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문단의 어른이었던 현천(玄川) 원중거(元重擧, 1719-1790)와 연암 박지원과도 교유한 규장각 학사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임진왜란 이후 파견된 통신사의 서기관이 되어 에도막부에 다녀왔다. 이들은 울릉도와 독도가 명백히 조선의 영토임을 일본 정부로부터 두 차례나 확인 받고 대마도와 백기주 왜인의 울릉도와 독도 침입을 근절 시킨 안용복의 장한 일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록하기를 잊지 않았다. 나중에 현천은 포항의 송라역 찰방으로, 청성은 흥해 군수로 부임하였다.
1786년 가을, 화마가 삼킨 안국사 가람을 스님들과 신도들이 겨우내 얼음을 깨고 눈을 치우며 다시 일으켜 세운 아름다운 일을 청성은 기문으로 남겼다. 이들과 교유하였던 '영남의 어른 스님' 보경사 오암선사(鰲巖禪師, 1710-1792)의 제자 우징(宇澄)스님은 안국사의 가람 중수 공덕비를 찬하였다. 경주의 징사(徵士) 구암(懼庵) 이수인(1739-1822) 선생과 영남의 명승이었던 징월(澄月, 1751-1823) 스님은 안국사를 찾아 시를 읊으며 삶을 관조하였다.
법광사에는 청해진 장보고 군대의 힘을 빌려 왕이 된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이 부처님 진신 사리를 봉안하고 세운 원탑이 있다. 이 석가불사리탑을 보수할 때 안국사를 비롯한 경북 동남 지역의 사찰들이 협조하였다. 중수 비문은 장원급제하고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문장가로서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던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연일 현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령에 머물던 시절 찬하였다. 옥돌 비석은 땅에 묻어 일본군의 파괴를 천만 다행으로 피할 수 있었다.
법광사 터는 국가가 사적지로 지정하고 시가 정비하여 시민의 문화유산이 되고 학생들의 역사 교육 마당이 되었다. 하지만 안국사 터는 국가와 시 당국과 시민들에게 철저히 잊혀지고 있다. 포스코 유치와 포항공대 설립에 기여하고, 초대 민선시장이며 향토사가였던 박일천(朴一天, 1915-1995) 선생이 1967년 집필한 '일월향지(日月鄕誌)'에 겨우 동엄과 단오 부자가 안국사에서 만난 일과 비문 한 점이 채록되어 있을 뿐이다.
일제의 마수에 폐허가 된 지 10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운주산 이마에 자리한 절터에 올라가보라. '나라의 평안을 지키던 절', 안국사의 도량은 갈아엎어져 밭이 되고 선방은 빈터로 남았다. 토대는 붕괴하고 기와 파편은 고랑에 나뒹굴고 부도탑은 깨진 채 무당의 굿터가 되어 있다. 산 아래 골짜기에까지 굴러온 비석 동강은 어느 집 빨랫돌과 주춧돌이 되어 있다. 선열 앞에 부끄럽고 어린 세대에 미안하다.
올해 광복절에는 독도가 더욱 그립고 안국사 절터가 사무치도록 마음에 밟힌다. 이젠 역사와 문화의 빛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첫댓글 안용복의 2차로 울릉도와 독도에서 왜인들을 쫒아내고 일본에 까지 가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임을 확인 받을 때, 안용복의 기지에 빠져 동행한 13명의 사람들 중 뇌헌 등 여수 흥국사 스님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당시 스님들은 국가로부터 엄청난 수탈을 당하였고, 이에 생계를 잇기 위해 상업 행위에 종사하는 상승들이 있었다.
가슴이 아린 글입니다. 읽고나니 안국사 빈터의 정경과 오늘날의 세태가 참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 종단에서 옛더를 다시 복원할 순 없을까요? ...경북도 지자체와 사암 연합회에서 함께 의논하여 옛 가람을 복구하는 큰 발원을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