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그것은 이제 새 세기의 문을 열기 위해 외워야만 하는 주문이 되었다. 그런데 대체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은 분명하다. 문화는 물질이 아니라 의미의 영역이다. 문화는 자연적 상태를 벗어난 인간의 존재 방식이며 인간이 추구하는 도덕적, 미적 가치가 다양하게 표현되는 상징의 영역이다. 이러한 문화는 최근 경제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생산중심의 전기 자본주의가 20세기 후반 소비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지배적 요인은 상품의 실물적 사용가치(use-value)에서 기호가치(sign-value)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에서도, 멀티미디어와 정보통신 분야의 눈부신 발전에서 보듯이, 문화적 표현 수단을 다양화하고 그 표현물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기술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근대산업사회가 인간의 단순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용적인 내구재의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존재하였다면, 새로운 세기는 '문화경제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동안 인류를 지배하던 근대적 물리적, 역학적 사고 방식은 앞으로 의미와 상징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학적 사유에 그 중심의 위치를 넘겨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려의 소리도 만만치 않다. 새로운 세기로 들어서며 소란스럽게 양산되는 문화 담론은 문화의 영역마저 자본증식의 논리로 잠식하려는 거대한 음모라는 고발, 그 의혹에 찬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이른바 문화의 상품화! 문화를 둘러싼 떠들썩한 이야기는 그 문화마저 식민지화하려는 음모를 현란하게 위장한 마케팅 전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가 상품화되고 있다는 것은 총체적 시장화라는 파국적 징후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기회로 반전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문화의 상품화를 통해 문화마저 효율성, 자본증식, 이윤극대화라는 자본의 논리에 침식당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환 가치 속에 매몰되어 있는 상품이 문화화될 수 있는 틈새가 어디엔가 열려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이 좌절된 이후의 시대에 자본의 논리에 바로 문화가 흘러듬으로써, 자본 논리의 전횡적 지배가 저지당하고 때에 따라서 자본주의가 문화적으로 역전된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는 탈출구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현대철학은 문화상품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의 철학이 문화의 상품화를 경멸하며, 문화 상품을 철학적 사색의 영역에 추방하고 문화의 상품화를 방치한다면, 그것은 철학의 고상함과 품위 유지에만 집착하는 귀족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오히려 철학은 문화의 상품화에 사색의 촉각을 드리우고 그것을 상품의 문화화로 전복시켜야 하지 않을까. 특히 철학은 문화 상품에 깊숙이 침투하여 그 안에 담겨있는 문화적·철학적 의미를 포착하고 아울러 그것이 상품논리에 압도당하지 않고 문화적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 현대문화를 상품화된 문화로 그리하여 비천한 대중문화로 방기해버리면, 현대 상품 경제의 내면 한 구석에 소중히 감추어져 있는 문화적 의미조차 고갈되어 버릴지 모른다. 그리고 그마저 그처럼 고갈되어 버린다면, 계몽이 망상이 되고 혁명도 좌절되어버린 이 시대에 과연 철학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이 상품으로 전락하도록 방조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철학은 이제 무식한 대중을 계몽하거나, 있지도 않은 유토피아를 선전하며 혁명의 깃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현대문화에, 그 대중적인 문화에 과감하고도 은밀하게 스며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만일 현대 상품 문화 속으로 스며들려는 철학적 결단이 설득력을 갖는다면, 우선적으로 철학적 사색의 빛을 받아야 할 것은 바로 바로 현대 문화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는 영상 문화, 그 중에서도 영화이다.
사실 영화는 더 이상 허구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현실은 우리가 종래 철학의 입장에서 허구라고 생각하는 것을 기반으로 형성되고 있다. 이미 현대인은 실재보다는 영상을 대면하는 시간이 더 많으며 따라서 그들의 삶은 영상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이 영상이미지를 따라 영화처럼 살기를 원하며 오늘날 삶의 공간은 영화처럼 꾸며지고 있다. 보들리야르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란 용어를 통하여 기호와 영상테크놀로지에 의해 조작된 시뮬레이션의 세계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현실을 대치하는 현대의 전복된 형이상학적 모습을 그려낸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가 실재라고 믿고 있는 것은 사실상 영화와 같은 하이퍼리얼리티를 기반으로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현실로부터 유리된 그들만의 철학이란 자폐증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철학은 변화하는 실재 뒤에 불변의 실체를 찾으려는 방향이 아니라 바로 그 현실을 떠받치고 있는 하이퍼리얼리티, 즉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으면서도 실재를 형성하는 허구적 기반에 대한 탐구를 거부할 수 없다. 이제 영화는 영화 제작자나 비평가에게만 맡겨두기에는 너무도 깊은 철학적인 무게를 지니게 되었다. 아직도 영화를 천박한 대중 문화적 현상으로 치부하여 철학적으로 거론할 가치가 없는 소일거리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현대 세계를 지탱하는 근본구조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한 소치가 아닐까. 어쩌면 그 무관심은 심지어 중세 말기 성직자들과 같은 편협함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문자화된 책을 읽으며 그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숭상하는 지식인 문화는 하느님의 계시를 진리의 원천으로 믿는 중세말기 대다수의 교조적 성직자들에게는 경건성을 상실한 한없이 천박한 행위였다.
나아가서 오늘날의 철학이 변화와 운동이 배제된 영역에서만 존재의 진정성을 승인하는 실체 형이상학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마치 베르그송처럼 실재 그 자체를 변화 속에서 질적으로 상호 침투하는 시간적 지속으로 본다면, 실재는 실로 영화와 같을 것이다. 물질이 필연적으로 운동하는 것이라면 그 물질은 어떤 응고된 관념적 형태에서 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견지하며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실체가 아니라 영화에서처럼 흐르는 이미지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미지로 존재하는 존재자들은 이미지의 존재론적 특성상 자기 동일성과 완벽한 자기경계를 유지할 수 없다. 때문에 그러한 존재자들은 틈새 난 자기 존재의 경계로 타 이미지의 틈입을 허용하고 동시에 타이미지로 흘러들므로써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질적 연속성을 생성하게 될 것이다. 마치 영화가 움직이는 이미지들로 이루어지고 이 이미지들이 상호 침투하며 의미의 파노라마를 만들어내듯. 이렇게 보면 실재는 이미 영화에 선행하는 영화, 즉 메타 시네마이며 진정한 실재는 애당초 영화와 같은 파노라마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영화는 사실 여러 면에서 우리의 철학적 사유를 유혹한다. 유감스럽게도 영화가 갖고있는 이러한 철학적 매력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화에 대한 깊은 성찰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실정이다. 실로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철학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주로 근대 과학과 논리에 침식당한 철학적 지성들은 여전히 이미지 배후의 실체를 찾는 실체형이상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타자성과의 어떠한 어울림도 거부하는 무모순성과 동일성에 집착하는 형식 논리적 사유의 철조망 안에서 허덕이고 있을 뿐이다. 타자성과의 상호틈입을 허용하는 이미지는 여전히 불신의 대상이다. 바로 여기서 현상학이 돋보인다. 이미 나타남을 철학적 주제의 전면에 등장시키며 근대적 실체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극복한 현상학은 과거와의 결별을 추구하는 여러 개별학문에 - 예컨대, 사회학, 정치학을 비롯하여 간호학에 이르기까지 - 신선한 지적 자양분을 공급한 바 있다. 이러한 현상학은 최근 들어 문화 현상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철학적 해석으로도 그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상학은 영화 경험을 해명하는데 빛을 발한다. 이미 퐁티는 그의 현상학을 기반으로 「영화와 현대 심리학」이란 대한 짧은 에세이를 썼다. 최재식은 이러한 퐁티의 에세이를 탁월하게 논구한 바 있다. 필자 또한 하이데거의 근대성비판과 그의 예술 및 언어 철학을 실마리로 영화의 존재론적 가능성을 탐색한 적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특히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으로부터 발전하고 있는 영화 현상학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영화 현상학은 소브책과 아깝게 일찍 타계한 싱어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소브책(V. Sobchack)이나 싱어(R. Singer)는 단순히 퐁티의 영화 에세이를 소개 혹은 주석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퐁티의 현상학을 영화에 보다 깊숙이 진입시켜 상당히 전문화된 영화 현상학을 전개하며 한편으로는 기존의 영화 이론을 비판한다.
2. 영화의 현상학적 의미 - 소브책의 영화 현상학
소브책은 라깡의 정신 분석학과 비판이론을 근거로 한 현대 주류 영화이론에 현상학 특히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통하여 도전한다. 소브책은 기존의 영화이론이 영화를 단순히 시각적 대상으로 환원시키고 관객을 이미 결정되어 있는 촬영기제 혹은 영화 기호학적 구조의 희생자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기존의 영화이론과 불화로 휘말려 들어간다. 현대 주류 영화이론에서는 영화를 통해서 일어나는 경험이 두 가지의 봄(Vision), 즉 관객과 영화라고 하는 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의 입장에서 하나의 봄의 대상이지만 그 자체 또한 세계를 보는 과정이다. 즉, 영화는 감각적 대상이지만 그 자체로는 감각적, 또 의미 부여적, 의미 생성적 주체이다. 나아가서 관객도 봄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이다. 이러한 독특한 영화체험은 현대 영화이론에서 방치되고 있지만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은 이러한 영화체험의 특성을 적절히 포착하여 투명화할 수 있다. 메를로-뽕띠는 그의 신체의 현상학에서 세계의 체험과 신체의 표현 사이의 상호관계, 즉 상호교배 작용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소브책은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에 기대어 영화 경험이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것으로 사는) 신체적 시각체험의 상호교배성과 순환성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동시에 바로 이러한 체험의 구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입장을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소브책의 영화 현상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몸을 지향적 체험의 주체로 격상시키며, 몸을 기호학적 해석학적 활동성으로 밝혀내는 퐁티의 몸의 현상학에 대한 언급을 생략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현상학이 영화현상학으로 전개되기 위해 요구되는 메를로-뽕띠의 몸의 현상학, 특히 신체를 육화된 지향적 활동성으로 발견해 내는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을 최대한 압축된 형태로 논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2-1. 몸 - 살아 움직이는 경험의 주체
20세기초 근대를 비판하며 밀려들어오는 현상학 물결에서 자신의 철학적 위치를 발견하는 메를로-뽕띠. 그는 과학적 세계가 실재세계의 법칙을 체계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연스런 경험세계를 기반으로 이 이념화된 결과물이라는 후설의 현상학적 통찰을 계승한다. 메를로-뽕띠는 후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세계관에 앞서 우리와 세계의 직접적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차원으로 되돌아간다. 그는 과학이전에 경험되는 그대로의 세계를 기술함으로써 세계의 구성원리를 해명하려 한다.
메를로-뽕띠의 철학이 과학에 의해 구성된 이론으로부터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모색이라면, 그가 지각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지각은 과학적 이론의 구성물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제공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각은 틀림없이 몸과 함께 이루어진다. 지각은 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탈신체화된 명상이 아니다. 우리가 부단히 눈동자를 움직이고 손을 대보며, 냄새를 맡고, 대상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가운데 지각은 이루어진다. 따라서 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지각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탐구의 초점이 몸에 맞추어져야 한다. 메를로-뽕띠는 바로 여기서 몸을 다소 주변부에 위치시키고 의식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에 몰두하는 후설을 벗어나 자신의 길로 들어선다. 현상적 탐구 방식 즉, 검토되지 않은 기존의 이론을 정지시키고 현상 그 자체로 되돌아가려는 환원의 정신은 이제 철저히 몸에 적용되어야 한다.
몸에 관한 기존의 이론은 경험론(Empirismus)과 지성주의(Intellektualismus)로 대별된다. 경험주의는 신체행위의 원인을 외부대상에 귀속시키며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신체적 반응간에 균일한 일대일 대응관계가 성립한다는 가설, 요컨대 인과론과 항상가설(Konstanzhypothese)에 입각하고 있다. 반면, 지성주의는 의식의 자발적 지향성을 기반으로 신체를 의식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메를로-뽕띠는 철학사를 양분해 온 이 거대한 두 조류와 동시에 대결하며 이 두 이론에 의해 감추어진 신체의 존재방식을 현상학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에 착수한다. 한편에서는 경험주의와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지성주의라는 두 개의 전선으로 펼쳐지는 이 작업은, 메를로-뽕띠의 출세작 『지각의 현상학』에서 보듯, 엄청난 밀도를 갖는 복잡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방대한 논의를 전체적으로 모두 거론할 필요 없이 두 기존 이론의 허구성을 극명하게 노출시키며 신체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현상들에 대한 기술이『지각의 현상학』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환지통(Phantom-glied)과 같은 병리 현상과 습관화된 숙련기술 등과 같은 현상에 대한 기술이다.
메를로-뽕띠가 주목하는 환지통은 사고나 수술을 통하여 신체 일부를 상실한 경우에 발생하는 증상이다. 한쪽 다리를 잃은 환자는 그 없어진 다리에서 계속 고통을 느끼며 마치 다리가 그대로 있는 듯한 감각활동을 지속한다. 예를 들면, 그 다리로 걸으려 한다든지 발을 뻗으려 한다든지.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환지통에 대한 기존 이론의 설명을 비판한다.
우선 인과론과 항상가설에 의거하는 경험주의는 환지통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다리를 잃은 사람이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을 다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리에 자극을 느낀다는 환지통은 이미 그러한 현상을 유발하는 외부 원인이 부재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환지통은 어떤 외부 대상이 어떤 신체의 일부에 자극을 가하여 자극이 그 신체부위에 위치화됨으로써 어떤 사태에 대한 지각을 야기시키는 실제적 상황의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환지통에는 신체 활동의 원인을 외부대상에 귀속시키며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신체적 반응간에 균일한 일대일 대응관계가 성립한다는 인과론과 항상 가설이 적용될 수 없다.
지성주의는 경험주의와는 반대로 의식의 자발성에 입각하여 이러한 환지통 체험 현상을 절단에 대한 거부, 즉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살려고 하는 의식적 결단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려할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지성주의적 설명이 경험론적 설명에 비해서는 호소력이 있지만, 환지통에서는 의식적 주체의 결단 같은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환지통은 실로 의식적 결정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를로-뽕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환지통의 체험에 있어서 절단의 거부나 마비의 거부는 내가 생각하고 내리는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한 후 명백하게 자리를 잡는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신체를 갖으려는 혹은 장애를 거부하려는 의지는 그 자체로 형성되지 않는다. 절단된 팔을 현재하는 것으로, 장애를 입은 팔을 부재하는 것으로 아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환지통은 경험주의가 주장하듯 외부의 대상이 원인으로 작용하거나 아니면 지성주의에서처럼 의식이 결단을 내림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이와 같이 경험주의와 그와 대립을 이루는 지성주의가 동시에 부정됨으로써 남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지통을 몸 자체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통찰하는 가능성이다. 환지통은, 말하자면 바로 발이, 절단되기 이전에 그 발이 누려왔던 행위영역을 보존하려 하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발이 이전처럼 움직이고 있다면 그 때에 그 발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질 행위의 영역이 의식에 앞서 이미 신체적으로 여전히 지향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체는 외부의 자극을 나름대로 형태화하고 조직화하는 도식이 형성되는데 스스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다리를 잃은 경우처럼 외부 세계의 유발 원인이 부재하는 상태에서도 이미 그 도식이 신체의 편에서 여전히 지향되고 있는 것이다. 신체의 신경학적 체계들은 국소적 자극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감각적 자극들을 분별하고 조직화한다. 그리하여 신경조직에 입은 상해는 감각적 내용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내용을 더욱 더 복잡하고 불확실하게 분별하고 조직화한다.
이와 같이 의식 이전에 이미 지향적으로 활동하는 신체의 존재 방식은 메를로-뽕띠가 습관, 실천적 지식 그리고 지향성의 관계를 다룰 때 더욱 분명해진다. 메를로-뽕띠는 타이핑, 운전, 악기 연주와 같은 숙련 기술이 습관화되고 실천되는 과정 역시 경험론과 지성주의 모두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선 경험주의자들은 이러한 기술의 습득을 그들이 기본 원리로 삼고 있는 인과론과 항상가설에 따라 특정 자극과 특정 신체적 반응이 연합되는 학습과정을 통해 설명하려 할 것이다. 습득된 기술은 경험론에 따르면 유사한 외부 상황 의해 발생되고 결정되는 일련의 행위들이 반사적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주장을 메를로-뽕띠는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하여 반박한다. 수준급 오르간 연주자의 경우 전혀 친숙하지 않은 형태로 페달이나 건반이 배치된 오르간을 한 시간 정도 연습하고도 능숙하게 연주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물론 이 새로운 오르간을 연주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물리적 신체적 운동은 경험주의자들이 이전에 습득된 것으로 생각하는 기술과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숙련된 오르간 연주자는 새 오르간을 한시간 가량 연습하고 연주한다. 여기서 만일 경험주의자들의 설명방식이 계속 고집된다면, 그토록 짧은 시간에 전혀 새로운 일련의 조건화된 반응이 학습되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오르간 연주가가 기존의 연주습관을 단시간에 새로운 오르간에 적합하게 전환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처음에 획득된 기술이 경험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외부의 구체적 상황이 발생시키고 결정하는 신체적 반응을 그대로 학습하여 그 상황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형태가 아니라 그 반대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즉, 애초에 습득된 기술은 그 개별적 상황을 어느 정도 일반적 전형으로 구조화하고 그 일반 전형과 유사한 여러 상황들에 그렇게 신체적으로 전형화된 반응 양식을 적절히 가변적으로 응용하는 신체적 능력으로 실행될 것이다. 따라서 메를로-뽕띠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경험론적 이론은 "학습과정이 체계적이라는 사실에 상반된다. 학습주체는 개개의 운동과 개개의 자극을 접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반적인 형태의 상황에 어떤 전형적인 해결방식으로 반응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때 상황의 변화 가능성은 매우 넓다. 그에 대한 반응 운동은 어떤 때에는 이러한 신체 부분에, 어떤 때에는 저런 신체 부분에 맡겨지지만 그 변화하는 상황과 그에 대한 반응은 각 요소들의 국소적 동일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를 공유한다."
이렇게 상황을 보다 일반적으로 전형화는 신체의 자기 구조화능력은 신체적으로 숙련된 기술에 관한 지성주의적 설명 역시 오류임을 보여준다. 지성주의적 설명방식에 따르면 연주자는 그 낯선 오르간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각 기관의 위치를 숙지하고 그것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머리 속에 그리는 등의 의식적 인지활동을 한 후 연주에 적용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재로 그 오르간 연주자가 하는 것은 "의자에 앉아 페달을 밟고 건반을 두드리며 악기의 곡조와 자신을 맞추고 자신 안에 적절한 차원과 방향을 흡수하면서 집에 정착하듯 오르간에 정착한다. 연주가는 건반과 페달의 객관적 공간적 위치를 탐색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춤을 배우는 과정을 돌이켜보면 한층 더 명확하게 지성주의적 설명방식의 한계가 보여질 것이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는 새로운 신체적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이미 습관화된 기술의 변양과는 달리 지성주의적으로 분석될 여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춤동작을 습득하는데 있어서 일정 부분의 의식적인 분석과 정신적 상상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춤동작을 도식화하고 머리 속으로 숙지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몸이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세심하게 새로운 운동을 분석하고 이미 획득된 형태와의 관계를 그려본다 할지라도, 이 관계를 파악하고 이러한 전환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감지하고, 새로운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를 처음으로 터득하고 시행하는 것은 결국 몸이 아닌가. 기존의 움직임에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전이할 때 그것을 실현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은 신체 자체에서 일어나는 앎이며 이것은 다른 무엇으로, 즉 의식이나 외부 원인으로 환원 불가능하다. 이러한 몸의 앎이 없이는 순전히 지성적 파악은 실행될 수 없다. 그리하여 메를로-뽕띠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춤의 형식이 일반적 동작의 어떤 요소들을 흡수할 수 있기 전에 그것은 말하자면 우선 그에 운동의 직인이 찍히게 해야한다. 이미 자주 언급된 바와 같이 동작을 이해하는 것은 몸이다. 습관의 획득은 실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운동의 의미를 이해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예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사태를 밝혀주는 것이다. 몸은 외부 세계의 자극과 신체적 반응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로 해소될 수 없는 그 이상의 능력이다. 때문에 몸은 다른 물체들처럼 몸밖의 외부 세계 안에 존재하며 외부 세계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몸은 이미 그 외부 세계가 완결되어 존재하기 전에 이미 항상 먼저 다가가 그 세계가 구성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메를로-뽕띠의 표현을 빌면, 신체는 물체처럼 그저 이미 주어진 세계 안 에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이미 항상 '세계로 다가가는 존재'(Zur-Welt-Sein)로서 '활동하는 지향성'(fungierende Intentionalitaet)이다. 따라서 몸이 몸담는 세계는 애초부터 이미 완결된 상태로 몸을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해지는 지향활동의 참여를 통해 조직화되고 형태화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몸이 존재하기 위한 절대적 전제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항상 살아 나아가는 몸의 지향활동이 그가 몸담는 세계 형성의 전제조건이 된다. 따라서 몸은 세계에 대해 제한적인 의미의 선험적 지향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를로-뽕띠는 몸을 "세계를 이루는 능력(Vermoegen der Welt)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몸으로 수행되는 선험적 지향성은 다른 물리적 대상들처럼 세계에 매몰되어 세계의 물리적 원리에 지배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성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자발적 의식처럼 완전히 초월적 위치에서 세계를 능가하는 것도 아니다. 몸은 그 물질적 실재성 때문에 세계 어딘가에 닻을 내리고 있으며, 그러한 한 세계를 완전히 능가할 수 없다. 따라서 몸은 끊임없이 세계로 다가가는 활동성 속에서 세계가 형성되는 데 참여하지만 세계가 그러한 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몸은 어떤 면에서 세계에 의해 능가된다. 따라서 세계와 몸은 세계가 형성되고 그 안에 몸이 담겨지는 과정에서 서로를 능가하지만 서로를 절대적으로 능가할 수 없는 상호교호 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몸과 세계가 상호 교호하며 몸이 다가가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방식은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 이전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 활동의 수행 양상, 예컨대 명료성, 자의식성(Selbstbewusstheit)과는 다른 양상으로 일어난다. 세계와 몸은 세계의 형태가 결정되는 데 상호교호 관계를 형성하며 동시에 어느 것이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전적으로 지배당하지 않는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있는 것이다.
2-2. 몸의 지향성으로부터 영화 현상학으로 - 지각과 표현의 순환
몸은 외부의 자극을 인과적으로 반응하는 수용체도 또 그렇다고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조정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육화된 지향활동이다. 그런데 육화된 지향성을 밝혀내는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이 어떻게 영화 현상학이 될 수 있는가?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이 영화 현상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는 바로 몸의 이중적 존재방식이다. 이 이중적 존재방식은 세계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체험의 주체로서 몸이 지닐 수밖에 없는 애매성에서 유래한다. 즉, 몸은 육화된 지향성으로서 이 세계의 주관이지만 동시에 육화된 지향성으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며, 따라서 타인에 대해서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며 세계를 지각하는 몸은 그것을 중심으로 비로소 세계가 조직되는 주체적 활동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와 타자에게 그 지향성이 물질적-생동적으로 실현되는 활동, 즉 객관적 표현활동으로서 제공된다. 따라서 지각의 근원성은 메를로-뽕띠에게 표현의 근원성이다. 표현은 몸으로 수행되는 지각이 몸짓으로 분절되어 타자에게 시각화되는 비젼(Vision)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몸은 지각과 표현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지각을 표현으로 또 표현을 지각으로 순환시키는 활동을 수행한다. 몸은 지각과 표현을 동시에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양상으로 순환시키며 살아 움직인다.
특히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나타나는 신체적 표현은, 몸 그 자체가 원천적으로 지향적 활동의 주체로서 파악되는 한, 이미 항상 의미 현상이라는 격위를 갖는다. 즉, 신체적 동작, 표정 등은 연기가 불을 지시하는 것과 같이 자신이외 다른 것을 지시함으로써 그로부터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각이 움직이는 몸의 지향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몸의 지향활동이 의식에 선행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우리 의식이 몸에 명령을 내리고 몸이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체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화된 지향성으로서 움직이는 몸을 통해 비로소 지향활동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몸의 움직임은 그 자체 무의미한 동작에 불과한 것이며 우리 의식의 의도를 표시할 때만 의미를 담는 기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 의미가 살아나는 표현이다. 요컨대 몸은 의미의 표피가 아니라 그 자체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심층이다. 따라서 찡그림, 웃음 등은 신체 내면의 의식이 지향하는 의도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기호가 아니라 그 자체 고통 혹은 기쁨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미화되는 원천적 과정이다. 우리의 몸짓, 표정은 우리 의식이 의도하기 이전에 이미 의미로 젖어있으며 의미와 밀착되어 있다. 의미 없는 몸짓이나 표정은 있을 수 없다. 몸은 그 자체가 이미 기호학적이다. 이러한 몸의 기호학적 존재방식을 이제 나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면,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타자의 신체적 동작이나 표정은 그 신체가 항상 지향적 활동중인 한 이미 항상 의미에 젖어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나의 살아 움직이는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지각에서 항상 의미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는 타자의 몸짓이나 표정을 그 의미 속에서 지각하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나는 타자의 몸짓이나 지각에서 어떠한 의미도 없는 동작, 몸짓, 표정을 지각하고 그후 의식의 반성이나 유추를 통해서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지각은 이미 의미와 분리될 수 없는 항상 의미가 그 자체로 지각되는 해석학적 활동이다. 내 몸은 타자의 몸짓이나 표정을 보는 순간 어떤 의식적 유추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마치 나의 몸에 그의 의도가 살고 있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그 표정과 몸짓에 젖어있는 의미를 느낀다. 지향활동의 시원적 주체로서의 몸에서 밝혀지는 몸의 기호학적 해석학적 활동은 메를로-뽕띠의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에서 이제 다음과 같이 실재적인 예를 통하여 보다 구체화한다. "실재로 어린아이들은 제스츄어나 얼굴 표정 등을 자기 뜻대로 지어 보일 수 있기 훨씬 전부터 그것들을 이해하고 있다. 즉, 이른바 의미는 행위에 밀착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사랑이나 증오 혹은 분노 등이 그것을 느끼는 사람, 단 하나의 증인에게만 가능한 내적 현실이라는 저 편견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분노나 수치, 증오, 그리고 사랑은 타인의 의식 밑바닥에 은폐된 심적 사실이 아니며, 외부에서부터도 볼 수 있는 행위 형태, 혹은 행동 양식인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얼굴 표정이나 제스쳐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속에 은폐된 것이 아니다. 감정이란 심리적이거나 내면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육체적 태도로 표현된, 타인과 세계와의 관계의 변형이기 때문에 단지 사랑이나 분노의 기호만이 외부의 관찰자에 주어진다거나, 이 기호들을 해석함으로써 타인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없으며 곧 타인은 직접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나는 분노나 위협을 동작 뒤에 감추어진 심적 사실로 지각하지 않고, 나는 그의 동작 속에서 분노를 읽는다. 동작은 나에게 분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작이 분노 자체이다. ... 동작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된다. ... 동작들의 교감이나 이해는 나의 의도들과 타인의 동작들, 나의 동작들과 타인의 행위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의도들과의 상호성 속에 의하여 얻어진다. 타인의 의도들이 내 몸 속에 살고 있는 것같이, 그리고 나의 의도들이 그의 몸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몸을 육화된 지향활동으로 발견하는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은 결국 우리를 다음과 같은 통찰로 인도한다. 1) 몸은 외부의 자극을 인과적으로 수용하며 반응하는 메카니즘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세계를 형태화하고 조직화하는 육화된 지향적 활동성이다. 2) 이와 같이 육화된 지향성인 한, 몸은 여하한의 대상성을 거부하며 자기 내면에 밀폐되어 있는 주관성에 머물 수 없고 어떠한 형태로든 객관화되어야 하다. 따라서 세계와 교섭하며 참여하는 몸은 주관적 양상에서 지각으로 객관적 양상에서 표현으로 살아 움직인다. 이 몸의 두 양상은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하는 교호작용을 함으로써 의미 있는 경험을 구성한다. 살아 움직이는 신체는 내주관적이며 동시에 상호 주관적인 체계(intrasubjective and intersubjective System)이다. 3) 더구나 이와 같이 살아 움직이는 신체를 통한 지각과 표현은 그것을 통해 비로소 지향과 의미가 살아나는 근원적 차원이다.
이렇게 세 가지 사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몸은 지각과 표현을 순환시키는 과정에서 기호학적이며 동시에 해석학적 활동을 수행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살아 움직이는 몸은 그것을 통해서 세계가 형성되고 보여지는 그 지향활동을 수행하며 그 의미를 표현을 통하여 세계로 운반한다. 그리고 이렇게 논구된 내용을 특히 시각적 경험에 적용시키면, 시각적 경험, 즉 비젼(Vision)은 단순한 정태적 지각이 아니라 봄과 보여지는 것을 순환시키며 의미를 근원적으로 생화하고 해석하는 지각과 표현의 동적 순환 체계로 파악된다. 따라서 비젼은 이미 항상 보는 행위를 보이게 하는 움직임, 즉 움직이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봄의 행위는 봄 자체가 보여지는 가시적인 봄의 운동으로, 즉 표현적 지각적 제스쳐로 성숙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하는 행위이다.
영화가 현상학적인 접근을 허용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영화는 신체와 같은 순환적 상호교호작용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에서 서사 세계를 보는 지각행위를 재현하며 동시에 그 지각된 것을 표현하는 장면과 마주친다. 즉, 영화 경험은 관객에게 이미 지각과 표현의 순환과정(commutation)인 살아있는 체험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영화는 인간의 어떤 다른 의사소통 매체보다 탁월하게 경험의 구조를 경험의 표현으로서 보이게 또 느끼게 해준다. 영화는 보면서 그 자신의 봄을 보이게 하는, 즉 그 자신을 반성적으로 느껴지게 하고 이해되게 하는 물리적-반성적 운동이다. "영화는 영화에 선행하는 영화 작가의 직접적인 지각 경험을 재현(represent)하고 반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각적이며 표현적인 존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험 그 자체를 보이게 현전화(present)한다." 그리하여 소브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는 매우 놀라운 현상이다. 영화는 물론 그의 기계적 기술적 신체에 의해 가능해졌지만 그것은 객관적 세계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신체화된 봄의 구조를 매우 독특하게 투사하고 보이게 한다. 이러한 구조는 지금까지 인간에게 나 자신의 신체에서 나의 것으로만 경험되는 사적인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영화는 인간의 시각체험을 단순히 기계적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기계적으로 인간의 봄의 순환적 상호교배적 구조, 즉 보이는 것과 보일 수 있는 것의 체계를 비추어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 봄의 체계는 세계 내의 대상뿐만 아니라 신체화된 지각주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동시에 지각된 것이 표현된다. 아울러 이때 영화와 관객이 맺는 관계는 관객이 그의 지각세계와 맺고 있는 것과 유사한 관계이다. 따라서 소브책은 이러한 상관관계를 지지하면서 서사적 영화도 세계와 신체화된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즉, 영화가 그 자체 지각적이라면 그 체험의 수행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소브책은 지각의 수행자인 신체와 유비적인 '영화신체'(film-body)란 용어를 도입한다. '영화신체'는 카메라와 영사기 그리고 스크린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유기체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지각기관이고, 영사기는 표현기관이며 스크린은 세계 공간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하고 있는 영화는 살아있는 신체경험의 지각적이며 동시에 표현적인 활동을 가시화하며 수행하는 것이다. 영화의 지각 수행 신체는 바로 관객과 영화의 소통적 관계의 기반이 된다. 즉 영화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이 진행될 때, 관객과 영화라고 하는 두 신체 사이의 상호 소통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영화를 이와 같이 메를로-뽕띠의 몸의 현상학을 통해서 이해하면, 영화 경험은 세계에 대한 지향적 신체적 의식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관객의 비젼과 영화의 상호관계이다.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봄(광경)과 관객의 비젼이 맺고 있는 의미관계는 영화가 보는 봄에 의해 매개되고 또 그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경험은 따라서 영화의 봄과 그 봄에 의해 보여지는 광경에 지향적으로 합치될 수 있는 가능성과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소브책은 관객의 지향적 체험과 영화의 봄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파악한다.
I) 카메라가 비반성적으로 대상을 지향하는 경우 관객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양상을 갖는다.
1) 관객과 영화가 동일하게 카메라에 의해 보여지는 대상을 지향하는 경우. 이것은 살아 움직이는 봄의 체험에 가장 기본적이고 단선적인 전반성적 단계의 상관관계이다. 실로 이것은 영화의 비젼이 관객에게 지향 행로를 제시해주기 때문에 관객과 영화 사이의 마찰이 최소화된 지향적 궤적 혹은 시각적 행로이다. 관객이 이렇게 카메라에 의해 제시된 지향행로를 따라가는 경우 관객은 카메라의 시각적 움직임 그 자체를 알아채지 못한다. 이렇게 관객이 카메라의 매개를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관객의 비젼이 카메라의 지향하는 것과 동일한 그 대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관객은 영화와 지각되는 지향대상 사이의 상관관계와 동일한 일차적 관계에 있으면서도 영화비평가의 경우처럼 그의 비젼을 영화의 지향대상으로부터 영화가 대상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즉 영화의 지각·표현작용에로 변경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영화의 지향대상은 카메라의 지각이 지향하는 대상인 반면, 관객의 지향대상은 영화의 지각적·표현적 지향작용인 것이다. 이 때 관객은 카메라가 세계를 매개하는 방식에 지향하여 세계를 보이게 하는 영화의 표현 활동을 인지한다.
3) 관객이 자기 자신의 지향적 양식을 반성적으로 지향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영화의 지향대상과 지향활동은 관객 자신의 시각적 활동이 주제로 떠오르는 배경을 제공한다. 영화의 지향적 대상과 그의 지향적 활동은 나의 시야 안에 있지만 지향되지 않고 관객자신의 노에시스적 봄의 활동이 지향되는 배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II) 영화가 자신의 지향양식을, 지각을 표현으로 실현하는 자신의 지향활동을 반성적으로 지향하는 경우.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소브책은 영화의 카메라가 영화 장면 속의 거울을 통해 반사되는 경우를 든다. 보다 복잡한 예는 다큐멘타리 필름에서 카메라가 대상을 추적하다가 순간적으로 어디로 카메라를 돌려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장면이 보여지는 경우이다. 이렇게 카메라가 주저하다가 장면을 조정함으로써, 영화는 반성적으로 자신의 상황과 판단에 지향하는 것이다. 영화는 자신의 봄을 보이게 하는 정박지점이 잘못 선택되었을 때 영화의 신체인 카메라의 방향과 초점을 재조정하는데 이때 영화는 그것이 지각하는 과제와 반성적으로 관계한다.
이 경우에도 영화와 관객 사이에 다음 세 가지의 상관관계가 성립한다.
1) 영화는 자신의 비젼의 대상인 세계로부터 등을 돌려 자신의 지향양식을 반성적으로 지향하지만 관객은 영화의 비젼의 대상을 지향하는 경우. 그리하여 지각적 관심의 갈등이 일어난다.
2) 영화는 자신의 지향양식을 반성적으로 지향하지만 관객은 영화에서 가시화되는 광경을 지향하는 경우. 이 때 관객과 영화는 각기 반대 방향에서 대상을 지향하고 있지만, - 영화는 반성적 방향에서 관객은 비반성적 방향에서-, 역설적이게도 관심과 해석의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와 관객은 같은 관심과 같은 지각대상을 갖고있기 때문에 관객과 영화는 지향적으로 동일한 표적에 수렴한다.
3) 관객은 자신의 지향방식에 대해 지향하고 영화는 자신의 지향방식에 대해 지향하는 경우. 이 경우 지향의 방향은 유사하지만 영화와 관객은 관심과 비젼에서 다른 지향적 대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는 관객과 영화사이 어떤 영화적 의사소통도 없고 불일치도 없다.
영화체험이 위와 같은 양상으로 펼쳐지는 두 신체의 지향적 상호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소브책은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보다 관객에게 훨씬 능동적인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 영화이론을 주도하고 있는 라깡, 알튀세 모델에 따르면 관객은 무의식적 과정에 의해 상상적, 통합적 주체로서 위상화되거나 이데올로기적 코드의 사용에 의해 텍스트 내에 주어와 같은 위치로 변조된다. 영화 감상은 독백적 과정으로 텍스트가 발신하고 관객은 수동적 수신자가 될 뿐이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비로소 주체로 구성되는 것이다. 특히 정신분석학에 기대는 영화이론가들은 영화의 스크린을 라깡의 거울단계와, 또 영화의 서사는 상징계와 유사한 것으로 설정하면서 라깡의 정신분석이론을 영화체험에 투사시키려한다. 여기서 거울단계와 상징계에 관한 라깡의 주장을 잠시 살펴보자.
라깡에 따르면 유아는 6개월 이전까지 자신의 몸을 서로 연관 없이 따로 떨어져 있는 파편화된 신체로 느끼다가 6개월에서 24개월 사이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의 몸 전체상을 지각한다. 이것을 계기로 유아에게 신체의 통일성을 체험되어 통일적인 자아 개념이 만들어진다. 자아는 발생적으로 나중에 구성되는 것이며 자아는 스스로의 구성 원천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즉 거울에 비친 상이란 타자로부터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유아는 아직 팔다리도 가눌 수 없고, 자신의 시선 마저 정확히 조절할 수 없으므로, 거울을 보고 생각하는 통합된 자아는 실제와는 간극을 가진, 상상 속의 자아이다. 유아는 거울 속에 있는, 통일되어 있고 완전해 보이는 이미지가 자신이라고 오인(meconnaisance)하고 만족에 빠진다. 그러나 이 오인에 의한 나르시즘적 만족은 유아 단계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평생 동안 그를 지배한다. 주목되어야 할 것은 자아가 스스로의 구성 원천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거울에 비친 상이란 타자로부터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유아는 그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들여다보고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으로 바깥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식 형성되는 가장 초기의 단계에서부터 타자의 존재는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인식하고, 지각하고 소망하는 나의 의식의 원천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자신은 사실상 나의 외부에서, 나 아닌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나의 의식 근원은 내 자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닌 곳에 있다. 때문에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런데 라깡의 연구에 따르면 거울 속의 이미지를 자기 자신으로 오인함으로써 타자적 자아가 형성되는 유아기는 언어활동으로 들어가는 단계와 일치한다고 한다. 유아는 이제 언어를 배우며 상징계(symbolic oder) 진입하게 된다.
라깡에 의존하는 영화이론은 영화를 보는 상황을 이러한 라깡의 거울단계와 상징계 단계와 유사한 상황으로 파악한다.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거울을 통해 상상계로서 기능하는 동시에 영화의 내러티브를 통해 관객을 상징계로 진입시킨다는 것이다. 영화는 결국 상상계와 상징계로 동시에 작용하면서 관객을 상상적 주체로 변조시킨다. 그리고 관객이 영화적 장치에 의해 관음증적 주체로 구성되는 한, 관객은 자신이 보는 것과 그에 포함되어 있는 시각적 쾌락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함정에 말려든다. 마치 거울단계의 유아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만족을 느끼는 나르시즘적 단계에 빠져들 듯. 이러한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을 시도하는 영화이론가 메츠는 영화의 관람 행위를 유년기로의 퇴행이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소브책의 영화 현상학에 따르면 관객은 자신의 지향적 봄의 활동을 수행하며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기호와 의미를 영화와 함께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객관적 관찰자에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시되어 왔다. 오히려 관찰자에게 보이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신체이며, 그러한 신체는 그 누구의 신체도 아닌 초월적 지향적 봄을 주인으로 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기계에 예속되는 것이다. 영화경험을 이렇게 텍스트에 편향되게 기술을 하는 것은 소브책이 지적하듯 영화현상을 대상적으로 외부적 관점에서 다루어 온 결과이다. 즉, 영화가 영화의 비젼을 구성하는 인간의 시각체험의 구조를 떠나 기호체계로 이루진 텍스트라는 외부적 관점에서 접근되고 있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현상학은 비젼을 추상적 상태에서 신체를 통해 살아 움직이는 그 자체 기호학적-해석학적 행위로 회복시켰다. 현상학은 영화를 단지 비젼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비젼의 주체로서 격상시켜 주제화하고 해석할 수 있는 수단과 어휘를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비젼의 주체인 몸은 그 자신의 지각, 표현 활동에서 그리고 그의 지향적 기획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보는 것으로는 물론 보여지는 것으로도 객관화될 수 없다. 하지만 현상학에 의해서 영화의 신체가 단순히 비생명적 기계 이상의 것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영화를 보는 사람을 현혹하고 지배하는 기만적이며 숨어있는 장치 이상의 것으로, 발견되고 인정된다.
마찬가지로 현상학은 관객을 영화적 봄의 생산과정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서 지향적으로 활동하는 독특한 존재로 위치시킨다. 외부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비젼을 생산하는 관객의 내면적인 과정은 영화 경험에서 수동적인 신체로 보이는 것을 채우고 있다. 내면적으로 고찰해보면, 즉 봄의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관객의 신체는 비어있는 수동적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항상 지향적 활동성으로 충전되어 있는 살아 움직이는 몸이다.
결국 소브책에 따르면 영화는 내면적이며 물질적이고 객관적이며 동시에 주관적인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되돌아보게 하는 지각적이며 동시에 표현적 매체이다. 영화는 지각적 대상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그 자체 지각적 주체로 다가온다. 영화는 그의 눈으로 말 걸어오면서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체험 불가능한 것을 보게 해준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주관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라는 것, 보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여진다는 것이 보여진다. 이와 같이 영화는 우리 자신의 주관적 봄의 순환적, 교호적, 사회적 성격에 대한 경험적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 모델을 제공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봄을 보는 순간, 따라서 타자의 눈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에 완전히 보여지는 것이다. ... 처음으로 나의 봄이 나에게 실재로 보여지는 것이다. 처음으로 나는 자신의 눈 아래 숨겨진 상태에서 돌아서서 나 자신에게 나타난다." 영화는 탁월하게 철학적인 전환, 봄의 주관적 구조에 대한 상호주관적 통찰을 - 자신을 봄의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으로, 또 타자도 마찬가지로 통찰하는 것을 - 허용한다. 이러한 영화의 현상학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소브책은 공상과학 영화 "브래드 러너"에서 복제인간 로이 배티가 인간에게 던지는 대사를 음미한다. 복제인간 로이 배티는 그의 눈을 유전공학적으로 제조한 생명공학자에 다음 같이 말을 남긴다. "내가 당신들의 눈으로 보는 것을 당신들이 볼 수 있다면". 영화의 지각적- 표현적 물질성은 상호주관성을 원하는 이러한 아이러닉한 욕망을 펼쳐놓는 것으로 바로 그 물질성을 통하여 그러한 욕망이 시각적으로 상호주관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단순히 인간의 봄을 기계적 봄으로 대치하기보다는 기계적으로 인간 봄의(봄과 보여짐의) 순환적 구조 - 즉, 세계내의 대상뿐만 아니라 항상 신체화된 지각 주관을 동반하는 살아있는 체계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3. 영화적 희열의 현상학적 원천 - 봄의 욕망
소브책에게 영화의 의미는 바로 우리의 신체적 지각구조를 상호주관화하는 데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는 경험의 구조를 드러내려는 현상학적 작업을 영상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브책의 영화 현상학에서는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 즉 영화가 희열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거의 취급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의 영화 현상학에는 바로 영화가 제공하는 희열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되어 있다. 소브책에 따르면 영화의 희열은 우리의 봄을 보여준다는, 즉 봄을 수행하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불행하게 차단되어 있는 봄의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편집에 따라 달라지는 영화적 희열의 질이 무차별적으로 취급된다. 상당히 작위적인 카메라 조작 없이 촬영된 영화나, 자연적 비젼을 능가하는 다양한 카메라워크에 의해 연출된 영화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봄의 과정을 드러내기에, 우리가 평소에 볼 수 없는 그 과정을 드러내기에, 우리에게 희열을 제공할 뿐이다. 실로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귀결이다. 린다 싱어(Linda Singer)는 바로 소브책의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
영화는 우리의 환상과 욕망을 시각적으로 실현시킬 것을 약속하는 과잉적 나타남을 발생시킨다. 싱어는 바로 이러한 시각적 희열의 생산 지점으로서의 영화적 표현과 기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싱어가 정확히 지적하듯 영화적 장치는 의미의 과잉을 생산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남의 형식과 조직을 재배치하는데, 바로 여기에 희열의 원천이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나타남은 질적으로 다양화된다. 이러한 질적 다양성은 상당 부분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재생하는 사진 장치에 의한 왜곡(deformation)에 기인한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이미 소브책이 영화 신체의 핵심적 부분으로 부각시킨바 있는 카메라이다. 어떻게 카메라가 이러한 역할을 하는가? 카메라는 단지 세계를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소브책이 주장하듯 메를로-뽕띠의 신체와 같이 세계에 지향적으로 다가간다. 그렇다고 영화에서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살아 움직이는 신체의 지각구조를 그저 반복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물에 대해 우리의 자연적 지각보다는 훨씬 능동적으로 조작적으로 지향한다. 따라서 카메라는 메를로-뽕띠적 신체를 훨씬 능가한다. 싱어는 카메라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카메라는 - 렌즈, 렌즈 구경, 필터, 초점 - 등 일련의 기능들로 분산되고 이러한 기능들은 상황의 어떤 잠재성이나 가능성을 강화하려 할 때 각각 독립적으로 조작된다. 카메라는 시각화의 힘을 강화 혹은 집중시킬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것들의 성격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
카메라는 대상에 고착되어 있는 인간의 봄과는 달리 나타나는 대상에 구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보다 직접적이고 극적인 조작을 할 수 있다. 카메라는 시각적 요소들의 관계에 변화를 줄 수 있다. 따라서 카메라에 의한 봄은 그러한 요소들을 선택적으로 분리해내고 그 요소들을 다시 희열의 테두리 내에 희열의 결절점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시각적 감동을 - 색채적으로 공간적으로 정서적으로 - 강화한다. 조명, 세트 등 다른 영화적 장치에 지원을 받으며 확대되는 조작가능성은 사진 이미지가 발산하는 매혹적 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제 주목해야할 것은 이렇게 작동하는 카메라가 자연적 봄과 다르게 진행되는 움직임을 통하여 자연적 봄의 결핍을 채워주는 시각적 풍요지대를 산출한다는 점이다. 싱어는 영화와 자연적 경험사이의 차이를 우선 다음과 같은 '시각적 포기'의 경우에서 보여준다.
영화에서 관객은 시각적 경험에서 적극적 구성적 역할을 포기하는 위치로 배치된다. 카메라는 시각적 상황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고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기 때문에, 관객은 카메라에 의해 제공되는 그 과잉 고정성이나 매혹의 위치를 선호하면서 관객 자신의 구성적 활동을 포기하는 위치로 전위된다. 물론 자연적 봄의 경우에도 시각적 포기의 상황은 발생한다. 싱어는 자연적 지각의 경우 시각적 포기 상황을 메를로-뽕띠를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메를로-뽕띠에 따르면 "지각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것에 빌려준 것을 되돌려 주지만 이것은 내가 처음에 그것으로부터 취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 나에게 나타나는 대상은 현재 나타나지 않는 부분도 내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나타나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그 나타나지 않는 부분에 나타남의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그 대상이 더 볼 것이 있다는 가능성을 내게 제공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적 지각의 경우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상호 교환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상호 교환적 관계는 시각적인 포기의 순간에 보는 자가 보이는 것에 흡수되면서 일방화되며 시각의 목표가 실종된다. 이러한 시각적 포기의 순간은 싱어 따르면 메를로-뽕띠의 지각 현상학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예이다: 푸른 하늘의 광활함이 주체로서 그 끝없이 열려지는 힘으로 나를 부를 때, "나는 나 자신을 그것에 내맡기고 이 신비 속으로 잠겨든다. 나의 의식은 이 끝없는 푸르름으로 스며든다." 메를로-뽕띠는 이런 지각의 순간을 내맡김의 순간으로 명명하면서 지각의 영역에 자신을 내맡기려는 봄의 욕망을 지적하고 있다. 앞에 든 푸른 하늘의 경우 이러한 지각의 욕망은 푸르름으로 스며들어 그것과 분리되지 않으려는 봄의 욕망이다. 그러나 푸르름이 스며든 눈은 더 이상 그 자신의 목표를 옮기고 결정할 수 없다. 대신 그것은 보이는 것에 의해 압도된 봄, 즉 보이는 것에 깊숙이 매혹되고 최대한 결정된 수동적 봄이다. 대상을 구성하는 봄의 지향행위는 푸르름 속으로 흡수되어 압도되며 대상을 상실하고 따라서 이 순간 보여진 푸르름은 푸른 하늘이란 대상이 아니라 다만 무한히 펼쳐진 푸른 영역이다. 완전한 내맡김의 순간에 우리 욕망의 표적, 즉 하늘이란 대상은 실종되는 것이다. 시각적 포기는 한편으로 지각의 영역에 내맡겨짐으로써 지각영역과 분리되지 않으려는 봄의 욕망을 충족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봄이 지향하는 표적의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거리) 실종이란 결핍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싱어에 따르면 영화에서 이러한 환상은 내맡김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보는 자와 보는 것 사이의 공간적 거리를 보존하는 영화 장치의 이중적 능력에 의해 충족된다.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푸르름은 여전히 프레임에 잡혀있는 푸른 하늘, 쇼트의 다른 요소들, 쇼트의 시웅스의 일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싱어가 분석한 바와 같이 영화가 봄과 보이는 것 사이의 본질적인 상호 관계를 탈중심화시킨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그리고 이 탈중심화에 의해 여러 가지 놀라운 효과가 산출된다. 영화에서 탈중심화는 카메라를 제 3의 지점으로 틈입시킴으로써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의 교호체계에 변화를 산출하는 것이다. 싱어는 메를로-뽕띠가 든 푸르름의 지각과 상응하는 예로 영화 Swept away에서 푸르름으로 가득 채워진 한 장면을 인용한다. 이 장면에서 지중해 하늘과 바다의 푸르름은 서로를 비추며 어우러져 매혹적이며 환상적인 푸른색을 탄생시킨다. 영화의 주인공인 부르주아 미망인과 그녀의 연인은 이 푸르름을 가르며 요트를 타고 금지된 욕망과 환상의 섬으로 떠난다. 물론 이 영화 주인공의 지각 체험 과정에서, 푸르름은 메를로-뽕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지각 주체로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스며드는 영역이다. 또 이것을 보는 순간 관객도 메를로-뽕띠의 경우와 유사한 시각적 포기 상황 속으로 끌려들어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에서는 푸르름과 주인공의 관계가 제 3자적 입장으로 탈중심화되어 여전히 관객과 거리를 유지하며 대상적 의미를 수행한다. 이 영화에서 지중해의 찬란한 햇살의 유희가 벌어지는 배경으로서 푸른색을 강화시키는 것은 무아지경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광활한 영역을 이미지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싱어가 정확히 포착하듯 색채의 바로미터로 기여하며 이야기가 펼쳐짐에 따라 욕망의 담론에 진입해 가는 것을 의미화한다. 즉, 관객은 제 3자 위치에서 푸른 하늘과 주인공의 관계에서는 대상화되지 않는 것을 그 푸른빛의 배경 효과를 통하여 보게된다는 것이다. 푸른빛은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매혹되는 초기 단계에서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희미하게 만들지만 영화가 끝날 때는 오히려 얼굴의 주름과 흠을 보여주는 거친 빛으로 변해간다. 이와 같이 색이 드러내는 현상이 변화해 가는 것은 다분히 비극적 종말로 흘러가는 영화의 시퀀스를 암시적으로 떠받친다. 따라서 영화에서 색도를 조작하는 것은 장면의 심층적 의미를 반영하며 회화의 색채와 마찬가지로 도상학(iconology)적 의미를 생산한다. 만일 대상과 지각주체의 관계에 카메라가 개입하여 대상과 봄의 주체와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푸르름은 이러한 배경적 의미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보는 자는 단지 그 푸르름에 스며들어 모든 거리를 상실하며 푸르름에 빠져들 뿐, 보는 자와 푸르름 사이의 거리는 어떤 의미로 채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자연적 봄의 구조를 벗어나는 영화의 봄에서 싱어는 자연적 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봄의 욕망을 포착하고 그것이 어떠한 카메라 기법을 통해 충족되지는 보여준다. 싱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메라는 봄의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인간에 의해 고안된 발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관객에서 외부의 내면으로서 그리고 내면의 외부로서 나타나는 이미지를 발생시킬 수 있다. 카메라는 욕망하는 눈의 발명이기 때문에 카메라는 눈의 결핍을 채워주는 시각적 풍요의 지대를 발생시킬 수 있다."
인간의 시각적 결핍에 대한 충족으로서의 시각적 현전을 제공하는 카메라의 능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제작의 최소 지향적 단위인 쇼트를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싱어는 이 작업에 착수하여 특히 "렌즈와 각도의 조작을 통해 효과를 낳는 봄의 여러 변형이 어떻게 욕망의 다양한 형태의 출현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는지" 이해하려 한다.
우선 광각의 경우, 자연적 시각 상황에서와는 달리, 전경과 후경은 쇼트의 깊이에서 서로를 퇴조시키거나 숨기지 않는다. 자연적 지각에서는 어떤 대상이 시야의 중심부에 놓이면 이외의 것은 주변화되며 배경으로 밀려난다. 이처럼 깊이와 넓이는 자연적 상황에서 서로 배척관계에 있다. 하지만 광각의 경우 카메라는 깊이와 넓이로 조직된 시야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 예로 싱어는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 의 한 장면을 인용한다. "천국의 나날들"에서는 깊이도 넓이도 희생되지 않고 전경과 후경 모두 초점에 맞추어져 있는 파노라마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카메라가 중립적 위치에서 인간의 눈처럼 어떤 초점을 선택하도록 강요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싱어에 따르면 줌 인(Zoom-In)이 제공하는 희열의 원천은 응시와 그 응시의 목표물 사이를 욕망의 힘으로 다리 놓는 마술적인 봄의 양식을 선명하게 실현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줌 쇼트는 봄의 영역을 떠다니며 그것이 보는 대상을 발견하고 놀랄만한 속도와 직접성 그리고 정확성으로 그에게 다가가려는 있는 봄의 욕망을 영상화한다. 따라서 줌은 싱어가 표현한 바와 같이 "세계라는 진창에 빠지지 않고 마음대로 거리의 범위를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는 육화된 봄의 능력"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봄의 문제와 애매성을 즉각 해결하려는 봄의 욕망"과 관련되는 것이다. 줌은 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거리, 시간 사물의 포박을 풀고 오로지 "지향의 힘에 의해 그의 세계를 조직하려는 봄의 욕망"을 만족시킨다.
광각과 줌렌즈는 장면의 위에 떠올라 장면을 형식적으로 그리고 구성적으로 조절하는 힘을 행사하는 고도 카메라 위치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 효과는 싱어가 지적하듯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에 의해 모의된 신적 시점과 유사하지만, 영화에서 이러한 효과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카메라가 그 지향 대상의 저항 없이 움직이며 개입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봄은 사물에 의해 가해진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각적 과잉의 환상을 갖는 봄을 증명하는 것이다.
카메라가 봄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봄에 개입하는 힘을 싱어는 클로즈업에서 가장 뚜렷하게 목격한다. 클로스 업에서 카메라는 욕망의 대상을 독점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실로 클로스 업은 사회 윤리적으로 금기시되고 있는 봄의 지대를 가까이 보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같다. 따라서 싱어는 이러한 클로스 업을 사회적 금기를 돌파하려는 욕망과 관련짓는다. 또 클로스 업은 그의 대상을 공간적으로 내밀한 곳에 위치시킨다. 그리하여 클로스 업은 어떤 대상의 독특한 특성을 다른 것을 배제한 상태에서 은밀한 공간에 가두고 그 자체로만 향유하려는 욕망을 표현하는데 사용기도 한다. 싱어는 클로스 업이 여성이나 여성 신체의 일부를 영상화하거나, 종료를 시사하는 키스가 화면을 채울 때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클로스 업은 또한 그 응시 대상을 그 규모와 맥락과 관계없이 그 대상에 내적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물신화할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싱어는 클로스 업이 그 반대로 대상을 극도로 무관심하게 바라봄으로써 대상을 무력화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음도 지적한다.
싱어는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카메라 기법이 봄의 결핍을 채우려는 봄의 욕망에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영화에서 봄의 결핍이 충족되는 시각적 풍요지대는 카메라 기법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편집에 의해서 완성된다. 따라서 싱어는 영화 편집 상의 여러 기법이 어떠한 시각적 결핍을 충족시키는지 분석한다.
싱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편집은 개개의 쇼트가 영화라는 통일적인 지속적 이벤트로 조직화되는 과정이다. 영화의 영화적 효과에 책임이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편집, 즉 이미지를 시간적으로 연결하는 편집 능력뿐만 아니라, 실재와는 다른 기반에서 사물들의 연관관계를 설정하는 편집 능력이다."
우선 싱어는 점프 컷(Jump-Cut)에 의해 시각적 욕망이 어떻게 충족되는지 보여준다. 우선 점프 컷은 의미와 감응의 과잉을 낳을 수 있다. 점프 컷의 속도와 직접성은 프레임 사이에 빠른 극적 전환(dramatic shift)과 쇼트와 쇼트 사이의 관계를 읽어내는 데 정서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시간상의 계열로서 병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맥락과 연관되어 관객에게 서스펜스, 기대, 흥분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점프 컷은 줌과 마찬가지로 상황들 간의 거리에 마술적인 다리를 놓는 것을 표상하고 실제 맥락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요소들 간의 관계를 성립시킨다. 그런데 실재의 맥락에서는 한 장면에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의 부재와 배제를 동반한다. 하지만 점프 컷은 그러한 맥락에 의한 제한과 구속을 뛰어넘으며 실재의 맥락에서 부재하는 것과 연결된다. 따라서 점프 컷은 싱어가 주장하듯 다른 것에 개방되어 그것과 접촉하기 위해 시각적 종합력을 확장시키려는 욕망을 대변한다.
연속성(continuity) 편집 또한 감응효과를 생산한다. 연속성을 위해 조직화된 시퀀스에서 봄은 인위적 노력이나 단절 없이 보려는 욕망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발적으로 펼쳐지는 듯한 세계와 대면한다. 연속성은 저항 없이 드러나야 할 세계를 우리에게 표상하는 동안 쇼트 사이의 끊임없는 연결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그 자신의 기능을 숨긴다. 그것은 사물이 그 고유의 질서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을 보려는 욕망을, 즉 단절, 불연속성 그리고 틈새 없는 세계를 보려는 욕망을 재현한다.
반면 이와 반대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몽타주이다. 몽타주의 귀재 에이젠쉬타인은 서로 충돌하는 장면을 대립시켜 극적 효과와 나래티브 상의 질적 비약을 낳는 몽타주 편집법을 변증법에 기초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싱어에 따르면 몽타주는 사물간의 연결이 서사적 인과적 혹은 자연적 의미를 상실하고 그의 진부한 맥락을 벗어나 병치에 의해 새로운 고유의 맥락을 생성하는 계열로 대치되는 봄의 방식이다. 몽타주는 영화적 의미화가 함축하고 있는 돌발적 성격이 선명하게 보여지는 경우이다. 몽타주는 분명한 맥락에 위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결합시킴으로써 관계를 형성한다. 이점에서 몽타주는 연속성 편집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연속성 편집의 전략은, 서사와 사물들과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게 하는 맥락을 설정할 수 있게 하는 영화의 다른 형태, 예컨대 등장인물 등에 의해 지원된다. 반면 몽타주 시퀀스의 계기들을 연결시키는 맥락은 행위에서 그의 실현을 전제하지 않는다. 몽타주는 나타남의 흐름과 계열만을 통해 사물간에 관계를 의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의미의 과잉을 생산한다. 이 순간 관객에게 일어나는 희열은, 세계를 조직하는 유일한 지배적인 힘으로서 세계를 그 자신의 요구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조직하려는 봄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영화의 체험은 나의 활동적 지향성이 여러 가지 조작으로 통해 탈중심화되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때문에 영화의 희열은 내가 기대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고 사물과 대면하여 경이와 매혹의 가능성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탈중심화된 지각이 자연적 지각과 구별되는 그 차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싱어에 따르면 영화의 희열은 나를 나 자신의 외부로 끌어내는 나타남을 제공하여 나를 내가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 왜냐하면 그러한 장소는 영화적 사건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기 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 곳으로 나를 옮겨 놓는 데 있다.
4. 맺음 말
우리는 지금까지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이 어떻게 영화 현상학이 될 수 있는지를 소브책과 싱어에 의해 발전된 영화 현상학을 통해 고찰해 보았다. 소브책의 경우는 메를로-뽕띠의 충실한 계승자로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을 거의 원형 그대로 영화 내면 깊숙이 침투시켜 우리의 봄의 구조를 상호주관적으로 드러내는 운동이 바로 영화임을 밝혀내었다. 하지만 싱어와 메를로-뽕띠의 관계는 불안하다. 싱어의 영화 현상학은 자연적 경험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현상적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싱어와 메를로-뽕띠의 관계는 싱어가 메를로-뽕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할 때 분명해진다.
메를로-뽕띠는 현상학이 영화 표현의 의미 능력을 평가하기에 특히 적합한 입장이라고 시사한바 있다. 왜냐하면 세계를 바라보는 현상학적 입장은 우리의 영화적 경험에서 확증되는 것 같고 또 영화는 현상학에서 확증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정신과 육체, 정신과 세계의 통일성과 양자가 서로에게서 표현되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고 메를로-뽕띠는 말한다. 메를로-뽕띠와 마찬가지로 싱어는 영화가 몇 가지 의미에서 현상학적 이론을 확증해 준다는 점을 인정한다. 영화 제작의 과정은 그 제작의 단계에서건 감상의 단계에서건 지향적이고 동기 유발적인 지각적 삶을 요구한다. 우리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지각이 시간을 넘어 항상 의미를 향해 가는 움직임이 아니라면, 영화는 단절된 요소들로 흩어져 일련의 정지된 사진 이미지 이상을 의미할 수 없을 것이다. 나타남의 흐름을 시간을 넘어서 종합할 수 있는 지향적 경험의 장소로서 신체적 비젼이 없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방식에 의해 발생하는 의미의 여분은 실종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제작은 봄의 상호주관적 의미를 전제하는데, 거기서 봄은 자신의 대상인식 양식이 아니라 타자에게 열려있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양식이다.
하지만 싱어는 영화에서 이러한 자연적 봄의 현상학적 구조가 그대로 재생되는 것(reproduce)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로 여기서 싱어는 메를로-뽕띠나 소브책과 거리를 취할 수밖에 없다. 영화적 봄의 가치는 자연적 봄으로부터의 거리와 차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봄이 봄의 구조를 인식하여 그 봄의 결핍을 파악하고 그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봄의 욕망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냥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 봄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비젼이 움직여 가는 것, 바로 그것이 영화이다. 메를로-뽕띠와 소브책은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 그들은 영화가 우리의 자연적 경험에 대한 반성적 운동으로 자연적 경험이 반복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영화를 영화로 만드는 핵심 요소, 즉 영화는 자연적 경험 구조를 변조 왜곡하여 자연적 경험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욕망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놓쳐버렸다. 영화에서 봄은 그 자신을 성찰하여 봄의 동기와 욕망을 재발견할 수 있는 봄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요컨대, 부재하는 것, 결핍된 것을 현전화하고 충족시키려하는 욕망이란 기관차의 운동, 바로 그것에 반응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는 싱어가 표현하듯 "우리 지각의 호흡, 범위, 깊이 그리고 그와 함께 지각에 의존하는 모든 삶을 증폭하고 고양하는 담론"이다. 영화의 희열은, 특히 영화의 시각적 희열은 영화가 우리의 봄의 과정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또 우리의 봄의 한계를 벗어나며 우리의 봄의 법칙을 위반하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싱어에 있어서 영화에 대한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이 갖는 의미와 역할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싱어에 따르면 우리의 봄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봄의 구조를 어떻게 벗어나고, 위반해야할지를 시사하기에 영화 현상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영화는 철저히 반성의 산물이며 그러한 한 그것은 의식의 차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몸의 현상학이 아니라 의식의 현상학에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