김 씨가 로비대상인 판사들을 가리켜 “그들은 술과 돈에 취해 있었다.”고 한 말을 들으며 국민들은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세상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입장에 서서 판단을 해나갈 것으로 믿는 판사들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국민들은 이 같은 소식들을 접하며, 장맛비가 하루 빨리 끝나기만을, 그래서 맑은 날이 찾아오고 또 들에 나가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기만 하면 일상의 흐름 속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곧 맑은 날씨 아래 추수를 할 풍성한 계절이 돌아옴을 기다린다. 그처럼 이 불쾌한 소식들이 조금씩 잦아들며 국민들은 다시 망각의 늪에 법조부정을 쳐 박아 던져버린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언론들도 마찬가지이다. 일과성의 사건으로 매기며 다시 대중의 눈을 끌 수 있는 사건으로 재빨리 옮겨간다.
사법부정에 관한 일반의 오해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주로 이런 부정이 생기는 현상의 근본원인을 파헤쳐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해를 한다. 윤상림, 김홍수 씨 같은 사람이 빨리 처벌을 받고 없어지면 사법부는 제 자리를 찾아가리라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법부정 혹은 사법부패는 절대 일과성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윤상림, 김홍수 씨가 사건의 본질이라는 안이한 분석으론 결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의 사법부나 법조-사법부와 검찰, 변호사회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통 법조삼륜, 법조의 세 수레바퀴라고 불린다-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결함은 이런 부정을 항시 생겨나게 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또 바깥으로 터져 나오건 그렇지 않건 간에 여전히 이런 일이 끊이지 않고 생겨나고 있다고 보면 확실하다. 윤상림, 김홍수 게이트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도대체 국민의 재산, 생명, 신체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막강한 힘을 가지는 재판에 그 재판의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적절한 제어장치가 되어있지 않는데, 어떻게 그 재판이 항상 올바르게 행해진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사법제도는 다른 각국의 사법제도와 비교하여 이 점에서 거의 낙제에 가깝다. 법관이 자발적으로 올바른 재판을 행하도록 막연히 기대하는 외에 공정한 재판에 관하여 우리는 다른 실효성 있는 제도적 장치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그나마 이러한 사건들이 불거져 나오는 것이 우리 사회가 그동안 꾸준히 진일보해온 덕이라고 보면 된다. 조관행 서울고등부장판사가 구속되는 일이 어찌 예전에 쉽게 일어날 수 있었으랴! 국민들 여론의 압력이 노도처럼 밀려들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큰 일 날 듯 하니 그를 구속시키고 국민들을 상대로 사과도 하는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십중팔구 은폐되었을 사건들이라는 뜻이다.
과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4자성어를 농락하며 조선의 병탄을 정당화시켰으나, 우리 사회에서는 법조의 세 수레바퀴는 하나라고, 그 동지적 유대성을 강조하는 프로퍼갠더가 판을 치며 법조계를 그르쳐왔다. 대개 이러한 유의 동질성 강조는 그 속에 음침한 함정을 품고 있는 법이다. 그래서 그런 법조부정이 발생했어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쉬쉬해주며 은밀히 사건의 유발자에게 정보를 흘려 사표를 내도록 하고, 겉으로는 입을 싹 닦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며왔다. 그렇게 해나갈 분명한 이익의 공유가 물론 있었다.
말할 자격은 없소만
내가 이 글을 쓸 자격이 없다는 사실, 잘 안다. 10년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판사생활을 하며 접대골프나 기생방 출입에 절었던 적도 있었고, 돈 봉투도 숱하게 받았다. 다만 사건에 직접 관계된 돈을 받았지 않았노라고, 또 그런 잘못된 법조문화에 저항하며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기도 했다는 식의 알량한 자기변명이 통하지 못함도 잘 안다. 변호사를 할 때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며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에 대한 인상을 고치기 위해 열심히 판검사를 접대하기도 했다. 사법부에서 낙인찍힌 변호사로 인식되어, 처음 사무직원을 구하는 것조차 애를 먹고 개업한지 한 달이 지나는 동안 고작해야 사건 한 건밖에 수임하지 못했던 참담한 처지에 빠졌던 나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뒹굴 거리며 이 모든 것은 어쩌면 판사로 있을 때 억울한 판결을 내린 자신의 업보가 미친 탓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 업보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미치게 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 자존심이 뭐니 하는 것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 약정한 돈 외에는 사건 당사자에게서 받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사건과 직접 관련한 접대를 삼가려고 노력했다는 따위의 변명을 하고 싶다. 허나 오십 보 백 보이다. 그런 부패구조와 완전히 단절 못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 같은 사람하고는 비교가 안 되게 훌륭한 모습으로 판사직을 수행하고 또 귀감이 되는 변호사를 해낸 분이 많다는 사실도 잘 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다 전생의 업이 현세의 인연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필자처럼 제대로 처세도 못했으면서 괜히 잘난 척 다른 사람을 비판하며 모가 나는 행동을 함은 결국 그 업의 무게가 너무 크고 인연의 얽힘이 너무 분주한 까닭이다. 나도 언제나 그런 분을 존경하며 우리 사법부에서 같이 일함을 기뻐했다. 난방이 제대로 안 되는 판사실에서 엄동설한이라 두터운 옷을 껴입은 채 세상일을 모두 잊어버린 채 오직 사건을 파악하고 판결을 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저런 성자(聖者)가 다시 있을까 하는 탄복을 금할 수 없었던 분도 지근에서 보았다. 그 분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해 판사로서의 직분을 대과없이 수행하겠다는 일념으로 청춘을 바쳐온 많은 판사들에게 내가 쓰는 글이 얼마나 불경하고 실례되는 일인 줄 잘 안다.
그러나 감히 부탁하자면, 내가 쓰는 이 글이 사법부에서 늘상 말하는 ‘인격체계가 그릇된 자가 근거 없이 사법의 염결성을 해치는 행위’ 따위로 취급하지 말아 달라. 나 역시 사법부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하는, 누구보다 사법부를 사랑하는 듯이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까지 흘려가며 사법부를 위해 항변하는 사람 못지않게 진실한 애정을 품고 있다. 다만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을 보호하려는 맹목적 방어적 의식이 주가 되어,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과거의 영화롭던 사법부를 다시 회복시키는 지고(至高)한 일이라는 착각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 본다. 그에 비하여 필자는 이 역시 착각에 불과할지 모르나, 좀 더 우리의 사법부가 미래지향적으로 국민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는 사법부가 되었으면 하는 염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착안의 포인트가 현격히 다르다고 본다. 어느 부장검사가 판사, 검사, 변호사의 공동모임에서 이런 말로 건배를 제의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나는 내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위하여 언제라도 이 한 몸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그 부장검사가 말한 조직은 진정한 검찰조직일까 아니면 자신의 머릿속에서 마음대로 생각해낸 왜곡된 마피아식의 조직일까?
사법개혁이 되지 않았던 이유
국민들은 연이어 터지는 이 사건들을 바라보며 하나의 의구심을 필시 가졌을 것이다. 그 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법개혁이니 뭐니 하며 요란스럽게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다시 우리 사회에서 터진단 말인가? 그럼 그 동안에 행해진 빈번한 사법개혁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권위주의 정권이 해체되고 우리 사회에 민주화의 열풍이 거세지며 사회 곳곳에서 상당부분 민주화의 결실이 주어졌다. 그러나 과연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서 ‘민주화된 사법부’를 가졌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본다면 그 대답은 쉽게 긍정적인 쪽으로 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일례를 들어보자.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유독 한국만 제외하고 재판과정에 직업 법관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참여시키게 하는 경험을 가져왔다. 이는 배심제 혹은 참심제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사법과정에 대한 국민 참여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 또 민주주의 실현의 징표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은가? 한국을 제외한 세계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해왔다면 분명 그만한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었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대법원은 2003년 상반기까지만 하여도 우리 국민은 아직 이를 도입할만한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투로 완강한 거부자세를 보였다. 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오만불손한 자세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흘러간 기록들을 잘 살펴보라. 과거 사법개혁을 주장하는 측에서 상투어로 내건 말은, 외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사법부의 독립이 훼손되어 왔으니 이를 시정함이 사법개혁의 본령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인가? 결과를 보자. 지금 사법부가 과연 외부에서 누가 공정한 재판을 저해하는 부당한 지시를 행하기 때문에 이런 파렴치한 일들이 발생하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법부의 독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좀 더 사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음은 또 다른 집단이기주의의 발로이다. 그 속에서 여전히 철밥통을 누리며 과거에 가지던 것 이상으로 더 가지며 살겠다는 혐오스런 의식이다. 이런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어서는 결코 올바른 사법개혁이 되지 않을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권이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적정하게 행사되도록 컨트롤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법개혁에서는 이 문제가 거의 안중에 없었으니 어찌 제대로 된 사법개혁이 이루어졌겠는가?
회칠한 무덤, 사법부
재판의 공정성을 해하려는 유혹은 그 재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했으면 하고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그 재판으로 어쩌면 자신의 인생 전체가 바뀔 지도 모름이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거기에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연고주의(緣故主義)가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이다. 판사건 누구건 연고를 무시하고 처신한다면 거만하고 무례한 인간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판사를 해보면 이 때문에 곤혹스런 입장에 처하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그 판단이 공정하다 아니다 하는 점은 거론도 하지 않으며-다시 낯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음성적으로 그 판사의 욕을 하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왜정 때 조선인이 설사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합격했더라도 법관은 잘 시키려 하지 않았고, 또 법관으로 발령은 내었다 하더라도 중요한 포스트에는 배치하지 않으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들의 말로는 부정하겠으나, 어찌 민족 차별적 관념이 없었다고 하겠는가? 다만 그들의 말에 의하면 반도출신들은 너무나 연고의식이 강하여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보아도 고을 수령으로 되어 일가친척이 찾아왔을 때 이를 어떻게 접대하여 인심을 잃지 않는가를 자세히 기술한다. 일가친척의 접대가 고을 수령으로서의 직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연고주의는 그만큼 뿌리 깊은 우리 민족의 본질적 정서가 아닐까? 내가 일본에 유학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이 실은 바로 일본사회와 우리 사회가 그 점에서 상당히 달랐다는 사실이었다. 일본도 수직적 네트워크의 사회이다.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네 편, 내 편을 유난히 가리는 사회이다. 그럼에도 그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과 상식이 언제나 살아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연고 같은 것을 이용해 그것을 깨려는 측에는 아주 엄격한 대응이 행해진다. 그래서 사회는 언제나 예측가능하다. 거기에다 맞추어 살아가면 되니 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살아가기가 편하다. 미국에서 유학하며 더욱 이런 점을 깊이 느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에서 우리 같이 법조브로커가 설쳐서 재판과정에도 영향을 미치고 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전혀 없다. 아마 그 나라 사람들에게 이 같은 말을 해주면 도무지 이해를 못하거나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무척 의아해하리라. 우리도 최근 연고주의를 극복하고 원칙에 따라 사회가 움직여나가게 하는 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 상당히 좋아지긴 했으나, 아직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멀었다. 그렇게 솔직히 인정하며 앞으로 더욱 노력해나가야 우리 사회의 장래가 보장된다고 본다.
사법시험은 왕조시대의 과거(科擧)를 연상시키며 치러져왔다. 지금은 상당부분 퇴색하긴 했어도 사법시험, 흔히 말하는 고등고시에 합격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인증으로 치부되었다. 그런 속에서 심한 특권의식이 자리 잡았다. 사법부에서 하는 일은 절대 오류가 없고, 설사 조그마한 잘못이 있어도 이는 사법부 내부에서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으니 외부인들은 여기에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일관해왔다. 등산 갈 때도 서열에 따라 발걸음을 맞추어 가야 한다는 그 지독한 권위주의, 서열의식이 자신의 양심과 법률에 따라서만 재판을 해야 한다는 헌법상의 원칙과 결코 상종할 수 없으며, 분명 어떤 마찰을 일으키리라는 점은 너무나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법부는 그 모든 내부적 모순을 애써 가리며 이 세상 제일가는 깨끗한 집단인양 겉치레에 분주해왔다.
법관의 잘못에는 터무니없는 관용이 베풀어졌다. 사법부에는 어떠한 결함도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법관의 잘못이 개입하여 재판이 그르쳐졌음에도,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 재판은 오직 정당했고 법관은 잘못을 전혀 범하지 않았다는 상투적인 회답이 민원인에게 돌아갔다. 이런 사건에는 국가배상청구도 허용되지 않았고, 검찰청에 고소해보았자 결과는 언제나 뻔했다. 이렇게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사건당사자가 입는 피해는 너무나 쉽게 무시되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사법부는 완전무결한 조직체라는 떠벌임이었다. 설사 어떤 부패사건으로 조금 문제화되는 면을 보여도 사건의 초기단계에서 그 은폐를 위하여 모든 힘을 동원했다. 언론도 협조해주었다. 검찰은 당연히, 아예 협조가 아니라 공범자의 의식으로 사건의 무마와 은폐에 힘을 기꺼이 빌려주었다. 최근 들어 검찰이 제대로 의식을 갖춘 법무장관들 밑에서 많이 변화했으나 아직은 멀었다.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은 사건, 검사 자신에 대한 평가가 상부로부터 직접적으로 내려질 수 있는 사건을 제외한 일반 사건에서는 과거와 별로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렇게 조직적인 상호공조 속에서 철두철미하게 하니 그런 부패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지워버리곤 했다. 그렇게 수 십 년 세월이 지나온 것이다.
판사들은 다른 나라의 사법부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그 왜곡된 질서 속에서 순응하기만 하면 자신의 장래는 보장되었다. 처음에는 숨을 죽이고 발걸음 하나에도 신경을 쓰며 조심을 해야 하나, 철저히 엄격하게 설정된 관료체계의 순서에 따라 점점 지위가 올라간다. 그 밑에 있게 되는 후배법관들에게는 자신이 해온 길을 그대로 밟아오도록 요구할 수 있었다. 웬만한 잘못을 저질러도 조직은 모두 알아서 보호해준다. 기계적으로 한번 정해진 서열은 해당 법관의 잘․잘못에 따라 바뀌지 않는다. 철저하리만치 철밥통이다. 그는 점점 편안해짐을 느끼며 그 조직이 안겨다주는 끝도 없는 안정감에 그게 바로 최선의 조직인양 생각하는 환상에 빠진다. 변호사 개업을 해도 전관예우(前官禮遇)에 따라 한 솥 밥을 먹는다는 의식 속에서 같이 지내온 동료, 선배, 후배 법관에게서 십시일반(十匙一飯)의 마음으로 특별대접을 받으며 몇 년간에 수십억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특권이었고, 남에게 내어주기 힘든,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기득권이었다. 여기에는 검찰이건 변호사회이건 입장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다. 재조의 경험이 있건 없건 많은 변호사들은 이런 체제 하에서 최대의 경제적 수혜자였다. 사건을 처리하는 판사나 검사와 사법연수원 몇 기의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목에 힘을 주며 한껏 높은 수임료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러한 것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양식이자 생존의 형태였다. 이에 의문을 품고 어설프게 비판에 나서는 사람은 범법조(凡法曹)에 형성된 아름다운 질서를 파괴하려는 것으로, 용서되지 않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한국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괘씸죄’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데, 법조계의 경우 이거 장난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속삭인다. 법조 3륜의 어느 하나라도 타격을 입으면 안 된다고. 그러면 자신들이 누리는 태평성대가 끝장날지 모른다는 위기위식이 그들 사이에서 간단없이 운위되며, 그들의 단결을 더욱 공고히 해왔다.
이 거대한 기득권체계에 저항하는 그 어떤 세력도 사람도, 저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체계, 우리 사회의 그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품성과 재질을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된 사법부를 아무런 근거 없이 해치려는 아주 고약한 세력이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 어쩌면 초헌법적인 정의에 따라 처단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어떤 판사가 국민의 입장을 생각하며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표시하였다는 이유로, 그에게 헌법 제12조에 따라 보장된 적법절차의 원칙까지 무시하고 단 한 번의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기회조차 봉쇄한 채 판사의 자격을 박탈해버린다. 법관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라 하더라도 국가의 최고법인 헌법을 무시하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나아가서 그들은 언론사 법조출입팀에게 그 판사의 사생활을 조작하여 알려주고, 인격적으로 형편없는 인간이 한 믿을 수 없는 말로 설득시켜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됨을 봉쇄하고, 기자들은 설마 대법원 공보관이 하는 말인데 거짓말이기야 하려고 하는 안이한 의식 속에서 대법원의 어처구니없이 비열한 공작에 그대로 따라가 버린다. 이런 일들이 공공연히 행해져 온 것이 우리의 사법부이다. 한 마디로 말해 속으로는 부조리와 모순으로 팽배했으면서도 위선과 가식으로 허우대만 잘 챙긴, 회칠한 무덤이었다.
피를 토하며 절규하는 사법피해자들
국민들은 무시한 채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사법부, 이를 위해 저지른 그 어떤 은폐나 공작도 오직 관념상의 아름답고도 화려한 사법부의 외관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사법부를 지켜나가는 용기 있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바른 말을 하는 후배 법관을 무저항상태로 세워두고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치며 질타하는 것이 흔들리는 사법부를 곧추 세우는 의로운 행위이었다.
이런 도착된 현실관, 의식 속에서 전국에는 불행히도 많은 사법피해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자신들의 억울함을 피를 토하며 절규한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가? 그래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이 사법부요 검찰인데, 거기에서 불이익한 재판과 처분을 받았다고 해서 저렇게 소란을 떠는가? 국가인권위원회도, 국민고충처리위원회도 그들에겐 손을 든 지 오래이다. 물론 사설의 변호사 사무실에 가보았자 대답은 뻔하다. 그들은 현대판 유민들이다. 우리의 역사상 이런 비참한 유민생활을 한 예는 적지 않다. 최근에는 민가협 소속 회원들이 그러했으나 민주화가 되며 그들의 처절한 한은 상당부분 해소되었다. 그러나 사법피해자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막다른 투쟁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사법피해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는 점 외에 거대한 공권력을 상대로 하여 싸우는 동안에 그리고 이 사회의 편견에 휘감겨 살아오는 동안에 정신이 극히 피폐해져 있으며 나아가서는 가정이 박살난 사람이 대부분이다. 또 기존의 법질서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으로 그들 옆에 서면 거의 살의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법질서에 대든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법부에서 그리고 검찰에서 언제라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었다면 그런 체제로 운용되어 왔다면 우리는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제 사법부여, 조금은 진실해지자. 가식을 조금은 벗어던지고 말해보자. 한 끼의 맛있는 식사를 위하여 판결을 팔아버리는 일도 왕왕 행해져 왔던 것이 우리 사법부가 아닌가? 재판 날 점 찍어둔 변호사를 가장 뒤에 남게 하여 그로부터 식사를 대접받으며 한 잔 술을 피곤한 몸속으로 넣어 피로를 잠시나마 잊으려고 했던 일은 아주 흔했다. 하지만 그 회합에서 그 변호사가 바로 그 날의 사건에 대하여 소정외 변론(所定外 辯論)을 행할 때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판사도 인간인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그다지 죄의식을 갖지 않고도 행했던 이런 일들에서도 부정의 소지는 없을 수 없었다.
실비니 떡값이니 전별금이니 하는 명목으로 받아들인 돈 봉투는 과연 재판부의 노고를 이해해주는 순수하고 갸륵한 심정에서 나오는 무채색의 기부일까? 필자가 처음 법관으로 발령받아 첫 추석이 되어 봉투를 들고 온 연세 많으신 변호사에게 그 봉투를 받지 않으려고 하니, 그 분이 보인 처량한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결국 그 봉투를 받아버렸다. 그런데 점점 그 봉투를 받는 데 맛을 들였다. 힘든 사건을 하나 잘 판결해줬는데, 인사 한번 들어오지 않는 변호사는 예의를 모르는 변호사로 낙인찍는 어리석은 판사로 변해갔다.
이번 김홍수 게이트에서 적나라하게 터져 나온, 판사들 세계의 은어로 통용되어온 ‘관선변호’(官選辯護)는 또 어떤가? 선배나 동료법관이 사건청탁을 하여오는 것은 심심찮게 본다. 그의 뒤에다 관선변호인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는 있어도, 현실적으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기란 소위 한솥밥을 먹는 처지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런 유의 은어로 또 ‘고문판사’(顧問判事)란 은어도 있다. ‘고문변호사’에 빗대어, 판사로서 어떤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을 위해 법원 내에서 설치고 다니며 청탁을 일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적어도 고문변호사보다는 고문판사의 말이 더 잘 먹혀 들어가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뻔 한 일이다. 우리가 좀 더 솔직해지자면 법관들의 비리연루는 결코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다르겠으나, 판사실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관련하여 돈 봉투를 받는 형편없는 인간도 있다. 이번에 조관행 부장판사가 판사실에서 돈을 받은 것을 갖고 ‘판결거래’를 했다고 보도가 되었으나, 그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판결을 놓고 아예 돈에 의한 노골적인 거래를 행하는 판사도 있다. 보석이나 적부심으로 피고인을 풀어주면 변호사 사무실에 연락하여 성공보수금을 제대로 챙길 기회를 주고, 또 판사실에는 봉투를 갖고 들어오게 한다. 만약 이런 순환적 거래의 패턴을 따르지 않는 변호사에게는 은전(恩典)은 더 이상 베풀어지지 않는다. 혹여 변호사가 깜빡하여 실수라도 한번 하면 그 뒤 몇 사건은 각오해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결코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니다. 필자는 조관행 부장판사의 혐의사실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가장 많은 뇌물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가장 운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심지어 새 차를 샀다고 변호사들을 하나씩 호출하여 대금의 일부씩을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철면피도 보았다. 그 돈, 적어도 몇 백만 원의 돈을 들고 들어간 변호사는 그 판사가 자신이 원하는 아주 중요한 사건에서 틀림없이 좋은 판결을 내려줌을 확신한다. 그래서 그 돈이 헛되게 날라 간 돈이 되지 않게 충분히 처방을 쓸 수 있다.
우리의 사법부는 이런 인간들에 대하여도 한 없이 관대하였다. 조직의 보호막은 그들에게도 언제나 자애롭게 펼쳐졌다. 징계절차는 개시된 적이 없고, 민원인에 대한 회답은 언제나 똑 같았다. 사법부는 여전히 순백(純白)의 청렴한 조직체로 누구도 이에 대해 반론을 감히 제기할 수 없다는, 쇳소리 쩡쩡 나는 호령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국민들의 원망과 한은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
다행히 최근에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이래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그는 우리 사법부가 과거에 잘못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취임 전에 행하였다. 이 당연한 말을 그리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 사법부의 수장이 이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선생 이래 수 십 년 세월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사법부에는 절대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허황된 논리로 치장하며 그 속에서 부패를 은폐시키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기에 급급해온 것이 그토록 오래 되었다.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말을 다름 아닌 사법부의 수장으로 될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것이 그저 놀랍다. 그 용기는 하늘을 찌르는 기상에서 나옴이다. 그는 또 우리의 사법부가 이제 국민의 사법부로 거듭 나야 함을 누누이 말해왔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사법부는 대법원장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든 법관에게 거의 절대적으로 소신에 따라 재판을 할 수 있는 헌법상의 보호가 주어진다. 대법원장이라고 해서 재판상 어느 법관에게 구체적 지시를 할 수는 없는 것이 바로 우리 헌법원칙이고 법치주의의 요체이다. 문제는 기존의 잘못된 사법부의 관행들이 너무나 오래 계속되었고, 적지 않은 법관들은 여전히 이에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대법원장 혼자 깨어있다고 해서 그리고 몇 사람의 훌륭한 법관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사법부를 기존의 모습에서 환골탈태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너무나 나이브(naive)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들이다. 국민들이 나서서 ‘열린 사법부’, 그 구성원들의 집단이익보다 국민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법부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과거사 청산
그러기 위해서 우선 시급한 과제가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이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왜정 때의 행위에 대한 과거사청산이 오랫동안 논란되었다는 점에서 일 것이다. 사실 왜정의 시기가 너무 길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해방 후에 지금까지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는 점에서 이 과거사청산은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일그러진 사법부의 구조 하에서 피해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 구제를 외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있다. 그 증거 같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혹자는 우리 민사소송법이나 형사소송법의 절차에 따라 재심을 청구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실정을 모르는 말이다. 우리 소송법상의 재심절차는 그 사유나 기간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될 뿐이다. 기존의 재판이 모두 공정하게 행해졌다는 점을 전제로, 그 재판 후에 형성된 법률관계를 우선시하겠다는, 법적 안정성을 보다 중시하는 입장이다.
우리도 이제 저 불쌍한 사법피해자들의 말에 한번 귀를 빌려주었으면 한다. 그들은 잘못된 재판으로 모든 것을 잃고 법질서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나 그들 역시 소중한 우리 국민들이다. 인혁당 사건과 같은 정치적인 사유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구제도 하루 빨리 되어져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 사회에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반의 재판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 관심의 영역밖에 있다. 대법원장의 인식대로라면, 우리 사법부가 때때로 잘못된 재판을 행해왔던 것이라면, 그 사건이 정치적인 것이건 그렇지 않고 일반 사건이건 간에 똑같이 취급을 받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국가에서 사법피해자들을 심사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위원회가 여러 모로 판단하여도 정말 억울하다고 판단되는 사건은 특별히 바로 재심이 허용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다만 그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기존의 탈 많은 법조체계와 별로 연이 닿지 않은 젊은 법조인들과 우리 사회에서 건전한 상식을 갖춘 시민들로 구성되었으면 한다. 물론 재심을 허용한다고 해서 바로 구제가 취해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법원의 재판을 통해서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야 최종적인 오류시정이 되는 것이니, 현행 헌법상의 사법국가주의(司法國家主義)와도 어긋남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과거 헌법상의 원칙을 무시하며 사법부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쫓아 낸 법관들에게 다시 한 번 그 사유를 심사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법관보다 헌법상의 지위가 더 보장된다고 할 수 없는 교수들에게, 더욱이 그들에게는 형식적으로는 소명의 기회 등이 주어졌음에도 다시 재심사를 부여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새로운 법의 제정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사법부가 당연히 취해야 할 조치라고 본다.
이러한 과거사 청산 작업을 통하여 사법부는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새롭게 형성되는 기풍을 진작시킬 수 있다고 본다. 한 가지 부연하자면, 대법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사법부의 과거사청산을 내걸었으나 지금껏 진척된 것은 하나도 없다. 불길한 조짐이라고 본다.
징계절차의 개선
더 이상 사법부는 무흠결의 완전한 조직체라는 사법무결점주의가 통용되지 않도록 하려면, 비위를 저지른 법관에 대한 공정 무사한 징계절차가 행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법관징계위원회가 사실상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법관비위은폐를 도와왔던 점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법관징계위원회의 구성원을 대폭 바꾸어야 한다. 법관 외의 외부인사가 당연히 다수 참여하여야 한다. 그리고 법관의 비위가 신고나 접수되면 반드시 법관징계위원회가 소집되도록 의무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제도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과연 법관징계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할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잘 알듯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집단이건 그 내부를 향한 온정주의의 뿌리는 너무나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사법개혁 작업의 완료
지금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채 지루하게 시간을 끌고 있는 사법개혁작업의 소산물인 법안들은, 많은 부족한 점이 있긴 해도 실은 과거의 사법개혁작업과는 그 틀의 차원을 달리 한다. 요점은 두 개다. 한국식 로스쿨의 창립과 한국식 배심원제의 채용이다. 전자는 우리 법조계에 아직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연고주의를 극복해나간다는 점에서나, 법조인들의 지나친 특권의식을 부수고 시민사회 구성원들과의 동질성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급변하는 글로벌 세상에서 우리 법조계가 경쟁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하여 다른 대안이 없을 만큼 꼭 필요한 제도이다. 후자는 더 말 할 필요가 없다. 세계의 모든 국가가 이 제도를 채용하였거나 채용하고 있는데 왜 우리만 오직 직업법관들에게 법적 분쟁의 해결을 맡겨야 하는가? 그 조직이 연고주의의 만연이나 과도한 관료주의, 계급주의로 심각한 구조적 결함을 갖고 있음에도 말이다.
나아가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에 관해서 야당의 완고한 반대 입장에 재고가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 사회에는 법조 전체가 강력한 파워집단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불행히도 법조 안에 들어있는 세 부류, 법원, 검찰, 변호사회는 지금까지 그 양에 있어서 엄청난 이익을 공유하며 아주 결속력이 강했다. 그래서 법조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화기능은 제대로 수행될 수가 없었다. 현재 일반적인 예측으로는, 이 기관이 설치되면 비리를 저지른 판․검사에 대한 진정이 봇물 터지듯 접수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존의 수사, 재판 기관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막혀있었던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는 앞으로 법원과 검찰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엄청난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나라당이 역으로 제안하는 특별검사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왜 한나라당은 이 법안에 굳이 반대하여, 로비에 아주 취약한 우리 사법체계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억울한 사람들의 가슴에 맺히는 한을 외면하려고 하는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혹시 과거에 잘못된 행위를 저지른 판사나 검사들이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그렇게 했으니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다면, 그 법에다 시행일 이후의 행위에 대하여만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가 권한을 갖는 것으로 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사법부에 대한 배려
이렇게 숨 가쁘게 말해오다 보니 마치 사법부가 비리의 온상인 양 하는 인상을 주었을까 겁이 난다. 그렇지 않다. 처음에 말한 대로 사법부에는 올곧게 자신의 직무를 다해온 수많은 법관들이 존재한다. 전체적으로 평가한 사건처리의 능률성도 뛰어나다. 다만 그러한 현상과는 별도로,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사는 이상 몇 사람의 선의와 헌신에 기대어 훌륭한 조직운용을 기대하는 대신에 제도적으로 우리 사법부를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게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또 일부 위선과 가식의 탈 안에 온존시켜 온 모순과 부조리를, 사법부 역시 국민 전체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드러내고 없애어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법부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우리 사법부에 아주 결여되어 있던 올바른 재판을 위한 통제의 시스템을 확보함이라고 본다.
이런 작업의 과정에는 사법부에 대한 배려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사실 법관들만큼 격심한 정신적 노동을 하는 직업은 우리 사회에서 다시 찾기 힘들다. 대학교수가 그에 버금갈 것이나, 양자를 다해본 필자로서는 법관 쪽이 훨씬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소한 대학교수에게 인정되는 안식년의 제도를 법관에게도 인정해주고, 그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한 개선도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일본에서처럼 재판부 하나에 법정 하나-일본의 재판부 개념은 우리와 조금 다르기는 하다-가 허용된다면, 법관들은 훨씬 효과적으로 재판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거듭 생겨나는 비리, 부조리로 지리한 장맛비, 그에 이은 축축한 불쾌감처럼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법부가 아니라, 여름날 느티나무 잎사귀를 스쳐가는 상쾌한 바람 같은 존재로 국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법부의 자정노력과 시스템의 개선 외에 법관들이 긍지를 가지고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설정해줌도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 소요되는 재원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회적 비용으로 선선히 수용해나갈 수 있는 자세가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재는 또 다른 척도가 되리라 믿는다. [lawshi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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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평 (申平)
● 1956년 대구 출생
● 경북대학교 법과대학 법학부 헌법학 교수, 앰네스티 법률가위원회 위원장, 사법연수원 외래교수, 한국비교공법학회 부회장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동 대학원 법학과 졸업
● 서울, 인천, 대구, 경주 법원에서 법관역임, 대구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 활동, 사법개혁국민연대 상임대표 역임
● 일본 최고재판소 외국재판관 연수원, 일본 게이오, 히토쯔바시 대학 객원연구원, 미국 Cleveland State University의 Visiting Scholar
● 논문 및 저서 : ‘사법개혁을 향하여’, ‘명예훼손법’ 등 7권의 저서와 ‘한국 사법부의 근본 문제점 분석과 그 해소방안의 모색’ 등 40여 편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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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개혁을 향하여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의 과정을 거쳐 왔다. 특히 인간의 인권을 전면의 기치로 내건 프랑스 혁명 이후 역사의 흐름은 더욱 세차게 물길을 헤쳐 왔다. 희망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지배했다. 물론 이 같은 역사의 흐름에 거스르는 반동과 퇴행의 국면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보다는 오히려 역사를 좀 더 빠르게 진보시키려는 개혁의 동인(動因)이 역사 속에서 작용하며 우리의 의식을 항상 일깨웠다. 역사상 개혁 작업이 대부분 그에 참여한 사람들의 상당한 희생을 요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희생을 밟고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인류의 가치, 유산이 형성되었다.
사법개혁이란 사법 분야에 있어서의 개혁이다. 사법 분야에는 고도의 전문성, 비대체성, 기능성의 특성이 존재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사법개혁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라. 한국의 사법은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로 국민을 배제한 사법으로 운용되어 왔다. 오히려 한국 사회 다른 어떤 분야보다 더 개혁 작업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사법 분야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사법개혁이 마무리될 때 한국 사회 전체는 이미 상당한 선진사회로 진입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사법개혁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며 최종적인 과제인 동시에 가장 그 작업이 어려운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우리는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민주주의라는 기치 아래 모든 국정이 포섭되게 노력하는 것이 위정자나 국민의 의무일진대, 세계 각국의 사법제도와 견주어 국민을 철저히 배제시키는 한국의 사법은 여하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 공동체가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헌법이념에 적합하게 한국의 사법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국가의 실현을 이룩하고자 하는 헌법의 정신에 따라 사법의 운용은 확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사법 분야에서 이제껏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국민을 위해 일한 많은 훌륭한 분들이 있어왔다. 국민들은 그들을 존경했다. 지금도 이러한 상찬을 받을만한 다수의 법조인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같은 미시적 시각에 매어달릴 수만은 없다. 한국의 사법이 잘못된 제도에 기반 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깊은 어두움과 국민들에게 작용하는 질곡은 너무나 심각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법에서는 지연, 혈연, 학연에 의해 형성되는 네트워크 속에서 불공정한 사건처리는 여전히 항다반사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돈에 의해 거래되는 판결이나 검찰의 처분도 없지는 않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법피해자가 양산되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가슴에 박힌 못이 만들어 내는 비참한 원성은 이 땅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다. 온상에서 나와 찬 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서보라. 이 사실을 실감할 것이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사법부나 검찰이 일반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능력과 자격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라는 의식이 떠나가질 않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국민을 무시하고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라는 비뚤어진 특권의식을 낳고, 이것은 다시 수다한 문제를 파생시킨다.
한국의 사법부나 검찰은 극단적인 관료화, 계급화된 현실 속에서 엄격한 폐쇄적 질서를 형성하였다. 그 속에서 구성원들의 이 사회를 위한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역할은 너무나 쉽게 매몰되기 쉬웠다. 사회 전체보다는 항상 사법부, 검찰의 이익을 우선하는 집단이기주의의 커다란 함정에 빠져서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사법이 폐쇄적 조직체를 이루며 정상적인 조직이 반드시 갖춰야 할 자정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내부에서 생기는 비리나 부정을 숨기기에만 급급하였다. 국민의 눈에 비추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판사나 검사도 폐쇄된 조직체가 마련해주는 보호막 속에 안주해왔다. 신상필벌의 원칙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직의 기강은 극히 해이해졌다. 이러는 가운데 국민의 이익을 고려하기보다는 상급자의 눈에 벗어나지 않게 무난히 처신하고, 정치적 선을 잘 찾아 위로 올라가는 것이 중요했다.
이 같은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는 사법의 구조 하에서 법학교육은 난맥상을 빚어내었다. 지독한 암기식 공부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법시험제도는 정상적인 법학교육을 질식시켜 왔다. 교육의 현장은 살벌, 황폐의 일변도를 걸어왔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법학교육은 거의 조금도 다름없이 답습되었다. 이 잘못된 현상은 단회적인 시험을 통해 법조인을 선발하는 사법시험제도에 모두 기인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닫힌 사법의 암울함에서 벗어나 우리는 열린 사법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사법개혁의 핵심이다.
열린 사법은 국민을 우선시하고, 국민이 주권자로서 가지는 기본권을 가장 소중히 하여 그곳에 국민의 숨결이 통하게 하는 공개적이고 투명한 사법을 말한다.
열린 사법을 구현하기 위해서 사법 분야에 일부 존재하는 부패현상이나 연고주의 현상에 대한 일벌백계의 강한 의지가 작용해야 한다. 더 이상 억울한 사법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마땅하다. 법조의 구성원들도 이제 국민들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국민들과 웃음과 울음을 함께 하며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조직의 운용상 꼭 필요한 한도에서 조직의 규율과 상하체계를 유지하되, 나머지는 과감히 풀어 구성원의 인간적 존엄성을 보장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하여 국민을 위한 사법체계를 구성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순에 가득 찬 지금의 법학교육도 다른 외국의 예를 본보기로 삼아 대폭 수술을 받아야 한다. 나아가 참심제도나 배심제도 등 새로운 재판제도나 법관의 선출제 혹은 법조일원화의 도입도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모든 편견과 선입견, 집착에서 해방되어 국민을 위한 사법, 열린 사법의 구현만을 화두로 삼자.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의 우리 사회가 간절히 요구하는, 가장 중요하면서 마지막 과제인 사법개혁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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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대(法臺), 변호사석, 방청석
1. 법대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
대학 동창회 망년회에서였다. 법원에 있는 동기가 “너는 왜 그렇게 사법부에 비판적이니?”하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내가 법대에 앉았을 때 안보이던 것이 변호사석에 앉으니 보였다. 지금은 방청석에 있으니 변호사석에서 안보이던 것이 또 보였다.”
법대가 제일 높고, 다음이 변호사석, 가장 낮은 곳이 방청석이다. 그럼 법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해도 좋다.
일반화하기 어려운 얘기라서, 그리고 제한된 지면이라서 필자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하겠다.
2. 변호사석에서
아시는 분은 아시겠으나 나는 타의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그런데 사연을 아는 시골사람들은 사건을 위임하려 들지 않았다. 변호사 문을 연지 한 달이 지났는데 기껏 한건밖에 수임되지 않았다.
어린 자식들의 철없는 눈망울이 떠오르며 잠이 오지 않는 나날이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때 조금 깨달았다. “아! 이 모든 것은 업보다. 내 전생의 업보도 있으려니와 내가 판사로 있으며 했던 많은 잘못된 판결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업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판사로 있으며 나는 자신이 접할 수 있었던 조직 내 구성원들의 잘못된 언행에 비판적이었으나, 그 범주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나도 한때 접대골프를 부지런히 쳤고, 한 주일에 한번 이상 요정에 출입하며 공술을 퍼마셨다. 남과 똑같이 행동하며 그들을 비판했으니 나는 어쩌면 도가 심한 위선자였다.
그렇게 시작한 변호사 생활이었다. 하지만 변호사석에 내려오니 법관들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많은 잘못들에 눈이 뜨였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과거모습이기도 했다. 재야에 계신 독자들은 내가 이를 굳이 거시하지 않아도 어떤 것을 말하는지 잘 아시리라. 법관 재직 시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갚을 요량으로 약간은 다른 변호사하고 다르게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며 나는 다시 일상의 포로가 되었다. 무의미하고 밋밋한 나날 속에서 돈에 집착하는 생활이었다.
홀연 이게 아니다 싶었다. 이대로 살았다간 제 명에 못 죽지 싶었다. 기회가 온 김에 냉큼 대학으로 들어왔다.
4. 방청석에 서니
사무실을 여전히 열어두긴 했어도 변호사업은 대충 정리했다. 홀가분한 입장이었다.
우연히 사법피해자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차마 눈을 뜨고는 보기 힘든 참상에 놓여있었다. 그들의 법조계에 대한 처절한 원한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나도 그들의 주장이 대부분 실정법에 대한 무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 줄 잘 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의 사법불신이다.
방청석에 서니 이 지독한 사법 불신의 실상을 환히 볼 수 있었다. 법대에서, 변호사석에서 결코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하나의 현실을 두고 이처럼 확연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섬뜩한 일이다. 단순히 사법피해자들을 비롯한 일부국민들이 도착된 현실을 보는 것이라고 책망함으로써 끝낼 수 없다. 그러기에는 분명 우리의 법조시스템은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사법피해자들과 접하며 내내 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일을 어이할꼬, 어이할꼬!” 국가의 근간인 사법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 그들에게 어떤 처방을 제시할 수 있을까? 시종 심한 무력감과 막막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5. 어찌하면 좋을까?
정신을 조금 추슬러 간략히 처방에 관한 몇 마디를 해보자.
재판제도로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배심제 혹은 참심제는 반드시 시행됨이 마땅하다. 이 지구상에서 한국만이 그 예외로 시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 능력에 다소 차이가 있어도, 나이를 든다는 것은 이상하게도 공통되는 인격적 기반을 형성하게 해준다. 주위의 고통 받고 슬퍼하는 사람을 보며 때로는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나이가 지긋해져야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며 비로소 자신의 부족하고 못난 점을 돌아보며 타인과 자신의 공유점을 확인하다. 국민들은 바로 이런 연륜을 가진 사람들에게 재판을 받고 싶어 한다. 이 같은 재판관은 법대에 자리 잡고 있어도 훤히 세상사를 내려다본다.
법조일원화, 법관의 장로화가 현재의 직업법관시스템과 괴리되는 면이 없지 않으나 그 도입이 꼭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이를 절실히 원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연고주의와 완전히 절연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사법부나 검찰이 표명하고 실천해가야 국민의 법조신뢰는 확보된다. 훌륭한 법관은 앞으로 내세우고, 그렇지 못한 법관은 뒤로 돌리는 정도로서도 제도로서의 자기정화의 큰 얼개는 이루어진다고 본다. 물론 한편으로는 법관들이 우리 사회를 위하여 흘리는 땀에 대하여 보다 적절한 대가를 치룰 수 있게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대한변협신문 원고]
첫댓글 선진국 후진국의 기준은 "국민들이 예측이 가능한 사회" 인가 아닌가의 여부에 따라 나눠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연고나 뒷거래을 통해 원칙과 상식이 번번히 깨지고 있으니.. 전혀 예측불가이고 이로인한 피해자들의 스스로를 구제하려는 힘든모습을 보아도 정말로 비효율적인 사회입니다.--;
신평교수님의 글 많은 생각을 해서 쓰신것입니다 여차하면 또.... 우리가 느끼고 있는점을 사심없이 토로해 주신점 우리나라 사법부 수장이 이런 글의 깊은 뜻을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이글이 법원,검찰청을 방문하는 아니 경찰서에 방문하는 모든자가 필독하기를
훌륭하신 분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심없이 현 사법부의 부조리에 대하여 질타할 수 있는 소신있는 법종인의 메아리가 더 넘쳐나길 기대해 봅니다. 신평 교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사법피해자들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만치 사법부에 대한 반감으로 이 일을 어찌할 꼬 라는 표현이 딱 맞을만치 자신들의 소중한 삶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법피해자들의 대부분이 열심히 선량하게 살았기에 바보처럼 당한 일이라 자신의 소중한 삶을 포기하면서 까지 사법부에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열심히 살아왔던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지 조차 , 사랑하는 자식들조차 보살필 어미가 될지도 모른 채 울분속에서 하루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법률가에 대한 항의를 못가진자들의 시샘 정도로 폄하하고 귀를 막는 찌질한 인생들도 판사출신인 신선생님의 추상같은 사법비판 앞에서는 끽소리 못하죠. 비판도 동급에서 해야 먹혀드는 속물 사회현실이 안쓰럽습니다만, 아무튼 신선생님같은 분이 있다는건 우리 사회에 큰 복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고보면 이 사건에 대해 한 소리 안하실 분이 아닌데, 이 분 약력을 보니 어느 정도 짚이는 데가 있군요..^^;; 연이란게 참...ㅎㅎ
신평교수님, 등 이분들도 아마 사법개혁 등을 주장하다가 , 상심하여 교수직으로 가셨다고 하며 윗글과 같이 속상하여 애를 태우고 하는 분입니다. 현대판 한국 사법부정 피해 유민 들의 속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고 , 본건에도 한마디 한마디 도움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너무나도 존결 받으실 만한, 진정한 판사님 이십니다.
신평교수님!!!!!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사법개혁이 꼭 이루어져 억울한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가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