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보러 가는 길 ‘문경새재’ 가 최고의 숲길로 되다.
지난 일요일인 10일 모교인 대구고등총동창회 주관으로 ‘제3회 달구산악축제’가 성대하게 열렸다. 전국의 대구고 출신들이 문경의 주흘산, 조령산 관통길인 새재야외 음악당에 집결했다.
여기를 참가하려고 지난 금요일날 밤에 대구로 내려와서 아내와 동행하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조진호 산악회 총무가 이웃에 있기에 7시40분에 만나 1차 집결지인 능인고에 도착했다.
오늘은 과연 몇 명이나 참가할까? 지난 부산 이기대 트래킹때 내가 준비해간 떡이 맛있었다며 이번에도 조진호 총무는 떡 30인분을 주문해서 간다. 어제 산속에 있어 연락이 안되어 지난번 떡집은 아니였지만 맛은 비스무리 했다. 25인승의 버스가 넘쳐서 중간에 무릎에 앉혀서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은 큰 법. ‘혹시나’가 ‘역시나’로 15명만을 태웠다.
대구에서 14명, 구미 장천에서 서정보를 픽업하여 쭉쭉 뻗은 낙동강변 길을 내달렸다. 낙동강은 4대강 살리기로 만든 구미보, 상주 경천보의 효력으로 메마랐던 낙동강에는 푸른 물이 가득했다. 오래전 어느 날 속리산을 등산하고 오는 길에 낙단교 밑에서 쏘가리를 잡는다고 밤새 낚시를 드리웠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난다. 쏘가리회와 쓸개즙과 소주를 드리켰던 내 40대 청춘의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문경새재 상행선 휴게소에서 양근식 교장 덕에 오미자의 분홍빛 5가지 차맛을 봤다. 聞慶이라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의 아름다운 지명이지만, 오늘은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까? 사람은 나이가 들면 추억을 반추하며 살아간다.
나의 옛 기억은 신문사 수련시절 MT왔던 기억과 소모임인 친구들과 산책한 경험, OB산악회 일원과 주흘산을 등반했던 기억, 고교 졸업 30주년에 14회 동기들과 산책했던 기억, 생물선생들과 꽃 탐사를 왔던 기억 등 서너 차례가 된다.
하지만 이번의 트래킹은 급변하는 세월만큼이나 변해버린 새재였다. 드라마 촬영지로서 단골로 나오는 문경새재의 이미지로 각인된 문경새재, 찻사발 축제장, 오미자, 사과로 문경은 또 한 번 유명세를 타고 있다. 문경새재는 본래의 자연미에 인공미를 가미하여 각종 시비와 의자, 쉼터, 계곡물을 끌여들여 보또랑길을 운치있게 조성했다.
무엇보다 문경새재는 새도 날기 어렵다는 설들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1000m가 넘는 산과 산사이의 고개의 옛이름이 재가 아닐가 싶다. 아니면 새로운 고개의 재란 뜻의 새재가 아닐까? 무엇보다 영남대로의 중로로 영남지방의 양반 가문의 자재가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이며, 충청과 영남의 경계가 유일한 길이기에 문경새재는 역사의 길이만큼이나 숱한 얘기와 사연이 담겨있다.
그 가운데 추풍령 길은 과거에 추풍 낙엽처럼 떨어진다고 기피했으며, 소백산의 죽령고개는 쭉쭉 미끄러진다며 이미지가 안 좋았다. 아마도 얘기꾼들이 각 지방마다 유리하게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 결과가 아닐까?
어쨌든 천혜의 요새인 이 길을 막지 못하여 임진왜란 당시 왜병은 15일 만에 한양으로 파죽지세로 쳐들어왔었다.
여기에 놀란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전 했지만 조총을 앞세우고 물밀 듯이 쳐올라왔다. 국제관계에 까막눈이 었던 선조와 조정은 무비유환의 치욕적인 몽진을 갔다. 아직도 소설 ‘임진왜란’을 쓴 김성한의 역사의 통찰과 명치유신후의 일본은 征明街道의 명분으로 힘없는 조선을 제멋대로 유린했다.
주인없는 땅을 거침없이 휘몰아쳐왔지만 절간에서 이를 보다 못한 스님들이 나서 승병을 꾸미고 일반 백성이 합세하여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할려고 몸부림쳤다. 대표적인 분들이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스님 등이 아닌가?
아마도 전라도의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그때 조선은 일본에게 먹혔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문경새재는 사극물 영화촬영 세트장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얼마 전 광개토대왕도 여기서 만들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의 유명 도공이 깊고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어 전통의 망태기 가마로 도자기를 구워내서 이조다완을 완성하여 일본사람들이 환장을 하게 만들어 지갑을 열게 한다. 도예명장으로 인간문화재인 문경요 천한봉씨와 영남요의 김정옥 등 도자기의 명인들이 많이 있으며 한국의 자랑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새재입구에 들어서자 선비상이 서있다. 조선의 선비가 지금 남아있는가? 고유한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이어오던 소중한 정신은 내다버리고 잃어버리고 정신문화는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돈을 신으로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인의예지신은 고리타분한 진부한 가치로 은연중 받아들인 게 아닌가?
이런 아름다운 길도 아차 했다면 아스팔트 포장으로 바뀔 뻔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야기는 문경에서 교편을 잡았던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자 역사적인 문경새재 길은 살리고, 산등성을 오르는 이화령쪽으로 도로포장을 했단다. 역시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탁월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자고로 박정희는 통치자로서 치산치수에 남 다른 애정으로 애국애민 한게 아닐까?
나는 국내 유명산을 다니며 산의 의미를 생각해보곤 한다. 아니 산을 닮고 싶었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고 산 속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어울려 자연을 이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 속에 올 때마다 내 심신은 맑아지고 영혼이 푸르러진다면 과장일까?
카메라를 충전기를 안 가져와 카메라가 무용지물이고, 갤탭은 너무 커서 애시당초 문명의 이기를 오늘은 잊기로 작정 했었다.
야외음악당을 통째로 전세 낸 동창회 집행부는 텐트를 치고 작게나마 기별 표시를 붙여놓았다. 서울서 온 17회인 내 동생이 찾아와 인사를 한다. 나도 OB산악회 선배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14시 30분까지 야외공연장으로 모이기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안 온다던 방태조 왕회장과 우종협고문, 정수홍 재경총동창회 전임회장 등 약 30여명의 반가운 동기들이 참가했다.
잘생긴 이준기가 재경 대구고 14회 산악회회장이고 윤기형 총무가 수고를 하고 있다, 대구는 양근식 교장이 14회 산악회 회장을 맡고 있고 조진호 총무가 봉사를 수년째 하고 있다. 동기회는 대구에서 강긍원 회장이 맡고 있고 총무는 홍병각이가 늘상 애를 쓴다.
수도 서울에서는 정동현 색스폰연주가가 맡고 있고, 총무는 최영범이 수고를 하고 있지만 실질적 총무는 이만희 대령이 맡고있지만 무슨 사정이 있는지 참가를 못했다. 왜 조직구성을 말하는가 하면 올해가 대구고 14회 산악회 박상원산행대장이 100회째 등반을 기획하여 삼박하고 성대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자고로 이 나이에는 건강이 제일이고 두 번째가 일이고 세 번째가 가정이고 네 번째가 벗이라 했다. 과연 그럴듯하고 맞는 말이다. “1건2사3가4우”로 자기관리를 해야겠다. 건강을 잃으면 천하를 얻어도 다 소용없다. 이준기에게 물었다. 왜 산에 오느냐고 “당뇨 때문이다” 고 솔직한 고백을 했다.
우리는 2관문인 조곡관 앞에서 함께 쌓온 도시락을 풀고 오미자막걸리에 건배를 했다. 14회의 건강과 행운을 위하여 건배를 하고 외람되게 내가 “우하하”(우리는 하늘 아래 하나다)로 단합을 새기는 뜻에서 건배사를 추가했다.
정말이지 이런 좋은 곳을 가족과 친한 친구들과 또 오고 싶다. 숲터널을 지나며 도회지에서 쌓여든 스트레스와 근심과 삶의 찌꺼기를 날리고 싶다. 흐르는 물에 세심과 세안과 세족을 하고 싶다.
점심을 먹고는 내 페이스대로 3관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였다. 마사토가 깔린 신작로가 아닌 옛과거길의 오솔길을 택해서 걸었다.
자신의 입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과거길을 떠나던 양반의 자제는 이 길을 떠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기대와 희생심, 지향성 교육열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입신양명의 필요를 깨달았다면 더욱 좋겠지만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재우도 무과급재를 늦게했다. 다만 조선의 선비로서 무인으로서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투철한 사명감으로 국가관이 생기지 않았겠나.
각설하고 한달음에 찾아간 3관문에서 대고출신 선배에게 다짜고짜로 부탁하여 사진을 한판 박고 명함을 건내며 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되돌아 오는데... 유인성이가 아픈 몸을 이끌고 올라온다. 다시 가자는 말에 다시 올라 기념 촬영을 했다. 이준기. 조진호. 이재용, 오주한 김종도가 완주했다.
1관문인 주흘관에서 3관문인 조령관까지 왕복 약 13Km의 환상적인 금의환향 길을 내려오면서 나는 육수를 엄청 흘렸지만 땀을 흘린만큼 보신을 했다. 집합장소로 내려와서 시원한 생맥주로 목을 축이며 친구와도 다시 헤어져야 하는 회자정리, 별리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첫댓글 최고의 트래킹코스가 잘 정리 되었고
동기들과의 중식후 오랜만에 15km의 트래킹 진수를 맛봤네요.
박기자! 해박한 지식과 수려한 문장으로 된 산행기가 멋져부러. 좋은 글 감사하며 계속 부탁합니다.
졸고를 칭찬해주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다시 수원으로 올라왔습니다. 김종도는 다시 내고향 성주땅을 밟을려면 동행요청합니다. 독산성, 선석사, 감응사를 안내 할께요.
와까리마스
호산인의 시원한 글 잘 읽었소이다. 그런데 홍의장군은 1585년 선조 18년 (당시 34세) 문과인 별시의 정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아 무효가 되었고, 선비 생활을 하던 중 임진 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인지 모르겠소. 좋은 글 끝에 어울리지 않은 댓글이지만 이해바라오. 부디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 행복한 생활 되시길 바라며...
붉은 옷을 입고 의병활동을 벌였던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는 초야의 선비였던 남명 조식의 제자로 스승의 영향으로 풍전등화의 전란에 분연히 일어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과에 합격했지요. 또한 남명의 영향으로 병서와 병략을 배웠기에 문무겸전의 선비이자 무관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무 겸전의 장수인 점은 옳지만 무과에 급제한 일은 없으며, 감사를 지낸 아버지의 영향으로 병법 관련 서적을 읽고 병영을 돌아보며 병법을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아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