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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 한라급 출신 천하장사, 26년 만에 탄생하나기사입력 2010-09-20 16:00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기면 정치다. 반대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면 그것이 바로 스포츠다. 많은 이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도 언제든 기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속 스포츠 씨름이 오랜 세월동안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체구가 작은 이가 큰 이를 모래판에 눕히는 반란이 언제든 허용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1983년 제1회 천하장사대회에서 체중 92㎏의 한라장사 이만기가 120㎏ 이상의 거구들이었던 이준희, 홍현욱을 차례로 꺾으며 씨름은 전 국민의 스포츠가 됐다. 엄혹한 시대에 씨름이야말로 ‘힘있는 자’에게 억눌렸던 ‘힘없는 자’들의 대리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 시대를 풍미했던 장사들은 중년이 됐고, 이제 씨름은 무형문화재가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여기 ‘제2의 이만기’를 외치며 씨름 중흥을 위해 기적에 도전하는 사내가 있다. 한라급 출신으로 천하장사를 꿈꾸는 김기태((30,현대삼호중공업)가 그 주인공이다.
한라급(105kg 이하)으로 104kg에 불과한 체중에도 150kg이 넘는 거구들에 연전연승을 거두고 결승까지 진출한 김기태가 한 번 더 기적을 연출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8강전에서 153kg의 김승현(연수구청)을 제압하고, 4강전에서도 142kg의 백성욱(용인백옥쌀)을 2대 0으로 꺾은 김기태라면 우승도 꿈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승전 상대는 170kg의 거구 윤정수(수원시청). 체중 차가 무려 64kg나 됐다. 30, 40kg 차이라면 모를까. 60kg 이상이면 제아무리 김기태라도 윤정수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승삼 대한씨름협회 전무도 김기태가 결승에서 기적을 연출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과거라면 김기태가 윤정수를 이길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프로씨름의 초창기였던 1980년대만 해도 이만기, 손상주, 나 같은 한라장사들이 백두장사를 모래판에 누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당시 백두장사들의 평균체중은 90~110kg 사이였다. 한라급과 많아야 20~30kg 차이였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백두장사의 평균체중이 130kg로 늘어나며 한라장사와 40kg 이상씩 차이가 나게 됐다. 거기다 백두장사들의 기술도 상당히 향상됐다. 한라장사가 백두장사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줄어들었던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태가 윤정수를 이긴다는 건 기적보다 더한 기적에 가까웠다.” 김기태라고 모를 리 없었다. 30~40kg이면 기술씨름이 통하겠지만, 50kg 이상 차이가 나면 ‘달걀로 바위치기’였다. 아니 달걀로 바위를 쳐봐야 흘러내린 달걀 때문에 바위만 더 단단히 굳어질 뿐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씨름은 ‘역칠기삼(力七技三)’해서 ‘힘이 7, 기술이 3’이 차지하는 스포츠다. 30~40kg 차이면 안다리걸기, 잡채기 등 여러 기술로 ‘힘 7’의 간격을 줄이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50kg 이상 차이가 나면 한계가 있다. 왜냐? 그땐 ‘역칠기삼(力九技一)’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김기태도 윤정수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건 바로 빠른 몸놀림으로 기습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대개 한라급 선수들은 백두급 선수들과 싸울 때 지구전을 선호한다. 체력소모가 심한 백두급 장사들이 제풀에 꺾일 때를 노린다. 하지만, 김기태는 그 반대의 작전을 펼쳤고, 윤정수가 방심한 틈을 타 빠르고 화려한 잡채기로 첫판을 따냈다.
거구 윤정수가 맥없이 모래판에 쓰러지는 걸 보고 관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윤정수는 강했다. 둘째 판과 셋째 판을 되치기와 배지기로 김기태를 쓰러트리며 승부를 2대 1로 돌려놨다. 기적은 파란으로 그치는 듯했다. 하지만, ‘다윗’ 김기태에겐 비장의 물맷돌이 있었다. 안다리걸기(주 : 자신의 오른쪽 다리로 상대편의 왼쪽 다리를 걸어 샅바를 당기며 상대편의 상체를 자기의 가슴과 어깨로 밀어 넘어뜨리는 기술)였다. 넷째 판에서 김기태는 윤정수를 드는 척하다가 안다리걸기를 구사해 승리를 거뒀다. 만약 남은 다섯째 판에서 김기태가 이겨 3대 2로 경기가 끝난다면 씨름계가 발칵 뒤집힐 게 자명했다. 64kg의 체중 차이를 극복한 기적이 연출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기태 역시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던 이만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다섯째 판이 시작되고, 김기태는 거칠게 윤정수를 몰아세웠다. 그리고 드디어 ‘한번 걸리면 소도 쓰러트린다’는 안다리걸기를 정확히 구사했다. 이제 남은 건 김기태가 어떤 자세로 모래판에서 포효하느냐였다. 작은 이가 큰 이를 매치는 씨름의 매력
(사진=한국씨름협회) 눈을 떴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김기태의 몸은 물에 젖은 이불처럼 무거웠다. 대개 다섯째 판까지 경기를 펼치면 씨름선수들의 체력소모는 마라톤을 뛰었을 때와 비슷하다. 탈진은 기본이다. 경기가 끝나고 김기태가 곧장 숙소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김기태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휴대전화를 들었다. 이내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수고했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맑았다. 그랬다. 김기태는 1품(준우승)에 올랐다. 필살기인 안다리걸기에 성공했지만, 모래판에 먼저 어깨가 닿은 건 김기태였다. “안다리걸기에 성공하고도 상대를 넘기지 못한 건 그때가 처음이다. 원체 윤정수가 거구다 보니까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사실 셋째 판부터 샅바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체력이 고갈돼 스스로 경기를 포기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지 싶다. 정말 백두급 선수를 쓰러트리고 통합장사에 오르고 싶었는데….” 김기태의 솔직한 고백이다. 사실이다. 2007, 2008년 3연속 통합장사 오른 윤정수는 백두급 선수치고는 지구전에도 능한 최고의 선수였다. 경기가 길어지면 질수록 손해를 보는 쪽은 김기태였다. 그렇다면 김기태가 수많은 패배 가운데 유독 그 경기를 아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말대로 백두급 선수를 쓰러트리고 통합장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83년 프로씨름 출범 이후 역대 천하장사 가운데 한라급 출신은 이만기(인제대 교수)가 유일하다. 1983년과 1984년 당시 한라급으로 출전해 백두급 선수들을 차례로 이기고 대권을 차지했다. 이만기의 우승으로 ‘힘’에 의존했던 씨름은 비로소 ‘기술’에 눈을 떴다. 그러나 그 이후로 다시는 한라급 출신 천하장사가 배출되지 못했다.
이만기도 1984년 11월부터 백두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평소 100kg를 유지하던 체중을 대회 때마다 한라급(95kg)에 맞춰야 하다 보니 7kg씩 감량해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극심한 체중감량 때문에 천하장사대회에서 백두급 선수와의 경기 시 이미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다 한라급엔 마땅한 연습상대가 없던 것도 이만기가 체급을 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한라장사를 7번이나 제패했던 이만기는 체급을 올리고 18번이나 백두장사에 올랐다. 천하장사도 한라급일 때 2번을 차지했지만, 백두급으로 출전해선 8번이나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만기 개인에겐 백두급 승격이 행운으로 작용했을지 몰라도 전체 씨름계로선 흥행에 치명타였다. 1983년 프로씨름이 출범했을 때 경이적인 TV 시청률 61%를 기록한 것도 이준희, 홍현욱 등 거구들을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구의 이만기가 차례대로 모래판에 쓰러트렸기 때문이었다.
6월 16일부터 19일까지 경북 문경체육관에서 ‘2010 단오장사씨름대회’에서 만난 씨름팬들은 그때의 감동을 잊지 않고 있었다. 대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성태(46) 씨는 27년 전인 1993년 4월 14일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가 열린 장충체육관에 있었다. “씨름은 시골 장터에서나 보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천하장사대회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는 매력적인 스포츠였다. 작은 체구의 이만기가 거구들을 하나 둘 쓰러트릴 땐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특히나 1980년대만 해도 정치적으로 얼마나 암울했던 시기였나. ‘강한 자’가 뭐든 독식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약한 자’가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건 씨름이 유일했다.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이 이만기에 열광한 것도 우리들의 한을 대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씨름팬 유명선(39)씨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지금도 한라급의 ‘털보’ 이승삼이 ‘인간 기중기’ 이봉걸을 매치고, 역시 한라급의 ‘기술 씨름의 달인’ 이기수가 ‘람바다’ 박광덕을 뒤집기로 넘길 때를 잊지 못한다. 그때부터 씨름에 묘미에 푹 빠져 시간만 되면 씨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천하장사가 거구들의 전유물이 돼 버렸다. 들배지기, 뒤집기 등 호쾌한 화려한 기술이 사라지고, 잡채기, 빗장걸이, 발뒤축거리 등 잔기술과 힘에 의존하는 씨름이 대세가 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씨름이 아예 스모가 된 것 같았다.” 지난해 11월 30일 오랜 내분을 마무리 짓고 최태정 회장 체재로 재출범한 대한씨름협회가 ‘제2의 이만기’를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면 거구를 매칠 수 있는 새로운 다윗의 등장이 절실했다. 씨름계는 한라급 출신으로 천하장사에 등극할 수 있는 다윗으로 김기태를 꼽고 있다. ‘차세대 이만기’의 등장 김기태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에서 태어났다. 구봉산이 올려다보이는 곳이다. 화성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단거리 육상선수였다. 운동신경이 뛰어난데다 키가 커 육상 유망주로 통했다. 씨름은 5학년 때 접했다. 씨름부 코치의 권유로 도(都) 대항 어린이체육대회에 나간 게 시작이었다. 씨름의 ‘씨’자로 모르는 상태에서 출전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육상경기에선 2등을 했는데, 씨름에선 1등을 한 것이다. 그날로 김기태는 씨름 선수로 전향했다. “초교 때 씨름 인기가 무척 높았다. 이만기, 이승삼은 말할 것도 없고, 강호동, 이기수, 황대웅, 김칠규 등 젊은 씨름선수들이 나 같은 초교생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육상보다 씨름이 더 매력적일 수밖에.” 중학교로 진학할 때 김기태는 한차례 고비를 맞는다. 천안북중에서 스카우트가 제의가 온 것이다. “천안북중 감독님이 ‘야구를 한번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고향 선배가 조규수(두산)인데 그 형이 야구를 잘하다 보니까 발 빠르고 덩치도 큰 나도 야구를 하면 잘할 걸로 생각하신 것 같다.” 지금도 야구를 좋아하는 김기태는 당시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진로는 천안북중이 아닌 씨름 명문중으로 유명한 충남 당진중으로 결정했다. “야구는 돈이 많은 드는 운동이었다.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워 야구는 꿈도 꾸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서 커 천하장사로 등극해 부자가 되자’고 결심했다.” 그러나 충남 당진중 시절엔 눈에 띄는 선수가 아니었다. 전국대회 4강에 들어도 번번이 2위에 만족해야 했다. 김기태의 가능성이 빛을 낸 건 충남 공주농고(현 공주생명과학고)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다. 고교 2학년 때부터 그는 전국대회를 차례로 휩쓸었다. 한해 5, 6관왕은 기본이었다. 그즈음 공주에선 ‘골프는 박세리’ ‘야구는 박찬호’ ‘씨름은 김기태’란 말이 돌았다. 공주 출신의 박세리, 박찬호만큼이나 김기태도 지역의 자랑거리였던 셈이다. 고교생 김기태가 그토록 주목받은 이유는 ‘차세대 이만기’로 통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씨름선수권대회에는 대학, 실업 선수들뿐만 아니라 고교선수도 참가할 수 있었다. 다른 체급은 고교선수가 아주 가끔 우승했지만, 한라급은 예외 없이 대학, 실업선수들의 몫이었다. 그런 와중에 쟁쟁한 대학, 실업선수들을 꺾고 고교생 신분으로 우승했다. 그때부터 씨름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8년 제52회 전국씨름선수권대회에서 ‘소년 장사’ 김기태는 개인전 역사급(100㎏ 이하)에서 대구대 김대익을 잡채기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인하대에 특기생으로 입학할 예정이었던 김기태는 순식간에 씨름계의 떠오르는 별이 됐다.
그러나 별은 오래 빛나지 않았다. 1999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왼쪽 무릎을 다쳤다. 무릎 연부조직이 크게 손상돼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무릎부상으로 이렇게 선수생활이 끝나는가 싶어 정말 많이 울었다. 수술하고 나서도 돈이 많이 들까 봐 재활법을 독학해 혼자 재활에 매달렸다.” 당시 씨름계는 재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대학 씨름부엔 아예 재활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도 않았다. 되레 ‘씨름은 거친 운동이니까’하며 부상을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김기태가 무릎을 다칠 즈음인 2000년 대한물리치료학회지에 게재된 ‘아마추어 씨름 선수들의 부상 발생 양상과 물리치료 이해도에 관한 연구’는 중요한 자료다. 씨름계가 얼마나 부상에 무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당시 연구의 설문에 응한 아마추어 씨름선수 가운데 ‘의사가 물리치료를 지시할 시 이를 따르겠느냐’는 질의에 무려 56%가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물리치료의 효과를 모르거나 효과가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리치료 자체를 모르는 아마추어 씨름선수도 42.9%나 됐다. 김기태가 그랬다. 만약 김기태가 안다리걸기가 주무기인 부상 선수 가운데 51%가 무릎부상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에 맞는 무릎강화훈련과 재활을 시도했을 것이다.
‘무릎을 다치면 선수생명이 끝’이라고 알려진 것과 김기태가 재활법을 독학해 혼자 재활에 매달린 건 이처럼 무지에서 비롯된 일종의 비극적인 촌극이었다. 김기태는 1년 동안 꼼짝없이 재활에 매달렸다. 그리고 서서히 ‘관심과 기대’속에서 수없이 사라져간 ‘유망주들 가운데 한 명’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김기태는 운이 좋았다. 대학 2학년 때 부상에서 벗어나 전국대회 대학부 개인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어차피 운도 스스로 조건을 만들어야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김기태의 우승은 어쩌면 노력의 대가였는지 모른다. “내 꿈은 하나였다. 오로지 한라장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대학 때 잘하지 못하면 프로팀과의 계약 때 많은 계약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죽을힘을 다했다.” 운명을 건 도박, 안다리 걸기 대학 3학년 때 대학씨름판을 휩쓴 김기태는 4학년이 되자 프로에 입문한다. 인하대 장지영 감독의 도움이 컸다. “3학년이 끝날 무렵, 장 감독님이 씨름부 감독으로 새로 부임하셨다. 집안 형편이 어렵고, 프로에 가서도 성공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프로에 직행하고 싶다’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보통의 대학감독은 제자의 조기 프로행을 막는다. 유망한 제자가 프로로 일찍 가버리면 대학부에서 뛸 수 없어 씨름부 성적이 떨어지고, 결국 성적 책임을 지고 감독이 물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 감독은 김기태의 프로행을 배려했고, 이후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기태는 4학년이 될 무렵인 2002년 프로씨름의 강호 LG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금 2억 7천만 원, 연봉 2천만 원의 매머드 계약이었다. 대학 2년생인 김기태에겐 과분한 계약이었다. 김기태는 “지금도 어째서 LG가 3억 원에 가까운 금액을 주고 나를 스카우트했는지 모르겠다”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당시 김기태를 직접 스카우트했던 전 LG 코치 이기수 MBC SPORTS+해설위원에게 물었다. 답은 간명했다. “체구가 작은 선수가 큰 선수를 이기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간혹 이 기술을 여러 가지 보유한 선수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선수들은 상위체급을 상대로는 잘하지만, 자기 체급에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기태는 자기 체급인 한라급 선수들한테도 잘하고, 백두급 선수들한테도 잘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기태를 처음부터 ‘백두급 선수를 이길 한라장사’로 지목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대는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차가웠다. 당시 LG 씨름단 한라급엔 이성원, 모제욱, 남동우 등 쟁쟁한 선배들이 포진해 있었다. 여기다 김용대(현대삼호)가 한라급의 터줏대감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차였다. 특히나 김용대의 활약상이 대단했다. 김기태가 프로에 데뷔하기 1년 전인 2001년 김용대는 당시 현역 선수 가운데 모제욱과 함께 한라장사 7회 우승으로 최다 우승을 기록 중이었다. ‘탱크’란 별명이 달릴 정도로 그의 씨름은 저돌적이고 힘이 넘쳤다. 김기태는 김용대를 넘지 않으면 자신의 꿈인 한라장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선배들도 김기태에게 ‘탱크’를 잡으라는 뜻에서 ‘폭격기’란 별명을 붙여줬다. 우려와 달리 프로 데뷔시즌은 성공적이었다. 데뷔 첫 경기에서 연맹 상비군의 이호영을 가볍게 모래판에 눕혔다. 역시 기술은 안다리 걸기였다. 데뷔 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올라 3위를 차지한 김기태는 그해 ‘씨름인의 밤’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예선에서 안다리 걸기를 시도했다가 무릎을 다쳤다. 이번엔 오른쪽 무릎 연부조직 손상이었다. 그는 다시 다음 해 봄까지 재활에 매달렸다. 이때도 김기태를 지탱한 건 한라장사의 꿈이었다. 이윽고, 지긋지긋했던 부상에서 벗어난 김기태는 2003년 4월 전북 진안에서 열린 장사씨름대회 한라급에 출전한다. 결승전까진 무리 없이 진출했다. 문제는 결승전이었다. 상대가 한라장사 통산 10회 우승에 도전하는 팀 동료 모제욱이었다. 모제욱은 한라급 선수들이 상대하기 꺼리는 변칙기술과 장기전 승부의 대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반대로 김기태는 저돌적인 공격으로 단시간에 승부를 내는 파이터였다. 예상대로 결승전은 김기태의 저돌적인 공세와 모제욱의 변칙 기술이 일대 격돌했다. 첫째 판은 모제욱의 승리였다. 잡채기로 후배 김기태를 손쉽게 제압했다. 그러나 둘째 판은 김기태의 차지였다. 모제욱을 뒤집기로 넘겨버린 것이다. 다음 판에서도 잡채기로 전세를 역전한 김기태는 생애 첫 우승을 눈앞에 뒀다. 하지만, 쉽게 물러날 모제욱이 아니었다. 오른발 끼어치기로 김기태를 쓰러트리며 2대 2 균형을 맞췄다. “마지막 다섯째 판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모 선배를 잡으려면 뭐니뭐니해도 안다리 걸기밖에 없었다. 하지만,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안다리 걸기는 부상을 동반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또 부상을 당한다면 선수생활이 위험할지 몰랐다.” 생애 첫 우승이냐, 선수생명의 끝이냐를 두고 장고를 거듭하던 김기태는 드디어 운명을 향해 주사위를 던졌다. “휙-”하는 심판의 호루라기가 울리자마자 김기태는 모제욱을 들어 올리고 번개처럼 오른쪽 다리를 상대의 왼쪽 다리에 걸었다. 그랬다. 바로 안다리 걸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모제욱은 움찔하다가 손을 쓸 틈도 없이 모래판에 쓰러지고 말았다. 운명을 건 도박에서 김기태는 승리했고, 생애 처음 한라장사의 꿈을 이뤘다. 행운과 불운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김기태
2004년 이후 모제욱의 부상으로 이탈하자 김기태는 김용대, 조범재와 번갈아가며 한라급 정상에 오른다. ‘탱크’ 김용대를 잡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모제욱을 이겼지만, 진정한 한라장사가 되려면 반드시 김용대의 벽을 넘어야 했다. 기회가 찾아온 건 2004년 5월 전남 고흥에서 열린 민속씨름대회였다. 이 대회 결승전에서 김기태는 김용대와 만났다. 김기태는 1999년 이후 13개 대회 우승으로 역대 한라장사 최다우승 신기록을 노리던 김용대에 셋째 판까지 1대 2로 밀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김기태는 다시 한 번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다. 넷째, 다섯째 판에서 연이어 안다리 걸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날 밤 한 스포츠신문엔 ‘탱크, 폭격기에 요격당하다’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김기태가 생애 두 번째 한라장사에 오른 것이다. “그즈음 연봉이 1억 원을 넘었다. 상금까지 합치면 1억 5천만 원을 웃돌았다. 어린 시절의 오랜 꿈을 이루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달콤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4년 12월 LG 씨름단이 해체를 공식 선언했기 때문이다. 최홍만, 백승일, 염원준, 모제욱, 김기태 등 스타 선수들이 즐비한 LG 씨름단의 해체는 씨름계엔 큰 충격이었다. 한국씨름연맹이 사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섰지만, 당시 연맹은 무언가를 해결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김기태는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LG 씨름단이 해체하면 씨름판도 사라진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결국, 김기태는 무일푼으로 쫓겨나듯 씨름판을 더나 했다. “그래도 씨름 인기가 좋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무직자가 된 김기태를 더 절망으로 빠트린 건 절친한 친구 최홍만의 이종격투기 전향 소식이었다. “내게도 그쪽(이종격투기)에서 연락이 왔다. ‘10억 원을 줄 테니 이종격투기 무대에서 뛸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단번에 ‘싫다’고 했다.” 10억 원이면 무척 큰 돈이다. 특히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김기태라면 사양은 되레 만용일 수 있었다. “이종격투기는 남자로서 도전해볼 만한 무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씨름인이었다. 이종격투기 ‘선수’는 아무나 돼도 ‘씨름인’은 누구나 될 수 없다. 지금도 제의를 거절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김기태는 이종격투기를 배우려고 일본으로 떠나는 친구 최홍만에게 한마디만 했단다. “(최)홍만에게 그랬다. ‘맞지 마라’고. ‘한국의 천하장사가 맞으면 안 된다’고. ‘맞아서 몸이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쓰러져선 안 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고작 그것밖에 없었다.”
김기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구미시 체육회 씨름단에 입단한다. “2005년 구리시 체육회에서 LG 씨름단 선수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다시 운동을 하게 돼 무척 기뻤다. 보수도 많이 배려해줘서 불만이 없었다. 다만, 과거 프로씨름단 때와는 여건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숙소가 따로 없어 원룸에서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 구미시 체육회가 실업팀이라, 프로팀들이 출전하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4~6개월에 한번씩 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정말 무늬만 선수였던 시절이다.” 60평대 아파트 두 채에 영양사, 트레이너를 두고 훈련했던 LG 시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지금도 실업팀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부상빈도가 높고, 치명적인 부상이 많은 씨름단엔 트레이너가 필수다. 그러나 트레이너가 없는 팀이 부지기수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팀들이 대부분이라, 열악한 훈련환경은 어쩔 수 없다손 쳐도 트레이너 확보는 장기적 관점에서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2006년 말 현대삼호중공업으로 다시 둥지를 옮긴 김기태는 그런 면에서 행운이다. 예전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6년 창단해 김칠규, 이태현 등 걸출한 선수들을 배출하며 국내 유일한 프로팀으로 남아있던 현대삼호중공업은 2008년 12월 프로 간판을 내리고 실업팀으로 전환했다. 프로대회를 주관했던 한국씨름연맹이 제 역할을 못하고 프로팀이 한 팀만 남은 상황에서 굳이 프로라는 간판을 달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 운영은 지금도 다른 실업팀을 압도한다. 여전히 프로팀의 운영방식을 취하고 있어 언제든 프로로의 재전환이 가능하단 평가다. 이기수 MBC SPORTS+ 해설위원은 “현대삼호중공업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프로개념의 실업팀이다. 다른 팀보다 레벨이 한 단계 위인 팀”이라며 “한국 씨름계의 생명줄과 같은 팀으로 의미가 깊다”라고 말했다. 김기태도 자신을 받아준 현대삼호중공업이 씨름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알고 있다. “현대삼호중공업은 프로 활성화를 위한 불씨다. 지금처럼 주변환경이 좋지 않은데도 꾸준히 씨름단을 지원해주는 모그룹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더 부담을 느끼기도 하지만, 꼭 한번 팀을 위해 대업을 이룰 것이다.” 김기태가 말하는 ‘대업’의 정체는 1984년 이만기 이후 26년 만에 한라급 출신의 천하장사 로 등극하는 것이다. 26년 만의 한라급 출신 천하장사 등극, 꿈은 아니다.
씨름계는 김기태를 백두급 선수를 누르고 천하장사가 될 유일한 한라급 선수로 꼽는다. 이기수 위원이 밝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기술의 다양함이다. “실전에서 상황에 맞게 5가지 이상 기술을 써 이기는 선수는 거의 없다. 김기태는 안다리, 뒤집기, 들배지기, 호미걸이, 잡채기 등의 여러 기술을 구사할 줄 안다.” 두 번째는 역시 명품 안다리 걸기다. “안다리 걸기는 실패 확률이 가장 낮고, 성공 확률은 가장 높은 기술이다. 상대방 왼다리에 걸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걸기만 하면 상대를 순식간에 쓰러트릴 수 있는 필살기다. 특히나 체구가 작은 선수가 큰 선수에게 쓰기에 가장 좋은 기술이다. 김기태는 국내 최고의 안다리 걸기 기술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만큼 백두급 장사를 제압하는 게 쉽다.” 세 번째는 들배지기다. “안다리 걸기가 효과적이지만, 상대가 눈치채기 쉽다. 이때 필요한 게 속임수 동작이다. 역시 가장 좋은 동작은 들배지기다. 들배지기를 하는 척하다가 상대가 다리를 벌린 틈을 타 안다리 걸기를 들어가면 꼼짝없이 당한다. 그래서 씨름계에선 오래전부터 안다리 걸기와 들배지기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기술로 알려졌다. 다행히도 김기태는 들배지기에 능하다. 한마디로 안다리 걸기가 통하지 않는 선수는 들배지기로 쓰러트리고, 들배지기가 통하기 어려운 선수에겐 안다리 걸기를 넣을 수 있다.”
하지만, 백두급 장사를 극복하려면 기술 이상의 것들이 요구된다. 이 위원은 김기태에게 두 가지를 주문했다. 우선, 체력보강과 많은 연습이다. “요즘 백두급 선수들은 체력적으로도 무척 뛰어나다. 장기전으로 가면 한라급 선수가 더 불리할 수 있다. 체력을 키운 다음엔 백두급 선수들과 자주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야 큰 선수를 상대하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순간 백두급 선수를 상대하는 기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신보다 큰 선수와 싸울 땐 힘 대 힘으로 맞서면 곤란하다. 큰 선수의 힘을 흘려보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스피드로 큰 선수를 제압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큰 선수와 맞서 싸우는 훈련이 선행돼야 한다.” 맞는 말이다. 대부분의 한라급 선수들은 부상을 우려해 백두급 선수와는 훈련하지 않는다. 하지만, 천하장사가 되겠다면 백두급 선수와의 훈련은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이 위원은 김기태에게 “안다리 걸기를 항상 주의하라”는 말로 당부를 끝마쳤다. “김기태의 안다리 걸기는 상대의 다릴 감아채서 ‘획’하고 돌리는 매우 어려운 기술이다. 그러나 무릎 관절에 큰 무리가 가는 단점이 있다. 부상을 당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하체 단련에 힘써야 한다.”
“역시 씨름은 기술이다. 거기다 지든 이기든 빠른 승부를 통해 경기를 끝낼 줄 알아야 한다. 난 그래야 이긴 것 같고, 보는 관중도 신이 난다고 생각한다.” 김기태는 선수생명을 걸고 천하장사에 도전하려 한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다. 어째서 그에게 천하장사에 도전하려는지 물었다. “천하장사는 말 그대로 ‘천하를 제패한다’는 뜻이다. 씨름인이라면 누구나 꾸는 꿈이다. 무엇보다 침체한 씨름계를 위해 이슈가 필요하다. 체구가 작은 한라급 선수가 백두급 선수들을 물리치고 천하장사에 오른다면 얼마나 멋지겠나.” “내게 씨름은 쌀이다. 나와 가족이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쌀을 대하는 소중한 마음으로 항상 씨름판에 설 것이고, 쌀처럼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가 될 참이다.” 추석을 맞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나흘간 경북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선 `2010 추석장사씨름대회`가 열린다. 추석 보름달이 뜨고, 물이 차는 만조가 되면 김기태는 한라장사로 우뚝 설 것이다. 구름 속에 숨었지만, 여전히 조수를 주관하는 달처럼 씨름의 강한 인력은 김기태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천하장사가 되기 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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