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 총알 탄 사나이였던 정재권 ⓒ스포탈코리아 |
90년대를 대표하는 ‘총알 탄 사나이’를 꼽는다면 누가 떠오르는가. 이번 호에 소개할 정재권(38세)은 서정원과 함께 ‘90년대 총알 탄 사나이’를 대표했던 선수이다. 서정원이 좀 더 호쾌하고 수비수 틈을 교묘하게 침투하는 번개 같은 느낌이었다면, 정재권은 좀 더 파워풀하고 상대 수비수와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파괴적인 느낌의 돌파를 선보였다.
정재권은 고향인 부산의 사하초와 장평중, 부산상고(현 개성고)를 거쳐 한양대를 졸업했고, 부산과 포항에서 프로 생활을 했다. 프로 통산 179경기에 나서 30골-23도움을 기록했으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활약했다. 같은 해에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어 다이너스티컵을 통해 A매치 데뷔를 했으며, A매치 통산 14경기에 나서 3골을 기록한 바 있다.
어릴 때부터 당할 자가 없었던 발군의 스피드
정재권의 스피드는 타고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스피드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던 정재권은 매일 들판을 뛰어다니면서 놀았고, 부산 사하초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이후에도 뛰는 것에서는 독보적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님이 사업을 하셔서 저는 시골에서 고모님 곁에서 컸어요. 그 시절에는 축구라는 것도 모른 채 산을 타고 들판을 뛰어다녔던 것이 유일한 놀이였죠. 그런데 먹을 게 부족하다보니 몸은 마르고 배만 볼록 나온 상태였어요.(웃음) 부산의 부모님 곁으로 다시 왔을 때 아버님께서 저를 보더니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으신 거죠. 그래서 축구부에 가입하게 됐어요.”
“사하초가 육상부로 유명했었는데, 육상 대표하고 운동회에서 뛰어서 이겨버렸죠.(웃음) 어릴 때부터 스피드로 누구에게 져본 적이 없었어요. 상황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고 해야할까. 탕 하면 스타트를 치고 나가는 것이 빨랐죠. 추진력도 좋았고요.”
이전까지 축구를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정재권은 처음 사하초에서 축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스피드밖에 없었던 선수였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포지션은 스위퍼였다. 정재권은 “처음에는 공을 잘 다루지 못하면서 스피드는 빠르니까 스위퍼에 서서 뒤로 공이 빠지면 빨리 쫓아가서 걷어내라는 것이었죠”라고 웃는다.
사하초 시절 스위퍼로 뛰었던 정재권은 장평중으로 진학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된다. 당시 장평중을 지도했던 정선일 감독(작고)은 정재권의 스피드를 좀 더 효과적으로 활약하기 위해서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끌어올렸던 것. 이 때를 기점으로 정재권은 측면 미드필더와 전방 공격수 및 윙 포워드로서 활약하게 됐다.
“정선일 선생님께서 저를 유심히 관찰하시더니 미드필더를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점차 공격수도 하고, 윙으로도 활약하기 시작했죠. 부산상고 시절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솔직히 그 시절의 저는 볼을 잘 차는 선수는 아니었어요. (고)종수나 (윤)정환이처럼 볼을 붙이고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고, 어느 지점에 떨어지는 볼을 쫓아가는 것을 좋아했죠. 볼에 대한 집념이 강했고, 측면 돌파를 즐겨했어요.”
“이 시절을 돌이켜보면 장평중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제가 2회 졸업생인데, 당시 숙소가 없어서 교실에서 잤어요. 또 학교 상황이 어려워서 주위에 있던 무우밭에서 무우 뽑아서 이로 갈아서 먹으면서 배를 채웠던 기억도 납니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지금은 좋은 추억이 됐죠.(웃음)”
|
K-리그에서 활약할 당시의 정재권 ⓒ베스트일레븐 |
처음으로 청소년대표팀 선발, 한 단계 도약했던 계기
부산상고 시절 활약을 펼치면서 전국무대에 이름을 알렸던 정재권은 3학년 시절이었던 1988년 처음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됐다. 카타르에서 열리는 U-19 아시아선수권을 준비하는 U-19 대표팀에 합류하게 된 것.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서 정재권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좀 더 높은 레벨의 축구를 몸으로 겪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시 부산상고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서 한양대로 진로를 결정한 상황이었죠. 갑자기 U-19 대표팀에 선발됐으니 훈련에 합류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얼떨떨하고 깜짝 놀랐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 때 훈련멤버들이 김병수 선배, 서정원 선배, 신태용 선배, 정광석 선배, 동기로 노정윤, 박남열, 김도훈, 최문식, 신범철 등이 있었죠.”
“어려운 경쟁을 뚫고 아시아 본선에 가긴 했는데, 거기서는 1경기도 뛰지 못했어요. 팀도 1승 1무 1패로 조별예선에서 떨어졌고요. 당연히 아쉬웠죠. 수영장에서 울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런데 대표팀을 통해서 제 위치를 알게 되기도 했어요. 그래도 영남에서 볼 좀 찬다는 소리 듣고 뽑혔는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구나라는 걸 느꼈죠.”
“특히 김병수 선배가 볼을 차는 것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볼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특히 저는 스피드를 이용해 공간을 침투하는 것에 집중했었거든요. 그런데 병수 형은 볼을 찰 때 2수 3수를 미리 내다보고 차더군요. 볼을 이용한 모든 테크닉이 뛰어났고요.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죠.”
이 때의 경험을 소중히 간직한 정재권은 이듬해 한양대에 입학하면서 일취월장했다. 1학년 때부터 경기에 투입된 그는 특유의 스피드를 살린 활발한 움직임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3학년 시절에는 셰필드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해 한국축구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1학년 시절부터 반 게임씩 뛰기 시작했죠. 지금 생각해도 한양대로 간 것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고 봐요. 팀 스타일이 빠른 공수전환과 기동력과 스피드를 이용한 축구였거든요. 저에게는 정말 딱 맞는 스타일의 축구를 했고, 자연히 저에게도 플러스 요인이 된 것이죠. 팀과의 궁합이 잘 맞았다고 할까요.”
“그 덕분에 셰필드 유니버시아드대표팀에도 선발되어 결국 우승까지 차지했었죠. 100년만의 우승이라고 떠들썩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 때 네덜란드와 결승전에서 붙었는데, 골키퍼가 판 데르 사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경기 자체는 4:6 정도로 밀렸는데, 승부차기 끝에 승리했었죠. 그 때 골키퍼가 부산 GK코치였던 김승안이었어요.(웃음)”
|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아랫줄 왼쪽에서 2번째가 정재권) ⓒFIFA |
바르셀로나 올림픽,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
셰필드 유니버시아드에서의 활약으로 정재권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올림픽대표팀에도 뽑히게 됐다. 올림픽대표팀이 출범한 초기에는 선발되지 못했던 그이지만, 결국 92년 봄 진해훈련을 통해 인정을 받아 결국 올림픽 본선까지 나가게 됐다.
“처음 크라머 감독님이 계실 때에는 뽑히지 않았어요. 당시 올림픽대표팀은 87년 U-17 월드컵에 나갔던 김병수-서정원-노정윤-정광석-신태용 선배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죠. 그런데 유니버시아드를 갔다 와서 지금은 작고하신 배기면 감독님(한양대)께서 저를 추천하셨어요. 기량이 많이 발전했으니 한번 테스트해보라고...”
“그 무렵은 크라머 감독님 대신 김삼락 감독님이 올림픽대표팀을 이끌기 시작했던 시기인데, 마침 (서)정원이 형도 부상이고 해서 테스트를 받았죠. 프로 팀들과 연습경기가 잡혀있었는데, 연속골도 터트리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어요. 그래서 발탁이 된 거죠.(웃음)”
“솔직히 걱정스럽기는 했었어요. 예전 U-19 대표팀 시절에도 김삼락 감독님이셨는데, 그 때는 저를 기용하지 않으셨잖아요. 저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실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일이 잘 풀리려고 그러니까 슛을 시도하면 다 들어가고, 드리블로 치고 들어가면 다 뚫리는 거예요. 프로 팀들을 상대로 말입니다.(웃음) 그러니까 김삼락 감독님도 다르게 보시더군요.”
결국 진해훈련에서 합격점을 받은 정재권은 미국 전지훈련에 동행했고,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 참가명단에도 포함됐다. 당시 올림픽대표팀은 축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역대 최고의 멤버로 평가받고 있다. 중심 미드필더였던 김병수가 부상으로 본선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노정윤-서정원-이임생-정광석-곽경근-나승화-김귀화-강철-신태용 등으로 구성된 팀 전력은 밸런스를 잘 갖추고 있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올림픽대표팀이 가장 강했던 팀 같아요. 실력을 갖춘 선수들로 공수 모두 포진되어 있었죠. 팀에 대한 자부심도 컸었고요.”
그런 선수들 틈에서 정재권은 뒤늦게 자리를 잡았지만, 올림픽 본선 3경기에서 모두 풀타임을 소화했다. 특히 모로코와의 1차전에서는 0-1로 지고 있던 후반 28분에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처음에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는 중압감이 컸죠. 심장 박동소리가 들릴 정도였어요.(웃음) 뛰기 전부터 숨이 차기 시작했고요. 10분 정도 뛰니까 서서히 풀리더군요.”
“3경기 모두 기억에 남는 경기지만, 모로코와의 첫 경기는 특별히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동점골을 터트렸으니까요. 측면에서 (나)승화 형이 크로스를 올렸는데, 제가 키핑하는 것이 조금 높았어요. 볼이 공중에 떴는데, 그냥 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넘어지면서 하프 발리슛을 시도했어요. 차는 순간 잘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죠. 골이 되든 안 되든 제대로 맞았다는 느낌 있잖아요. 넘어지면서 보니까 골키퍼 손을 피해서 골망으로 빨려들어가더군요. 그 때의 기분은 설명할 수 없죠.(웃음)”
그러나 한국은 선전을 펼쳤음에도 조 예선 통과에는 실패했다. 모로코-파라과이-스웨덴과 모두 비긴 한국은 1승 2무를 기록한 스웨덴과 파라과이에게 밀리고 말았다.
“진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실제로 3무를 기록했고요. 그 대회에서 우리만 유일하게 3무였던 걸로 기억해요. 3게임 중 1게임은 잡을 수 있었는데, 그런 부분이 아쉽죠. 득점 상황에서의 집중력이나 상황대처능력 등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또 그 시절만 해도 지금과 달리 상대에 대한 정보 분석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었죠.”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 90년대 최고의 스피드맨을 놓고 항상 같이 거론되었던 서정원과는 U-19 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에서 함께 생활했다. 과연 누가 더 빨랐을까?
“누가 더 빠른지는 몰라요. 친하게 지내고 좋아하는 형인데, 같이 뛰어보지는 않았어요. 서로 일부러 그런 부분에서는 안 부딪친 것 같아요. 둘다 스피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대결을 피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스타일적으로 조금 다른데, 정원이 형은 수비를 피하면서 스피드를 활용하는 스타일이고, 저는 몸싸움을 하면서 돌파하는 스타일이었죠.”
국가대표팀의 부름 - A매치 데뷔전에서 골 기록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정재권은 곧바로 다이너스티컵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대학 선수로는 유일했다.
“대선배님들과 함께 뛰니 너무 영광스러웠죠. 정용환 선배님과 같은 방을 썼는데, 처음에는 정말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긴장했었어요.(웃음) 그런데 선배님이 부드럽게 대해주셔서 긴장을 풀 수 있었죠. 저 혼자 대학생이다보니 선배님들이 모두 귀여워해주셨어요. 어린 동생 챙기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죠.”
“그 시절에는 대표팀 생활 자체가 너무 영광스러운 것이어서 훈련 끝나고 선배님들 축구화를 모두 받아와서 복도에 앉아 구두약과 솔로 축구화를 닦았던 기억도 납니다. 모든 게 신기하고 배움의 대상이었죠.”
한창 상승세를 타던 시점이었던 정재권은 A매치 데뷔전이었던 중국전부터 일을 냈다. 그리고 A매치 2번째 경기인 일본전에서도 골을 넣었다. A매치 데뷔 후 2경기 연속골의 대기록이었다.
“91년 유니버시아드와 92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최고의 상태였어요. 슛을 시도하면 다 들어가는 그런 느낌이었죠.(웃음) 그 때 별명도 ‘생선’이었어요. 팔딱팔딱 뛰는 느낌이라고 형들이 지어줬죠.”
“A매치 데뷔전이었던 중국전에서 (이)상윤이 형이 왼쪽에서 월패스를 줬고, 저는 볼을 내준 뒤 돌아 들어갔죠. 그리고 크로스를 받아서 밀어넣었어요. 거의 하프라인부터 침투해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 경기였던 일본전에서도 골을 넣었는데, A매치 데뷔전부터의 2경기 연속골은 6명인가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전형적인 골잡이는 아니었지만, 많이 움직이고 많이 뛰다보니까 찬스를 많이 잡을 수 있었어요. 기회를 많이 맞이하다보니까 득점도 많아졌던 것 같아요. 또 당시는 흔히 말하는 골대가 넓어지는 그런 느낌이 실제로 있었죠.(웃음)”
“당시 일본전은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중 하나에요. 제가 1골 넣으면서 연장전, 그리고 승부차기까지 갔죠. 저는 너무 많이 뛰어서 가슴까지 경련이 오더군요. 그 정도로 죽어라 뛰었죠. 결국 승부차기는 차지 못하고 그라운드에 누워서 봤어요. 승부차기에서 졌는데,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고 화가 나더군요.”
|
97년 K-리그 정규리그에서의 정재권 ⓒ베스트일레븐 |
94년 대우에 입단, 프로 선수로서의 시작
1993년에 한양대를 졸업한 정재권은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1년간 중소기업은행에서 뛰었다. 그리고 1994년에 드래프트에 나왔는데, 대우(현 부산)에 지명을 받는다는 약속을 받고 참가한 것이었다. 정재권은 어렸을 때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던 대우만이 자신의 팀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부산에서 자랐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경기장을 가면서 어린 마음에도 언젠가 대우에 꼭 갈 거라는 다짐을 했었어요. 당시 대우는 멤버 대부분이 대표선수였을 정도로 화려했었죠. 드래프트에 참가했을 때도 대우가 아닌 다른 국내팀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협의가 되어서 대우에 지명을 받게 됐죠.”
“당시에는 대우와 포철(현 포항)이 최고의 팀들이었어요. 대우가 화려한 느낌이었다면 포철은 육중한 느낌이 있었죠. 처음 대우 유니폼을 입었을 때의 기분은 아마도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했을 때의 기분과 같을 거예요.(웃음)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꿈의 팀에 입단했기 때문에 주위의 기대에 보답하고 내 가치를 보여주겠다는 책임감도 컸죠.”
데뷔 시즌에 발목 수술로 인해 초반 3개월을 결장한 정재권은 14경기에 출장해 1골-2도움을 기록하며 무난한 첫 시즌을 보냈다. 본격적으로 컨디션을 회복한 1995년부터 98년까지는 매년 25경기에 이상 나서며 공격을 주도했다. 97년 6골-5도움으로 부산이 3관왕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98년에는 8골-8도움의 개인 최고 기록을 올리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는 부상도 없었고, 안정감도 찾았어요. 또 선수는 감독과 코드가 잘 맞아야 활약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런 부분도 좋았고요. 부산대우 시절 6명의 감독님을 모셨는데, 그 중에서 이차만 감독님과 제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이 감독님은 인화와 대화를 중시하시는 분이셨고, 저로 하여금 운동장에서 보답하겠다는 각오를 끌어내신 분이셨죠.”
포르투갈로의 도전, 아쉬움으로 남아
1997년 부산대우의 시즌 3관왕에 일조하며 물 오른 기량을 선보인 정재권에게 유럽 진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포르투갈 1부리그의 세투발에서 오라는 제의를 받았던 정재권은 망설일 것 없이 포르투갈행을 선택했다. 당시 98 프랑스 월드컵을 준비 중이던 차범근 감독이 대표팀에 합류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재권은 유럽 진출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단 임대로 해보고 정식계약을 하자는 제의였는데, 당시 제대로 된 에이전트가 없고 해서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차범근 감독님께서 대표팀에 합류하라고 연락이 왔었죠. 제가 97년 12월에 포르투갈로 가야 했는데, 대표팀 소집은 98년 1월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아니면 유럽에 나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결국 포르투갈행을 강행했죠.”
“세투발에 합류해서 데뷔전에서 골을 터트렸죠. 아무래도 임대선수는 첫 인상이 중요한데, 골도 넣고 스피드와 뛰는 양도 좋으니까 평가가 높았어요. 계속 스타팅 멤버로 기용해줘서 벤피카 같은 팀과의 경기에도 뛰었죠.”
이렇듯 포르투갈에서 성공적인 축구인생을 이어가는 듯 보였던 정재권이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팀에서 인정받았음에도 에이전트의 일처리 미숙과 친정팀인 부산대우의 복귀 압박 등이 겹치면서 결국 3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부산대우에서 계속 들어오라고 그랬어요. 중국에서 한중일 클럽챔피언전이 열리는데 그 대회부터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구단에서는 복귀해서 열심히 하면 다시 보내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98년에 정말 열심히 뛰어서 좋은 성과를 올렸어요. 그런데 결국 기회가 오지 않더군요. 구단에서는 약속했던 유럽진출에 대해 자꾸 소극적으로 나왔고요.”
이런 경기 외적인 문제들은 정재권에게 슬럼프로 다가왔다. 결국 99시즌에 정재권은 단 하나의 공격 포인트도 기록하지 못했다. 그리고 부산대우의 시대가 1999년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현대산업개발에 팀을 인수해 새로운 팀으로 변모하면서 정재권도 새로운 팀을 모색했다. 마침 포항의 박성화 감독에게서 연락이 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 당시에 몸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유럽 진출 등의 문제로 너무 복잡했어요. 팀 최고연봉자로서의 부담감도 있었고요. 유럽진출을 약속했으면서 왜 못 나가게 하냐고 따지면 구단에서는 ‘협상 중이다. 조건이 맞지 않아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라는 대답만 돌아왔죠. 그 약속만 믿고 열심히 했는데, 자꾸 이렇게 나오니까 정말 실망스럽더군요. 그 시절에는 너무 마음이 복잡해서 암자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스스로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 마음이 쫓기다보니 너무 힘들었죠.”
“그렇게 한 시즌을 보냈는데, 현대산업개발이 팀을 인수했죠. 개인적으로 ‘대우맨’으로 살아왔던 것이기에 조금 불이익이 있더라도 팀에 계속 남아있었던 건데, 대우가 사라지니 계속 있어야할 필요성도 없어졌죠. 마침 박성화 감독님께서 도와달라고 전화가 오셔서 포항으로 가게 됐습니다.”
|
한양대 코치와 함께 서울 유나이티드 선수로도 뛰고 있는 정재권 ⓒ스포탈코리아 |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다.
그를 포항으로 불렀던 박성화 감독이 2000년 6월에 사임한 이후, 정재권은 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다. 결국 포항과의 협의 끝에 자유계약으로 풀린 정재권은 새로운 팀을 알아볼 동안, 모교인 부산상고에서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포항 차동해 사장님의 배려로 자유계약으로 풀렸어요. 후반기에 등록해서 뛰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만드는데, 동의대 김종부 감독님께서 이왕 몸 만드는 거 대학에서 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하시더군요. 애들도 좀 가르쳐줄 겸 와서 몸을 만들라고 하시길래 맞는 말이다 싶어서 갔는데, 그게 코치 자리였어요.(웃음) 총장님께도 인사드리고 그랬죠.”
“그 때까지도 현역생활에 대한 미련이 계속 있었고, 동래중으로 갈 때까지도 그 마음은 그대로였는데, 결국 현실적으로는 이뤄질 수 없었어요. 동래중에서 5년간 감독을 하다가 올해에는 모교인 한양대로 오게 됐죠.”
그 와중에도 정재권은 K3리그 서울 유나이티드의 선수로 뛰고 있기도 하다. 현역 생활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그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을 풀 수 있는 기회가 K3리그를 통해 주어진 것이었다.
“한양대 동계훈련 때문에 순천에 가서 대신고와 연습게임을 했었어요. 선수가 부족해서 25분 정도 뛰었는데, 아직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죠. 마침 경기가 끝나고 대신고 임근재 감독님(서울 유나이티드 감독이기도 함)이 서울에서 한 시즌만 뛰어달라고 하시더군요.”
“저도 뛰고 싶기는 한데, 코치 생활을 하는 중이라 자주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니까 그것은 편의를 봐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바로 수락했죠. 어찌 보면 현역 선수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U리그 등 한양대 일정 때문에 5경기 정도밖에 뛰지 못했지만, 가면 열심히 뜁니다. 아직 스피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 같더군요.(웃음)”
어느덧 정재권이 지도자 생활에 접어든 지도 7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이 길로 들어선 후에야 정재권은 지도자들이 선수를 하나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충을 이겨내고 있는지를 알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현역 시절 받았던 관심과 사랑을 이제는 후배들에게 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정재권이란 선수 하나를 만들기 위해 저를 가르치신 분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제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제가 후배들을 위해 노력할 때죠. 현역 시절처럼 직접 부딪치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리고 이왕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으니 한 단계씩 밟고 올라가 언젠가 대표팀 감독도 한번 해봐야죠. 지도자로서의 꿈입니다.(웃음)”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08년 9월호 '나의 선수 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