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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황식물[救荒植物]의 종류와 식용법
흉년이 들어 양식이 부족할 때,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곡식 대신에 먹을 수 있는 야생 식물
구황식물의 종류
구황식물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벌인 한판 투쟁의 중심에 있던 먹거리였다. 게다가 그 주림은 어쩌다 마주친 것이 아니라 일상화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먹거리는 우리 민족의 삶의 연결 끈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그것들은 어떤 것이었고 어떻게 먹을 수 있게 만들었을까?
구황식물의 종류
구황서에 등장하는 구황식물의 종류는 수백 가지에 이른다.
"한국인이 식용할 수 있는 식물로 [임원경제지]에는 구황식물 260여종, 일제시기 조사서인 森爲三, [한국인이 식용할 수 있는 야생식물에 대하여]
(조선총독부 월보 3권 3호)에서는 야생식물 233종, 林泰治의 [구황식물과 그 식용법],( 1944, 동도서적)에서는 한국의 야생구황식물이 초본, 목본을 합하여
851종, 그 중 평소 농촌에서 식용하고 있는 것은 304종이라 했다. 1983년 강원도 구황식물 조사 연구에 의하면(김춘련, 1983, ‘구황식품 조사연구-
강원도지방을 중심으로’ [관동대학교 논문집] 11) 이 지역 구황식물은 415종, 해조류가 415종이다. 일제시대 조선농회에서 펴낸 [조선의 구황식물]에서는
한반도 기호 이북지방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구황식물 중 적절한 것으로 선택한 것이 100종이고 그 밖에 유용한 식물로 소개한 것이 91종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구황식물의 종류를 분류한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민의 입장에서 볼 때 주림을 면하게 해 주는 먹거리는 어떻게
이용하여 먹는 것인가가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먹거리 이용 해설서라 할 수 있는 구황서가 이 부분에 비중을 두고 구황식물의 종류를 분류, 설명한 것은 본초학을 바탕으로 해서일 뿐 아니라 이같은 관점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하 구황서의 분류 기준에 따라 당시 이용된 구황식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었는지 설명하기로 한다.
01.잎이나 싹, 줄기를 먹는 식물
구황서에 소개된 구황식물의 상당수가 잎이나 싹, 줄기 등을 먹는 것이다. [임원경제지]에는 잎을 먹을 수 있는 식물 128종, 줄기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3종, 뿌리와 잎을 먹을 수 있는 것이 12종, 잎과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 39종, 꽃과 잎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3종이어서 잎과 줄기 등을 먹는 식물이 전체
소개된 260여종 중 187종이다. 그리고 [조선의 구황식물]에 소개된 100여 가지의 식물 중에서 잎이나 싹, 줄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이 66가지에 이른다. 적어도 70% 이상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1980년대 조사된 강원도 구황식물에서도 415종의 식물 중 332종이 봄철에 나는 어린 잎이나 줄기를 먹는 것이었다. 이는
흉년은 물론 곡식이 떨어지는 춘궁기에 이들 나물류가 모자라는 곡물을 보충하는 먹거리로서 쓰일 수 밖에 없었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다산의 다음과 같은 시는 이와 같은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산시문집] 권 5, 채호)
“다북쑥을 캐고 또 캐지만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로세
양떼처럼 떼를 지어/저 산언덕을 오르네
푸른 치마에 구부정한 자세
흐트러진 붉은 머리털
무엇에 쓰려고 쑥을 캘까
눈물이 쏟아진다네
쌀독엔 쌀 한 톨 없고
들에도 풀싹 하나 없는데
다북쑥만이 나서
무더기를 이뤘기에
말리고 또 말리고
데치고 소금을 쳐
미음 쑤고 죽 쑤어 먹지
다른 것 아니라네
다북쑥 캐고 또 캐지만
다북쑥이 아니라 제비쑥이라네
명아주도 비름도 다 시들고
자귀나물은 떡잎도 안 생겨...”
위백규, ‘茨菰’(김석회, 1992, [존재 위백규의 생활시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pp.70). "
“밭에 있어도 스스로는 곡식을 해치지 않고
솥에 들어가면 만민을 살리기에 딱 맞는다네
흉년엔 바야흐로 쓰임받기에 제일이지만
등한 평일에는 봄마다 산과 들에 널려 있다네"
이렇게 가장 널리 활용되던 잎과 줄기, 싹을 먹는 식물 중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들이나 산에서 거둘 수 있는 각종 야생 초목이나 소채류였다.
"곡물의 비축이 넉넉하지 않던 조선전기 산야에서 캐낸 나물과 소채가 구황에 요긴하게 쓰인 탓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들 야생들풀이 무성히 자라도록
하기 위해 경칩때 산야에 불을 놓는 것을 허용하자는 의론이 나오기도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9, 1, 임진)."
이는 오래동안 나물반찬 위주로 식생활을 유지해 온 우리 민족의 채식문화가 농경사회라는 특성과 함께 만성적인 곡물 부족에 시달리면서 먹거리를
개발해 온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으로 널리 이용된 것이 나무에 달린 잎이나 싹이었다. 솔잎, 뽕잎, 팽나무잎, 느릅나무 잎 등은 조선전기부터 이용되어왔다.
특히 솔잎은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기곤을 면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의서에서는 물론 승려나 수련자들이 훌륭한 벽곡물로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에서 가장 손쉽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철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벽곡만이 아니라 구황식물로서의 가치 또한 컸다. 이 때문에 조선 정부는
흉년이 들 때마다 솔잎의 이용을 강조하고 솔잎 구급방의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다([숙종실록] 숙종 12 11 정유, [숙종실록] 숙종 21, 1, 무오).
뽕잎 또한 배고픔을 면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또 잠업 발달과 관련하여 일찍부터 인가 근처에 심어 가꾼 탓에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때문에
뽕잎은 구황식품의 비축이 관 주도로 이루어지던 조선 전기부터 대표적인 구황식물로 자리잡아 왔다. 뽕잎은 인가는 물론 교외에서도 구할 수 있으나
교외에서 채취한 것은 뱀이나 전갈이 침을 흘려 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집 가까운 원포(園圃)에서 기른 것이 좋다고 했다. 또 여름과 가을에 다시 돋은
잎새, 잎 가장귀가 진 계상(鷄桑)'이 좋은 상품이었다. 이것은 서리가 내린 뒤에 채취해서 흐르는 물에 씻어 볕에 말려 사용했다([산림경제] 권1, 복거).
잣잎 또한 이용하였다. [산림경제]에서는 잣잎은 골라 봄에는 동, 여름엔 남, 가을엔 서, 겨울엔 북쪽 가지의 나무 끝 가까운 것을 채취하여 가늘게 썰어서
이를 갈아 식전마다 술로 2돈씩 먹으라 했다.
한편 팽나무 잎과 느티나무 잎 등은 백성들 스스로 먹어도 해가 없이 주림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용해 왔으며, [구황보유방] 이후 각종 구황서에도 2월 이후 새 잎이 나면 이용하라고 했다.
또 자귀나무(合歡木), 무궁화(木槿), 백양, 때죽나무(椿樹), 촉초(蜀椒), 갈매나무(鼠李), 졸참나무(靑岡樹), 엄나무(刺楸樹), 춘수, 산뽕나무, 석류, 은행,
대추나무, 복숭아나무 잎 등의 어린 잎도 먹는 것으로 [임원경제지]에서는 언급하고 있고 일제시대에는 스무나무(자유), 참축나무(香椿), 다래나무, 두릅나무, 엄나무, 느리밤나무 잎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植木秀幹, 1919, [조선의 구황식물], 조선농회).
이를 보면 시기가 내려오면서 먹을 수 있는 나무 잎의 종류가 많아지고 있다. 이는 그동안 민간에서 이용해 왔던 것을 확인하여 기록으로 남긴 것도 있고
새롭게 먹을 수 있다고 개발되어 추가된 것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나무에서 얻는 잎들은 대부분 봄철에 돋은 어린 새순이어야 먹을 수 있었다.
곡물의 잎으로는 콩잎, 메밀 잎 등이 가장 널리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구황비축 식물로 이용되던 콩잎은 구황물 비축을 관이 주도하지 않던 숙종 대에도 관아에서 구황 콩잎이라하여 거둘 정도였다. 메밀은 잎, 뿌리, 열매, 줄기 모두 이용할 수 있어 봄부터 가을까지 먹을 수 있는 진정한 구황식물로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거둔 시기에 따라 각 기 다른 식용법을 적용해야 했다. 팥잎, 자강두, 강두, 들깨, 백편두, 유마, 산흑두, 순망곡, 양귀비, 비름 등도 잎을 먹는
곡물이었다.
02.껍질을 먹을 수 있는 식물
초근목피로 연명한다는 우리 속담이 증명하듯 나무껍질도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한 몫 하였다. 그러나 모든 나무껍질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껍질로 널리 알려진 것은 소나무와 느릅나무 껍질이었다.
흉년이 들면 기민들은 전국 어디서나 자라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먹으며 연명하기도 하였는데([명종실록] 명종 3, 3, 경자)
‘속껍질을 삶아 먹으면 배고프지 않다’고 지침을 준 구황서는 [산림경제]가 처음이었다(소나무껍질의 활용에 대한 언급은 [구황촬요]와 [구황보유방]에서는
없고 [산림경제]에서부터 등장한다). 이에 비해 유피는 훨씬 먼저 구황서에 등장한다. 이미 [구황촬요]에서부터 유피는 성질이 매끄러워 오랫동안 먹으면
배고프지 않고, 성질이 깔깔한 솔잎, 쌀가루 등과 섞어 먹으면 위를 보호하고 장을 이롭게 한다며 여러 가지 먹는 방법이 소개되었다. 소나무 껍질과
유피껍질은 임진왜란 당시 군병들이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 양식 삼아 먹었을 정도로 곡물대용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선조실록] 선조 27, 3, 무자).
구기자 껍질과 오가피 등은 약용으로 더 널리 쓰였다. 그러나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극한 상황에서 건강, 보양을 위한 것 또한 연명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고([산림경제] 1권, 복식) 이것은 구황식물로서도 일정한 기능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03.뿌리를 먹는 식물
식물의 뿌리 또한 일찍부터 구황식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소무가 19년 동안 풀뿌리 나무열매를 먹고 살았으며 을사년 흉년에 곡식 뿌리를 먹은 사람들은
부황에 걸려 죽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곡의 뿌리는 모두 거두어 먹을 수 있다([충주구황절요])’ 는 것은 초근목피로 연명한다는 말의 실제를 보여준다.
조선 전기에 널리 먹던 뿌리 식물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만청, 나복근, 더덕(사삼), 도라지, 칡, 곡식 뿌리 등이 언급되는 대부분이다.
무는 구황식으로 효용이 있다고 생각한 정부의 노력으로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구황촬요]에 이르면 ‘사철 장복이 가능한 훌륭한 흉년 대비식물’로
평가되었다.
나복근도 이른 아침 구워서 먹으면 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는 식물이었다.
한편 칡뿌리 또한 무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노력으로 구황식물로서의 가치가 널리 알려져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갈근에 의지하여 연명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정조실록] 7, 10, 무인) 대표적인 구황식물로 자리 잡게 된다.
뿌리를 먹는 식물의 종류는 지속적으로 늘어간다. [구황보유방]에 나타난 뿌리를 먹는 식물을 보면 이전에 널리 알려진 것 뿐만아니라 메밀, 마, 천문동, 토란, 오우, 황정, 백합, 하수오, 연근, 선복근, 관중, 둥그레, 출, 삽주뿌리, 양제근 등이 있다.
토란은 일찍부터 구황식물로서 활용가치가 있었지만 당시 조선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제민요술(濟民要術)》에서 "토란은 굶주림을 구제하여 흉년을 넘길 수 있는데 지금 중국에서 대부분 이것에 뜻을 두지 않고 굶어죽은 사람들이 도로에 가득차고 백골이 뒹굴고 있다. 사람들이 혹 이 법을 모르거나 혹 알더라도 심지 않고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니 슬픈 일이다. 인목(人收)이 된 자가 어찌 통독할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여 구황식물로 토란을 활용할 것을 강조하였다([구황보유방]).
[구황보유방]을 편찬한 신속은 토란의 구황식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것을 널리 알리고자 자신이 보고들은 토란 재배법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토란은 비옥한 땅 물 가까운 곳을 골라 2, 3월에 심으면 좋다. 가물면 물을 대어주고 풀이 나면 바로 김을 매어 부지런히 가꾸면 수확이 보통보다 두 배로
될 것이다. 굿 만드는 것은(作區) 굿을 네모나게 넓이 깊이 모두 3척으로 하고 콩깍지를 굿 안에 넣고 발로 밟아 두께가 5척 정도 되면 물을 부어 윤택하게
한다. 좋은 토란 다섯 개를 사각 및 중앙에 하나씩 심고 콩까지를 덮고 발로 밟는다. 가물거든 물을 준다. 한 굿에서 석 섬은 거둘 수 있다([구황보유방]).
이같은 노력의 결과 토란은 널리 보급되어 정조대에 이르면 서쪽 지방의 대표적인 구황식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정조실록] 정조 22, 6, 정유).
한편 [구황보유방]에 새로이 등장한 뿌리를 먹는 식물인 출((朮)삽주뿌리), 양제근(소루쟁이뿌리), 황정(黃精-둑대뿌리), 둥그레, 천문동, 백합, 하수오 뿌리,
선복근(메뿌리) 등은 대부분 약재로 재배되어 쓰이던 것들이다. 치료와 보양에 쓰이지만 배고픔을 면하고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도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양식대용으로 활용할만하다 여겨 구황식물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임원경제지]에는 이외에 상륙, 맥문동, 노아자, 산나복, 호야나복, 솜양지꽃 , 감로자(甘露子), 지과아(地瓜兒), 발제, 감자(甘藷), 원지(遠志), 저초(菹草), 수조(水藻), 수총(水蔥), 택산(澤蒜), 누자총(樓子蔥), 석구, 수나복, 과루(瓜蔞), 타자, 감(가시연) 등을 먹을 수 있는 뿌리 식물로 들고 있는데 당시 고구마를 비롯한 신규작물과 새로이 찾아낸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일제 시대 일반화된 뿌리를 먹는 식물은 울메, 무릇, 도라지, 찬대, 민들레, 삿비울 등이었다. 그리고
월동식물로서 뿌리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고사리, 울메, 달레, 개나리, 무릇, 얼네지, 천문동, 둥글레, 마, 칡, 메, 도라지, 찬대, 모시대, 더덕, 삽주, 지치굉이,
민들레, 삿비울 등이 추천되기도 하였다.
이들 뿌리를 먹는 식물은 대개 가을이나 겨울에 캐어 먹는 것이 많지만 월동식물로서 봄, 가을에 캐어 먹는 것도 있다. 자라는 곳은 산야, 들판, 채마밭, 물가. 저습지 등 식물의 특성에 따라 다양하다.
04.씨와 열매를 먹는 식뭁
가을을 지칭할 때 오곡백과가 풍성한 계절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먹는 먹거리라는 뜻을 나타내는 오곡백과는 바로 씨와 열매를 먹는 식물을 말한다.
흉년이다, 풍년이다의 결정적 근거도 오곡백과의 결실 여부에 달린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씨, 열매에는 통상적인 곡물을 지칭하는 오곡(쌀, 보리, 조, 기장, 콩)외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전기에는 청량미, 도토리, 평실,
해홍실, 메밀, 녹두, 콩, 밤 등이 있었음을 실록 기록과 [충주구황촬요]에서 알 수 있다. [구황보유방] 이후 [산림경제] [임원경제지]에서는 메밀, 밤, 찹쌀, 멥쌀, 은행, 대추, 검정콩, 청량미, 만청자, 느릅나무 열매, 백봉령, 규자, 밀, 고욤, 임자, 백지마, 새삼씨, 호도, 건시, 도토리, 잣, 개암 , 황정 등이 등장한다.
[임원경제지]에 실린 씨와 열매를 먹는 식물은 풀, 나무, 과일 열매와 각종 곡물로 그 수가 엄청나다. [조선의 구황식물]에서는 은행, 잣, 피, 벼, 조, 가리나무, 개암, 도토리, 떡갈나무, 밤, 산사, 소나무, 으름(통초), 산사나무, 머루, 다래, 을축(월유), 고욤, 등을 들고 있다.
이 많은 열매들 중 흉년의 기민구제에 가장 공이 컸던 것은 도토리였다. 이것은 세종대 이후 흉년 조짐이 들면 미리 거두어 비축하는 구호잡물의 대표였다. 풍흉을 막론하고 전국의 산야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으며 양식 대용으로서 기능도 충분하였기 때문에 관에서는 물론 민간에서도 미리 거두어 비축토록
할 것을 종용하였고 도토리로 연명하였다는 기사는 실록에 수없이 나온다.
한편 특이한 것으로 대나무 열매를 들 수 있다. 대나무 열매에 관한 당시의 여러 설을 분석하여 정리한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대나무 씨는 흔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메밀과 같아 특별한 맛이 없고 까칠하지만 밥처럼 먹을 수 있어 竹米라고도 하여 황년의 징조로 여길만큼 구황식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지만 평상시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 대나무 열매를 구황에 이용한 사례가 조선 전기에
보인다. 태종 10년 강원도 대령산 대나무에 열매가 열렸는데 오곡과 같아서 사람들이 이것을 따서 오곡처럼 먹고 술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이 하루에 5,6말
또는 10말을 수확하여 백성들이 모두 7,8석씩 저축하여 조석끼니는 마련했다고 하였다(이삭은 기장같고 열매는 보리같고 차지기는 율무 같고 맛은
당서(唐黍)같다고 했다). 또 세종 19년에는 지리산 대나무에 열매가 많이 맺어 사람들이 20여석, 혹은 10여석을 채취하여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메밀가루와 다름없었다 한다. 또 서울 삼각산에도 대나무에 열매가 맺혀 성안 사람들이 많이 가서 따 먹었다고 했다([세종실록] 세종 19, 7, 경인).
05.꽃을 먹는 식물
흔하지는 않지만 식물의 꽃이 구황식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초 구황비축물이었던 메밀꽃, 삼화꽃을 비롯하여 황정, 감국화, 율무, 인동, 국화 등이
배고플 때 꽃을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식용법이 기록된 [임원경제지]에 실린 나무에 열린 꽃 4종 새앙나무(蠟梅), 등꽃나물(藤花菜),
노나무꽃(楸樹花), 금계아 을 보면 모두 맛이 달아 물에 담가, 또는 삶아 익혀서 나물처럼 조리해 먹거나 볶아 차로 마시기도 했다.
06.기타
황각, 해초류, 해홍채 등은 구황물 비축이 의무화되던 조선 전기부터 꾸준히 기민 구제에 사용되었고 바닷가에서는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대표적인
구황식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구황식물의 식용법
수백 가지 종류에 달하는 구황식물들을 어떻게 먹거리로 만들어 먹었을까? 그 구체적인 식용법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구황식이란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배고픔을 덜고 기운을 얻어 굶어죽지 않게 하는 음식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능하다면 적은 양으로 배부를 수 있도록, 또 적게 먹고 오래도록
배고프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 중점이 두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이라는 특성 상 먹어서 탈이 나지 않고 그러면서 먹기 좋게 또 맛있게 만들도록 시도하고 개발해 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식용법은 과연 어떠하였는지 구황서의 설명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01.식물자체를 먹는법
곡물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에게 곡물이 아닌 다른 것만으로 배를 채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한 한 먹기 좋게, 그리고 속이 든든하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
① 날로 먹는 법
날로 먹는 구황식의 대표적인 것이 솔잎이다. 솔잎은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기곤을 면하게 하여 대표적인 구황식으로 일찍부터 인정받아 왔다. 각종
구황서와 의서에 곡기 없이 연명할 수 있는 좋은 것으로 드는 솔잎은 (잣잎 역시 마찬가지) 잘게 썰어 물과 함께 또는 죽이나 맑은 국과 함께 먹되 매일 잣잎
5홉, 솔잎 3홉을 과도하지 않게 복용한다([임원경제지] 4, 권 27, 인제지, 구황-[박물지]를 근거로 설명하였다).
소나무, 유피 등은 즙으로도 먹었다. 소나무 생잎의 수액이나 송진, 유피 즙 등도 이용하였다. 솔잎의 생잎을 따 수액을 낸 것을 복령 가루, 행인, 감초를 빻은 가루와 함께 먹거나 송진(송진 정제법은 저절로 흘러나온 깨끗한 것을 뽕나무재 즙에 달여 5, 7번 끓여 거른 다음 찬물에 넣어 응고되면 다시 달이기를
10번을 한다고 했다. [증보산림경제]) 1근을 가루로 만든 백봉령 4량과 함께 매일 새벽에 물에 타서 또는 꿀로 환을 만들어 먹었다. 느릅나무껍질은 채취해서 찧은 다음 도기(陶器)나 나무통에 담아 물에 담갔다가 즙을 짜서 복용하는데, 즙이 없어지면 물을 보태 뒤섞어서 짜면 계속 즙이 나왔다([구황촬요]).
콩을 날로 씹어 먹거나 납을 그냥 씹어 먹는 것은 3장 벽곡법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한편 미곡류와 깨 종류를 쪄 말린 후량을 씹어 먹었다. 후량은 벽곡의 일환으로 또는 조리가 불가능한 먼 여행길의 대체식량으로 먹었는데 이용되던 미곡은 청량미, 찹쌀, 메쌀, 대미, 늦메벼 등이었다.
구체적인 만드는 법을 보면 청량미(靑梁米--생동쌀)는 초(醋)와 섞어 백 번 찌고 백 번 볕에 말려 후량을 만들거나 청량미 1말을 쓴 술 1말에 3일간 담갔다가 꺼내어 1백 번 찌고 1백 번 볕에 말려 만들었다. 찹쌀 후량은 찹쌀 1말을 깨끗이 씻어서 1백 번 찌고 1백 번 볕에 말린 다음 빻아 가루로 만들었다([구황보유방]). 멥쌀 후량은 멥쌀 1되를 술 3되에 담갔다가 건져 볕에 말리고 또 담갔다가 또 볕에 말려서 술이 다 없어질 때까지 계속한다. 대미(大米) 후량은 대미 3홉을 볶아내고 황랍 2냥을 냄비에 녹인 다음 거기에 쌀을 넣고 볶아 이것을 말려서 만들었다([구황보유방]).
검정깨, 흰깨, 들깨로도 후량을 만들었다. 깨를 가지고 후량을 만드는 법을 보면 검은 참깨는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볕에 쬐어 볶아서 찧어 먹거나 떡으로
만들어 먹었다. 또는 흰콩, 대추와 함께 쪄 볕에 말린 다음 단(團)으로도 만들어 먹었다. 흰참깨(白芝麻,脂麻)는 쪄 볕에 말려서 약으로 삼아 먹었으며 들깨는 쪄서 뜨거운 햇볕에 말려 껍질이 벌어질 때 방아질하여 낟알을 취(取)해 먹었다([구황보유방]).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흔한 날로 먹는 방법은 생나물로 먹는 것이다. 만청, 황정([임원경제지]에서는 황정(黃精) 둑대뿌리는 날 것을 처음 먹는다면 1촌 반
정도가 적당하고 점점 양을 늘려가라고 했다), 새박뿌리(何首烏), 형개(荊芥), 장대나물(南芥菜), 야생부추(野?), 호야나복(野胡蘿蔔), 번백초(?白草) 뿌리,
감로자(甘露子) 뿌리, 지과아(地瓜兒) 뿌리, 지각아(地角兒) 어린 깍지, 수두아(水豆兒) 싹, 뿌리, 누자총(樓子蔥), 석구(石?), 수나복(水蘿?), 연꽃(蓮) 뿌리,
감(가시연) 열매, 마 뿌리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쓴맛이나 이상한 맛을 제거하고 날로 절여 먹었다.
나물을 생채로 먹는 것이 삶아 데친 나물로 먹는 것보다 적은 것은 일반 조리서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 한다. 이는 쓴맛, 떫은 맛, 아린 맛이 있는 것이
많아서 그대로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이성우, [조선시대 조리서의 분석적 연구] 198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54).
과일류야말로 달리 먹는 법을 설명할 필요없는 익은 것을 따서 먹는 먹거리다. 구황서에 등장하는 과실류로는 대추, 잣, 개암, 산수유, 무화과 호도, 앵두,
백당자(白棠子), 길리자(吉利子), 감, 배, 포도, 오얏, 모과, 산옥매(郁李), 능각(菱角), 산포도, 매실 등이다.
② 가루로 먹는 법
요즈음 바쁜 현대인들이 즐겨 먹는 아침 식사 중의 하나가 선식이다. 갖가지 곡물을 볶아 빻은 선식은 음료수가 흔치 않던 시절 목을 축이면서 요기도 되게 하던 미숫가루를 영양학적으로 발전시킨 고급 대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미숫가루, 선식의 원조가 바로 가루로 만들어 먹던 구황식이었다.
가루로 만들어 먹는 방법 역시 벽곡의 한 방법으로 또는 먼 여행 길에, 조리가 곤란한 상황에서 요기를 하기 위해 나온 것이지만 널리 사용되던 구황식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구황식물 중의 하나였던 솔잎은 가루로 만들어 먹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구황서에는 솔잎 가루 만드는 법이 다양하게 기재되어 있다.
우선 솔잎의 생잎을 곱게 찧어 찐 다음 볕에 말려 가루로 만들거나 솔잎 2말을 콩 1되와 같이 볶아서 뜨거울 때에 찧어 가루로 만들었다. 쓴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가루를 쪄 다시 가루를 내어 쓴맛을 줄였으나 찌지 않은 것이 더욱 기력(氣力)이 있다. 또 이와 다르게 솔잎을 찧은 다음 포대에 담아서 흐르는
물속에 담갔다가 3?4일이 지난 후 건져 쪄서 볕에 말리거나 온돌에 말려 찧어서 가루로 만들기도 하였다.
또 다른 방법은 남구만이 사용한 것이었다. 즉 ‘새로 딴 솔잎 2말, 콩(대두) 3되를 볶아 함께 섞어 빻은 것을 촘촘한 체로 쳐 고운 가루로 만든다. 체에 내린
촉촉한 가루 한 홉을 냉수 반종기에 타서 마시면 산뜻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찬다. 끓인 물을 마셔 속을 따뜻하게 하면 배고픔을 견디는데 더욱 좋다. 만일
콩이 없으면 나락, 조, 기장, 수수 등 곡식가루를 볶아 함께 가루로 만들어도 좋다. 속방에는 잎을 찧어 가루가 되기 전에 음지에 말렸다가 다시 찧는 때문에
맛이 매우 쓰다. 또 마른 가루는 비록 곱지만 물에 타면 거칠어지고 입에 들어가면 끈끈하게 응고되어 삼키면 불쾌하다. 촉촉한 가루는 처음 체에 내려 마르기 전에는 맛이 매우 깔끔하다. 마르고 나면 맛은 변치 않으나 입에 달라붙는 문제가 있다. 또 가루로 만드는 것은 매우 고와야 하므로 두 번 체에 내리는 것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임원경제지]).
느릅나무는 속껍질을 채취하여 볕에 말렸다가 찧어 가루로 만들어서 물에 타 매일 수 홉씩 먹는 것인데, 즙보다 만들기 어렵고 효과도 못하였다.
잣도 가루로 만들었다. 약간 익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때를 기다려 붙어있는 가지를 잘라 내어 구멍을 뚫고 말려 씨를 빼내어 찌거나 볶아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 먹을 것을 권하였다([산림경제] 권4, 구황).
다양한 재료로 일종의 미숫가루라 할 초를 만들었다. 천금초 만드는 법을 보면 메밀가루(백면) 6근, 꿀 2근, 향유 2근, 백봉령 4냥, 거피한 생강 4냥, 말린
생강포 4냥, 감초 2냥을 고운 가루로 만들어 고루 섞은 후 찧어 덩어리를 만들고 이것을 쪄어 그늘에 말려 가루로 만들었다([증보산림경제] 권10, 구황).
검정콩을 볶아서 대추와 함께 찧어서 초로 만들어 밥 대용으로 먹기도 하였다([구황보유방]).
메밀은 반쯤 익고 줄기와 잎이 부드러울 때에 베어서 말린 다음 줄기와 열매를 함께 잘게 썰어 볶은 다음 찧어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먹었다. 가을이 되기
전에 벤 것은 떨어낸 짚을 볶아서 찧어 가루를 만들고 가을에 벤 것은 (일반) 곡식처럼 먹는다. 그러나 가을이 지난 뒤에 벤 것은 반드시 곡식가루와 섞어야만 먹을 수 있었다([구황보유방]).
만청자, 삽주뿌리, 오우(烏芋), 찔레씨도 가루로 만들었다. 만청자는 씨를 물에 세 번 삶아 쓴맛을 모두 없앤 다음 볕에 말렸다가 가루로 만들어 2돈씩 물에 타 하루에 세 번씩 장복을 하되 점차 양을 늘려 먹도록 했다([구황촬요]). 찔레씨는 가시를 제거하고 가루로 내어 물에 조리하여 하루에 3번 2잔씩 먹었다
([임원경제지] 4, 인제지 28, 구황).
도토리 가루를 차로 마시기도 했다. 도토리를 껍질을 벗기고 물에 담가 껄끄러운 맛을 제거한 후 볕에 말려 가루로 만들어 꿀에 섞어 차를 만들어 먹었다
([증보산림경제] 상동).
③ 면 만들어 먹는 법
국수는 한국인이 즐겨 먹는 대표적인 음식 중의 하나이나 주로 점심 등 간단한 식사나 새참 등 중간 요기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늘날 국수는 주로 밀, 메밀 등으로 만들고 쌀 생산이 많은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 일상화된 쌀국수는 아직 낯설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곡물이 부족하거나 없을 때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식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국수를 만들어 먹던 식물로는 마, 경자, 모형(牡荊), 노두, 호두(胡豆), 패자, 야칠, 장구채(王不留行), 타자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마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씨와 열매를 이용한 것이고 마는 뿌리를 이용하였다.
구체적인 국수 만드는 법을 보면 거의 유사하다. 마, 전자, 갈근의 뿌리는 말려 가루로 만든 다음 면을 만들어 먹었다([구황보유방]). 칡국수는 녹두가루와
섞어서 만들면 목마르지 않은데 간성 칡을 가장 최고로 쳤다. 경자, 모형(牡荊)는 열매를 따 물에 담가 물을 갈아주며 쓴 맛을 뺀 다음 볕에 말려 빻아 국수를 만들었다. 노두, 호두(胡豆) 등 콩 종류는 익은 열매를 갈아서, 패자, 야칠 등 곡류는 열매의 껍질을 벗기고 갈아서 국수로 만들었다([임원경제지]).
④ 익혀 먹는 법
㉠ 삶고 찌고 굽고
요즘 건강식의 하나로 생식이 등장하고 채식주의자들은 대부분 날로 먹지만 모든 식물을 날로 먹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식물이지만 그 중에는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있고 또 가시 등이 있어 날로 먹기 어려운 것도 있다.
황정의 경우 푹 삶지 않으면 가시로 인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푹 익혀 먹도록 권하고 있다([임원경제지] 상동).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익히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구황서 또한 삶거나 찌거나 굽는 등 방법을 소개하였다.
찌거나 삶아 먹는 것으로는 소나무 껍질, 마, 토란, 고욤, 오우, 천문동 뿌리, 개나리뿌리(百合), 메뿌리, 사삼뿌리, 둥그레, 자리공(陸), 맥문동 뿌리(심지를
제거), 창출(蒼朮), 창포, 노아산(老鴉蒜) 뿌리, 산무, 발제, 고구마(감저), 연뿌리, 감(가시연), 질려자, 도토리(열매를 주워 물을 갈아주며 담갔다가 삶아 15번
씻어 깔깔한 맛을 없애고 푹 쪄 먹으면 위장을 후하게 하고 배고프지 않다([임원경제지]), 능각(菱角, 껍질이 늙었거나 조잡하고 작은 것은 익혀 먹는다
([임원경제지]). 어린 죽순, 자고 뿌리, 우엉, 원지 등이 있다. 황산곡자두방과 황정휴량방 등 많은 벽곡법에도 익혀서 먹는 것이 제시되고 있다.
고구마 뿌리를 날로 먹거나 쩌 먹거나 삶아 먹거나 구워 먹을 수 있다. 속을 잘라 볕에 말려서 죽반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이것을 경상도에서는 빼때기라고 한다. [임원경제지].
사용되었다. 꽃을 먹는 식물 또한 이 방법으로 조리하였다. 대부분 식용 부위를 삶아 물에 담가서 식물의 쓴맛, 이상한 맛 등을 우려낸 다음 깨끗이 씻어 소금, 기름으로 조리한다.
채소를 삶아 무칠 때 기름으로 조미하는데 이것은 식품영양학적으로 볼 때 채소 속의 카로틴 흡수에 효과가 있어 합리적이라고 한다(조후종, 2001, [우리
음식 이야기] 한림출판사, p.120).
간혹 잎이나 싹을 삶아서 말렸다가 다시 물에 불려 부드럽게 한 다음 조미하여 먹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오늘날 말린 나물 요리법과 동일하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조리하는 식물은 [임원경제지]에 등장하는 것이 백여 가지가 넘을 정도이니 그 이름을 일일이 거명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흉년의 대표적 이용 식물이던 자고는 잎을 삶은 후 물에 담가 쌉싸름한 맛을 없애고 익혀 먹는다. 혹 둥글레, 향호(香蒿)를 함께 숙지황처럼 검은 색이 될 때까지 푹 삶아 꺼내 볶은 콩가루와 같이 먹기도 하였다.
⑤ 국 끓여 먹기
재료에 물을 부어 끓인 요리인 국은 밥과 함께 한국음식을 대표한다. 이것은 한편으론 적은 재료로 양을 늘려 배를 불릴 수 있으므로 구황식 조리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리법은 모든 식물에 적용되지 않는다. 구황서에 국을 끓여먹을 수 있다고 기재된 식물명을 거명해보면 쑥, 냉이를 비롯하여 양제근, 소루쟁이뿌리, 사호(邪蒿), 야칠, 지황(地黃), 택산(澤蒜), 자소(紫蘇), 국화(菊) 등이다.
차조기는 잎을 따 삶아 익혀 끓여 먹는데 날로 먹거나 생선과 함게 국을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 씨는 갈아 즙을 내어 국을 만들어 먹는다([임원경제지] 인제지 권 28, 구황).
⑥ 장아찌 만들기
간장에 담그거나 소금에 절여, 또는 된장에 박아먹는 장아찌, 짠지는 염분을 공급하는 대표적인 반찬이다. 구황서에서는 장 만드는 재료로 들어간 더덕,
도라지를 장이 익은 다음에 반찬으로 먹을 수 있다 하였으니 바로 장아찌를 이르는 것이다([구황촬요]).
⑦ 묵 만들기
묵은 전분식품을 맷돌에 갈아 앙금을 가라앉혀 물에 섞어 풀 쑤듯이 쑤어 굳힌 음식으로 메밀, 밤, 녹두, 옥수수, 동부, 고구마 등이 많이 이용된다(조후종,
[우리 음식 이야기] 한림출판사, 2001, p.109). 그런데 조선시대 구황서에는 도토리의 식용법으로 묵에 관한 설명이 거의 없다. 다만 일제시대 편찬된 [조선의 구황식품]에서 대표적인 도토리의 식용법으로 묵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묵이 순수하게 전분만을 이용해서 만들기 때문에 ‘적은 재료로 많은 양의 먹거리를 만들어야’ 하는 구황식의 목적에 맞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02.다른 곡식, 잡물과 섞어 먹는 법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가능한 한 양을 늘려, 가능한 한 오래도록 위장에 머무르게 한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구황식물을 곡물 등 다른 잡물과 섞어 죽, 밥, 떡 등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① 죽, 삼 만들기
㉠ 죽 만들기
요즈음 새로운 건강, 다이어트 식으로 등장한 것이 죽이다. 죽은 먹기 쉽고 편할 뿐 아니라 조금 먹고도 배부르며 영양도 풍부하여 살찌지 않으면서 건강을 챙기려는 현대인의 요구에 딱 맞는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된 60년대까지도 죽을 먹는다는 것은 가난의 상징이었고 실제 초등학교에서 가난하여 점심을 굶는 어린이들에게 미국의 구호양곡인 옥수수로 죽을 끓여 급식을 하기도 했다. 죽과 관련된 우리 속담 ‘시래기 죽도 못 먹는다’ ‘죽 먹고 힘쓸 수 있나?’ 등은 죽이 주리고 배고픈 사람들이
연명하기 위해 먹는 음식임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 죽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대표적인 구황식이었다. 죽은 적은 곡물을 가지고 많은 기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관에서 죽 끓이는 곳을 설치하고 굶주린 기민들에게 죽을 배급하여 왔다. 조선시대는 숙종 초까지 설죽구제가 국가 기민구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죽의
구황기능은 관에서 뿐만이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도 알고 있어야 했다. 곡물이 바닥나거나 부족할 때 여러 가지 식물을 이용하여 죽을 끓여 먹으며 이듬해 봄 새 곡식을 얻을 때까지 연명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구황서에 실린 갖가지 식물의 식용법은 백성들 스스로의 생존확보를 위한 투쟁
지침서였다고 할 수도 있다.
구황서에 등장하는 죽 재료는 솔잎, 유피, 메밀, 뽕잎, 도토리, 갈근, 냉이를 비롯한 각종 채소 등이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솔잎으로 만드는 죽이다.
솔잎은 가루로 만들어 곡식으로 쑨 묽은 죽과 함께 나누어 먹거나([충주구황절요]) 솔잎가루 3홉, 쌀가루 1홉, 유피즙 1되를 고루 섞어 죽을 쑤기도 했다.
대개 솔잎은 성질이 깔깔하고 유피즙은 성질이 매끄러워서 쌀가루와 섞으면 크게 위를 보호하고 대소장을 이롭게 하는데 이것은 구황식으로 뿐 아니라 보통 때 섭양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유피가 적게 나거나 아예 생산이 되지 않는 곳에서는 유피즙 대신 맑은 물을 써도 해롭지 않다고 했다([구황촬요]). 허나
실제로 곡물이 부족할 때 관에서는 솔잎만으로 또는 솔잎가루와 쌀가루를 10: 1로 섞어 죽을 쑤어 기민에게 먹이기도 하였다(李端夏, 〈畏齊集〉 권3, 疏箚, 傳諭懷德復命後辭職仍陳沿路所聞疏, 庚戌 (《韓國文集叢刊》 125, p322-323)). 그런데 솔잎 죽을 오래 먹을 경우 변이 막히기 쉬운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콩가루 1~2 숟갈을 2~3일간 죽에 타서 먹거나, 날 콩을 물에 담갔다가 씹어 먹으면 해결이 된다고 하였다([구황촬요]).
도토리 잎, 뽕잎, 메밀, 잉장고초(芿壯稿草) 및 대경두기 등을 가늘게 썰어 누렇게 볶아 가루로 만든 다음 체에 내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 먹으면 기운을
돋울 수 있었다. 갈근 또한 죽을 쑤어 먹기도 하였고 냉이는 성질이 온하여 간, 위장을 덥게 하고 오장을 이롭게 하는데 죽을 쑤어 먹으면 피를 끌어 간으로
돌아가게 만든다고 하였다.
한편 채소를 이용하여 죽 끓이는 법을 보면 나물을 캐어 깨끗한 물에 씻어 항아리에 담고 보리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에 담가 담박한 죽이 되도록 한 다음
물을 부어 채소가 떠오르면 돌로 눌러주되 소금은 쓰지 않는다. 6, 7일이 지난 후 물이 배면 채소가 황색으로 변하고 약간 신맛이 나는 누런 나물(황제)이
된다. 이제와 쌀을 섞어 죽을 끓이면 쌀 2되로 3되의 죽을 만들 수 있다. 또 유초, 봉자채(蓬子菜), 호지자(胡枝子), 양귀비(앵율, 罌栗), 냉이 등의 씨를 갈아
곡식을 섞어 죽을 쑤기도 하였다([임원경제지]).
㉡ 삼
삼은 흩이다. 섞는다는 뜻이 있으나 [예기] 내칙(內則)에서는 쌀가루에 소, 양, 돼지의 고기를 잘게 썬 것을 섞어 경단(餌)를 만들어 지진 것이라 하였고, 또
삼은 국죽을 가리키기도 한다(이성우, 1982, [조선시대 조리서의 분석적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구황서에 나타난 삼으로 만들어 먹은 식물은 메밀꽃, 콩잎, 콩깍지, 곡식뿌리, 복숭아 등이었다. 메밀꽃, 콩잎, 콩깍지를 가루로 만들어 곡식가루와 섞어 삼을 만들거나, 콩깍지를 삶아서 온돌에 펴 말려 가루를 만든 후 물에 담가 가라앉히고 물을 두세 번 갈아주어 독을 제거한 뒤 삼을 만들면 좋다고 했다([구황촬요]). 또 복숭아 열매는 익기 전에 얇게 조각을 내어 볕에 말렸다가 삼을 만들어 비황식품으로 저장할 수 있다고 하였다([임원경제지]).
② 밥, 떡, 전병 만들기
㉠ 밥 만들기
도라지뿌리, 새삼씨, 칡 뿌리, 무, 메밀, 계안초 등으로 밥을 만들어 먹었다. 도라지는 깨끗이 씻어 삶은 다음 포대에 넣어 물에 담그고 밟아 쓴맛을 뺀 다음
짓이겨 진흙처럼 만들어서 밥과 섞어 먹는다([구황보유방]). 새삼씨로 밥을 지어먹으면 배고프지 않을 뿐 아니라 풍질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풍질을 앓은 후에 병황(兵荒 난리)으로 인하여 수곡(數斛)의 토사자를 먹었는데, 옛날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구황촬요].
칡뿌리는 깨끗이 씻어 껍질을 제거하고 문드러지게 찧어 수비(水飛)해서 그 실낱을 버리고 앙금을 가라앉힌 후 물을 따라내고 앙금을 쌀과 섞어 밥을 지었다. 무는 뿌리를 캐어 깨끗이 씻은 후 볕에 말려 절구에 빻아 밥을 짓고, 메밀 열매는 익힌 후 볕에 말려 껍질 입이 벌어지면 절구질을 하여 벗기고 밥을 지었다.
㉡ 떡, 전병, 다식
느릅나무 속껍질 가루 1되, 쌀가루 1홉, 솔잎가루 1홉을 맹물 끓인 것(白湯)에 고루 섞어 떡을 만든 후 끓는 물에 넣어 익힌 다음 식혀서 먹었다. 또 다른
방법은 느릅나무 속껍질 가루 1되와 쌀가루 1홉을 백탕에 개어 익반죽하여 떡을 만들어서 삶아먹거나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지져서 전병(煎餠)을 만들어서 먹었다. 기름이 없으면 납을 사용해도 무방하였다([구황촬요]). 또 밤, 대추, 호도, 곶감을 껍질을 벗기고 방아에 찧어 둥글고 두터운 떡을 만들거나, 다식을
만들어 볕에 말렸다가 거두어 먹도록 했다.
옛날에 기이한 중이 있었는데 미리 위의 물건을 여러 해 동안 구하여 많이 저축을 하였었다. 그 후 흉년을 만나게 되자 이것을 먹고서 살아났다 한다.
[구황촬요].
보리가루(밀가루도 무방) 1근, 백복령 가루 4냥을 생우유에 갠 후 떡을 만들어 삶아 먹었다. 메밀을 껍질을 벗기고 갈아 떡을 만들거나, 참깨를 찌고 말린
다음 찧어서 떡을 만들었다. 계안초, 고조두(苦鳥豆), 앵율(罌栗), 가시연, 순망곡(舜芒穀) 씨와 과루(瓜蔞) 뿌리를 가루로 빻아 떡을 만들라 했고, 벽곡식의
하나인 왕씨휴량방(王氏休糧方)에서는 메밀가루, 황랍, 백봉령 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었다([임원경제지]).
한편 황랍에 백면을 넣어서, 또는 지황 부리를 9번 찌고 말려 전병을 만들었다. 또 도꼬마리(창이, 蒼耳) 씨를 연한 황색이 나도록 볶아 빻아 껍질을 제거하고 가루로 내어 병과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③ 꿀, 타 식물과 섞어 환 만들기
‘약 한 알로 한 끼 식사를 대신할 수 있다면, 이는 모든 주부들이 가장 바라는 희망사항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희망이 실행되던 적이 있었다. 다만
요리하는 것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조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벽곡을 위해 또 구황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끼니대용식 환약 복용인 점이 달랐다.
구황서를 보면 환약 만들어 먹는 법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것은 대부분 벽곡의 하나로서 사용되어 오던 것을 구황을 위해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주림을 이기기 위한 황랍으로 환 만드는 법을 보면 황랍, 송진, 은행, 대추, 복령을 가루로 만들어 환을 지어 50환씩 먹거나, 황랍, 송진, 백봉령, 감국화를 달인 꿀에 개어 총알만한 환으로 만들어 1환씩을 끓인 과 함께 씹어 먹었다([구황촬요]). 또 송진을 꿀에 섞어 환을 만들고, 둑대뿌리, 삽주뿌리, 새박뿌리도
말려 환으로 만들어 먹었다.
벽곡용 환의 재료는 주로 검정콩, 검정깨, 흰깨 등이었다. 검정깨를 콩, 대추와 함께 단으로 또는 검정깨 또는 흰깨를 찹쌀가루, 대추와 함께 쪄 환으로 만들어 먹었다. 검정콩을 이용한 환은 검정콩과 대마씨, 대추를 찌고 익혀 만들었다.
03.술을 만들어 먹는 법
구황서에는 배고픔을 더는 데 도움이 되는 술 만드는 법이 제법 나온다.
① 천금주(千金酒)를 만드는 법
먼저 찰볏짚을 진하게 달여 짚을 건져낸 다음에 천금목피(千金木皮)를 넣고는 다시 달여 1·2차 끓인다. 이것이 식기를 기다렸다가 항아리에 넣고 양에 맞게 누룩가루를 넣는다. 그리고 이튿날에 쌀죽을 넣고 익혀서 맑아질 때까지 놓아두면 맛이 감미롭게 된다. 그것을 먹이면 부기를 빠지게 하는 데 신묘한 효험이 있다. 그런데 술 빚은 물 2동이에 쌀 1되를 넣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구황촬요]).
② 적선소주법(謫仙燒酒法)
백미(白米) 1되 5홉을 1백 번 씻어 하룻밤을 재워서 가루를 만들어 끓인 물 4말로 죽을 쑤어 식기를 기다려 좋은 누룩가루 3되와 섞어서 항아리에 넣는다.
여름에는 3일, 겨울에는 5일이 지난 뒤에 찹쌀 1말을 1백 번 씻어서 하룻밤을 지나 술밥을 쪄서 위에서 설명한 술과항아리에 넣어둔다. 그리고 익기를
기다려서 네 번으로 나누어 내린다. 한번 내리면 4되가 나오니 도합 16되가 나오는데, 맛이 좋다([구황보유방]).
③ 소나무순으로 술 만드는 방법
소나무순을 많이 따서 큰 항아리 속에 가득 담고 끓인 물을 항아리에 가득 부었다가 3일이 지난 뒤에 소나무순을 건져내고 체로 항아리 물을 걸러 찌꺼기를 버린다. 그 물을 도로 항아리에 붓고 찹쌀 1말을 쪄서 누룩 1되와 섞어 항아리 물로 술을 빚어 넣는다. 그리하여 항아리의 아구리를 봉하여 두었다가 15일이 지난 뒤에 먹으면 그 맛이 매우 좋다. 여러 날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다([구황보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