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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 속에 피는 꽃】
80년대 초의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새로운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화를 열망한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뒷골목에서 민주화라는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단호하게 사회체제를 확립하려는 군사정권에 감히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경직되고 통제된 사회에 그저 순응하는 것만이 자신을 보전하는 길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민들의 생활이야 거기서 거기였다. 직장을 다니고, 퇴근길엔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시국을 안주삼아 소주잔을 기우리며 살아가는 현실이었다.
창수는 사무실 직원들과 자주 어울렸다.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이 많아 놀이를 하고 어울려 술잔을 기우리기에는 매우 분위기가 좋았다.
그 중에는 창수처럼 총각도 더러는 있고 결혼초기인 직원들도 절반쯤은 되었다. 퇴근 후면 마땅한 놀이거리가 없으므로 주로 사무실 방에서 화투치기를 하였는데 처음엔 밥 사기, 술내기에서 점차 현금이 오가는 현실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금액이 그리 많지 않고 또한 실력들이 비슷하다보니 따는 사람도 잃는 사람도 크게 차이나지 않고 결국은 밥값과 술값으로 흘러나가고 말았다.
초여름으로 접어드니 날씨가 조금 후덥지근해지고 있다. 창수는 생각해보니 임 여인에게 전화를 안 한 것이 일주일이 넘은 것 같다. 전번 구포에서의 일 때문에 여인의 기분이 얼마나 상했는지 기분도 찜찜하고 선 듯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때 뭔가를 좀 확실하게 했더라면 하고 생각도 해보지만 아무래도 강압적인 표현으로 여인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마음의 부담이 된다.
자꾸만 여관에서 무표정하게 대하던 것과 무거운 표정으로 버스를 타고 떠나던 뒷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이대로 헤어지고 말아야 할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사무실 주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로 다가갔다.
조심스레 전화다이얼을 돌린다. 뚜〜뚜 신호가 가고 잠시 후 딸아이가 전화를 받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놓는다.
(제길〜어디가고 전화를 안 받지?)
잠시 망설이다 다시금 전화를 걸어본다. 모른척하고 엄마의 행방을 물어볼까? 아니면 또다시 끊고 말아.
“여보세요!” 임 여인 이었다.
“아 난데. 오랜만...”
“좀 전에 전화하다가 끊었어?”
“응. 잘 있지?”
“나야 뭐. 어디야?”
“사무실. 얼굴 한번 안 볼래?”
“언제? 저녁에?”
“응! 6시 반에 부전동 전번에 그 집에서 기다릴게”
“알았다.”
(휴〜이젠 됐다.)
창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해가 길어 아직도 햇살이 남은 부전동 먹자골목의 막창구이 집은 한산했다. 아마도 어둠이 조금은 깔려야 사람들이 몰려들 것 같다. 얼마지 않아 그녀가 왔다. 창수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잘 지냈어?”
“미워서 안보고 싶던 모양이지. 전화도 안 해주고...”
“자기가 하면 안 되나?”
“여자가 어떻게 남의 사무실에 전화를 해?”
“하면 어때? 누군지 알아서.”
“몰라! 하여간 미워 죽겠어.”
“일단 고기나 좀먹고 소주도 한잔 하자.”
이곳은 가게는 허름하지만 곱창 맛은 일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늦게 오면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소주를 몇 잔씩 마셨다. 여인은 약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귀찮은 거 아니가?”
“귀찮기는. 집에는 아무 일 없나?”
“없기는 애 아빠가 김창수한테 가서 살라고 하더라.”
“헛소리 좀 하지 말고. 남은 속이 타 죽겠는데..”
“정말이가? 내 생각 했다고?”
“그럼 내가 거짓말 하는 줄 아나보지. 있는 것만 마시고 가까운데 산 책이나 할래?”
“그러든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하천변을 거닐었다. 가로등 불빛이 있기는 하지만 남의 눈을 피할 정도는 되었다. 여인이 먼저 창수에게 팔짱을 끼었다. 창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제 모든 것이 제대로 풀려가는 것 같다. 가로등 불빛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어둑한 하천변 길이다. 창수는 연신 여인의 손을 쥐었다 놓았다 하기도 하고,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껴안기도 하였다. 여인에게서 약간의 취기와 비틀거림이 있어 두 사람을 더욱더 밀착되게 한다. 얼마를 걸었을까? 제법 많이 걸은 것 같았다. 방향을 바꾸어 임 여인의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간간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열기를 식혀주고 있다.
토요일이다. 창수는 사무실 근처 공중전화에서 임 여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조금 후 여인이 직접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마침 집에 있었네.”
“응. 왜? 무슨 일 있어?”“일은?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나. 오늘 토요일이잖아?”
“참 그렇구나! 어디 갈려고?”
“응 한시 반까지 서면 극장 앞으로 나올래?”
“알았어. 나중에 봐.”
창수는 임 여인과 창수는 을숙도 행 버스를 탔다. 을숙도에는 널따란 갈대밭이 있어 마음이 상쾌했다. 강가를 여기저기 다니며 걷기도 하고 게를 잡으려고 다가가 보지만 이놈들이 어떻게나 빠른지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가져간 과일을 먹으며 갈대 그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해가 질 무렵에서야 하단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고 나니 8시가 가까웠다.
에덴공원으로 향했다. 에덴공원엔 푸른 숲이 있고, 주변은 낙동강 제방과 인접하고 있어 많은 아베크족들이 찾는 곳이다. 조용한 집을 골라 파전과 동동주를 시켰다. 배가 고픈 탓인지 맛이 매우 좋다. 가게들마다 빨갛고 초록색 전구를 켜놓고 손님을 유혹한다.
창수는 예전 군대생활에서 부산출신 상관이 ‘에덴동산의 4막 5장’이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생각이 났다. 그분 참으로 재미있었고, 창수는 부산에서 군대를 갔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았었다. 여기가 그 에덴동산이다.
(에덴공원 : 승학산 서쪽 낙동강변의 도시공원으로 원래 ‘강선대’라는 유명한 장소로서 일제시대 때에는
일본의 포병부대가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동산을 비유해 이름붙인 곳
으로 많은 아베크족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하나 둘 아베크족들이 모여들어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다. 벌써 3통의 동동주가 들어왔다. 처음엔 배가고파 먹었는데 얼큰하게 달아오른다. 우리는 동동주집을 나와 강가로 자리를 옮겼다. 강가엔 벤치가 있고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여인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기분이 너무 상쾌하다. 술을 마셔서 기분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도 좋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앗 차! 큰일이다. 벌써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엔 10시가 지나면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끊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인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버스정류장엔 몇몇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버스정류소에 도착해보니 아뿔싸! 마지막 버스가 조금 전에 출발해 버렸다고들 한다.
이곳에는 택시도 이 시간이면 오지 않는 곳이다. 어떻게 할까? 두 사람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난감해 했다.
“아! 어떡하지. 조금만 빨리 왔어도...”
“아이! 집에 못가면 큰일인데. 이야기도 제대로 안하고 왔는데”
“그럼 우선 집에 전화라도 해라. 급한 일이 생겨서 멀리 왔다고.”
“아! 정말 어째야 하지. 큰일이네. 알았다 우선 전화나 해보고.”
여인은 근처 공중전화 박스에서 한동안 전화를 하고 있었다. 창수는 다소 걱정이 되긴 하였지만 오늘밤은 여인과 같이 한방에서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전화했나? 우선 잠 잘 곳을 찾아보자.”
“어디서 잔단 말이고. 말도 안 된다.”
“그럼 밖에서 밤 샐래? 방법이 없잖아? 누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는 일이잖아.”
“아〜정말 이런 일이...”
창수는 뒷걸음질 치는 여인의 팔을 끌고 근처의 여관으로 향했다. 여인은 별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는 듯 마지못해 창수가 이끄는 대로 여관문을 들어섰다. 창수는 오늘밤이 여인과 자신의 관계를 확실하게 변화시켜줄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라고 여겼다.
어느 소설에선가 유부녀가 시아버지의 기사와 정을 통하고 지내면서 남자가 자신과 같은 방에서 밤을 새지는 않더라도 한 지붕 아래서 만이라도 있다는 게 행복하다 했던가? 귀소본능, 소유본능 이라고 했던가? 하루 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라는 의미와는 조금은 틀리지만 어째든 남녀가 밤을 같이 새운다는 건 그 감정이 색다르고 아주 깊은 것이다.
창수는 이부자리를 깔고 가볍게 샤워를 하고 피곤하여 잠을 청했다. 두어 시간을 잤을까? 인기척에 잠을 깨어보니 임 여인이 일어나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안자고 뭐해?”
“잠이 안와서...”
“왜 걱정이 되어서? 할 수 없잖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창수는 순간 생각했다. 자신이 바라던 게 이것이었다. 아무짓도 하지 않아도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창수는 여인을 자리에 높이고 팔베개를 하고는 잠이 들었다.
아침 6시경 잠에서 깨어난 창수의 옆에는 임 여인이 누워 있었다. 드디어 둘이 밤을 같이 새운 것이 실감이 났다. 그녀는 깨어있었다.
“좀 잤나?”“으 응. 잘 잤어?”
그런데 그녀의 행동이 이렇게 달라져 있을 수가? 이젠 창수를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하고 있었다.
(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창수는 마음속으로 뛸 듯이 기뻤다. 한 여인에게서 진정한 인정을 받는 다는 것이다. 지인에서 애인, 애인에서 남편에 가까운 아니 남편보다도 오히려 더 가까운 실질적인 그 무엇(?)으로....
이런 것이 믿음이고, 화합일진대. 아가씨나 가정이 있는 유부녀라 할지라도 자신과 단순히 육체관계를 갖는 것과 같은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며 하룻밤을 같이 지낸다는 의미가 매우 다르다는 느낀다는 것이다.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서로들 얼굴을 쳐다보고 조금은 어색해 했다. 여인은 자신의 밥을 덜어 사내에게 주었다.
“자기는 집에다 어디 간다고 했어?”
“응 친정에 간다고.”
“친정에 전화는 안 할까?”
“안 할 거야. 요즘 사이가 안 좋은 걸 친정에서도 알거든...”
“그럼 밥 먹고 삼량진에 가서 놀다오자. 시간도 때울 겸.”
식사를 마치고 둘은 사상역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삼량진 방면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열차의 연결부위쪽 뒷문난간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고 있었다. 기차 굴을 지날 땐 키스를 하기도 했다. 물금역에서 내려 강가로 갔다. 초여름이라 강가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준비해간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창수는 강에 들어가기 위해 옷을 벗었다. 수영복이 아닌 일반 팬티였지만 가까운 곳엔 다름 사람이 없고, 임 여인만 있었으나 쑥스럽지가 않다. 한 바퀴 헤엄을 치고 돌아오자 여인은 창수의 등을 씻어 주었다. 마치 사랑스런 부부처럼...
5시경 부산으로 돌아와 구포에서 일찌감치 저녁을 먹었다. 여인을 일찍 보내기 위해서다.
“집에 가면 아무 일 없겠지?”
“내 걱정 하지마라. 내가 알아 다 한다.”
“만약 들통 나면 나한테 와라. 진짜 같이 살자.”
“신경 안 써도 된다. 피곤할 텐데 빨리 가라.”
“알았다. 먼저 타라.“
창수는 여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지만 그래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 몸가짐도 신경을 쓰고, 가정이 있음에도 자신과 같이 지내기를 마다않는 여인이 고맙기도 하고 연민의 정을 느끼며 저 여인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접어들자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휴가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회사라는 게 끊임없는 업무가 연속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분위기야 다소 경직되어 있더라도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3저 현상으로 수출이 날로 증가하고 물가가 안정되어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전보다 많이 나아지고 있다.
창수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서울에 출장을 다닌다. 서울은 아무래도 지방과는 달리 각종 정보가 앞서있고 또한 사고방식이 획일적이고 않고 현실적이어서 정치 이야기라든지,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지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출장을 가서도 창수는 임 여인에게 전화를 하곤 했다. 아니 어쩌면 부산에서보다 더 긴 시간을 할애 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객지에 나가면 아무래도 외로움이라 던지 그런 것들이 더하기 때문일 것이다.
창수는 여름동안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자주 마시곤 하였다. 마땅히 취미생활을 할 것도 없고 해서 일과시간을 마치면 퇴근길에 가까운데 있는 친구부터 우선 만나고 그리고 가다가는 다른 친구를 만나기가 일쑤였다. 그들이 먹는 술이란 주로 낙지볶음, 곱창, 삽겹살을 안주로 소주를 먹거나 간혹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정도였다.
그리고 1,2차에서 술을 마시면 그 다음은 포장마차까지 12시를 채우거나 통금단속을 피해 골목길 포장마차로 숨어들곤 했다.
창수는 포장마차나 선술집을 선호했다. 왜냐하면 술값이 비교적 싼 편이지만 그 곳에 가면 정겨운 인생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포장마차 여주인들은 은근히 총각이라면 장사 속을 보이고 공치사를 하거나 흥미를 돋우는 말을 하곤 했다.
여름이 무르익는 8월초 어느 날이었다. 임 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주말에 어디 가나.”
“아니! 나야 뭐 할 일이 있나? 혼자 있는 몸인데 데이트나 하자고? 기꺼이 시간 내 줄게”
“그런 게 아니고 어디 같이 좀 갈 데가 있어서.”
“그것도 괜찮지 뭐.”
“알았다. 그럼 나중에 다시 전화할 게.”
“오케이.”
도대체 어디를 가잔 말인지 궁금했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때가되면 알게 될 거니까. 그리고 만나지도 제법 되고 해서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같이 간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고 가정을 가진 여인이 아니라면 여름휴가라도 같이 가자고 해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잠깐씩 틈새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것으로도 만족해야 할 처지이다.
이틀 후 토요일 오전. 그녀에게서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와 볼일을 보기로 약속한 날이다. 점심을 먹고 한시 반경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나자고 한다. 창수는 그러자고 하면서 무슨 일 일까하는 궁금증이 더했다.
회사 근처 중국집에서 볶음밥을 시켜먹고 시간에 맞추어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녀가 먼저 와 있었다. 차표를 타는 곳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어딜 갈 건데.”
“남해에.”
“남해? 거기에 뭐하는데?”
”응! 친구 남편 좀 만나려.“
“친구 남편?”
“응 가면서 이야기 해줄 께.”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국도를 달린다. 창문을 열어놓고 달리다 보니 바람이 들어와 제법 더위를 식혀준다. 손님은 토요일임에도 그렇게 많지가 않다. 방학을 하여 친척집으로 이동하는 학생들과 아들네 집을 다녀오는 아낙네들이 고작이었다.
사천 곤양을 지나고 진교를 지나니 남해바다가 보인다. 파란 하늘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 더위를 잊은 듯 크고 작은 배들이 오고고 있다.
남해대교에 다다르니 마음이 매우 상쾌하다.
남해대교는 설치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배를 타고 건너야 했으나 그나마 차로 편하게 건널 수 있으니 얼마나 시간이 단축되고 편한지 모르겠다.
다리 밑에는 낚시꾼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름답고 조그만 섬들이 올망졸망 위치하고 있어 정취를 더한다.
창수가 창밖에 반짝이는 바닷물 빛을 바라다보며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즈음 버스는 어느새 다리를 다 건넜고 검문소의 검문을 거치면서 임 여인은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남해대교 : 하동노량과 남해노량을 육지로 연결하는 다리로서 1973년 6월에 준공되었고, 이순신의 노량대
첩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남해의 관문으로 한려수도 관광명소로서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보니 다리입구 전망대였다. 그 곳에는 식당과 술집이 있고 나이트클럽이 있는데 친구남편이 이 나이트클럽에서 악사로 일하고 있단다. 그녀가 여기에 온 것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도무지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아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려왔단다.
그녀가 나이트클럽에 들어간 후 나는 조금 떨어진 휴게소 벤치에 앉아 바다에 떨어지고 있는 저녁노을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젠 작은 배들도 거의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얼마 후 그녀가 나이트클럽을 나와서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만났어? 뭐래?”
“그냥 이야기만 전하고 왔어. 저녁 사준다는 걸 그냥 간다고 하고 왔어 다른 남자랑 같이 온 걸 알면 큰일 난다.”
“그야 그렇지. 돌아가는 차가 있는지 알아보자.”
두 사람은 가계근처로 와서 부산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는지 물어 보았으나 막차가 여섯시에 있는데 아마 지금은 끝났을 거라고 한다. 시계를 보니 여섯시 20분을 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건너편 바닷가로 내려갔다. 우선 숙소가 있는지부터 알아두어야 했다. 그러나 그 곳은 조그만 어촌마을로서 숙소가 있어보였었는데 정작은 없었다.
아름다운 바닷가의 경치도 구경할 틈이 없이 서둘러 국도변으로 오라왔다. 버스를 타고 남해읍으로 들어갔다.
버스 정류소근처에서 낙지볶음을 시켜먹었다. 섬지역이라 그런지 낙지가 싱싱할 것이라는 선입감이 들어 맛이 좋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시골이라 특별히 구경거리도 없고, 피곤하기도 하여 숙소를 먼저 구하기로 했다.
주차장 주변은 의례 그렇듯이 숙박시설이 보인다. 여인숙이다. 그런데 여인숙을 들어서니 가정집 같아 보인다. 마당가운데 두레박 우물이 있고 몸채 아래채, 사랑채 같은 규모의 방들이 있다.
마당 어귀에는 동네 사람들인 듯 두서너 명의 노인네가 모여 모기를 쫒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는 사랑채 방에 들었다. 방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선풍기도 없는 그냥 시골의 사랑방 같았다. 남쪽으로 난 창문에서 바람이 조금 들어올 뿐이었다. 시골 사람들이 다니려 왔다가 시간이 늦어 하는 수 없이 하루 밤을 머무는 그런 정도 개념의 숙박시설이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가져온 배를 깎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음이 안 되는 방이라서 크게 소리 내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아마도 밖의 사람들은 두 사람이 부부 정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샌가 임 여인이 밖으로 나가더니 우물가에서 간단하게 목욕을 하고 왔다. 창수더러도 하고 오라고 하지만 밖엔 여자들이 있어서 가기가 싶지 않았다.
대신 창수는 여인에게 선풍기를 하나 빌려오라고 하였다. 아무래도 잠자리를 같이 하려면 더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시골의 밤. 볼거리도 없고 마냥 심심하기만 할 뿐이다. 그래도 옆에는 임 여인이 있지 않은가? 선풍기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창수는 옷을 벗어 던졌다.
“안 덥나?”
“덥지 왜 안 더워.”
“왜? 옷 벗어 라고?”
“모처럼 신혼여행 왔는데 그냥 잘 수 있나?”
“무슨 그런 헛소리 하지마라. 그러면 나는 갈 거다.”
“괜찮다, 그냥 부부인줄 알거다.”
“부부라도 그렇지 누가 들으면...”
조금 전 우물가를 다녀온 여인의 몸은 아직도 까칠하면서도 끈끈하다. 선풍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두 사람은 피곤한 탓인지 잠이 빨리 들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여인은 벌써 눈을 뜨고 창수를 바라보고 있다. 창수는 옆에 누운 여인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여인숙을 나선 두 사람은 이젠 정말 부부처럼 당당해 보였다.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뒤 부산으로 올라와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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