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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박연(벨트브레), 하멜, 영국 해군대령 맥스웰과 홀이 상업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면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Karl August Friedrich Gutzlaff, 1803-1851)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 2차 대각성 운동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중엽이 되었을 때, 세계는 근대화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은둔의 나라로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조선에 대한 관심은 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국가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제국주의 정책의 붐
을 타고 동양과의 통상확대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면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유럽과 북미의 강대국들도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즉 선교와 상업의 목적으로 동양에 대한 유럽과 북미인들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지극히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불가분의 관계처럼 병행되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선교를 추진하고 타진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국의 힘을 의지하여 선교사역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인도의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한 영국선교나 그 이전에 있었던 포르투갈의 남미 선교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다행히 한국선교는 비교적 순수한 목적으로 복음이 전래된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
① 귀츨라프의 선교준비
개신교의 동양선교는 18세기 말에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영국인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의 인도선교(1793년)를 비롯하여,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의 중국선교(1807년), 미국인 저드슨(Adoniram Judson)의 버마선교(1812년)가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어서 스코틀랜드 출
신의 밀른(William Milne, 米燐)이 1813년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영국 회중교회의 중국선교사로서 매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麥都思)가 같은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817년에 말래카에 도착, 모리슨과 밀른을 도와 출판선교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의사이며,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이다. 그는 1803년 7월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 지방의 피리쯔(Pyriz)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았다. 꿈에 그리던 경건주의의 중심지인 할레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는 특권을 얻는 귀츨라프는 학업을 마친 후 베를린에 있는 선교사 양성소(the Missionary Institute)에서 국비로 선교사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여섯 개 언어를 동시에 공부했다. 이와 같은 훈련 과정을 통해 그는 학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장차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충실히 갖춘 뜨거운 신앙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영국 여행 중에 영국 선교사로서 중국 선교의 선구자였던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만나, 중국선교 보고를 듣게 된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선교사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는 1827년 1월 네덜란드선교회(the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고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인 동남아의 바타비아(Batavia)에 도착했다. 1828년 8월 23일 시암, 방콕으로 선교의 거점을 옮긴 후 그의 선교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귀츨라프와 그의 아내는 시암어로 많은 작품을 번역하고 Cochin-Chinese 사전을 편찬하고 신약성경을 다섯 개의 방언으로 번역하였고, 난파한 일본 선박의 한 선원과 친숙해져, 그와 협력해서 1838년에는 일본어로 요한복음을 번역 간행할 정도로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827년부터 네덜란드선교회와의 관계를 끊은 귀츨라프는 영국 회중교회 선교사인 월터 매드허스트의 제안에 따라 태국선교를 두 차례나 시도해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고 4년 뒤인 1831년에 원래 자신이 바라던 선교지인 중국으로 옮겨 갔다.
1831년 그는 요동반도를 거쳐 마카오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모리슨과 합류하였다. 귀츨라프는 그
가 마카오에 도착했던 1831년 6월에 중국 동해안과 만주를 거쳐 오는 약 6개월에 이르는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이 여행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귀츨라프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이 선교여행에서의 성과 때문이었다.
② 귀츨라프의 내한
1831년 선교여행 이후에 한국 선교를 모색하며 본격적인 한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을 때, 마침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까지 교역을 확대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조선, 일본, 오키나와, 대만까지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1천 톤급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 무역선을 이끌고 항해할 때 그 배에‘통역관’으로 동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로드 암허스트 호의 선장 휴 린세이(Hugh H. Lindsay)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실한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귀츨라프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귀츨라프에게 통역, 선의(船醫), 선목(船牧)을 제의해 이 역사적인 한국 선교여행이 상업적인 목적을 띤 상선을 타고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귀츨라프는“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서구에서 온 첫 개신교 선교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록 그가 통역관으로 승선하긴 했으나 그의 입국 목적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와 백령군도의 어느 한 섬에 정박하였고, 지방 관헌을 통하여 정부 당국과 접촉을 시도하였다고 하나, 그가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역사는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다만 1832년 7월 17일, 충남 장항 앞 창선도에 도착한 이후 기록한 일기가 남아 있어 그의 활동을 잠시 엿볼 수 있을 뿐이며, 이 일에 비추어 황해도에서도 이와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 외에는 별로 큰 진전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7월 17일, 강한 바람에 밀려 한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자비로운 섭리로 중국 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많은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셨으며, 오! 그로 인해 우리는 진실로 감사드린다.”
“7월 17일, 고깃배를 타고 있는 남루한 차림의 두 어부를
만났고, 그 중 한 노인에게 성경과 사자표 단추를 주었더니 매
우 좋아하였다.”
주민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복음서를 주려고 했으나 그 중 한 사람이 책을 받고는“불가”(不可, pulga)라고 소리치며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귀츨라프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 말을“불질러라”(fire), “그것을 불태워버려라”(burn it)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일기에서 밝힌 대로 그곳에서는 “직접 복음서를 주는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하지만 귀츨라
프는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한국에 대한 기록들이 하나같이 외국인들에 대해 무조건 폐쇄적이고 닫혀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귀츨라프는 비록 한국인들이 외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적대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준 복음서 선물에 대해 보답할 수 없어서 그들은 대단히 감사하며 우리에게 잎담배 몇 잎을 주었는데, 우리는 겸손하게 그것들을 받았다. 그 후 어디서든지 조선인을 혼자서 만나면 이 어부들처럼 인정에 넘쳤으며 은혜를 베풀었다.”
장산을 떠나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7월 23일에 안면도 근해에 이르러 안개가 짙게 깔린 가운데 한 섬에 정박했다. 그날 어부 몇 사람이 와서 귀츨라프 일행을 초청, 소금에 절인 마른 물고기와 신 액체(막걸리)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7월 24일 사람들이 갑판에 올라와 문안하며 현재 배가 정박한 곳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강경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하고 또 고관을 만나 무역 상담을 하며, 식량을 구할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7월 25일, 한국 관원의 요청으로 고대도 안항으로 옮겨 정박하였으며, 섬 사람들은 신기한 서양 배와 서양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는데,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고관과 만난 일행은 왕에게 헌상할 서신과 선물 준비를 서둘렀다. 성경도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능한 곧 왕에게 서신과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들을 포장하는 데 한나절을 넘게 시간을 보냈다. 린세이 선장은 내가 갖고 있는 성경 한 질과 전도문서 전부를 함께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했다.…두 교섭위원인 텡노와 양치를 대동하고 우리는 선물을 갖고 출발했다. 그 선물은 유리그릇, 옥양목, 낙타모직물, 담요 등과 한문으로 쓴 서한인데 붉은 비단으로 싼 것이다.”
한양에서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정부 관리의 감시가 없는 해안의 해변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접촉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온 서적, 의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를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를 자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백낙준 박사가 지적했고 후에 제임스 그레이슨(James Huntly Grayson)이 한국의 초기 불교와 기독교(Early Buddhism and Christianity in Korea)에서 진술한대로, 이 첫 개신교 선교사는 한국의 천주교와 달리 처음부터 복음을 공유하는 일, 곧 성경을 반포하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③ 귀츨라프의 성경 반포
그의 일기에는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염원이 군데군데 짙게 나타나 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건네주기를 원했고, 선물과 함께 성경을 동봉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츨라프 일행은 7월 30일,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포도 재배법과 포도에서 미주(美酒)를 얻는 방법과 자신들이 가지고 온 감자 씨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파종법과 재배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외국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었다며 반대하던 주민들도 새로운 농산물로 재배 농업의 혁신을 이루어야 이윤을 얻을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말없이 승낙했다.
귀츨라프 일행은 이들 중 몇이라도 복음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를 희망하며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고대도에 암허스트 호가 도착하자 마량진에서 관리들이 입국 목적과 배를 시찰하기 위해 귀츨라프가 탄 배에 승선했다가 그만 일기불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밤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배에 올라온 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적어 주고 그 옆에 한글로 토를 달게 하여 주기도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가 번역한 주기도문 기록은 찾을 길이 없지만, 이것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 가장 훌륭한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귀츨라프는 우리 민족에게 생명의 양식인 성경과 육신의 양식인 감자까지 주고 간 고마운 선교사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고 김인수는 말한다.
1832년 8월 7일 서울에서 통역관을 대동하고 특사가 내려왔는데, 그는 조선은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어떤 외국이나 외국인과 통상이나 교역을 할 수 없으니, 즉시 물러가라고 엄하게 말하였다. 또한 선장이 국왕에게 보낸 선물도 성경과 함께 되돌려 보내었다.그러나 실상은 지방 관리가 통상과 선교 사업을 요청하는 귀츨라프 일행의 청원서와 선물을 아예 중앙정부에 전달도 하지 않고 되돌려 준 것이었다. 린세이와 귀츨라프 일행은 그것들을 되돌려 받기를 거부했다.
왜 한국 지방 관리들이 선물과 서신을 한양의 국왕에게 전달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16년 전 첨사가 바실 홀과 맥스웰 대령과 접촉한 뒤 불이익을 당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던 지방 관리들에게는 또다시 외국인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선물과 서신을 조정에 전달하는 것이 큰 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8월 11일 어렵게 조선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은 이들은 영국 선박이 이곳에 오면 양식을 공급해 줄 것과 서해안에 배가 난파당하면 북경으로 되돌려 보내 달라고 청원했고, 관리는 두 가지 모두 동의했다.
귀츨라프는 더 이상 그곳에 체류하며 선교를 강행할 수 없어 훗날을 기약하며“아주 작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신앙”을 심어두고, 정들었던 주민들과 석별의 정도 나누지 못하고 섬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언젠가 자신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아름다운 결실이 되어 거둘 때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고대도를 떠날 수 있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안에 그들에게 은혜가 임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고대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교리를 전파함으로 그 날을 앞당기려고 매우 간절히 열망했던 것이다.…고대도의 관리들과 많은 서민들이 성경을 받았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미약한 시작일지라도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더 좋은 때가 한국에 임할 것임을 희망하자.”라고 회고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비록 자신들의 청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백성들에게 성경과 근대 농업기술, 외국과의 교류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며칠 후 제주도를 발견한 일행은 그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곳을 선교 기지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귀츨라프의 소원은 19세기가 지나기 전에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세계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응답되었다. 미개한 나라, 역사의 무대에 가려진 이 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한국선교를 타진하시고, 복음의 씨앗을 이 나라의 작디작은 섬 고대도에 뿌리셨던 것이다. 그 결과 1882년 그리피스가 그의 저서‘조선: 은둔의 나라’(Korea: The Hermit Nation)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록 지금은 미개한 민족이지만, 장차 동방의 복음의 빛이 되어 동방에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 소원은 머지않아 역사 속에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다.
1834년 모리슨이 세상을 떠난 후 귀츨라프는 중국주재 영국 대사관의 통역 겸 서기로 임명받았고, 마지막에는 무역 감독으로 임명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직책을 갖고 있었다. 중국인, 중국 역사, 언어, 그리고 그들의 관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귀츨라프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 전쟁 동안 1842년 난징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44년 그는 본국 전도사 양성소를 창립해 48명의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기도 했고, 1849년에는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강연을 통해 중국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그는 1834년 『중국사개관』, 『칼 귀츨라프 항해기』를 저술하고, 1838년에는 중국
개항을, 1833-1837년에는『이스턴 엔 웨스턴 이그재미너』(The Eastern and Western Examiner)지를 간행했으며, 그 외에도 정기 간행물『차이니스 리파지토리』(Chinese Repository), 중국어 월간지 등을 간행하고 수많은 책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1851년 중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8월 9일, 홍콩 빅토리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극동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인 귀츨라프는 많은 저술과 발자취를 남겨 극동 선교 역사에 소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고난과 개척의 25년간의 선교사역을 마감했다.
(2)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귀츨라프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지 34년 후인 1866년, 영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 젊은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崔蘭軒) 선교사였다.
그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New College, University of London)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철저한 신앙과 선교의 사명감으로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1863년 6월 4일이었다. 그는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던 해에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영국을 떠날 때에는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 달(3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 하겠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가, 현지 런던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아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로 가서 세관에 취직하여 일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교사로 온 토마스를 방관하실 수는 없었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재충전 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들과 먼저 접촉한 사람은 윌리엄슨이었다.
1865년 가을, 한국에서 온 목선 한 쌍이 지푸에 나타났는데 그 안에 사형될 위험을 무릅쓰고 산동에까지 온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몸에 염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과 메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슨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나 성경지식이 아주 없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종교적인 형편과 국내 실정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은 토마스는 한국 선교를 추진할 것을 다짐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마침 1865년 9월 4일 조선으로 향하는 배가 있어서 토마스는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엄슨이 전해 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소속 선교사로서 서해안으로 떠났다.
1865년 9월 13일 항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두 달 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1866년 1월 초에는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런던선교회로부터 그의 새 임지로 북경이 정해졌음을 통고받았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런던선교회 총무 티드맨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한국 선교 보고서를 보냈다.
“우리는 한 작은 중국 목선을 타고 9월 4일 지푸를 떠났고 한국 해안에 도착한 날은 13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해안에서 2개월 반 동안 머물렀습니다. 나는 한국 천주교인의 도움으로 그 불쌍한 백성들에게 복음의 가장 귀중한 진리 중 얼마를 가르치기에 넉넉한 한국말을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백성으로 말하면 대체로 외국인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나, 나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책 한 두 권씩을 받도록 권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책을 받을 때에는 사형을 당하든지 아니면 벌금형이나 투옥될 것을 각오하고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런 책을 얼마나 읽기를 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1866년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면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나 친숙한 교제를 나누었다. 이 접촉을 통해 그는 지난해 한국에서 전했던 성경이 평양에까지 흘러들어 갔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확인은 한국에 대한 그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다. 기회만 있으면 한국에 달려가려고 하였다.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의 원정이 논의되었을 때 토마스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로즈 제독이 거느린 프랑스 함대가 인도지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었으므로 그의 한국행은 무기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천진을 거쳐 지푸에 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된 토마스는 실망이 컸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배를 타고 한국 선교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는 미국 프레스톤 소유로서, 중무장한 일종의 상선이었다. 셔먼호에는 배 소유주 미국인 프레스톤이 영국의 메도우 상사와 함께 조선과의 통상의 길을트기 위해 선적한 면포, 유리그릇, 철판, 자명종 등 많은 상품과 선장 미국인 페이지(Page), 영국인 선원 호가쓰(George Hogarth), 항해사 미국인 윌슨(Wilson) 그리고 토마스 등 5명의 서양인과 청나라와 말레이시아인 19명의 동양인이 승선하고 있었다.
1866년 8월 19일 셔먼호가 송산리 앞바다를 떠나 황주 송림리 연봉포로 올라오자 정는 급보를 전해 듣고“요새 이상한 배가 우리 바다에”많이 나타나니“행동이 수상한 무리를 살피고 국방을 엄히 하라”는 특명을 하달했다. 황주 목사의 입국 불가 전갈에도 불구하고 8월 21일 밤 토마스와 그의 일행을 태운 셔먼호는 드디어 대동강 입구, 용강군 다미면 상칠리 주영포를 거쳐, 25일 평양을 향해 강 상류로 계속하여 거슬러 올라와 평양부 초리방 일리 신장포(草里坊一里新場浦)에 닻을 내렸다.
외국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평양 감사 박규수는 급히 중군 이현익, 군관 방익진, 평양부 서윤, 신태정을 파송해 상선의 입국경위와 정황을 알아보도록 보냈다. 토마스는 입국의 목적이 통상과 선교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자신들은 천주교가 아니라 야소교(耶蘇敎) 신자들이라고 전해 주었다. 왕조실록에 있는 대로 토마스는 문정관에게“백서에
덕이 되고 인성(人性)에 선이 되는 진도(眞道)가 야소교(耶蘇敎)에 있다”는 사실을 누누이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국책으로 삼고 있는 터였기 때문에 문정관은 그들에게 외국과의 무역은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탐문을 통해 한국 측은 이 배가 산동 반도를 떠나 백령도를 거쳐 평양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통상 및 야소교 전파를 목적하고 있음도 알았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가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은 한국 관민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처음에 양식과 땔감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친절을 보이던 한국 측도,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은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에 셔먼호에서도 위협을 느껴 병졸들과 성민들을 향해 소총과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면서 셔먼호가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상류에서 병졸들은 작은 배들을 여러 척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거기에 불을 붙여 떠내려 보내자 이 불타는 작은 배들이 떠내려가 셔먼호에 닿아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배가 불타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이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은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병졸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에서 순교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가 되었다. 토마스 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 성경 한 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는 받지 않았다가 되돌아갈 때 이것을 집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안주(安州)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남장로교 선교사 레널즈(William Reynolds)의 조사가 되었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장사포에서 성서를 받은 소년 홍신길, 석정호에서 성서를 받은 김영섭과 김종권, 만경대에서 성서를 받은 최치량 등도 후에 강서와 평양 판동교회의 창설자들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칼을 맞고 개신교 목사로서 이 땅에 최초의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시고 산 많은 평양 성민들이 예수를 믿어 평양은 한국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는“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한 터툴리안의 말이 한국교회사에도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1927년 5월 8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토마스가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대동강의 쑥섬에 모여 기념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33년 9월 14일에는 기념 예배당이 준공되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순교적 신앙은 후대의 수많은 선교사들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순교정신은 한국교회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내려와 주기철, 손양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진리를 지킬 수 있게 만든 신앙적 지주가 되었다. 또한 그의 죽음을 통하여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과 선교회들은 한국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3)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비록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한국 선교에 대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토마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던 알렉산더 윌리엄슨이었다. 윌리엄슨은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일찍이 런던선교회 소속선교사로서 1855년에 중국에 와서 그리피스 존(Griffis John) 등과 같이 상해에서 선교하던 중, 토마스 목사의 생사도 알아 볼 겸 한국 사정을 알려고 1867년 만주에 내왕하는 한인들과 두 차례 접촉하였다. 윌리엄슨은 4월에 요동 지방의 잉체코에서 한국인 상인들
과 여행자들에게 진리의 말씀과 서적들을 주면서,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달 19일에는 천장대에서 귀국 도상의 한국 동지사 일행을 만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에 관한 지식에 놀랐다. 만다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지사는 북경에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으며 런던선교회도 방문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이 사람이 로버트 토마스를 만났었다고 하는 사실을 1866년 4월 4일 날짜의 토마스의 서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동지사 일행이 방금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북경에서 다른 외국인들보다 훨씬 이들과 친숙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조선에 관한 지식 그리고 조선말을 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에 저들이 묵고 있는 공적인 숙소에 아주 쉽게, 환영을 받으면서 왕래할 수가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윌리엄슨은 상당한 정도의 한국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 토마스를 통해서 얻은 지식과, 자신이 직접 만난 두 사람의 조선인 천주교인을 통해 얻은 지식, 그 외에도 고려문 전도시에 만났던 많은 조선인들을 통해 그는“분명히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간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한국인의 지성과 성품과 윤리적 생활이 우수한 점, 그리고 명민한 판단과 담 큰 결단력을 지적하고는, 지력(地歷)과 지하자원에까지 언급하고 수운(水運)의 편리함도 서술한 후“이 나라에 없는 것은 다만 서양의 종교와 그 문명의 박차(迫車)와 지도(指導)”라고 갈파하였다.
1866년 토마스가 순교하기 1년 전부터 고려문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는 1867년에도 그곳의 한국 상인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 토마스의 죽음이 한국 선교열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된 것이다. 복음은 이처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토마스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년이 되는 1867년 9월 9일, 윌리엄슨은 고려문을 포함한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다. 고려문은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장이 섰는데, 이때는 한국인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중국인과 물건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었다. 따라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윌리엄슨은 한국인들에게 중국어 성경을 팔면서 복음을 전했다.
윌리엄슨은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고 그 일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면서도,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 대국들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한국이 문호를 열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대영제국과 미국 같은 나라들이 선도하여 한국같이 그 나라들에 반대하여 어리석고도 무식하게 폐쇄하는 나라들을 개방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이자 특권이라고 나는 믿는다.”고 하였다.
윌리엄슨은 누구 못지않은 불타는 복음의 열정이 있었지만, 선교방법론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비록 한국의 개방을 위해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 나라를 개방하도록 만드는 일이야말로 일종의 거룩한 소명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중국으로 박해를 피해갔던 리델 신부가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한국 선교의 문을 열려고 한 것이나, 토마스가 불란서 함대의 통역으로 국내에 입국하려고 한 이면에서 우리는 당시 영국과 불란서 등 유럽 강대국 출신 선
교사들의 내면에 복음의 열정이 제국주의 패권의식으로 채색되어 복음의 순수성이 희석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범위로 확대된 서구형의 기독교회는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전제한 교파형의 미국 기독교회에 비해서 이러한 과오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우리는 귀츨라프, 토마스, 윌리엄슨에게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불타는 선교의 열정, 복음의 열정을 발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의식세계가 역시 당시 강대국 백성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패권의식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지 못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복음 본래의 순수성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이들은 후대 한국선교를 위해 중요한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4)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
토마스나 윌리엄슨같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들 가운데는 일찍부터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실제로 한국 선교를 타진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존 로스(John Ross, 1841-1915)와 존 맥킨타이어(John McIntyre, 1837-1905) 선교사였다. 이들은 처남매부지간이었다. 일찍이 1892년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는 자신의 서울에서 본 한국(Korea From Its Capital)에서“한국개신교 복음화의 시작은 중국 우장에서 활동하는 존 로스 목사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지적할 만큼 존 로스는 한국개신교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로스(羅約翰)는 제임스 그레이슨이 "한국의 첫 선교사”라고 부를 만큼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입국 이전에 한국 선교의 초석을 놓았던 개신교 선교사였다.
① 존 로스의 한국 선교 준비
1872년 존 로스는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그 해 8월 중국 지푸를 거쳐 그 다음달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부가 있는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만주어를 배우는 한편 만주 우장을 거점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73년 사랑하는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큰 위기를 만났지만, 로스는 결코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던 로스는 영국에 있는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는 선뜻 오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선교지에 와 사역하던 총각 선교사 존 맥킨타이어가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고 청혼하여 둘이 결혼했다. 로스는 1881년 재혼할 때까지 7, 8년을 여동생 캐더린의 도움 속에 홀로 지내며 한국 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수 있었다.
로스는 아내와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1873년 가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산동 지역 특히 서간 지역으로 1차 선교여행을 떠나며 한국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만주 우장을 떠난 존 로스는 봉천 홍경을 거쳐서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까지 건너갔다 거기서 우연히 한 한인촌을 발견했다. 이미 윌리엄슨에게 토마스 선교사 순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조선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였지만,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사공을 찾았지만 나서는 뱃사공이 없어 배라도 빌려 비밀리에 도강하려고 했으나 배를 빌려 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당시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외국인과 접촉만 하면 처형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존 로스 선교사를 태워다 줄 사공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존 로스는 한국에 입국하는 것을 포기하고‘개국(開國)의 날’이 속히 이르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귀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한 사람의 한인과 친하게 되어 자기가 갖고 있었던 한문 성서 몇 권을 그에게 전하고 돌아왔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니 배포한 성경을 읽고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로스는 1873년 가을, 만주를 출발하여 고려문을 방문했다. 로스는 고려문에서 한국어 선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중국인 여사(旅舍)에 짐을 풀고 매일 시장에 나가 한국인을 만났으나 별 소득이 없이 영구로 돌아갔다.
1874년 4월 말에서 5월 초 로스는 자선 사업가 아딩톤(R. Arthington)의 재정 후원으로 서기를 동반하고 다시 고려문에 가서 자신의 어학 선생을 찾기 시작했다. 서기를 통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의주 출신 중인 이응찬(李應贊)이었다. 이응찬은 한약재를 잔뜩 싣고 고려문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 갑자기 남서풍을 만나 거센 파도가 이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어 싣고 가던 모든 물건들이 물에 잠기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물에서 나왔으나 물건은 찾을 길 없게 되었고, 갑자기 무일푼의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1890년 로스는 이응찬을 만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술회한다.
“일을 하자니 힘이 들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워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궁지에 빠졌다. 이러한 비참한 환경에 놓여 있을 때에 그는 우연히 한국말 선생을 구하기 위하여 한국 사람들 사이에 파견된 나의 서기와 만나게 되었다. 하루 저녁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에게로 왔다. 나를 만나자 그의 친구들을 먼저 돌려보낸 다음에 곧 나의 선생이 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 앞에서나 모르는 척 해달라고 신신부탁한 다음에 뛰어나가서 친구들이 여관에 채 들어가기 전에 그들을 따라갔다.”
이응찬은 진퇴양난의 위기의 순간에 로스 일행을 만나 그의 어학 선생을 하면서 로스의 사역을 지원한 것이다. 로스는 이때가 1874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본래 한학에 뛰어난 이응찬의 지도를 받으면서 로스의 어학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이응찬의 어학 지도로 로스는 1877년 한국어 교본『한영문전입문』(韓英文典入門, A Corean-English Primer)을 저술하였으며, 1879년에는『한국, 그 역사, 생활 습관』(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 1875년에는『예수셩교문답』과『예수셩교요령』도 출판하였다. 로스 목사는 한글에 대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글자는 표음문자인데다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워서 누구나 쉽게 또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②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한글 성경 번역
이응찬은 존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
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로스는 말씀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 보았다. 해서 성경 번역, 한글성서 간행에 전력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복음주의자였다.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절하고도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은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 등 그곳 외국인들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이응찬과 함께 로스의 성경 번역 사업을 지원했다. 이들이 한 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위해 한문 성경을 수차례 정독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4년 후 1879년에 네 사람 모두가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 사실에 대해 로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맥킨타이어는 네 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한국인들은 중국인들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같은 의주의 청년인 서상륜(徐相崙)이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홍삼 장사를 하기 위해서 영구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서상륜은 그곳에서 심한 열병에 걸려 생명을 잃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로스가 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즉시 서상륜을 그곳 선교부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을 다해 간호해 주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서상륜은 퇴원을 한 후 같은 해인 1879년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4년 후 1883
년에는 김청송(金靑松)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880년 존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는 한국인의 신앙공동체 형성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최근에 한국인들을 위한 저녁 집회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우리 번역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관하는데 자기네들 방에서 최소한 8명이 모이고 있다. 나도 늘 참석하지만 듣기만 한다. 나는 한국어를 단지 번역 수단으로만 이용해서 문자로만 알았지 번역인들과 대화할 땐 중국어를 썼다. 그러나 이처럼 소외되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적어도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결심이다. <지금은> 이 일에 제외되어 있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이런 집회를 내 자신이 인도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10월까지 열두 달 동안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30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가 이미 복음 전래 초기부터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은 역시 성경 번역에 있다 하겠다.
초창기의 성경 번역 과정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1879년 존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머무는 동안 서방세계에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새로 번역될 한글 성경의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보조받을 약속을 받아내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로스는 1881년에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예수셩교문답’과‘예수셩교요령’을 그해 10월에 인쇄했고, 이어 성경 인쇄에 들어가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는 한글 성경전서를 완간할 수 없어 한국인 식자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서간도 한인촌 출신 김청송이었다. 비록“그는 너무 둔하고 느려서 무슨 일이나 네 번 이상 가르쳐 주어야 비로소 깨달아 알았고 손이 너무 떠서 두 인쇄공이 3,000장을 인쇄하는 동안에 겨우 4페이지밖에 조판을 하지 못할”만큼 천성적으로 느렸지만“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치밀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 치밀함 때문에 인쇄되어 나오는 복음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성경 번역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께서 다시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말씀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최종 원고가 완성되어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 동지사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봉천교회에 들렸다. 이때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그 원고의 교정을 부탁해 그가 원고를 서울로 가지고 가서 교정을 완료한 후에 다른 동지사편에 그것을 돌려보냈다. 이 사실은 1890년 로스가 이때를 회고하면서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이미 동지사 일행에 의해 “번역원고가 한국의 수도에서 교정되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심지어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번역 원고가 해외 서울의 수도에서 수정되었으며, 이는 너무 많은 흥미를 자아내 한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나르는 동지사에 딸려 이따금씩 중국에 오는 한 수행원이 이곳의 성경 번역 사업을 보기위해 들렀다. 이들의 방문은 점차 더욱 잦아졌고,그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느리기 한이 없었던 그 식자공(김청송)과는
정확히 정반대 모델이었다. 그는 손놀림이 민첩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말과 사고와 행동이 영특했다. 그는 식자공으로 종사했으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더 잘 적응하리라고 여겨지는 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 몇 백 권의 복음서와 훨씬 더 많은 전도지를 가지고 그는 봉천에서 정 동쪽으로 약 4백 마일 떨어진 자신의 마을로 갔다. 그는 그 여행에 2주일이 걸렸고, 반년 만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책들을 팔았으며,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은 내가(로스)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오기를 원했다고 했다.”
처음에 로스는 와서 세례를 달라는 말을 반신반의해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더 많은 책을 공급받고 다른 마을로 가 반년 후 돌아와서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성경 번역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출판 후에도 성경 보급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께서 한글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도 개입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발견한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번역에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 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English Revised Version)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사용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882년 3월에 누가복음을 처음 인쇄하고, 5월에는 요한복음을 발행한 데 이어서 1883년에는 재 교정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합본이 3,000권, 재 교정된 요한복음이 5,000권 발행되었고,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1885년에는 로마인서,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출판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이 완간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하는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성경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 번역에 기여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만든 성서를 보급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는 정식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글로 성경이 번역되어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놀랍게 진행되었다.